날씨가 전하는 말
날씨가 정말 얄궂다.
연 삼 일째 황사가 하늘을 뒤덮어 바깥출입이 두렵다.
중국 쪽에서 넘어온 황사와 우리네가 만들어낸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있으니 한 번도 파란 하늘이 그립지 않았는데 새삼스럽게 그 하늘이 그립다.
바람이라도 횅하니 불면 저 멀리 일본 쪽으로 사라질 텐데 자연은 무슨 심보인지 한점의 바람도 일으키지 않으니 그냥 정체되어 머물고 있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대부분 사람은 오늘 황사가 심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환경에 관한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하지 않고 주어진 일에 충실할 뿐인지고 해도 나는 다른 생각에 잠긴다.
발전이 과연 능사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어릴 때는 이런 짓궂은 하늘을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공기는 맑았고 하늘은 파랬다.
그러니 공기는 싱그럽다는 표현과 하늘은 너무 깨끗해 눈이 시리다는 표현을 누구나 쉽게 쓰는 것을 보면서 자랐는데 이젠 내가 들이마시는 공기가 바로 폐 속에 흡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름막 기능을 하는 마스크 그것도 KF94를 써야 외출할 수 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다.
몇 해 동안 코로나가 유행한 덕에 그래도 마스크 쓰는 습관이 들어서인지 불평하고픈 마음은 덜 하지만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좋아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인지 더더욱 날씨가 얄궂고 미워진다.
지구가 겪고 있는 환경은 끔찍한 지경에 이른 느낌이 있다.
세상 방방곡곡에 예전에는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연인 매스컴은 알려주고 있다.
어느 사막에는 일 년에 내릴 비가 하루 동안 내렸고 홍수, 지진, 폭설 얘기도 심상찮게 들려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먼 나라의 얘기란 듯이 무관심하게 지낸다.
빠르고 갑작스럽게 변하지 않는 부분에 대한 느낌은 전혀 일어나지 않은 듯이 무감각하다고 표현하고 싶다.
충격적이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인간을 보면서 느끼게 된 것은 참 멍청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이다.
뭔가 모르게 지구가 몸살을 앓고 힘들다고 몸부림치는데 그 몸부림이 자신의 주위에서 느껴지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무감각함이 당연한 듯 알지만, 사실은 무서운 현상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은 변화에 잘 적응하는 동물일까?
설령 잘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해도 갑작스레 닥치는 변화에 완벽하게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듯해 불안하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발병하여 인간 세상을 급습했을 때 수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듯이 환경이 변해 다가오는 위험도 수많은 희생이 동반되리라는 예측쯤은 가능한 일 아닐까 한다.
집안에 가동 중인 공기청정기가 온종일 시끄럽게 작동하고 있다.
분명 창문을 꼭 닫혀있고 바깥바람은 들어오지 않는데도 기기는 연일 색깔을 바꿔가면서 미세먼지를 감지하고 정화하기 위해 야단법석이다.
이것 또한, 소음이다.
편하고 건강한 삶을 위한 선택이지만 이 또한 소음과 함께 여러 가지 불편을 초래하는 발전이 만들어 낸 작품임은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은 필요에 따라 인간이 발견하고 만들어 생활에 적용하여 이용하는데 사실 예전 같으면 필요치 않은 물건임은 틀림없다.
황사나 미세먼지가 없었다면 굳이 공기청정기를 만들 이유가 없어 사람들은 상상하여 발견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막상 공기의 질이 나빠지고 숨쉬기가 곤란해지는 지경을 인간이 스스로 만들고 그것에 대응하는 기구를 발명하여 대단한 양 난리를 피우고 있지만, 애초 발전이라는 인간의 무리수가 없었더라면 절대 필요치 않은 물건임은 틀림이 없어 보여 안타까운 느낌이 있다.
흔히 새롭다는 것은 어떤 기능이 부여되어 탄생한 것을 말하며 찬양하는데 사실 없어도 잘 살았던 그 옛날이 훨씬 저비용의 삶으로 만족한 경우가 아닐까에 동조하고 싶어진다는 얘기다.
맑은 공기가 세상 모두를 싱그럽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을 선물했듯이 황사와 미세먼지가 집안에 불편을 초래하는 공기청전기를 들여놓게 만드는 현실을 사람들은 편리성이라고 찬양하지만, 전혀 잘못된 발상이라는 느낌이 존재한다.
공기를 혼탁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전혀 불필요한 기구고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소음 공해에 시달리는 이 순간 또 다른 역겨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고 그 파괴된 환경 때문에 새로운 기구들을 만드는 악순환을 겪은 인간은 과연 우수한 존재일까?
난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과 비교하여 별로 나은 점이 없다는 생각을 간혹한다.
굳이 발전하지 않아도 충분한데 인간이 가진 욕심 때문에 파괴와 건설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기구와 물질로 인한 또 다른 기구와 물질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단지 어리석을 뿐이지 지혜롭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아 보인다.
사람들은 부(富)를 찬양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루어지면 보란 듯이 차를 바꾸고 의식주를 바꾸고 심지어는 여자와 남자도 바꾼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자신의 쾌락을 위한 작은 행동들이 지구를 힘들게 하고 환경을 파괴하는데 일조하는 일을 연이어서 하면서도 모르고 그 삶에 도취해 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일이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풍족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삶 속에 풍요와 함께 존재했던 자연의 은덕이 그리워진다.
냇가에서 고무신으로 잡던 작은 물고기 붕어, 미꾸라지, 피라미, 송사리도 그리운 존재듯이 아무 곳에 나와 지천에 늘린 쑥을 뜯어다 쑥떡도 요즘은 깨끗한 쑥을 구하기 힘들어 헤매야 하는 경험을 하니 그립기는 마찬가지다.
도롯가에 맘껏 자란 쑥을 캐서 쑥떡을 해 먹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든 자동차가 지나면서 남긴 매연과 고무 조각이 그 속에 수없이 많이 있으니 누구 할 것 없이 그냥 내버려 둘 뿐 입맛을 돋우는 떡을 해먹을 궁리하지 않는 것이다.
아파트의 편리한 구조가 익숙해서 좋긴 하지만 해 질 녘 나무 냄새를 풍기며 피어오르는 연기가 저녁때를 알리는 운치는 사라졌고 담 너머 보이는 다정한 이웃의 얼굴은 언제 보았는지 상상이 안 되는 닫힌 공간에 살면서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기에 죽은 지 몇 달 만에 발견된 독거노인의 삶을 보고도 무감각한 게 현대인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따뜻한 고구마 하나 건네주며 허기를 달랬으면 좋겠다는 인심도 사라지고 행여 누군가가 나를 볼까 봐 유리창에 커튼을 치고 전자제품이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 낸 전자파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으로 살면서 인간과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정을 잊은 지 오래됐다.
인간은 사악함으로 변질하였다.
진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편에만 마음을 쏟는 이상한 형태의 심리들이 만들어졌고 죄와 벌의 관계 또한 애매한 구분으로 들쭉날쭉해졌다.
죄를 지은 자도 그냥 멋있어 보이는 이상한 형태가 세상의 잣대로 등장하는 순간 우린 무엇을 진실이라고 말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잊어버려야 한다.
적과 동지의 구분이 정당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고 그 사람의 흉악함도 동지로 변하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선행으로 탈바꿈하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을 믿을 희망이 사라짐을 본다.
현재와 탁한 공기만큼이나 인간의 마음도 혼탁하고 더럽다.
탁함이 싫은 이유는 분명하다.
숨쉬기 어렵고 여행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늘을 바라봐도 예전에 내가 보아왔던 파란, 그 깨끗함은 완전히 사라졌고 혼탁한 공기만이 집 안에 있는 공기청정기를 쉼 없이 일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 또한 소음이라는 새로운 번거로움이 어울려 마음속에 안식을 용서하지 않아 불쾌해진다.
미세먼지 같은 오염물질을 만든 인간이 죗값을 치르는듯해서 허허롭다.
그래서 감옥에 갇힌 듯이 집안에 갇혀 공기청정기의 소음 공해를 몸으로 받고 고초를 치르고 있으니 오래 살지 않았지만, 세상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멈췄으면 좋겠다.
질 좋은 공기 때문에 할 일을 잃어 소음을 발생하는 공기청전기도 조용히 멈췄으면 좋겠다.
그리고 소음이 완전히 멎은 순간 밖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마음대로 활보하는 시간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창밖을 내다본다.
아직도 한치의 농도 변화가 없어 탁할 뿐이다.
이 혼탁함 속에 인간의 죄들이 이글 그리며 불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