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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03
#. 오타루의 운하 (밤)
밤하늘에 퍼져나가는 불꽃들. 그때마다 환성을 지르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밤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폭죽들.
눈 조각상의 뒤에 숨어 혜진을 애무하는 준수. 점점 격렬해지는 혜진의 반응.
누군가 두 사람에게 부딪혀 온다. 놀래서 보는 혜진.
젊은 한 쌍이 혜진과 준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격렬한 애무를 주고받고 있다.
준수가 혜진의 손을 잡아끈다. 다른 장소를 찾아 헤매는 두 사람.
#. 동. 부근 주차장 (밤)
혜진의 손을 끌고 달려오는 준수. 두리번거리며 혜진의 렌트카를 찾는다.
혜진 : 그만.
준수가 혜진의 차를 발견하고 달려간다. 차문을 열고 혜진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는다.
멀리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꽃들.
거칠게 혜진의 옷을 벗기려고 드는 준수. 그 손을 꽉 잡는 혜진.
준수의 손길이 멎는다. 괴로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몸을 일으키는 준수.
혜진이 그런 준수를 끌어당겨 안는다. 혜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진정하는 준수.
준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는 혜진.
혜진 : 날 거기 두고 그냥 가버린 줄 알았어... 무서웠어... 늘 혼자였는데도... 생전 처음 혼자가 된 것처럼...
준수 : ...
벌떡 몸을 일으켜 시트에 머리 기대고 눈을 감는 준수. 아직도 솟구치는 격정을 누르려고 가쁜 숨을 내쉰다.
혜진 : ...
그런 준수를 바라보다 일어나 앉는다. 고개 반대쪽으로 돌리는 준수.
혜진 : (웃으려고 하다) 누구하고 전활 한거야?
준수 : (고개 홱 들어서) 미안해요. 이럴 생각 아니었어요.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구요.
혜진 : ...
준수 : 화났어요?
혜진 : ...
가만히 고개 젓는다.
차에서 내리는 준수.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여기저기 휘젓듯 둘러보더니,
준수 : 끝났나 봐요.
뒷걸음질치며 밤하늘을 훑어본다. 정적에 쌓인 밤하늘.
#. 오타루의 거리 (밤)
축제가 끝났다. 여기저기 파장을 아쉬워하며 흩어져가는 사람들.
준수와 혜진이 나란히 걸어온다. 될 수 있는 대로 혜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준수.
그런 준수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혜진.
준수 : (딴 곳 보며) 비웃는 거예요?
혜진 : 내가 왜.
준수 : 결국은 그렇고 그런 놈으로 봤을 거 아녜요.
혜진 : 난 그렇고 그런 여자구?
준수 : (멈춰서 본다)
혜진 : 비겼네 뭐.
준수 : ...
혜진 : ...(웃어 보인다. 몸을 움츠리며)
준수 : (환하게 웃으며) 배 안 고파요?
끄덕이는 혜진. 얼른 혜진의 손을 잡고 끌고 가려던 준수가 흠칫 혜진의 손을 놓으려 한다.
혜진이 준수의 손을 꼬옥 잡아준다.
다시 환하게 웃으며 혜진의 손을 잡고 달려가는 준수.
#. 동. 호텔의 레스토랑 (밤)
입안에 잔뜩 든 고기를 씹으며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준수. 보고 있는 혜진.
준수 : 왜 안 먹어요?
혜진 : (포크를 내려놓으며) 누구하고 전화한 거야.
준수 : (고기 썰며) 그게 궁금해요?
혜진 : 꼭 내가 남의 인생에 끼어든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준수 : 친구예요. (말하고 본다)
혜진 : (보고 있는)
준수 : 여자친구요.
다시 먹기 시작한다.
혜진 : 좋아하는 사이?
준수 : 글쎄요. (입 안의 남은 고기 마저 씹더니) 그게 좀 그래요.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구요.
혜진 : 비밀이 많으네.
준수 : 무슨 비밀이요?
포크와 나이프까지 내려놓고 정색하고 혜진을 바라보는 준수.
순간 당황해서 말문이 막히는 혜진.
준수 : 내가 그 쪽 인생에 뛰어든 거라면 미안해요. 그렇다고 그런 쓸데없는 호기심에 일일이 대답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혜진 : (당황해서 겨우) 난.
준수 : 정말 알고 싶으세요. 내가 어떤 놈이지.
혜진 : ...
준수 : 앉아계세요. 방을 하나 빌려올게요. (일어나려다 다시 앉으며) 두개 빌릴까요?
혜진 : ...
준수 : 좋아요. 결정하기 힘들면 나한테 맡기세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준수. 꼼짝 못하고 앉아있는 혜진.
#. 동. 프론트 데스크 (밤)
준수가 온다. 호텔 직원과 인사를 나누며 여권을 꺼내 앞에 놓는 준수.
#. 동. 레스토랑 안 (밤)
일단의 남녀가 왁자지껄 떠들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혜진의 옆 식탁에 둘러앉는다.
그 중 한 남자가 취해서 혜진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고개 돌려 창 밖을 내다보는 혜진.
취한 남자가 치근거린다. 일본어로 “뭐야, 이 시간에 여자 혼자서.”
동행한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고 한마디씩 하며 손을 내젓는다.
취객이 큰 소리로 떠든다. “너희들은 다 짝이 있잖아.”
혜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 동. 프론트 데스크 (밤)
여권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열쇠를 받아 드는 준수. 인사를 나누고 레스토랑 쪽으로 가려다 멈추는 준수.
로비의 전화 부스에 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준수 : ...
바라보는.
#. 동. 로비의 전화 부스 (밤)
수화기 귀에 대고 초조한 혜진. 신호음 소리. 안받는다. 실망해서 전화 끊으려는데...
“여보세요” 나리의 목소리.
혜진 : (얼른) 나리니?
“엄마?”
혜진 : 그래 엄마야. 잘 있었어?
“엄마 왜 안와.”
혜진 : 집에 별일 없지... 엄마? 잘 있어... 아냐, 엄마 금방 갈 거야. 나래랑 학원 잘 다니지? 그래, 나두 보고 싶어...
선물? 뭐 갖고 싶은데... 그래, 꼭 사갈게... 아빠?
#. 혜진의 집 서재 (밤)
컴퓨터 보고 있는 동원. 나리 문 열고 들어온다.
나리 : 아빠, 전화 받어. 엄마야.
동원에게 전화기 쥐어준다.
동원 : (전화 받으며 나리에게 나가 있으라는 손짓) 나야.
#. 오타루 호텔 로비의 전화 부스 (밤)
혜진 : ...
“어떻게 지내?”
혜진 : ...
"재밌냐구?“
혜진 : ...미안해요.
“집 걱정 말고 잘 지내다 와.”
혜진 : (다급하게) 잠깐만요.
#. 혜진의 집 서재 (밤)
동원 : ... (기다리다) 뭐? ...잠깐만 뭐...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길 잃어버렸어요.”
동원 : 그랬어?
문가에 서있는 나리에게 나가서 문 닫으라는 손짓. 키득 웃으며 안나가는 나리.
동원 : 전화할거 없어. 집 걱정 말고 잘 지내다와.
“전화했는데 내가 못 받았을까봐.”
동원 : 안했어.
#. 오타루 호텔의 로비 전화 부스 (밤)
혜진 : ...그랬어요?
“나리 다시 바꿔줘.”
혜진 : 아녜요. 그냥 당신이 궁금해서.
“내 성격 몰라서 이런 전활 걸어?”
흠칫하는 혜진.
#. 혜진의 집 서재 (밤)
동원 : 당신 문제가 뭔진 모르겠지만 집에 들어올 때 다 털고 들어와. 뚱해가지고 집에 있는 사람들 다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요.” 좀 격해진 혜진의 목소리.
동원 : (버럭) 당신이 세 살 난 애야? 당신 문젠 당신이 해결해야지, 끊어.
전화 끊는다.
나리 : 아빠.
#. 오타루 호텔의 로비 전화 부스 (밤)
혜진 : ...
멍하니 전화기 들고 있는 혜진.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얼른 전화 끊고 전화기에다 이마를 대고 얼굴을 묻는 혜진.
털어버리듯 고개 들고 레스토랑으로 가는 혜진.
#. 동. 레스토랑 안 (밤)
들어오는 혜진. 창가에 앉아있는 준수의 모습이 보인다. 취객들은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가서 마주앉는 혜진.
혜진 :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준수 : 어디루요.
혜진 : ...
준수 : 이 밤중에요?
혜진 : ...
괴로워서 고개 돌린다.
준수 : 우습잖아요. 오타루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죽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요?
혜진 : (굳어지는)
준수 : 농담예요. 자살하려는 사람이 집에다 전활 걸 리가 없죠. (열쇠 꺼내 혜진 앞에 내밀며) 쓰세요. 난 또 하나 빌릴게요.
일어나려는 준수.
혜진 : (막듯이 빠르게) 내가 마치 식탁 위에 놓여있는 찻잔이나 찬장 속에 놓여있는 접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수 : (다시 앉는다)
혜진 : 어떻게 그냥 집을 나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죽거나 죽으러 간다는 핑계라도 있어야지.
준수 : 나한테 그냥 맡겨주면 안돼요?
혜진 : ...
준수 : ... 나한테...그냥 맡겨두세요.
속삭이는 듯한 준수의 눈길.
혜진 : ...
준수를 바라본다. 무언가 간절한 준수의 눈빛.
무너지듯 스르륵 눈을 감는 혜진.
#. 동. 호텔의 방안 (밤)
혜진을 벽에 밀어붙이고 거칠게 입술을 밀어붙이는 준수. 그 입술을 피하는 혜진.
그러자 더욱 거세게 혜진을 벽에다 밀어붙이는 준수. 견디지 못하고 준수의 입술을 손으로 막는 혜진.
준수 : 말했죠? 아무 생각하지 말라구요.
고개 젓는 혜진.
준수 : (혜진의 손을 낚아채 밑으로 내려 꽉 잡으며) 죽으러 온 거잖아요. 죽을 자릴 찾아서.
준수를 밀치고 문 쪽으로 달려가는 혜진. 준수가 혜진의 팔을 잡아당겨 다시 끌어안는다.
얼굴을 돌리는 혜진.
준수 : 정말 죽으려는 거 아니잖아요. 살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죽으려는 거잖아요.
혜진 : 놔줘요. 난...
준수 : (더 끌어안으며)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만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거예요. 나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세요.
그럼 살고 싶어질 테니까.
혜진의 입술을 덮치는 준수의 입술.
#. 오타루의 어느 산 위 (혜진의 의식)
정상을 기어오르고 있는 혜진. 눈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듯 산을 기어오른다.
#. 오타루의 호텔 방 안 (밤)
준수의 거친 포옹. 멍하니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 오타루의 어느 산 위 (혜진의 의식)
벼랑 위까지 기어온 혜진. 가쁜 숨 내쉬며 눈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
#. 오타루의 호텔 방 안 (밤)
필사적으로 혜진을 끌어안는 준수. 멍한 혜진의 눈길.
#. 오타루의 어느 산 위 (혜진의 의식)
벼랑 밑을 내려다보는 혜진. 까마득한 계곡.
무서워서 엎드린 채 뒤로 물러나는 혜진. 숨이 가쁘다.
다시 벼랑 끝으로 기어간다. 계곡 사이를 휘몰아치고 있는 눈보라.
#. 오타루의 호텔 방 안 (밤)
스르륵 눈을 감으며 준수에게 몸을 맡기는 혜진.
#. 오타루의 거리 (새벽)
눈 축제가 끝났다. 눈 조각과 그 밖의 조형물들을 치우고 있는 인부들.
여기저기 축제의 찌꺼기들이 뒹굴고 있다.
#. 호텔의 방안 (새벽)
짙게 드리워진 커튼. 어둡다.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혜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혜진의 옷가지들.
몸을 뒤척여 바로 눕는 혜진. 눈을 뜬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흠칫 놀라며 옆을 본다. 아무도 없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혜진이 신음하며 시트 속의 자신의 몸을 더듬는다.
혜진 : ...
아득한...
#. 오타루의 산의 입구 (새벽)
산을 바라보고 있는 준수. 새벽안개에 덮인 산.
#. 호텔의 방안 (새벽)
커튼을 열어 제치는 혜진. 창밖에 보이는 거리. 여기저기 부서지고 있는 눈 조각들.
혜진 : ...
창에다 입김을 부는 혜진. 성에가 끼면서 지워졌던 글자가 새겨진다. ‘사랑’
#. 산으로 올라가는 길 (새벽)
거친 숨을 내쉬며 준수가 산을 올라가고 있다. 미끄러지면 다시 기어오르고 그렇게 산을 오르고 있다.
#. 오타루의 호텔 앞 (새벽)
새벽을 밝히는 불빛들이 아직 남아있는 거리.
혜진 : ...
호텔 현관에서 그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혜진. 눈 조각을 치우고 있는 인부들.
혜진 : (소리) 가장 흔하면서 가장 낯선 단어가 사랑이다.
#. 산으로 올라가는 길 (새벽)
발을 헛딛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준수. 가까스로 나무를 잡고 멈춘다.
하늘을 향해 누워 가쁜 숨 내쉬는 준수.
#. 오타루의 거리 (새벽)
걷고 있는 혜진. 멈춰서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길에 떨어진 눈 조각을 집어 들어 힘껏 던져보는 혜진. 기분이 좋다.
또 한번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는 혜진. 그 위에,
혜진 : (소리)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에게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이 나는 괴로웠다.
나를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잖아. 그 사람은...
#. 산의 정상 (새벽)
준수 : ...
우뚝 서있다.
산 아래 펼쳐져 있는 깊은 계곡. 가쁜 숨 쉬며 노려보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준수.
#. 오타루의 거리 (새벽)
고풍스런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혜진.
혜진 : (소리) 이 사람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서 그래서 결혼한 것이라면 어떠한 난관도 헤쳐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에 매달리고 의지하면 언젠가는 사랑의 상처 같은 건 저절로 아무는 것이 아닐까.
#. 산의 정상
벼랑 끝에 엎드려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준수. 눈에 덮인 계곡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준수.
#. 오타루의 어느 호숫가 (새벽)
떠오르는 햇살에 반짝이는 수면. 바라보고 있는 혜진.
혜진 : (소리) 사랑 없이 결혼한 건 남편만일까...? 나는...?
떠오르는 햇빛에 눈부셔하며 망연히 서있는 혜진.
#.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택시가 멎어있다. 운전석에서 졸고 있는 운전기사.
뒷문을 열고 타는 준수.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내쉰다.
놀래서 깨는 운전기사. 얼른 차의 시동을 건다.
운전기사 : (일본어) 추우시죠. 방금 엔진을 껐으니까 금방 따뜻해질 겁니다.
준수 : (일본어) 지난 크리스마스 때 저 산에 올라갔다 등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었지요?
운전기사 : 등반 사고? 글쎄요. (뒤돌아보며) 워낙 사고가 많이 나는 데라서... 가만 있자, 지난 크리스마스 때면.
준수 : 갑자기 일찍 눈이 내리는 바람에...
운전기사 : 정초에 등반 사고가 났다는 얘긴 들었지만 지난 연말이면 기억에 없는데요. 미안합니다.
(히터 조정하며) 좀 따뜻해졌습니까?
준수 : ...
시트에 머리 기댄 채 돌려 뒤창으로 산을 바라본다. 험준한 산.
#. 오타루의 호텔 방안
짐을 싸고 있는 혜진. 잊어버린 물건이 없나 방안을 둘러본다.
구석에 팽개쳐진 준수의 가방이 보인다. 뭔가 급하게 물건을 꺼낸 듯 자크가 열려 있고 그 사이로 삐져나와 있는 여권.
혜진 : ...
테이블로 가서 호텔 메모지를 꺼내 펜을 잡는다.
“먼저 갑니다.” 쓰다가 멈춘다.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다시 쓴다. “인연...” 이라고 쓰다고 다시 멈춘다.
혜진 : ...
메모지를 찢어 휴지통에 던져 놓고 일어나 코트를 입는다.
가방을 끌고 문 쪽으로 가려다 준수의 가방을 다시 본다.
혜진 : ...
준수의 가방에 삐져나온 여권을 끄집어 든다. 망설이다 펴본다.
준수의 사진. 그리고 이준수라는 이름. 저도 모르게 빙긋 웃는 혜진.
한숨쉬고 준수의 가방 속에 여권을 다시 집어넣는 혜진, 멈춘다. 가방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여권.
혜진 : ...
망설이다 여권을 꺼내 펴본다. 준수의 사진.
혜진 : ...
이름을 본다. 강성구라는 이름.
잘못하다 들킨 것처럼 놀라며 얼른 여권을 닫아 가방 속에 처넣는 혜진.
#. 오타루의 도서관 전자열람실
컴퓨터 화면으로 신문을 검색하고 있는 준수. 2007년 12월 25일 이후의 신문을 빠르게 검색하고 있다.
신음하며 의자에 기대 머리를 젖히는 준수. 다른 신문을 검색하기 시작하는 준수.
#. 오타루의 호텔 앞
택시 와서 멎고, 내리는 준수. 안으로 들어간다.
#. 동. 호텔 방안
들어오는 준수.
준수 : ...
깨끗이 정돈된 방안. 안으로 달려가 가방을 찾는다. 없다.
미친 듯이 옷장을 뒤지는 준수. 문득 뒤돌아본다. 침대위에 얌전히 놓여있는 가방.
재빨리 가방을 열어보는 준수. 이것저것 확인한다.
그러다 침대 옆 탁자에 차키로 눌러놓은 메모지를 발견한다. 집어 드는 준수.
혜진 : (소리) 몰라서 내일까지 방값 계산했어요. 또 몰라서 차도 두고 가요. 오타루에 더 있을 거면 차 쓰세요.
필요 없으면 아무데나 렌트카 회사에 갖다놓으면 돼요.
준수 : ...
메모지를 꾸겨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간다.
#. 오타루의 기차역
차에서 내리는 준수. 플랫폼으로 뛰어올라오는 준수. 막 출발하는 전동차의 문을 두드린다.
그대로 떠나는 전동차.
#. 동. 앞거리
차에 다시 타 급하게 차를 출발시키는 준수.
#. 삿뽀로 가는 고속도로
속도를 내서 공항으로 향하는 준수의 차.
#. 공항의 휴게실 안 (회상)
고개 숙이고 앉은 혜진. 마주앉은 동원이 뭐라고 떠들고 있다.
힐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수가 고개를 돌리려다 놀라서 다시 본다. 동원의 얼굴. 그 얼굴에서-
#. 동. 차 안
초조한 마음으로 빠르게 차를 몰고 가는 준수.
#. 다애의 빌라 앞 (밤) (회상)
동원과 다투고 있는 다애. 동원이 다애를 달랜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다애. 다애의 손을 잡는 동원. 그 손을 뿌리치고 동원에게 악쓰는 다애. 그런 다애를 끌어안는 동원.
동원을 뿌리치며 악쓰다 결국 몸을 맡기고 마는 다애.
준수 : ...
숨어서 바라보고 있다.
동원의 가슴을 때리며 울고 있는 다애. 그런 다애를 꼬옥 안아주는 동원.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 것도 모른 채 멍하니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준수.
#. 치도세 공항 출국장 앞
렌트카가 와서 멎는다. 다 멎기도 전에 차문 열고 뛰어 내려 안으로 달려가는 준수.
#. 동. 출국장 안
달려 들어오는 준수. 둘러본다. 손님이 별로 없다.
비행 시간표를 보는 준수. KAL 14:00분이라는 전광판의 싸인.
준수 : ...
맥이 풀린다.
#. 동. 공항청사 앞
힘없이 나오는 준수. 숨이 막히듯 본다.
혜진이 고개 숙이고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다. 바라보고 서 있는 준수.
혜진이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준수를 본다. 준수가 마치 울음처럼 웃어 보인다.
혜진 : (힘없이) 비행길 놓쳤어요.
자지러지듯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혜진. 마치 쓰러질 것 같은...
준수가 달려와 혜진을 끌어안는다. 준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의지하는 혜진.
#. 어느 커피숍 안
동원 : 좀 진전이 있었습니까?
박병식 : ...
서류 봉투에서 느릿느릿 사진을 꺼내는 박병식.
동원 : 본부장님이 하도 재촉을 해서.
박병식 : 별 건 없구요. 가게하고 집 사이만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 몇 장을 동원에게 건넨다. 받아보는 동원. 다애의 사진들이다.
동원 : (사진 보며) 본부장님 말씀이 어딜 간다고 했다는데.
박병식 : 어딜요?
동원 : 파린가 밀라논가 하여간 유럽 쪽으로.
박병식 : 이 사람 압니까.
사진 한 장 더 내민다. 해리정과 다애의 사진이다.
박병식 : 별로 친해보이진 않았는데.
동원 : 나야 모르죠. 본부장님 사생활이니까.
박병식 : 아직 별건 없어요. 사람 뒷조사는 처음이라서.
동원 : 범인을 잡자면 사람 뒷조사부터 하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박병식 : 이거하고 그거하곤 다르지. (불쾌한 모양이다)
동원 : 본부장님이 궁금해 하는 건 이 아가씨가 정말 외국으로 나갈 건지 아니면 그냥 서울에 있으면서 나갔다고 한 건지.
박병식 : 그런 건 나도 모르죠. 밥 먹고 스물네 시간 이 아가씨 뒤만 쫓아다니는 게 아니니까.
동원 : 그런 건 출입국 기록을 뒤져보면 다 나오는 거 아닙니까.
박병식 : 민간인들끼리 그런 걸 뒤져볼 수는 없지. 출입국 관리는 관에서 하는 거니까.
동원 : (어이없어 본다)
박병식 : (사진 다시 서류 봉투에 집어넣으며) 하여간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찾아보리다.
사진 봉투 속에 다 넣고 일어나 나가 버리는 박병식.
동원 : ...
한숨 내쉬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는 동원.
동원 : (소리) 포기해 버릴까? 손해 본 주식에 미련을 둬 본적이 없는데 인생도 그런 거잖아.
뒤돌아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게 그놈의 미련이라는 건데.
#. 동원의 회사 복도
동원 온다. 앞을 가로막는 공장장.
힐끔 보고 피해서 가려는 동원을 공장장이 다시 막아선다.
공장장 : 저희 사장님 훌륭한 분이십니다.
동원 : (찡그리며 본다) 네?
공장장 : 오핼 하신 겁니다. 저희 사장님 정말 훌륭한 분이십니다.
동원 : 무슨 말씀이신지.
공장장 : 저희 회사 주식 값이 떨어지고 있는 건 선생님께서 저희 회사 주식을 내다 파시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동원 : (귀찮아서) 그래서요.
공장장 : 이걸 좀 봐주십시오. (서류 꺼내며) 이거 미국하고 맺은 계약섭니다. 이것만 수출해도...
현필이 달려든다.
현필 : 가시라는데 왜 이러세요. 자꾸 이러시면...
공장장을 밀쳐내는 현필. 그 틈에 사무실로 가는 동원.
공장장 : 선생님, 저희 사장님 돈버시면 직원들 집부터 사주시는 분입니다.
사장님은 셋방에 사시면서 직원들 집부터 사주시는 분이에요.
울부짖듯 외치는 공장장.
#. 동. 사무실 안
의자에 머리 기대고 앉아 있는 동원.
동원 : (소리)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건 결혼뿐이었다. 그 밖엔 모든 게 생각하고 계획한대로 다 됐다. 지금까지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핸드폰의 단축 번호를 누른다.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핸드폰 꺼내 책상 위에 던져 버리는 동원.
문 열고 들어오는 현필.
현필 : 죄송합니다. 부장님. 간 줄 알았는데.
동원 : 누구야?
현필 : 용돈 백만 원 줘서 돌려줬던... (웃으며) 삼백만 원을 들고 왔더라구요. 인사가 부족해서 그런거면.
동원 : (막으며) 다시 그 사람한테 서류 받아요.
현필 : 네?
동원 : 수출 계약서.
현필 : 그 회사 주식 오늘 아침에 마저 다 팔아 버렸는데요.
동원 : 서류 받아오고 오후 장에 그 주식 다시 사들여.
현필 : 좀 더 알아보신 후에.
동원 : (버럭) 뭘 해.
현필 : 네.
투덜대며 나가는 현필.
동원 : ...
다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이는 동원. 한 숨 쉬듯 스르륵 눈을 감는다. 그 위에,
동원 : (소리) 어저껜 왜 약속을 어겼어.
#. 서울의 고수부지 (회상)
다애 : 딴 약속이 있었어요.
낡은 경승용차의 트렁크 위에 앉아 캔 커피를 마시고 있는 다애.
동원 : 어제 한 약속은 니가 한 거야.
승용차에 기대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동원.
다애 : 잊어버렸어요.
동원 : 잊어버려?
다애 : 그저께까진 안 잊어버렸는데 어저께 아침에 일어나서 잊어버렸나 봐요.
다애, 트렁크에서 내려 캔 커피 통을 발로 밟아서 찌그러뜨리더니 강 쪽을 향해 끌고 가 공차 듯 힘차게 날려버린다.
동원 : 생각해봤어?
다애 : 뭐요.
동원 : 내 밑에서 일하는 거.
다애 : (보더니 손으로 입 가리고 쿡쿡 웃는다)
동원 : ...(웃음이 그치길 기다리듯 본다)
다애 : (보더니 찡그리며) 그런 건 싫은데.
동원 :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거 서로 불편하잖아.
다애 : 뭐 어때요. 난 편한데.
동원 : 무슨 일 해서 먹고 사는 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활비 대주면.
다애 : (더 찡그리며 고개 젓는다)
동원 : 오피스텔 하나 사줄게.
다애 : (삐죽하며 고개 젓는다)
동원 : 차는.
다애 : ... (눈이 반짝해서) 무슨 차.
동원 : 차 바꿀 때 됐잖아. (다애 차 발로 툭툭 치며) 철판이 낡아서 언제 주저앉을지 모르겠다.
다애 : 진짜 찰 사주겠다는 거예요.
동원 : (끄덕)
다애 : 새 차, 헌차?
동원 : 새 차.
다애 : (자지러지더니) 갖고 싶은 차가 있는데.
#. 교외의 길 (회상)
달리는 미니 오픈 스포츠카. 신이 난 다애.
동원 : 차 안이 너무 좁잖아.
다애 : 뭐라구요.
동원 : (큰소리로) 안이 너무 좁다구.
불편해서 뒤척이는 동원.
다애 : 괜찮아요. 나 혼자 타고 다닐 거니까.
몸을 기울이며 급커브를 돌아가는 다애.
동원 : 조심해.
차문에 몸을 부딪치는 동원. 신나서 웃어대는 다애.
#. 고수부지 (회상)
미니 스포츠카 의자 위에 올라타고 앉아있는 다애. 승용차에 기대 있는 동원.
동원 : 생각해 봤어?
다애 : (입만 삐죽)
동원 : 절대로 니 사생활에 간섭 안할게.
다애 : 너무 자주 만나면 자꾸 이것저것 알고 싶어지는 거잖아요.
동원 : (두 손 벌리며) 절대로.
다애 : (미끄러지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난 싫은데. (힐끔 눈치 본다)
동원 : 그렇게 싫으면 할 수 없고.
승용차에 타는 동원. 시동 거는데 크락숀 소리.
동원 : (본다)
다애 : (차창 열라는 시늉)
동원 : (차창 내린다)
다애 : 오피스텔은 싫어요. 내가 아저씨 이거 같잖아.
새끼손가락 펴 보이는 다애.
동원 : ...
웃으며 끄덕인다.
다애의 미니 스포츠카 달려가 버린다.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차를 몰고 가는 동원.
#. 동원의 사무실 안 (현실)
의자를 박차듯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동원.
#. 동. 복도
벤딩 머신 근처여 모여 히히덕거리는 직원들.
현필 : 모르겠어요. 요즘은 하두 변덕이 심해서 하부장님 눈치 보기 바쁘다니까요.
김영호 : 현필이 너 나한테 슬며시 작전 거는 거 아냐.
현필 : 작전은요. 지난 달 실적 못 보셨어요.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키며) 이거라구요, 이거.
김영호가 복도를 눈짓한다. 동원이 온다.
현필 : (달려가며) 서류 받아놨구요. 사자 주문 냈는데요.
대꾸 없이 가버리는 동원.
김영호에게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현필.
#. 어느 산장 앞
산중턱에 자리 잡은 산장. 혜진의 렌트카가 산길을 올라와 산장 앞에 멈춘다.
운전석에서 내려 차의 트렁크를 열고 짐을 내리는 준수.
조수석에서 내리는 혜진. 산을 바라본다. 설원너머 우뚝 솟은 산봉우리.
혜진 : ...
성큼 혜진 앞으로 다가오는 산봉우리. 문득 숨이 막히는 혜진.
차의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는 준수.
준수 : 내가 비행장으로 달려가면서 얼마나 빌었는지 알아요. 하나님, 부처님 제발 비행길 놓치게 해주십시오.
내 생전에 그렇게 뭔갈 간절히 빌어본 건 처음이에요.
혜진 : 정말 굉장하네요.
두 손을 벌리고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산봉우리를 바라본다.
혜진 : 이런 곳이라면 정말 죽는 게 무섭지 않을 거 같아요...
야호. 힘껏 소리 지르는 혜진. 그리곤 귀를 기울인다. 멀리서 혜진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돼서 돌아온다.
더 신나서 소리치고 또 치는 혜진.
#. 동. 산장의 방안 (밤)
혜진을 내려다보는 준수. 두 눈을 감은 편안한 혜진의 모습.
부드러운 준수의 애무가 이어진다. 감고 있는 혜진의 눈망울이 조금씩 움직인다.
멀리서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산중턱 (밤)
눈 더미가 우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
#. 동. 산장의 방안 (밤)
격렬해지는 준수의 애무. 더욱 편안하게 몸을 맡기고 있는 혜진.
혜진 : (소리)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나는 죽으러 온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사랑을 찾아서.
#. 동. 산장 앞 (새벽)
아직 어둠에 쌓여있는.
#. 동. 방안 (새벽)
엎드려 잠든 혜진. 그 옆모습. 미소를 짓듯이 행복한 얼굴이다.
#. 산길 (새벽)
눈을 밟으며 산을 오르고 있는 발. 거친 숨소리.
#. 산장의 방안 (밤)
잠든 혜진.
#. 산의 정상 (새벽)
벼랑 끝에 버티고 서서 가쁜 숨 내쉬고 있는 준수. 한발자국 벼랑 끝으로 내민다. 우르릉 눈사태 소리.
멈추는 준수. 밑을 내려본다. 눈사태로 뽀얗게 피어오르는 눈안개. 부르르 떨며 물러서는 준수.
순간 공포에 질리는 준수의 얼굴.
성구의 웃음소리. 훅 숨을 들이마시며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는 준수.
벼랑을 향해 몸을 던지듯 눕히고 있는 성구. 그 손을 꽉 잡는 준수.
성구 : 손을 놔 버려.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가 있어.
준수 : (겁에 질린)
성구 : 왜 그렇게 배짱이 없는 거야. 날 미워하고 있잖아. 죽이고 싶도록. (웃더니) 손을 놔 버려. 내 손을 놔 버리라구.
부르르 떨며 성구의 손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는 준수.
성구 : 놔, 내 손을 놔. 그만큼 모욕을 당하고 살았으면 그 대가를 받아내야지.
마주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는 성구. 준수의 손에서 성구의 손이 미끄러져 나간다.
준수 : 아. 안돼.
비명을 지르는 준수. 성구의 손이 준수의 손에서 빠져나간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 속에 얼굴을 처박는 준수.
#. 동. 산장 앞
아침이다. 혜진이 코트를 걸치고 산을 바라보고 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눈.
젊은 관리인이 뒤채에서 눈 치우는 판을 들고 나온다.
관리인 : (일본어) 잘 잤어요?
혜진 : (좀 어색해서 몸을 움츠리며) 하이, 밤중에 눈이 많이 왔나보네요.
관리인 : 이맘때면 눈이 그칠 날이 없죠. 시장하시면 먹을 걸 좀 만들어 드릴까요.
혜진 : 고맙지만...
관리인 : 그럼 따뜻한 커피라도.
혜진 : 하이, 아리가또...
#. 산의 중턱
눈 속에 미끄러져 내려오는 준수. 미친 듯이 여기저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 산장의 홀 안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고 꼬챙이로 나무를 들쑤셔 불길을 터주는 관리인.
혜진 : ...
코트를 걸치고 커피 잔을 감싸 쥐고 조금씩 마시고 있다.
관리인 : 금방 따뜻해질 겁니다.
혜진 : 저 때문에 불을 피우셨나 봐요.
관리인 : 겨울엔 손님이 없어서.
혜진 : 등산객들이 많을 것 같은데.
관리인 : (웃으며) 이 산은 등산하기엔 험한 곳이죠. 그렇다고 케이투나 에베레스트처럼 등산가들의 모험심을 자극할만한
험한 산두 못 되구요. 겨울엔 항상 쓸쓸합니다.
혜진 : (웃으며) 무섭지 않으세요. 혼자서.
관리인 : 무섭긴 해두 비워놓을 순 없으니까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관리인.
#. 산중턱
미친 듯이 두 손으로 눈을 파헤치는 준수. 문득 멈춘다. 위쪽에 눈 밖으로 삐져나온 등산화의 일부분.
기어가는 준수. 등산화를 끄집어낸다. 등산화.
준수 : ...
털썩 주저앉는다.
#. 산장의 홀 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혜진.
혜진 : (관리인 보고 웃으며) 부인이 미인이시네요.
관리인 다른 사진을 내민다. 받아 보는 혜진. 어린 아들과 딸의 사진이다. 순간 흠칫하는 혜진.
관리인 : 무척 보고 싶지만 일년에 한두 번밖엔 볼 수가 없습니다.
혜진 : 왜요. 여기 일이 바빠서요?
관리인 : (웃는다)
혜진 :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인데.
관리인 : 집사람과 갈라선지 벌써 삼년이 지났거든요.
혜진 : ...(멍해지는)
관리인 : 애들도 지금은 훌쩍 커 있을 겁니다. 그건 삼 년 전에 찍은 사진이거든요.
쓸쓸한 관리인의 웃음.
#. 산중턱
눈 위에 놓여진 등산화.
여기저기 눈을 파헤치고 있던 준수가 두 손 놓고 허리를 굽힌 채 한숨을 내쉰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짐승처럼 으르릉거리며 눈물을 쏟아낸다.
#. 산장의 앞 (밤)
굴뚝에 피어오르는 연기.
#. 동. 홀 안 (밤)
벽난로의 은근한 불길.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몸을 녹이고 있는 준수.
혜진 : ...
바라보다 준수의 등산화를 잡는다. 반사적으로 발을 웅크리는 준수.
혜진 : 구두 속까지 다 젖었잖아요. 발을 말리고 따뜻하게 녹이지 않으면 동상에 걸릴 거예요.
준수의 등산화를 벗기는 혜진.
두 발을 다 벗기자 무릎을 곧추세우며 두 발을 감추듯 당기는 준수.
혜진 : (딱하다는 듯 바라보다) 하루 종일 어디 있었어요.
준수 : ...
혜진 : 친구 찾아 다녔어요?
준수 : 미안해요... 내가 다 망쳐놨어요.
혜진 : ...
준수 : 잡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다 망쳐 놨다구요.
혜진 : ...
바라본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준수.
가만히 준수의 어깨에 손을 얹는 혜진. 그대로 혜진의 가슴에 몸을 던지는 준수.
준수 : (울음을 삼키며) 부인 같은 녀석이었어요.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끈이 있었는데 내가 그걸 끊어버린 거예요.
미안해요. 내가 부인을 망쳐놨어요.
중얼거리더니 잠든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준수.
혜진 : ...
준수를 가만히 어루만져준다. 벽난로의 잔잔한 불길.
혜진 : (준수를 어린아이처럼 달래듯 어루만져주며, 마음의 소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상관인가...
산에서 조난당한 친구가 누구든... 죽었든 죽였든... 나하곤 상관없는 일야...
벽난로. 불길이 잦아든 숯덩이.
웅크리고 잠이든 준수. 담요를 몇 겹으로 덮어줬다.
우르릉거리는 낮은 소리.
#. 산중턱 (밤)
어둠 속에 무너져 내리는 눈 더미.
#. 산장의 홀 안 (밤)
우르릉 소리에 눈을 뜨는 준수. 악몽을 꾼 듯 흠칫하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준수 : ...
건너편 소파에 기대 잠이 든 혜진. 미소를 머금고 잠이 든.
준수 : ...
조심 일어난다. 홀을 빠져나가려다 다시 혜진을 본다. 움직이지 않는 혜진.
준수 조심 문을 열고 나간다.
혜진 : ...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 동. 방안 (밤)
허겁지겁 짐을 챙기는 준수.
#. 동. 홀 안 (밤)
삐걱 문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바람 소리.
혜진 : ...
가만히 눈을 뜬다.
#. 동. 산장 앞 (밤)
나와서 문을 닫는 준수. 가쁜 숨 내쉬더니 가방을 들쳐 메고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 동. 홀 안 (밤)
혜진 : ...
#. 산길 (밤)
미친 듯이 어둠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준수.
#. 인천공항
활주로에 불꽃을 튕기며 내려앉는 여객기의 바퀴.
#. 출국장 앞
붐비는 인파.
혜진 : ....
우두커니 서있다.
#. 달리는 공항철로
차창가의 혜진의 모습.
#. 동. 공항철도 객차 안
한가하다.
혜진 : ...
가방을 꽉 잡고 앉아있다. 객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겨두고.
#. 헬스클럽 안
자전거 패달을 죽어라 밟아대는 동원. 옆 자전거에 타고 슬슬 패달을 밟고 있는 신중호.
신중호 : 하 부장, 이쯤에서 한번 갈아타는 것도 좋잖아. 위에서 큰 걸루 서너 장은 각오하고 있더라구.
어때, 한 우물 판다구 누가 알아주나. 그러다 헛발질 몇 번하면 헌신짝 쳐다보듯 할 텐데.
못들은 척 맹렬하게 자전거 패달만 밟아대는 동원.
#. 동. 마사지실
엎드려 마사지 받고 있는 동원과 신중호.
신중호 : 아예 큼지막한 걸루 한 장 던질지도 몰라. 그 정도면 팔자 고치는 거 아냐.
마음만 먹으면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펀드를 맡길 거야. 물론 인센티브도 따로 챙겨주고.
잠든 듯 마사지만 받는 동원.
#. 동. 호텔 앞 (저녁 무렵)
발레 파킹한 차를 기다리고 섰는 동원과 신중호.
신중호 : (힐끔 보더니) 참, 사모님 잘 계셔. 누가 그러는데 북해도 공항에서 사모님을 봤다고 그러던데.
동원 : (홱 본다)
신중호 : 난 전번에 회사 옮기면서 마누라도 바꿨다. 차도 바꾸고.
외제 스포츠카가 와서 멎는다. 차에 타는 신중호. 새끼손가락 세워 보이며.
신중호 : 이것두 바꾸고.
급 발진해서 달려가 버리는 신중호.
욕지기를 꾸욱 누르는 동원. 동원의 차가 와서 멎는다. 우두커니 서있는 동원.
#. 혜진의 집 가는 언덕길 (밤)
동원의 차 올라온다.
#. 혜진의 집 앞 (밤)
동원의 차 온다. 운전석의 동원 차를 멈추고 프론트 윈도우 너머 쪽 바라본다.
대문 앞 계단에 여행용 가방을 앞에 놓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동원 : ...(신음)
혜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원의 차를 바라본다. 해드 라이트에 눈부셔하는 혜진의 모습.
해드 라이트를 끄고 차에서 내리는 동원. 혜진 앞으로 걸어간다.
동원 : 왜 그러고 있어.
혜진 : 집에 불이 꺼져 있어서요.
동원 : ...
집 본다. 불이 꺼져있다.
동원 : 불 켜두고 퇴근하라고 일렀는데 파출부가 잊어버렸나 보군. 일어나.
혜진 : 애들은요.
동원 : 고모 집에 데려다 줬어. 내일 학교 안가는 날이라. (좀 짜증나서) 뭐해, 일어나잖구.
혜진 : 여기서 깜빡 잠이 들었나 봐요.
동원 : 언제 왔는데.
혜진 : 비행기 내려서 전철타고 택시 갈아타고 그러고 왔더니.
동원 : (막듯이) 오늘 온다고 전활했으면 공항으로 마중 나갔을 거 아냐.
혜진 : (흘기듯 웃으며) 바쁘신 분이 뭐.
동원 : 밑에 애들이라두 내보내지.
혜진 : (일어나며) 짐 들여놓고 애들 데리러가요.
동원 : 내일.
주머니서 집 키 꺼내 던진다. 겨우 받는 혜진.
동원 : 주차장에 차 넣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혜진 : 여보, 애들.
동원, 차에 타서 차문 꽝 닫는다. 해드 라이트가 켜진다.
눈이 부셔 고개 돌리는 혜진.
#. 혜진의 집 욕실 (밤)
샤워의 물줄기. 얼굴을 디밀고 샤워하는 혜진.
#. 동. 드레싱 룸 (밤)
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리는 혜진.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가슴을 바라본다.
드라이 멈추고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어 보는 혜진. 맥이 풀린다.
#. 동. 안방 (밤)
목까지 가린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오는 혜진. 침대가 눈 안에 들어온다.
혜진 : ...
숨이 막힌다. 얼른 시선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던 혜진 멈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거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동원의 모습이 보인다.
동원 : (전화) 한달만...기다려주는 김에 한달만 더 기다려 달라구... 그런 게 아냐, 신형. 회사 옮기는 게 쉬운 일 아니잖아...
탐나지, 물론. 일 년에 백억이 무슨 애들 장난감 이름이야... 알았어... 말 안 새게 단속 좀 해주고.
#. 동. 거실 (밤)
동원 : (전화) 그나저나 차 좋드라. 이왕이면 옆 자리두 채워주지 그래. (웃으며) 알았어, 빠이.
전화 끊다 안방 문가에 뒷짐 지고 기대있는 혜진을 바라본다.
동원 : 저녁은...
혜진 : 당신은요.
동원 : 난 생각 없어.
혜진 : 나두요.
동원 : ...(바라본다)
혜진 : ...(문가에 기대있는)
동원 : 잠깐 나갔다 올게.
현관으로 간다.
혜진 : 잠깐만요.
멈추는 동원.
혜진 : ...
동원 : 뭔데.
혜진 : 할 말이 있어요.
동원 : 그렇게 급해?
혜진 : ...네.
동원 : 나 지금 기분 별루 안 좋은데 나중에 하면 안돼.
혜진 : 안돼요.
동원 : 안돼?
기가 막히다는 듯 본다. 화가 나서 다가오는 동원. 저도 모르게 움찔 하는 혜진.
동원 : 살림하는 여편네가 애들하고 남편 놔두고 지 맘대로 집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불쑥 집에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할 얘기가 있다... 그래, 뭐야. 오늘하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
혜진 : ...(겁에 질려 바라보는)
동원 : ...(노려보다 한숨 푹 쉬더니) 내일하자구.
현관으로 달려가듯 가는 동원.
혜진 : (다급하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동원 : ...
현관문 잡고 움직이지 않는 동원.
혜진 : ...
소리쳐 놓고 놀란 듯 서있는 혜진.
천천히 동원이 돌아선다.
동원 : 뭐라구 했어.
혜진 : (더듬거리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구요.
동원 : ... 그래?
혜진 : (힘없이) 미안해요.
동원 : ... 알았어.
나가버리는 동원.
혜진 : ...
눈물이 치솟는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멍하다.
밖에서 차 소리.
혜진 : 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