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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의사회 임원진 운영은 좀 독특하다. 우선 차기 회장에 선출되면 3년간 차기 회장으로서 회장을 보좌하며 활동하다 3년 후 정식 회장에 취임한다. 이후 3년간은 ‘직전 회장’ 자격으로 활동하게 된다. 박 교수는 2013년 서울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정식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박 교수의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여성 해부학자 나복영(80) 고려대 명예교수다. 모녀가 함께 해부학을 전공한 모녀 해부학자는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다. 그는 6·25 전쟁이 나던 해(1950년)에 태어났다. 전쟁통에 병리학 교수였던 아버지(박정규)가 납북되는 바람에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어릴 적부터 해부학 실험실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그리고 해부학자가 돼 세계여의사회 회장에까지 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전쟁과 가난을 경험해야 했던 어린 시절 그의 조국은 ‘받는 나라’였다. 그로부터 60년. 한국은 이제 ‘주는 나라’로 발돋움했다.
박 교수는 “저 자신이 교육이라든지 옷·식료품 같은 생필품 지원에 있어 외국의 도움과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기 때문에 고마움을 잘 알고 있다”며 “세계여의사회의 수장으로서 빈곤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저개발국에 대한 의료지원과 봉사를 체계적으로 펼쳐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와 함께 그가 이끌고 있는 한국여의사회도 내년 2월 본격적인 해외 의료봉사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세계 여의사들의 수장이 됐다. 소감은.
“주양자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조직위원장을 맡은 서울 총회(1989년)에서 주일억 회장이 당선됐다. 당시 한국이 경제적으로 막 올라가기 시작해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국제사회, 특히 세계여의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 7월 총회 때도 주최국인 독일 다음으로 연제 발표를 많이 했고 발표 수준도 아주 높았다.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세계여의사회는 1919년 만들어졌지만 일반엔 아직 생소하다.
“당시 여의사들은 소수자였고 차별이 심했다. 여의사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선 국제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해서 세계여의사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여의사회는 56년에 결성돼 58년 세계여의사회에 가입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여의사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 레지던트 트레이닝을 받을 때 여의사들은 자신이 가고 싶은 과, 인기 있는 과에 가지 못했다. 지금은 레지던트의 절반 이상이 여학생이지만 얼마 전까지도 성형외과·피부과·안과 같은 인기 과에선 노골적으로 여학생들은 안 받는다는 조건을 내걸 정도였다.”
-회장에 취임하면 어떤 활동에 중점을 둘 것인가.
“지금도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에선 여아 할례나 성폭력 등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 폭력의 피해자들을 구호하는 일에 적극 나서려 한다.”
-한국여의사회도 활동이 활발하다.
“지난 4일 120명의 여의사들이 모여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의료인 트레이닝을 열었다.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는 전부 경찰병원으로만 보내졌다. 하지만 피해자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젠 어느 병원으로든 갈 수 있게 됐는데, 일반병원의 의사들은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를 다뤄본 경험이 없고 여기에 대처하는 매뉴얼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다. 여의사 교육을 전국으로 확대해 나가고 전국적 여의사 네트워크를 만들어 성폭력 피해자들을 진료하는 매뉴얼을 갖추려 한다.”
-그 밖의 활동은.
“10월엔 조손가정 돕기 비전캠프를 열 계획이다. 한국화이자제약·어린이재단과 공동으로 조부모들과 사는 아이들 50명을 초청해 ‘엄마 같은 의사’로서 건강 검진과 컨설팅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또 지난 5월엔 여성들만 수감돼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재소자들에 대한 검진과 상담을 했다. 이런 활동들을 단발성이 아닌 계속사업으로 이끌어갈 계획이다.”
-해외 의료봉사를 중점 사업으로 내걸고 있는데.
“여의사회 차원에서의 해외봉사는 지금까진 엄두를 못 냈는데 이젠 할 수 있는 역량이 됐고 자원자도 많다. 내가 6·25 때 태어났기 때문에 외국 의사들이 어떻게 우리를 도와줬는지 잘 안다. 스칸디나비안 의사들이 와서 국립의료원을 태동시키고, 부산에선 병원을 짓기 힘드니까 병원선을 띄워놓고 외국 의사들이 진료도 해주고 의사·간호사 트레이닝도 시켰다. 한국이 ‘받던 나라’에서 이젠 ‘주는 나라’가 될 때가 됐다. 내년 2월께 방글라데시·인도, 동남아시아 등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라에 나가 의료봉사를 시작하려 한다.”
박 교수는 인터뷰 내내 ‘주는 나라’를 강조했다. 의사 집안에서 자라면서 접한 어린 시절 경험 때문이다. 그는 경성제국대(서울대의 전신) 의학부를 졸업한 아버지가 납북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의 전신)을 나온 어머니(나복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그가 세상, 특히 의학의 길과 통하는 통로였다. 어머니를 통해 미국 의사들이 어떻게 한국을 도왔는지, 당시 아시아의 잘살던 나라이던 필리핀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듣고 자랐다. 실제로 나 명예교수는 57년 미국 차이나메디컬보드의 지원을 받아 교환교수로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나 명예교수는 이후 한국여의사회를 만드는 데 관여했고 3대 회장을 지냈다.
경기여중·고를 나온 박 교수는 어머니가 재직하고 있던 고려대 의대에 입학하면서 의학자의 길을 걸었다. 대학 시절 조교이던 남편(홍승길 건국대 의생명과학원장)을 만나 결혼했고 76~78년 독일 킬(Kiel)대학에서 저명한 생리학자인 로버트 슈미트 교수 밑에서 같이 박사학위를 했다. 홍 원장의 전공은 생리학이다. 부모와 남편 등 4명이 모두 기초의학자다. 그에게 왜 해부학을 택했는지 물었다.
“우리 몸을 샅샅이 알게 된다는 게 재밌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과 신경을 하나하나 해부하고 서로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밝혀내는 방대한 공부가 너무 좋았고요. 당시 국내에서 신경과학은 가르치는 교수가 없어 불모지였기 때문에 앞으로 엄청나게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도 있었죠. 또 어머니도 그렇지만 저도 임상보다는 학생들 가르치는 걸 좋아했어요. 그래서 뉴로사이언스를 하는 교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해부학을 하게 된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시체를 보고 자랐다. 어머니의 실험실은 명륜동에 있었고 난 혜화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학교 끝나면 어머니 방에 가서 태아표본 같은 걸 보면서 살았다. 내겐 어릴 적 놀이터가 실험실이고 해부학 교실이었다.”
-의사가 아니었으면 어떤 길을 갔을까.
“한때 정치외교학과를 갈까 고민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유명한 역학자한테 사주팔자를 봤는데 ‘비행기 타고 온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사주’라고 나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난 외교관이 돼야 하나 보다 하는 게 딱 박혔다. 막상 대학에 가려고 하니 정외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의대는 길이 보였다. … 그런데 나이 먹고 돌아보니 내가 ‘의사 외교관’이 돼 있더라. 의사 외교관으로서 한국을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싶다.”
박 교수는 홍 원장과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37살에 늦둥이로 낳은 딸은 지금 대학 3학년(사회학과)이다.
박경아(60) 연세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 2010.4.21.조선 http://blog.daum.net/chang4624/1698
[동아 에세이/박경아]베이징 공항에서 체험한 노인 공경 [오피니언] 2014-07-30 03:00 동아
박경아 세계여의사회회장 연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