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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련 한인 본당 제5회가족 캠프(2012년) ”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12)
★ 언 제 : ’12. 7. 25(수) ∼ 28(토) / 3박 4일(대련)
7. 25(수) ∼ 29(일) / 4박 5일(한국)
★ 어 디 로 : 고구려유적지 & 백두산
대련 한인 본당 & 직암 선교회
❦ 대련 한인 본당 가족 캠프 기도문 ❧
참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대지
높은 산과 드넓은 바다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희들을 사랑스런 아들, 딸로
이 세상에 보내 주시어
하느님 아버지를 찬미할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대련 한인 본당은
고구려 유적지와 백두산을 탐방하며 선조들의 신앙을 기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는 주제로,
가족 캠프를 하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이번 가족 캠프에서,
우리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그려보고 싶습니다.
만주 벌판을 달려가 백두산에 올라 한민족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고,
북한의 국경을 따라 달리며 민족의 화해와 평화 통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 하오니 저희에게 은총을 주소서.
하느님 아버지!
이번 가족캠프를 통하여
저희 대련 한인 본당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는 공동체,
더욱 당신 마음에 드는 공동체가 되도록
저희들을 이끌어 주소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안중근 토마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평화의 모후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대련 한인 본당 18주년 본당의 날 행사
본당 주보 긴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장춘 소팔가자에서 부제 서품을 받고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백두산과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를 탐험 하셨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발자취를 되새기며 순교신앙을 길이 살려 갑시다.
대련 한인 본당 제 2 회 압록강 기도행진
- 지향 : 남북한의 화해와 평화통일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3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시다.
4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바치심을 묵상합시다.
5단 마리아께서 잃으셨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심을 묵상합시다.
❤빛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첫기적을 행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심을 묵상합시다.
❤고통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영광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유적지 정보
백두산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은 길림성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 동부 최고의 산맥이다..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활동으로 부식토가 산정상에 하얗게 쌓여 붙여진 이름으로, 말그대로 '흰 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청나라때 백두산을 장백산신으로 봉한 이후에 "장백산(長白山 : 창바이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원래는 화산활동을 하는 산이었으나 이미 250년 전에 활동을 멈춘 사화산(死火山)에 속한다. 백두산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천연식물원으로서 동북호랑이를 비롯한 희귀한 야생동물과 야생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국가급 보호구에 속한다. 전체 면적 중 1/3은 중국의 영토로, 2/3는 북한의 영토에 속한다. 백두산 연평균기온은 -8도로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에 달한다.
두만강
상류에서는 서두수(西頭水)라고 불리며 대홍단군과 무산군의 경계에서 지류인 석을수와 합류한 뒤에는 두만강이라 불린다. 두만강의 명칭은 고려강(高麗江)을 비롯해서 도문강 (圖門江또는徒們江)·토문강(土們江)·통문강 (統們江)으로 표기된 문헌도 있으나 이들은 대부분 중국측의 문헌이고, 한국의 문헌에는 거의 두만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주인들이 두만강을 고려강이라 부르는 것은 이 강이 고려와 만주의 국경을 이루는 강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도문강이란 말은 '새가 많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의 여진어 '圖們色禽'에서 비롯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두만강은 대륙교류의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중국·소련의 세력 각축장인 동시에 완충지대로서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두만강 중·상류 지역은 한대 침엽수림대의 원시림이 풍부한데 대체로 침엽수가 76%, 활엽수가 24%를 차지한다. 이 강은 중국·소련과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국경하천으로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이 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하였으며 민족수난의 역사를 안고 있는 강이기도 하다.
연길
연길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부터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 이며 중국 조선족문화의 중심지로 백두산과 가까워 매년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연변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 집, 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나라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자치주 스스로 그 민족 나름대로의 지역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 내의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조선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고 있고, 그 때문에 연변의 거의 모든 옥의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이 공용어로 되어 있다.
연길의 면적은 390㎢, 인구는 약 25만 8000명(1993)에 달하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부근에 석탄·금 등의 광산이 있고 광공업이 발달해 있다. 한국어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의과대학·연변대학 등이 있다.
단동
단동시는 요녕성에 위치한 면적 1만4,918㎢, 인구 250 만명인 중국최대의 국경도시로 북한의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뜻은 ‘아침해가 뜨는 ’붉은도시’란 뜻이다. 단둥 주변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으나, 1862~74년에 식민을 위해 개방한 이후, 산둥 성으로부터 주민을 옮겨오게 해 급속히 개발·확대되었으며, 1876년에 정규 행정체제를 갖춘 현청소재지가 되었다. 도시가 커짐에 따라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지역의 자연적인 관문이 되었으며 한반도와 만주지방 사이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또 농산물, 특히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콩의 집산지가 되었고 목재 수출항으로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톈진[天津]·상하이[上海]와 산둥 성으로 수송하는 연안무역용 대규모 정크선단이 발달했으며, 1907년에 무역항이 되어 외국상선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1933년 산업개발의 중심지로 계획되어, 거대한 섬유공장들이 세워지고 제재소와 목재 펄프 공장들이 건설되었다. 1949년 이래 산업 성장을 계속하여 산업이 아주 다양해졌다. 섬유산업은 이제 면직물·합성섬유 제조 및 제사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거대한 제지와 목재 펄프 공장이 있고, 다양한 화학공장들이 약제와 공업용 화학약품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고무 공장도 있어 다양한 공물을 가공처리하고 있다.
용정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자, 윤동주 시인의 고향, 용정.... 용정은 20세기 초 반 민족의 운명이 일제 침략에 신음 하던 시절, 지각과 실력을 갖춘 애국 청년들이 모여 나라 잃은 설움을 한 탄하고 독립을 꿈을 품고 심신을 갈고 닦았던 곳이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은 지린성(吉林省) 동부에 자리잡고 있다. 전체 인구는 26.13만명이며 그 중 조선족은 전체 인구의 67.1%를 차자하고 있다. 또한 조선족 인구가 중국에서 제일 많은 도시로, 우리 민족 전통을 완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특히, 용정은 일제 하에서 독립운동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해, 반일운동의 역사적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가곡 '선구자'의 무대 역시 용정이며, 윤동주, 문익환 목사의 고향도 용정이다. 연변을 찾는 많은 한국인은 용정을 찾아 일송정에 오르고, 용두레 우물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대성학교 박물관을 찾아 역사 답사를 하기도 한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용정에 들어서는 길목 우측에 비암산이 있다. 비암산 정상 소나무 옆에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일송정 푸른 솔이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노래 선구자의 '일송정'이다. 60여년전 항일혁명근거지의 비밀 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등 많은 애국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이 모여 활동한 곳이다. 일송정은 당시 일제가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말려 죽이고 정사를 파괴했는데, 1990년에 복구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용정제일중학교 교정에는 과거 대성중학교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윤동주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안에는 대성중학교 출신의 윤동주, 문익환 등 유명인사와 항일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장수왕릉
장수왕 : 고구려 제20대 왕(413~491 재위).이름은 거련(巨連)·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 태자로 책립되었다가 413년 10월 광개토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79년에 걸친 장수왕의 재위기간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국력이 충실한 시기였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이 이룩해놓은 업적을 바탕으로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외교를 추진하고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결과 장수왕대에 고구려는 북으로 부여성(扶餘城 : 지금의 農安), 남으로는 남한강 유역, 서로는 랴오허[遼河], 동으로는 훈춘[琿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광개토대왕비
414년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웠으며, 응회암(凝灰岩) 재질 높이가 약 6.39미터, 면의 너비가 1.5미터이고,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라고
된 부분으로 광개토대왕의 비석임을 알게 해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대
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
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자료가 된다.이 비석은 조선후기까지 확인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호산산성
고구려의 지방성의 하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호산산성이 박작성으로 비정된다. 박작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성이다. 이 성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다. 성 안에는 둘레 4.4m의 우물이 남아 있다. 우물의 석축벽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꼴 돌을 곧게 올려 쌓았는데 아직까지도 53층이나 남아 있고 깊이가 11.25m나 된다. 현재 호산산성의 북쪽에 중국 명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성벽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여순감옥
청일전쟁(淸日戰錚)에서 승리한 일본은1895년04월17일 청국과 시모노세키(下關條約)조약을 조인하고 요동반도(遼東半島)을 점령한다.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권을 반대하는 삼국간섭(三國干涉: 러시아,프랑스, 독일 공동간섭)에 의해 러시아는 일본의 세력을 축출하고, 1902년 항거하는 동북 3성(東北三省: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여순감옥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일본이 확장 중축한 여순감옥(旅順監獄)의 규모는 총면적 26,000㎡,275여개의 여러 형태의 감방과 지하감방(監房) 2천여명을 동시에 수용 가능한 크기의 대규모 형무소(刑務所)이다. 1906년에서 1936년사이 연간 수감자 수는 약 2만 여명이 넘었다.
수감자는 주로 애국지사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이고 그외에는 터키인,독일인 등 국가의 반파시즘 투사들이 투옥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뒤 여순에서 철수하고 소련의 붉은군대가 주둔하면서 여순감옥 사용이 중지 되었다.
1971년 여순감옥을 전시관으로 복원하여 일반인에게 개관했고 1988년 중국정부는 여순감옥을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외국인(外國人)의 출입을 통제하던 여순감옥(旅順監獄)이 2009년10월1일부터 전면개방(全面開放)조치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 역사학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선생, 엄청난 재산을 처분해 독립군 후진 인재양성에 투자한 독립운동가 이회영선생을 비롯하여 최흥식, 손기업, 박민항, 류상근지사 등이 여순감옥에서 사형 되거나 가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소팔가자(小八家子) 성당
소팔가자(小八家子)는 중국 길림성의 장춘 서북쪽으로 약 70리 정도에 위치한 중국의 전통적인 교우촌으로서 이곳 주민 95%가 가톨릭 신자이다. 소팔가자 마을과 소팔가자 천주교당은 거의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소팔가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소팔가자 천주교당에 참례하는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소팔가자(小八家子)란 여덟 가구가 모여서 한 마을을 이루었다는 데서 유래가 된 마을 이름이다. 이 소팔가자는 우리 한국인들과 매우 친근한 역사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과 최양업이 소팔가자에서 부제품을 받은 것이 그것이다.
이곳은 본래 만주의 한 작은 교우촌일 뿐이었는데, 1796년 천주교우촌이 형성되고 1838년에는 요동 대목구가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면서부터 파리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으로 만주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임명된 베롤(E.J.F.Verolles, 方) 주교가 1841년에 이 일대의 광대한 토지를 매입한 뒤 성당을 건립하고 만주 전교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조선 선교사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 그리고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이 이곳에 거처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페레올 주교 아래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던 김대건은 1844년 초에 북방 입국로를 탐색하라는 주교의 명에 따라 2개월 동안 도보로 훈춘을 거쳐 조선 동북방 국경에 있는 경원까지 가서 조선의 밀사를 만난 뒤 동북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귀환하였다. 2개월 동안 그는 왕복 2천리 길을 걸었던 것이다.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최양업과 함께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그해 12월 초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게 된다. 이로써 소팔가자는 한국인 신학생들이 최초로 부제품을 받은 역사적인 사적지가 되었다.소팔가자는 김대건 신부에게는 비단 부제품을 받았다는 곳으로서의 중요성보다도 그를 있게 만든 고향과 같은 곳이다. 거기서 그는 페레올 주교를 만났고 사제가 되기까지의 모든 역정을 겪으면서 신학공부를 한 토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는 소팔가자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육성했는데 제자란 사제가 될 만한 인물을 눈여겨 두는 것이었다. 이때 김대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인과 사별한 40대의 딩(丁)명리였다. 김대건 신부는 한번 결혼했다는 것이 결점이었으나 중국 사람으로서 그만한 인재가 드물다고 판단해서 나중에 사제품을 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딩 신부의 방계 혈통인 딩병란(프란치스코) 신부가 있다. 그는 나중에 치명 당했다. 그의 역시 방계 혈통인 딩옥봉(요한 바오로)이 현재 소팔가자 성당에서 훌륭한 조상들의 유지를 받들면서 봉사활동을 펴고 있다.장춘 소팔가자 성당은 김대건 신부님이 1년여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성당 제대와 연결이 되어있는 성당 뒤에는 성모동굴이 있고 맞은 편에는 김대건 신부님의 동상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성당 뒷마당이다. 뒷편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께서 머물렀던 장소가 있다. 당시 소팔가자 성당은 훗날 폐허가 되었다가 의화단 사건을 겪은 뒤인 1908년에 재건되었다. 이후 1998년 11월 9일 마카오, 필리핀 롤롬보이에 이어서 세번째로 성 김대건 동상을 건립하였다. 이 동상은 마카오, 롤롬보이에 건립된 동상과 동일한 고(故) 김세중 교수의 작품이다. 소팔가자로 향하는 길은 잘 닦아 놓은 아스팔트 도로였다. 김대건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서울 가락동 본당에서 후원을 받아 길을 닦았고, 이 길의 이름을 '김대건로'라고 명명하였다.장춘 소팔가자 김대건 기념관은 5층 건물에 2500평의 현대식 건물로 소팔가자 김대건 성인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지도신부:최선웅 야고보, 회장 김현욱 돈보스코)가 1997.7-2005.4 추진한 사업의 일환으로 완성한 건물이다. 기념관은 중국 돈으로 20만원이 안 되는 돈으로 2003년에 준공을 하였다. 김대건 기념관은 과거에 김대건 신부가 머무셨던 작은 방위에 세워졌다.
비사성비사성은 한자로 卑沙城외에 필사성(畢奢城)등으로 쓴다. 중국에서는 대흑산(663,1M)에 있는 산성이라는 뜻에서 대흑산산성(大黑山山城으로 부른다, 고구려대 축조된성이지만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요녕성 진저우 유이향 동쪽의 대흑산 주위에 석회암으로 샇은 거대한 석성(石城)으로 ,고구려가 수당 전쟁을 할 때 적군의 침략을 막는 최전선 산성 역할을 하엿다.(삼국사기에는 사면이 절벽으로 둘려싸여 있고 ,다만 서문을 통해서만 오를수 잇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만큼 천혜의 요새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대 흑산 주위에 새로 성벽을 쌓았는데, 고증을 하지 않아 고구려의 축성법과는 전혀 다른 성벽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1~2m높이의 성벽이 일부 남아 있지만, 동북 공정으로 진행 되고 있어 어떻게 바뀔지는 알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