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은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끌어 가시는 복이다. 중심은 하나님, 핵심은 은혜. 마음이 청결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헬라어 단어, 카르디아(καρδία)는 땅과 동의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땅이 좋아야 한다는데, 좋은 밭은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은 땅을 다 제거하고 정리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밭이 되면 말씀이 떨어져서 100배로 결실한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왜냐하면 마음은 믿음이 들어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 마음은 예수님이 거처하시는 곳이다. 내면의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마음이 인간의 본질이다. 사무엘이 잘생긴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중심을 본다는 것은 마음을 본다는 것.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그 악한 마음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나온다(막7:21-23). 이런 마음이 청결하게 될 리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새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겔36장).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훈련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셔야 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는 길이 예수님 보혈의 피다. 청결이 ‘카탈로스’ 카타르시스(정화작용)에서 나왔다. 청결은 윤리나 도덕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이는 제사 용어로 누군가로부터 흠 없다고 선언된 상태를 말한다. 율법은 인간이 깨끗함을 받으려면 피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피 없이는 정결하게 되는 일이 없다. 레위기에서는 양이나 염소나 소의 피로 속죄받는다. 그런데 깨끗해지면 다시 더러워지고 더러워지면 또 양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당신의 피로 단번에 이루어 주신 것이다. 이를 ‘영 단번’이라고 한다(Once and for all). 착하게 살고 구제하고 선을 베푼다고 청결해지는 길이 없다. 노력이나 행위로 발버둥 쳐도 안 된다. 바울, 베드로, 요한 같은 제자들이 우리가 청결하게 되는 것이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음을 말한다(엡1:7 벧전1:18-19 요일1:7).
바울은 나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빌3:6). CT, MRI로 검사해야 하는데, 폰으로 찍어 피부만 보면서 ‘나는 깨끗해, 아무 문제 없어’하는 사람과 똑같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런데 CT, MRI로 찍어 봤더니 곧 죽을 존재라는 것. 눈에 비늘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행9:18).
율법이라는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잠언을 읽으면서도 윤리나 도덕으로 읽는다. 처세술이나 생활의 유익이 되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런 것은 율법의 조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심지어 복음조차도 율법으로 해석하면 죽인다(고후3:6). 마귀도 예수님을 유혹할 때 성경을 가지고 유혹한다. 말씀을 율법으로 사용한다. 복음은 살리는 말씀인데 예수님 없이 해석하면 다 죽인다. 구약을 장차 오실 메시아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잠언의 말씀을 가지고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영생을 얻는 힘을 얻게 된다.
살리는 것이 의다. 살리는 자가 돼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 살길이 없다. 그래서 내가 파산할수록 좋다. "나는 더럽습니다" 그래야 목욕한다. "주님의 피로 나를 씻어 주십시오" 우리가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윗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보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이 더 크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를 붙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unfailing love). 다윗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 크신 것. 다윗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절망했다. 죄란 죄는 다 지었다.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했기 때문에 산 것이다.
에서는 고난을 겪은 적도 없이 늘 평탄한 부자였다. 그러니 자기가 무너질 시간이 없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그게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짓을 소망한다. "하나님 제발 나는 간섭하지 마시고 물질이나 많이 주십시오" 그게 에서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지옥에 떨어져 물 한 방울을 구하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신다.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주님을 보도록 이끌어 가신다. 다윗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 자신의 파산을 이야기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우슬초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빗자루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 다른 것을 증거한 적이 없다. 나는 십자가와 거기에 달리신 예수님 외에는 더 이상 자랑할 것이 없다.
마음의 청결함이 있으면 하나님을 본다. 본다는 헬라어는 ὁράω (호라오)가 있고, γινώσκω(기노스코)가 있다. 기노스코는 영어로 'I know'에 가깝고 호라오는 'I see'에 가깝다. 기노스코는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고 호라오는 어떤 과정에서 깨달았다는 것. 뉘앙스가 다르다. 하나님을 그냥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지고 보는 것. 보는 것과 아는 것이 합쳐진 것이 호라오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그런데 두려워하면 멀어진다. 여기서 두렵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멀어질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 빛과 가까워지기에 죄는 당연히 멀리하게 된다. 죄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 그러니 죄가 머물 곳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호라오다. 주님 보고 깨닫는 것.
그런데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말은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태양은 간접적으로 선글라스라도 끼고 봐야 한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인데, 보이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요1:18). 예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수준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할 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마음이 청결한 자, 예수님 보혈의 피로 씻긴 자는 예수님을 보고 영생을 얻는다(요3:14,15). 믿는 자나 바라보는 자가 동의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의, 구원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셔서 새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마음이 청결해진다. 그럼 하나님을 보게 된다.
청결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뿌림으로 더러운 옷이 흰옷이 되는 것, 알곡이 되는 것, 100% 섞이지 않은 순금, 그리고 정예군이 되는 복 있는 자의 모습이 우리 최종의 모습이길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