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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8일 아침 7시50분 포카라 공항으로 들어섰다. 포카라에서 좀솜으로 가는 비행기는 모두 아침 9시 이전에 뜬다. 9시를 넘기면 기온이 상승하면서 이상기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16인승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항공사측에서 우리의 짐 일부를 다음 비행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비행기가 작으니 항공사측을 이해해야만 했다.
짐 일부를 비행장에 남겨둔 채 정인성(한국대학산악연맹 고문), 이도윤(타이탄산악회), 셀파 앙덴디(38), 키친보이 다와(33)와 함께 좀솜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북서쪽으로 기수를 돌리자 낯설지 않은 페디와 담푸스가 내려다보였다. 오른쪽으로 마차푸차레(6,998m)도 보였다. 잠시 후 마차푸차레가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닐기리(6,940m)와 안나푸르나(8,091m) 연봉들이 보인다.
안나푸르나 남봉(7,219m)을 가깝게 지나치자 이상기류에 비행기가 요동을 쳤다. 마치 배가 롤링하듯 흔들렸다. 비행기가 칼리간다키 협곡 속으로 방향을 틀어 담푸스피크(5,950m)와 닐기리(6,940m) 연봉 사이 협곡 속으로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좀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전 8시9분. 해발 800m인 포카라에서 해발 2,720m인 좀솜까지 올라오는 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좀솜 비행장에 내리는 승객 대부분은 카그베니~묵티나스~트롱패스~마낭~페디로 가는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커들이다. 반대로 마낭을 경유해 트롱패스를 넘어온 트레커들은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포카라로 나가기도 한다.
비행장을 나와 옴스(‘OM’s)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간판만 호텔일 뿐, 일반 로지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큰 건물에 불과하다. 이 호텔에 여장을 풀면 좋은 이유는 바로 앞에 입산신고를 해야하는 ACAP(안나푸르나 보존지역 프로젝트) 사무소와 경찰 체크포스트(검문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호텔 여주인이 이 동네에서는 힘깨나 쓰는 위치에 있어 부탁하면 포터나 말을 쉽게 구해주기로 한 때문이다.
호텔 베란다에서 두번째 비행기편으로 도착되는 짐을 찾으러 보낸 키친보이 다와(33)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기관총 사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호텔 동쪽 약 200m 떨어진 군부대에서 사격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계속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으며 오전 10시에 네팔라면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도 완전무장한 군인들 수십 명이 땀을 흘리며 베란다 앞을 지나갔다. 들것을 든 병사도 보였다. 마오이스트 준동을 막기 위해 좀솜에도 대대급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식량을 구입하고 포터를 구했다. 바가지를 씌우는지 너무 비쌌다. 카트만두나 포카라에서 4~5루피 하는 계란이 20루피나 한다. 식품을 포카라에서 착실하게 준비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포터를 구하는 과정에서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카트만두에서부터 구해오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이곳 포터들은 다루기도 까다롭지만, 간혹 포터가 짐을 맨 채 도망가는 일도 있다고 한다. 오전 10시 가이드에게 포터를 구해오라고 했다. 2시간 안에 올 것이라고 했지만, 오후 4시가 넘어도 포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스탕 트레킹에는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트레킹과 다른 점이 있다. 안나푸르나는 트레커 2인에 포터 1인, 트레커 3인에 포터 2명을 써도 괜찮다. 그러나 무스탕은 반드시 트레커 1인에 포터 1인을 써야 된다. 포터 1인당 짐 무게는 30kg을 넘으면 안된다.
포터를 기다릴 겸 무료함을 달래려고 호텔 앞 체크포스트를 통과하는 트레커들을 구경했다. 눈길을 끄는 것이 말(馬)들이었다. 이곳 말들은 제주도 조랑말 크기다. 포터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우리에게 호텔 여주인이 무스탕은 너무 힘들어 포터들이 가기를 꺼리는 곳이라면서 말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고 귀띰해줬다.
호텔 여주인 얘기가 옳은 것 같았다. 믿음이 가지도 않는 포터 대신 말을 구하기로 했다. 말은 한꺼번에 무게 60kg을 싣는다. 말 1마리가 포터 2명 구실을 한다. 말 3마리면 마부까지 합산해서 포터 7명을 고용한 것과 같아진다. 말은 도망갈 위험도 없다.
마침 호텔을 기웃거리던 말 주인에게 호텔 주인 아주머니가 “내일 아침 일찍 코리안들 짐을 싣고 무스탕으로 가라”고 했다. 말 주인과 말 사용료 흥정을 하고 카고백 3개를 포함해 식량과 텐트 등을 6개로 다시 짐을 꾸렸다.
포터 문제가 해결된 후 취사장비를 점검하는 중 주전자가 빠진 것을 알게 됐다. 가이드에게 주전자를 사오라고 했다. 주전자를 파는 가게는 체크포스트와 군부대 정문 앞을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30분 후 주전자를 들고 나타난 가이드가 경찰관 2명과 함께 왔다. 댄디가 진짜 가이드인지 신원확인차 쫓아온 것이다. 경찰관이 돌아간 다음 좀솜 지역은 해만 지면 통행금지가 실시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10월29일 좀솜~카그베니~추상
아침 8시 비행기편으로 배달되어 온 무스탕 트레킹 허가증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카트만두에서 10월27일에야 신청했던 허가증이 예상외로 빨리 해결된 것이다. 트레킹허가증을 가지고 호텔 건너편 오른쪽 ACAP 사무실에 가서 등록한 다음, 체크포스트에서 트레킹허가증을 보이고 정식 검문을 받았다.
트레킹 허가증을 잘 챙기고 오전 8시25분 체크포스트를 출발했다. 약 200m 거리 군부대 정문 앞을 지나려는데 기관총으로 무장한 7~8명의 군인들이 또 검문했다. 군인들은 외국인 트레커들은 그냥 통과시켰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갈 가이드와 치킨보이 등 자국인들은 짐까지 샅샅이 뒤지고 신분증을 군인들 3~4명이 돌아가며 확인, 또 확인했다.
그렇게 내국인에 대한 검문이 심한 이유는 트레킹 짐속에 총을 숨겨 마오이스트들에게 운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부는 이 동네 사람이라 검문을 면해주었다.
20분이 넘는 검문을 마친 다음, 마을을 벗어났다. 마지막 농가를 지나니 산길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칼리간다키 강을 메운 광활한 사막 가운데로 흐릿한 발자국들이 있었다. 이게 길이라는 것이다. 황당했다. 축구장 몇 개를 이어붙인 것처럼 넓은 폭에 자갈밭으로 뒤덮여 잘못 디디면 몸이 뒤뚱거렸다.
마을을 벗어난 지 1시간, 오른쪽으로 판다 콜라 합수점이 보였다. 합수점을 지나니 자갈밭길은 왼쪽 급사면길로 이어졌다. 이제부터는 제대로 된 길을 걷는다는 기분에 힘이 솟았다.
멀리 V자 협곡에 걸친 현수교와 협곡 안쪽 마을인 카그베니가 시야에 들어왔다. 사면길로 다리 입구에 닿았다. 강폭이 가장 좁은 지점에 설치된 다리였다. 높이 30m에 길이 70m인 현수교를 건너니 아주머니 한 분이 사과를 팔고 있었다. 처음으로 대하는 무스탕 사람이라는 생각에 사과를 1kg(30루피) 팔아드렸다.
로지 3채가 있는 카그베니 입구를 지나 묵티나스 삼거리에 닿았다(10:55). 오른쪽 묵티나스 방면 길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이룬 트레커와 포터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왼쪽 카그베니로 가는 길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40분을 더 걸어 오전 11시35분 카그베니에 도착했다. 좀솜에서 여기까지 약 10km 거리를 휴식시간 거의 없이 3시간15분이 걸렸다.
카그베니 로지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오후 1시 의외로 30대 중반인 여자경찰관 한 명이 업무를 보고 있는 체크포스트에 들렀다. 무스탕은 카그베니가 시발지점이자 도착지점이다. 카그베니를 경계로 무스탕 일정이 초과되면 하루 70달러씩 더 내야 한다.
체크포스트 출입문 벽면에는 ‘제한구역, 관광객들은 이 지역을 벗어나지 마십시오’라는 경고문구와 함께 수개월 전 실종된 한국인 대학생과 외국인 여성 트레커를 찾는다는 전단도 붙어 있다.
오후 1시25분 체크포스트를 출발, 마주보이는 칼리간다키 강을 에워싼 잿빛 산들이 황량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왔다. 둔덕을 따라 강변에 이르자 강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등산화를 벗어 배낭에 매달았다.
샌들을 가져왔지만 카고백 속에 든 채로 말과 함께 먼저 보내 어쩔 수 없었다. 스틱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폭 30m 강물을 건너 자갈밭에 당도했다. 새 양말로 갈아신고 다시 등산화를 신고 가자 또 등산화를 벗어야 했다. 강바닥에는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배낭 무게 때문에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이도윤씨 왈 “평생 받을 지압을 여기서 하게 됐다”면서 그래도 밝은 표정을 지었다. 얼마 가지 않아 두 번 더 강을 건넜다. 상체는 더웠지만 발과 다리는 얼어붙었다. 강물이 무릎을 넘지 않는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도 문제였다. 이후로 징검다리가 놓였거나 폭이 좁고 등산화 발목을 넘지 않는 물줄기를 7개나 건넜다.
물 건너는 일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자갈과 모래가 섞인 황무지에 모래바람이 불어닥쳐 호흡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입을 막고 걸었다. 강바닥을 1시간10분 동안 걷자 오른쪽 급사면으로 길이 이어졌다. 강바닥을 탈출하게 되어 다행이었다. 바람에 먼지가 휘날렸지만 강바닥보다는 급사면길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불과 10분 거리에서 길은 다시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거의 1시간을 더 강바닥에서 비칠거리다가 수백m 높이 급경사 허리를 횡단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횡단길 왼쪽 아래로는 칼리간다키강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건너편 절벽 허리에는 하모니카처럼 네모난 작은 굴 수십 개가 일렬로 뚫려 있다. 옛날 수도승들이 도를 닦던 자리거나 거주지였다고 한다. 50년대에는 중공군 침공 때 주민들 은신처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무덤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왼쪽 아래 강으로 미끄러질세라 조심하며 횡단길을 통과해 탕베 마을(3,060m)로 들어서는 평탄한 길로 내려섰다. 이 마을에는 무스탕을 대표하는 검은 색, 흰 색, 붉은 색 초르텐(티벳식 불탑)들이 눈길을 끌었다. 마을 주변에는 곰파(승원)와 수백 년 전에 건축됐던 요새의 폐허들도 보였다.
탕베 마을을 지나 안내도에는 1시간이 소요된다는 추상(2,980m) 마을에 20분만에 도착했다. 트레킹이 아니라 산악마라톤에 가까운 속도다. 오후 5시10분 로지에 여장을 풀고 있는데, 가이드 앙리가 내 카메라를 들고 들어왔다. 탕베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쉬는 사이 정신이 나가 카메라를 두고 왔던 것이다.
추상 마을은 회칠한 돌로 만든 집들과 좁은 오솔길로 된 3개 군락으로 이뤄져 있다. 마을 서쪽 강 건너로는 오르간파이프를 닮은 300m 높이 주황색 절벽이 하늘을 가릴 듯 자리하고 있다. 절벽 허리에는 접근이 어려운 석굴들이 약 100m 높이에 일렬로 뚫려 있다.
남쪽 끝에 곰파가 있고,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동쪽 절벽 위에 몇 채의 부서진 성곽이 있다. 동쪽 지계곡인 나리콜라(일명 나르싱콜라) 남쪽 둑으로 오르는 길은 데탕으로 이어지는데, 그곳에는 곰파와 소금광산이 있다. 그리고 묵티나스로 가는 규 라(4,077m)를 넘는 길이 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밖에 없는 홀에서 저녁 준비를 했다. 코베아 가스버너 위에 압력솥을 올려 밥부터 지었다. 주인 아주머니와 딸들이 몰려왔다. 압력솥 아래 불을 토해내는 가스버너를 신기한 듯 구경했다. 세상에 이렇게 작고 예쁜 버너는 처음 본다고 한다.<카그베니~추상 12km, 4시간10분 소요>
10월30일 추상~샹보체
아침 6시40분 추상을 출발했다. 나리 콜라를 건너 둔덕 위 길을 따라 가는 도중 절벽에서 떨어진 붉고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강변을 널부러져 있었다. 바위덩어리가 있는 강둑으로 내려갔다. 칼리간다키 강물이 절벽과 절벽 사이 터널을 통해 세차게 흘러나왔다. 터널 바로 앞에 30m 길이 철근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오버행 절벽 아래를 지나니 강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급경사 사면을 올라서니 첼레 마을(해발 3,050m)이 나왔다. 마을 주변에는 버드나무와 약간의 밀밭이 보였다. 마을 상단부 마굿간이 밀집되어 있는 골목을 빠져나가 가파른 돌출부를 오르니 가파른 협곡 절벽 횡단길로 이어졌다. ⊃자형으로 흙을 파내 만든 길은 지그재그로 이어졌고, 그 아래로 지야카르콜라가 아찔하게 내려다보였다.
미세한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횡단길을 따라 1시간을 오르니 완만한 사면길로 이어지면서 타르촉(부처님 말씀이 적힌 천조각)이 휘날리고 있다. 무스탕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고개인 첼레라(3,624m)다. 사면으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흙먼지만 날리는 사막과 같은 척박한 곳에 포플러 군락으로 에워싸인 사마르 마을(3,660m)로 들어섰다.
마을 상단부 초르텐을 빠져나와 협곡으로 들어가 계류를 건너 급경사를 오르니 작은 탑이 나타났다. 작은 탑을 지나서부터 광활한 사면에 어른 키 크기 향나무 군락들이 나타났다. 이어 두번째 고개인 베나라(3,838m)에 오르자 타르촉이 강풍에 세차게 휘날리고 있다. 15분 후 베나 마을(3,860m·민가 3채뿐)에 도착, 라면과 우동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베나마을을 뒤로하고 이제까지 지나온 지형과 거의 닮은 사막 분위기의 길을 따라 1시간25분 걸어 세번째 고개인 얌다라(3,860m)에 도착, 고개를 내려서서 협곡을 휘돌아 오늘 목적지인 샹보체 마을(3,800m)에 도착하니 오후 2시55분이다. 한 곳 뿐인 로지에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다. “아무데나 봐요. 화장실 없어요.”<추상~샹보체 15km. 8시간15분 소요>
10월31일 샹보체~카랑
새벽 3시30분 기상, 4시50분 떡국으로 아침식사, 6시 정각 샹보체 출발. 샹보체라(3,850m)를 넘어 1시간 후 겔링 마을(3,570m)에 들어섰다. 포플라군락과 풀밭이 광대하게 펼쳐져 아름다운 마을이다. 유일하게 크고 붉은 색을 한 곰파가 회칠한 가옥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지리산 세석평전 수십 배 넓의인 평전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올라 나이라(4,010m)에 도착했다. 고갯마루에서 무스탕 북부가 광활하게 조망됐고, 남으로는 안나푸르나와 닐기리가 아득하게 바라보였다.
나이라는 로만탕 남쪽 경계다. 주민들은 나이라 남쪽 평원 상단부를 자이테라고 부른다. 잰걸음으로 게미 마을(3,520m)로 향했다. 안내서에는 45분이 소요된다는 거리를 우리는 30분만에 도착했다. 게미는 넓은 밭으로 에워싸인 마을이다.
주민들과 승려들은 정부가 여행자 방문을 허가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무스탕이 처음으로 개방된 첫 해인 지난 92년 겔링 곰파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인 물건들이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포플러 그늘에서 우동과 칼국수로 점심을 마치고 카랑으로 향했다. 마을 한가운데 좁은 골목을 통과해 게미콜라 협곡으로 내려서니 철제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급경사를 올라간 평지에 이르니 마니통(기도문이 들어있는 원통?지나가면서 통을 손으로 돌린다)이 나타났다. 그 옆 단층 건물은 일본이 세운 병원이다.
오를 수록 가팔라지는 돌밭길에 흙먼지가 날렸다. 수백 마리의 양떼가 내려왔다. 양떼들이 비켜주는 길을 따라 1시간20분만에 트사랑라(일명 초야라·3,870m)에 올랐다. 고개를 넘어 내려갔다가 고갯마루를 왼쪽으로 돌아드니 정면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분지 가운데로 카랑 마을(3,560m)이 보였다. 마을을 바라보며 차츰 내려서는 들판길을 따라 마을 출입구 역할도 하는 초르텐을 지나 카랑 마을 로지에 도착했다.
풀밭과 버드나무, 회칠 한 집들이 어우러진 마을 동쪽 칼리간다키 방면 절벽 위에는 거대한 5층 건물인 티베트 스타일 요새와 붉은 칠을 한 곰파가 눈길을 끌었다. 곰파 동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칼리간다키 계곡이 광활하게 조망됐다. 미국 그랜드캐년을 보았다는 정인성 고문은 그보다 규모가 네 배는 된다면서 감탄했다.
이 마을은 자체적으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마을 북서쪽 카랑콜라 물줄기를 이용한 수력발전이다. 오늘은 4,000m에 가까운 고개 3개를 넘은 탓인지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간고등어조림을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했다.<샹보체~카랑 18.5km, 8시간30분 소요>
11월1일 카랑~로만탕
아침 7시50분 로지를 출발, 마을을 벗어나니 길은 북서쪽 카랑콜라쪽으로 이어졌다. 지름 6인치 정도 되는 파이프가 길을 가로막았다. 오른쪽 협곡 아래에 있는 수력발전소로 물을 공급하는 파이프다. 파이프를 넘어 내려서자 카랑콜라 급류 위에 걸친 파란 페인트로 칠한 철제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 S자로 굽어 이어지는 사면길로 약 500m 올라가니 카랑 마을 반대편 언덕 위다. 직선거리로 불과 200m거리인 여기까지 오는 데 40분이나 소요됐다. 여기서부터는 온통 회색과 노란 색으로 칠한 것 같은 사막지대가 펼쳐졌다. 축구장 수십 개가 들어서고도 남을 광활한 황무지 가운데로 이어지는 길은 트럭이 다녀도 좋을 정도였다. 일명 와이드로드라고 불리는 길이다.
멀리 보이는 언덕 아래 초르텐 한 개가 장난감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저기서 다리쉼해야지 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앞서가는 정인성 고문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초르텐에 도착한 것은 40분 후였다.
정 고문은 혼자서 잰걸음으로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초르텐까지 함께 온 이도윤씨도 도저히 정 고문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래바닥에 배낭을 내려놓으며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자고 했다. 담배를 피워문 이씨는 우리가 걸어온 사막을 바라보며 “미국 네바다사막 보다도 한 수 위”라고 했다.
휴식을 접고 잰걸음으로 고개로 향했다. 15분 후 고갯마루에 오르자 정면으로 무스탕히말 동릉이 처음으로 목전에 나타났다. 20분 후에는 왼쪽으로 무스탕히말 최고봉인 만사일(6,235m)이 나타났다.
만사일을 바라보며 40분 거리에 이르니 정면으로 로만탕 성곽이 내려다보이는 로라(3,950m)에 올랐다. 왼쪽 언덕으로 더 올라가 보았다. 북서쪽으로 잉크를 뿌려놓은 듯한 파란 하늘 아래로 무스탕 연봉들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무스탕 오른쪽으로 잔잔하게 이어지는 산릉이 잠시 가라앉은 코라라(4,660m)도 보였다. 북동으로는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사르바라(5,060m) 주변 산릉들이 넘실거렸다.
로라를 내려서서 ‘염원의 평야’라 불리는 거대한 분지로 들어섰다. 무스탕의 수도 로만탕(3,840m)은 이 분지 속 평야에 형성돼 있었다.<카랑~로만탕 12km. 4시간30분 소요><계속>
글·사진 박영래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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