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무일법 수론훈련 (本無一法 誰論熏鍊)
본래 한 법도 없는데, 오랜 수련을 말하는 이 누구인가?
일체막작 명적자현 (一切莫作 明寂自現)
어떤 것도 조작하지 않으면, 밝고 고요함이 저절로 드러난다.
지법무지 무지지요 (知法無知 無知知要)
법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앎이 아니니,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요체이다.
지리무전 비해비전 (至理無詮 非解非纏)
최고의 이치는 설명할 수 없으니,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니다.
영통응물 상재목전 (靈通應物 常在目前)
영활하게 통하여 사물과 호응하니, 항상 눈앞에 있다.
삼세무불 무심부불 (三世無物 無心無佛)
온 세상에 한 물건도 없어,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계교괴상 구진배정 (計校乖常 求真背正)
생각으로 따지면 이치와 어긋나고, 진리를 구하면 진리를 등진다.
만상상진 삼라일상 (萬象常真 森羅一相)
만 가지 형상이 항상 진실하고, 삼라만상이 한 모양이다.
본래부존 본래즉금 (本來不存 本來即今)
본래가 따로 없으니, 본래가 바로 지금이다.
보리본유 불수용수 (菩提本有 不須用守)
깨달음은 원래 있는 것이니 일부러 지킬 필요가 없다.
✔ 본래 얻을 수 있는 한 법도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한 물건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으며 수행을 하겠다는 것인가? 수행을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 어떤 일도 할 것이 없다. 만들어 낼 것도 없고, 조작할 것도 없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그저 푹 쉴 때, 밝음과 고요함은 저절로 드러난다. 수행을 해야 그 결과 정혜(定慧)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정혜는 삼라만상 위에, 눈앞에 완전하게 구족되어 있다.
이 법은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아는 나와 아는 상대가 있음을 듯하고, 그것은 곧 둘로 나뉘는 이법(二法)이다. 수행자들이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 법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다. 알려고 하면 어긋난다.
알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요체다. ‘오직 모를 뿐’이다. 그저 모르고 몰라서 답답하고 갑갑할 뿐,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르고 모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모름의 끝까지 다다르게 되고, 바로 그 때 온 존재가, 온 우주가 온통 칠통 같은 모름 속을 뚫고 터져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은 단박에 끝난다. 할 일을 다 해 마친다.
최고의 이치는 말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말로는 이 법은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말도 벌써 이법(二法)이 아닌가? 속박과 해탈이 둘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속박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이것이다’라고 하는 순간 벌써 어긋난다. ‘이것이다’라고 내세울 만한 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은 신령스럽고도 활활발발하게 통하여 우주 만물과 호응한다. 바로 여기 눈앞에서. 그러나 그렇게 영활하게 통하는 바로 이 눈앞의 ‘이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한 물건도 아니다. ‘무엇’이라고 이름 할만 한 그 무엇이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다. 없으면서 있고, 있으면서 없다.
생각으로 따지면 바른 이치에 이를 수가 없다. 진리라고 할지라도 구하게 되면 등진다. 구하는 마음이 바로 중생의 분별심이기 때문이다. 구하려는 마음이 벌써, 얻지 못한 것과 얻어야 할 것을 둘로 나누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로 확연히 통하는 것일 뿐, 그 어떤 것도 구할 것이 없다. 구해야 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수 만 가지 형상, 삼라만상 일체만법이 항상 진실하다. 이대로 완전하다. 그 수없이 많은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양이 근원에서는 오직 하나의 모양 없는 모양이다.
본래랄 것조차 따로 없으니, 본래가 바로 지금이다.
깨달음, 보리는 바로 지금,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 일부러 지킬 필요가 없다. 구할 필요도 없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