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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신천지와 이상향 1 / 송 기 호 (Ki-Ho Song)
ysoo 추천 0 조회 726 19.02.06 18: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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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와 이상향 1

A New World and Utopia 1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1990년대에 크린토피아나 그린피아처럼 끝말에 ‘~토피아’,‘ ~피아’란 말이 브랜드 끝에 붙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16세기에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1535년)가 만든 ‘유토피아’ 란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토피아’란 말은 장소를 의미하고, ‘유’란 말은 좋다는 뜻과 없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은 사실 이 세상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사회는 허구인 것을 알면서도 항상 갈망하는 대상이 되어 왔다. 거울에 비진 상처럼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적도 너머의 사람들’ (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에 대해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번 1200년 전에 배 한 척이 폭풍우에 밀려 유토피아에 온 적이 있습니다. 로마인들과 이집트인들 몇 명이 바닷가에 표류하였다가 그곳에 영구히 거주하였습니다(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 59쪽)."


그러기에 유토피아는 찾아나서야만 했다.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도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지구상에 어딘가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 실낙원을 찾아나선 것이 지리상의 발견시대를 열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의 유토피아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도연명(365~427년)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에 나오는 무릉도원인데, 무릉에 살던 어부가 길을 잃었다가 방문한 세계가 그곳이다. 그곳도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무릉(武陵)의 어떤 사람이 계곡을 따라가다 길을 잃고 말았는데, 홀연히 복사꽃 숲을 만났다. 물가의 양편 수백 걸음 안에 다른 나무는 없었고, 향기로운 풀이 아름답게 자라고 떨어진 꽃잎은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그 어부는 대단히 신기하여 다시 앞으로 나가 보니 숲이 끝났다.

숲이 끝나고 물줄기도 사라진 곳에 문득 산이 나타났다. 산에는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마치 광선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는 배를 버리고 그 입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극히 협소하여 겨우 사람이 통행할 정도였다. 다시 수십 걸음을 들어가자 넓고 탁 트인 곳이 보였다. 이 사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찾아와 바깥세상의 일을 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진(秦)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인간세계와 격리되었다고 하며, 지금이 어떤 세상이냐고 물었다
(진정염·임기담 저, 이성규 역, 『중국대동사상연구』지식산업사, 1990 225쪽)."


유토피아는 섬에 설정되어 있고, 무릉도원은 육지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세종 때인 1447년에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무릉도원을 형상으로 잘 보여준다(그림 1).

왼쪽에는 현실세계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그려져 있는데, 두 세계는 험준한 산 속에 좁고 구불거리는 길로 연결되어 있어 감히 범접하지 못할 듯하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섬이나 산속 어딘가에 이상적인 피난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견본담채 38.6x106cm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조선 전기에는 새로 개척한 북방 어딘가에 신천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방귀가 고하기를“북청 사람 최득의 말에, 신유년(1441년) 8월 같은 마을에 사는 일곱 사람과 함께 갑산 서남쪽 산골짜기 사이에서 산에 올라가 6일간을 가니 큰 절이 멀리 보였습니다. 그래서 굵은 새끼를 나무에 맨 뒤에 그 새끼줄을 붙잡고 내려가서 절에 다가가니 중 아홉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이 우리를 데리고 서북쪽 작은 길을 따라가니 인가 70여 호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람들에게 가서 ‘어디에 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또 한 마을에는 100여 호가 살고, 또 한 마을에는 80여 호가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말을 듣고 왔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런 김방귀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이처럼 새로운 땅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야인(耶人,여진족)들도 역시 떠들고 있는 것이다(세종실록 24년<1442년> 2월 8일)."


이것은 세종의 지시 내용으로서, 함경도 갑산 어딘가에 신천지가 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수색하도록 독려하였다. 갑산은 삼수와 더불어 압록강 상류에 있는 지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한 산골을 상징한다(그림 2).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란 의미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란 관용어가 생겨났다.


그렇게 험준한 산속 어딘가에 새로운 땅이 있고, 그곳은 찾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길을 통해 현실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무릉도원의 생각과 상통한다.


그림 2. 신천지로 지목된 삼수, 갑산일대



이듬해에는 벽동(碧潼)에 사는 산골사람 박정이 역시 갑산에서 새 땅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지난 12년 간 매 둥지를 찾으려 궁벽한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곳에 들어갔더니 무려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김인우라 하였습니다. 김인우 등이 나를 보고 머물기를 청하기에 열흘 가량 있으면서 술도 같이 마시며 자세히 그들의 내력을 물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막혀서 바람이 적고 날씨가 포근했는데, 지름길 하나만 있어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습속이나 말, 음식, 집, 밭가는 쟁기 따위도 우리나라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곡식은 기장과 조를 심을 뿐인데,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쌓이고 쌓여서 부유하기가 비할 데 없었습니다.
내가 작별하고 돌아올 때 김인우가“그대가 만일 부역에 견디기 어려우면 여기 와서 함께 살되 남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말하기에, 내가 그리 하기로 허락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나 그곳에 가서 살려고 했더니, 길을 잃고서 딴 곳으로 가게 되어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세종 실록 25년<1443년> 1월 10일)."


이 역시 오솔길로 현실세계와 연결된 이상향을 언급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는 말은‘도화원기’에“이렇게 며칠을 머문 후에 그가 작별하고 떠날 때, 그 안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를 바깥사람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어부는 밖으로 나와 그 배를 타고 길을 찾아 나오며 곳곳에 표지를 남겨 놓았다. 그는 군(郡)의 관청에 이르러 태수를 찾아가 여차여차하였음을 말하였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그가 갔던 곳을 따라 일전에 남긴 표지를 찾았으나, 끝내 헤매기만 하였을 뿐 그 길을 찾지 못하였다.” 고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박정의 보고는 허위로 밝혀졌다. 그를 데리고 가서 조사하게 했더니 도중에 도망가버리고, 새 땅이란 것도 갑산군 남면 능귀리로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새 땅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조정에서 굳게 믿고 있었고, 이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북방에 신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40년 뒤인 성종 때에 와서 되살아났다. 다음은 신천지를 찾으려 할 때에 곽치희가 세종 때의 경험을 왕에게 아뢴 내용이다.


"신이 기해년(1419년) 무렵에 이성현감으로 있었는데, 병사 한 명이 와서“북청·갑산·삼수 중간에 빈 땅이 있어 숨어사는 사람이 몇 집 됩니다.”고 고했습니다. 신이 그의 말을 감사에게 알리니, 감사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했습니다. 신이 사흘 동안을 가니 빈 땅이 있었는데 매우 평탄하고 넓었으며 토질이 비옥했습니다. 민가 셋이 있기에 물어보니 단천의 정병(正兵) 봉족(奉足)이 도망해 와서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서북쪽을 가리키며“저 속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고 하기에, 신이 몇 리를 더 들어가 보니 수목이 하늘에 닿고 나무들이 자빠져 길을 막아 넘어가기 어렵기에 전진하지 못하고 도로 나와 단지 지도만 그려 감사에게 보고 했었습니다(성종실록 15년<1484> 9월 21일)."


찾는 데에 헛수고만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 사이에는 신천지가 어딘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다음은 곽치희가 새 땅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와 보고 한 말이다.


"신들이 처음 영안도[함경도]에 가서 새 땅이 있는지 여부를 널리 물어보았고, 또한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중한 상을 주겠다고 백성들에게 유시했지만, 신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도(道) 사람들이 “새 땅은 토질이 비옥하여 벼 이삭 하나의 크기가 거의 허리 둘레만하고 연 줄기를 도끼로 베어내야 한다.”고 말하므로, 듣는 사람 다수가 거기에 가서 살려고 하여 간혹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고 처자와 부모를 이별하고 가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성종실록 16년<1485년> 2월 1일)."


새 땅이 얼마나 비옥한지 과장된 것은 사실 백성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실컷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세 말기에 영국 농민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은 다음과 같았다.


"기름과 우유와 꿀과 포도주의 강이 흐르고, 교회와 수도원은 온통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벽은 고기로, 지붕은 과자로, 첨탑은 푸딩으로 되어 있어, 군주만이 먹을 수 있는 좋은 음식을 누구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잘 구워진 거위가 “뜨끈뜨끈한 거위요” 하면서 돌아다니고, 잘 익은 종달새가 사람의 입을 찾아 날아든다(김영한, [이상사회와 유토피아]『 한국사시민강좌』10, 1992. 170쪽)."


이런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찾아나서는 것은 현실에 대한 탈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80년 뒤인 선조 때에도 강계 부근에 있다는 서해평(西海坪)이란 도피처가 보고되었다.


"서해평은 원래 우리 땅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킬 수가 없는 곳이다. 다만 오랑캐들이 와서 살면서 번성할까 걱정하여 가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몰아냈고, 말을 듣지 않을 땐 격퇴하였다. 땅이 비옥하여 채소나 곡식이 잘되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 오랑캐들이 몰래 들어와 살면서 몰아내도 다시 돌아왔다. 강계에서 그곳을 가려면 길이 아주 좁아 겨우 발 하나 붙일 정도인데, 위는 절벽이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흘러 허공교(虛空橋)라는 이름을 붙였다(선조수정실록 원년<1568년> 5월 1일)."


이 뒤로 북쪽 경계에 있다는 신천지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북방 개척에 따라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이 사라진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상적인 땅은 육지가 아닌 바다로 옮겨갔다.
중국에서도 무릉도원의 관념에서 시대가 지나면서 해인국(海人國)으로 변모한 것이나 유럽에서 유토피아가 섬으로 그려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음은 중국 북송 초기의 작품에 그려진 해인국 모습이다.


"뱃머리에 기대 바라보니 섬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노를 저어 가 보았더니, 울타리를 친 초가집이 100여 호 있었고, 자세히 보니 조그마한 경작지도 있었습니다. 등을 내놓고 엎드려 해를 쪼이는 사람도 있었고, 발을 물에 담그며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물과 낚시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는 남자도 있었고, 약초를 캐는 부인도 있었습니다. 모두 희희낙락함이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이성규 역서, 286쪽)."


우리 역사에서는 이러한 섬으로 오래 전부터 울릉도가 지목되어 왔다. 울릉도를 무릉도(武陵島)라고도 불렀으니, 이 말은 무릉도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울릉도는 현실적인 섬이었으면서도 이상향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울릉도가 있다.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이라 불렀고 무릉 또는 우릉(羽陵)이라고도 하였다. 사방 100리가 되는데 지증왕 12년에 항복해왔다. …> (『고려사』지리지, 울진현)"


이 설명으로 보아서 울릉도란 말도 ‘우산’ 과 ‘무릉’ 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듯하다. 이 섬에 대해서 조선 태종 때에 보고한 내용이다.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들었습니다. 무릉도의 둘레는 7식(息,210리)이고 옆에 작은 섬이 있으며, 밭 50여 결을 부칠 수 있다고 합니다. 들어가는 길은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정도라서 나란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이란 자가 15집을 이끌고 들어가 살면서 때때로 거짓 왜구가 되어 도적질을 했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에 있으니,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살펴보게 하소서(태종실록 16년<1416년> 9월 2일)."


특히 조선시대에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여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면서 동해의 섬들은 더욱 더 이상향으로 지목되었다. 동해에 있다고 전해진 ‘요도’ 나 ‘삼봉도’ 가 그러한 예이다.


"강원도 감사에게 이르기를“세상에 전하길, 동해 가운데에 요도(蓼島)가 있다고 한 지가 오래고, 또 그 산의 모양을 보았다는 자도 많다고 한다. 내가 두 번이나 관리를 보냈으나 찾지 못했는데, 지금 병사 최운저가‘일찍이 삼척 봉화현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고, 그 뒤에 무릉도에 가다가 또 이 섬을 바라보았다.’고 말하고, … 남회가 바다를 전부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요도란 말은 허망한 것이다(세종실록 27년 <1445년> 8월 17일)."


이보다 실록에 더 자주 등장하고 조선후기까지도 꾸준히 언급된 섬이 삼봉도(三峯島)이다. 특히 성종 때에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김한경의 말에“청명한 날이면 경흥에서 삼봉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7일 밤낮을 가서 도착하였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전 해에 사람을 보내어 무릉도(茂陵島)를 찾아가게 했는데, 울진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하루 밤낮을 가서 도착했고, 서쪽으로 사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고 하는데, 그가 말한 지세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릉도의 북쪽에 요도가 있는데 갔다 온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이것도 의심스럽다(성종실록 4년<1473년> 1월 9일)."


부령 사람 김한경이 삼봉도를 안다고 해서 성종이 그를 불러서 물어보았고, 그 결과를 함경도 관찰사에게 유시한 말이다. 왕이 의심하고 있지만 삼봉도 수색 작업은 계속되었다.


"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이 급히“영흥사람 김자주가 ‘삼봉도에 가보았고, 또 그 모양을 그려 왔다.’ 고 말하므로, 김자주를 보내어 바치게 합니다.”고 아뢰었다. 그에게 명하여 물어보게 하니, 김자주가 “경성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3박 4일을 가니 섬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사람 30여 명이 섬 입구에 벌여 섰고, 연기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대개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붙잡힐까 두려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고 대답하니, 겹옷 두 벌을 하사했다(성종실록 7년 <1476년> 10월 22일)."


며칠 뒤에 김자주를 심문하여 알아낸 섬 모습은 다음과 같다.


"지난 9월 16일에 경성 땅 옹구미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했는데, 같은 날 부령 땅 청암에 도착하여 잤고, 17일에 회령 땅 가린곶에 도착하여 잤고, 18일에는 경원 땅 말응대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서쪽으로 섬과 7, 8리 남짓 떨어진 거리에 정박하여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가운데 섬이고, 그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모두 바닷물이 통하고 있었습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사람 모양 같이 따로 서 있는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성종실록 7년 <1476년> 10월 27일)."


삼봉도는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처럼 봉우리가 세개라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무릉도와 다르면서 몇 개의 바위섬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서 독도인 듯하지만,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점에서는 독도가 아닌 듯도 하다.


성종 이후에는 삼봉도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지리 지식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다만, 영조 때에 황부가 배를 만들어서 이곳으로 가려 한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갠 때에 두리산 봉화대에 오르면 겨우 그 섬 모양을 볼 수 있는데 누운 소와 같다.”고 하므로, … 이에 앞서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가 아뢰기를“삼봉도는 예전부터 서로 오간 일이 없는데, 황부는 죄인의 아비로서 배를 만들어 들어갈 생각을 했으니, 매우 흉악하고 교활합니다.…”고 하였다(영조실록 4년 <1728> 6월 9일)."


이처럼 함경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해 바닷가에 삼봉도가 있다는 생각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고, 여차하면 그곳으로 가려고 일을 꾀하곤 하였다.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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