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경기도 고양 공양왕릉과 강원도 삼척 공양왕릉
고려 오백 년 사직이 하염없이 끝나도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무덤 또한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죽어 무덤이 여럿인 사람들이 있다. 춘천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무덤은 봉분이 세 개나 되며, 조선조 세조 때의 사육신 성삼문의 무덤은 무려 세 곳에 흩어져 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이들의 시신은 하나인데 무덤이 여럿인 이유는 시신 수습조차 어려웠던 그들의 참혹한 죽음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도 강원도 삼척과 경기도 고양 두 곳에 있으니 필시 얽히고설킨 곡절이 있을 터. 이 또한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연관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현재 삼척에 있는 무덤은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고양에 있는 무덤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몇 해 전,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을 둘러본 뒤 고양에 있는 공양왕릉은 어떻게 생겼을까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수일 내에 찾아가 보리라 다짐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며칠 전 틈을 내 고양에 있는 공양왕릉(恭讓王陵)을 찾았다. 공양왕릉은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과 왕비 노씨의 무덤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있다. 무덤은 쌍능 형식으로 각 무덤 앞에는 묘비과 상석이 하나씩 있고, 그 사이에 장명등이 놓였으며, 무덤 양쪽에는 문신상과 무신상을 세웠다. 그리고 무덤 앞에는 석수(石獸/돌로 만든 짐승) 하나가 앞을 보고 서 있다. 비석은 능침 조성 시 세운 것으로 보이며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고 새긴 무덤 표석은 조선조 고종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34대 임금인 공양왕은 폐위되어 시해된 뒤 조선조 태종 때 다시 왕으로 추봉되면서 능호를 고릉(高陵)이라 했다. 하지만 누가 이토록 초라한 능침을 보고 왕릉이라 생각하겠는가. 비록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라고는 하나 무덤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들이 너무도 초라하다. 하기야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이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연천 야산에 묻힌 것과 무엇이 다르랴. 어쨌거나 고릉(高陵)은 고려 임금의 유해가 마지막으로 안장된 왕릉이며 고려 왕릉이 대부분 북한 지역에 있기에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고려 왕릉이기도 하다. 공양왕릉은 삼척에도 있는데, 실제 왕의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한편, 강원도 삼척에서 바다를 끼고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40리가량 가면 근덕면 궁촌리라는 작은 어촌에 이른다. 이 마을 국도변 야트막한 산기슭에 일반사람 봉분 몇 배 크기의 커다란 무덤 하나와 크고 작은 무덤 3기가 모여 있다. 봉분의 크기로 봐서는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지만 무덤 앞에 상석 하나가 있을 뿐 묘비를 비롯한 아무런 석물도 없으니 누구 무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무덤들은 일명 궁촌왕릉이라 불리는데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그리고 공양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해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 공양왕릉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해마다 이 무덤 앞에서 공양왕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삼척 사람들이 궁촌리 무덤을 공양왕릉이라고 굳게 믿는 까닭은 조선 중기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와 조선 말기 김구혁이 쓴 <척주선생안> 내용 때문이다. 척주(陟州)는 삼척의 옛 이름으로 삼척에 관한 인물,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바, 두 문헌 모두 궁촌리의 큰 무덤이 공양왕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척주지 서문에 ‘이 책을 저술할 때 노인들이 전하는 말과 향리들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을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어 구전에 크게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임금이 있던 곳이라 하여 ‘궁촌’, 고갯마루에서 살해당했다고 하여 ‘살해재’, 왕이 살던 곳이라고 해서 ‘궁터’, 말을 매던 곳이라고 해서 ‘마리방’이라고 했다는 이곳 지명은 큰 무덤이 공양왕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얘기해 주고 있다.
<척주지>나 <척주선생안>은 지방관리가 구전 되는 내용을 자료로 쓴 책이므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역대 왕들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실록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 16년(1467년)에 군(君)으로 강등시켰던 공양군을 왕으로 복위시키고 능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고 기록했으나 무덤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세종실록>에는 세종 19년(1437년)에 경기도 안성 청용사에 모시고 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봉현(지금의 고양)에 있는 묘 옆의 암자로 옮기도록 명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고양시에 있는 고릉(高陵)이 곧 공양왕의 무덤임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문화재청에서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1970년에 사적(191호)으로 지정했다.
그렇다면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은 도대체 어찌 된 것인가. 삼척 일대에서 구전되는 내용과 왕조실록의 기록을 종합해 보건대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는 유배지인 삼척에서 특사에게 목 졸려 죽은 뒤 지금 궁촌리에 있는 큰 무덤에 묻혔을 것으로 믿어진다. 새 왕조 출범 초기에 정정이 불안하여 전 왕을 외진 곳에 유배 보내 사사한 터에 무덤인들 제대로 꾸몄겠는가. 그러나 조선왕조가 점차 안정되자 태종은 공양군을 왕으로 복위시키면서 삼척에 묻혀 있는 왕의 유해를 고양으로 이장하도록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헌종 3년(1837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무덤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버려진 무덤을 지금의 형태로 보수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공양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 45세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당시 고려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정국이 몹시 혼란했다. 게다가 조정은 공민왕 이후 친원파와 친명파 간 대립이 심해 고려왕조의 운명이 급격히 기울던 때였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최영장군을 제거한 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왕권을 좌지우지한다. <고려사>에서는 왕이 옹립 소식을 듣고는 너무 놀랍고 두려워 사양했다고 적고 있다. 왕이 되더라도 이성계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양왕은 재위 3년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민심이 동요하자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쓰러져가는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무장세력은 공양왕으로 하여금 폐위된 우왕과 창왕을 살해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그를 양위라는 명분으로 끌어내리고 이성계를 태조로 하는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창업하니 이른바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새 왕조는 후환이 두려워 고려왕족들을 강화도, 삼척, 거제도 등 외진 곳으로 추방했다가 이윽고 몰살시킨다. 공양왕 역시 공양군으로 강등하고 두 아들과 함께 원주로 보내 감시하다가 다시 삼척으로 유배시킨다. 그리고 태조 3년에 공양왕과 두 아들에게 역모의 죄를 씌워 모두 목 졸라 죽이니 고려왕조는 태조 왕건이 개국한 지 474년 만에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만다. 그나마 살아남은 왕족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王)자가 들어있는 전(田)씨, 옥(玉)씨, 전(全)씨, 용(龍)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숨어 살아야 했으니 정치권력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왕이 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강요로 왕위에 올랐던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유배지에서 두 아들과 함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그의 한 맺힌 넋은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른다. 이토록 죽음이 애절할진대 유해가 어디에 묻혀 있음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무덤을 뒤로 하고 산기슭을 걸어 내려오는데 문득 불교의식 영산재(靈山齎)에서 부르는 초혼가(招魂歌)의 첫머리가 떠올랐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내 한 몸 죽어 한 인생 사라진다 해도 한 될 게 없다마는. 나라 잃은 백성들의 한숨 소리 뼈아프도다. 왕건 태조님의 삼한통일 고려대국이 내 대에 이르러 절단되니, 오백 년 왕조사가 하염없이 끝나도다. 오! 슬프고 애달프도다......’
<고양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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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공양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