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과 열정과 꿈을 키우면서 그리고 대학진학의 일념으로 눈에 불을 켜고 공부에 열중하며 청춘을 불사르던 정든 교정을 뒤로하고,
막강의 물오른 청년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과 형제, 친구 그리고 정다운 이들이 모여 사는 고향을 뒤로한 채 우리는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제주를 떠나야 했다.
산지 부두 연락선이 뱃머리를 돌리며 우렁찬 뱃고동을 불어댈 때의 아련하게 멀어져가는 우리들 태생의 모태 그 한라산이 드리운 그림자가 지금도 아련하다.
그 때가 1965년 1월.. 그런데 우린 아직도 이곳 서울에 멈춰있는 채 고향 제주를 그리며 살아야할 줄이야..
졸업을 앞두고 모교와 제주의 명예를 안고 제일정신의 높은 뜻을 펼치리라고 서울의 대학 입시에 도전하기 위하여 떠나온 것이 타향살이의 시작이 된 셈이다. 그 때 8회 졸업생 100여명이 대거 서울과 육지 유명대학에 응시하여 큰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제주일고 대학입시 도전 역사상 최대인원이었으며, 동문과 모교와 은사님과 가족과 제주도민 모두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1965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당당히 서울 입성에 성공하여 우리를 사랑해주신 모든 이들의 여망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그 장엄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수도권대학으로 진출한 용사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강동현(한양대 법대), 강용준(동국대 이공대), 강택선(인하공대), 고덕필(연세대 상대), 고문봉(한양대 상대), 고수익(한양대 공대), 고원일(중앙대 경상대), 고택윤(성균관대 상대), 고홍휴(연세대 문리대), 김남익(국민대 법대), 김덕호(국민대 경상대), 김동석(국립항공대), 김두현(경희대 한의대), 김부익(경희대 상대), 김영배(성균관대 상대), 김윤진(서라벌예대), 김중석(연세대 상대), 김태중(고려대 상대), 문건(국립항공대), 문훈택(인하공대), 박은상(중앙대 상대), 박시철(중앙대 상대), 서정용(서라벌예대), 양재호(중앙대 영연과), 양중익(서울대 약대), 양창욱(한양대 공대), 우장석(고려대 농대), 윤종민(서라벌예대), 이석련(중앙대 사대), 이성옥(숭실대 이공대), 임창기(서라벌예대), 장세만(한양대 공대), 정홍식(경희대 공대), 진원배(연세대 공대), 한근세(성균관대 약대), 한운섭(한양대 공대), 현공남(서울대 농대), 현순도(서울대 법대) 등 38명 모두들 자랑스럽고, 그대들과 같이 있음이 지금도 행복하다.
유독히 모교에 대한 애교심이 강하고 동기생들 간에 우애가 깊었던 우리는 대학생활을 통틀어 무수히 만나고 다투기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두들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도 강했던 탓도 있었으리라..
모두들 서울에서의 청운의 꿈을 새로이 가꾸어가는 사이 고학년으로 들어선 1967년도에 빅 이벤트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재경8회 동기회장을 맡고 있는 강동현이 7회 백명윤 선배와 러닝메이트로 재경제주도학우회장단 도전의 출사포를 내뿜으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재경제주도학우회 5,000여 회원 구성분포로 보아 일고출신으로선 도저히 승산 없는 무모한 게임으로 진단되었지만, 8회기 모두가 하나 되어 대학을 찾아다니고, 대학기숙사를 누비며 “새 시대의 희망리더”를 표방함으로써 거함으로 비춰졌던 상대후보를 누르고 서울입성 초유의 단합된 성공을 이루어 재경제주도학우회장단을 탄생시켰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 동기회장 : 강동현
<1970년대> 취직하고, 장가가고..
일부 동기생들이 군복무로 인하여 대학졸업이 1970년도 이후로 미루어지고 있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교하여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등등 우리 동기생사회가 요동을 친 시기이다. 아마도 군복무 기간 중 결혼한 정홍식이 웨딩마치 테이프를 선착순으로 끊었던 것 같다. 미인을 두고 간 군 생활이 편치 않았으리라..
한운섭 건축기술사 수석합격, 현순도 사법시험 합격, 고덕필 경영학박사, 진원배 물리학박사, 문건 통신공학박사, 양중익 약학박사, 현공남 경제학박사 학위취득 등으로 8기생의 명예를 한껏 드높인 시기이다. 학위를 취득한 고덕필(청주대), 문건(군산대), 진원배(동아대), 현공남(제주대)은 선후를 다투며 각각 대학교수로 취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엔 제주대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출한 강기창(대한항공), 김승돈(한국전력), 김희민(무역진흥공사), 좌성욱(쌍용양회), 홍성문(한국도로공사) 등이 합류하였고, 강재경(경찰병원), 강훈식(빙그래), 김용관(축협), 한경화(수원여고), 현준산(인천시청), 홍성국(홍진통상) 등도 재경동창회에 합류하였다.
모두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며, 신혼가정을 꾸려가거나, 장가갈 준비로 몹시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여서 한동안 우리 모임이 증가된 인원에 비하여 진정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동기회장 : 장세만, 김덕호
<1980년대> 민주화와 선업화의 선봉에 서다
1979년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광주사태 발발에 이은 전국적인 노동계의 투쟁으로 인하여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제5공화국 탄생에 대한 지식사회의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는 등의 사회현상은 이제 사회의 중견으로 올라선 우리들에겐 매우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88올림픽 개최지 확정, 1985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등으로 경기호전의 기대심리가 살아나고,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이면서 조금씩 안정기로 접어드는 듯 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정책 발표로 촉발된 학생시위가 군사정부에 대한 항의시위로 진전되면서 시위는 교수와 일반사회로 확산되어 급기야 군사정부는 1987년 6.29 민주화선언으로 민주항쟁의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우리 동창사회는 성숙단계에 이른 기성사회인으로서 한창 혈기왕성한 의협심을 발휘하여야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위치였다. 바로 그 정치상황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행동으로 말하며, 이 나라 민주화 발전을 이끄는 선봉에 있었음과 오늘날 경제대국의 근간을 이룬 현대 산업사회를 이끌어내는 중심에 있었음을 밝혀 둔다.
우리들 동창사회도 어느덧 성숙단계로 들어서는 시기에서 중책에 취임하는가 하면 서울과 지방 근무교차, 승진 및 영전, 전직과 창업, 해외진출 등 재편성기로 확연히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들 조직의 간부로 성장해가는 가운데 강기창 대한항공사우디화물지점장 취임, 강동현 (주)동우교역 설립 대표이사 취임, 강재경 성모의원개원 원장 취임, 김부익 미국이민, 김승돈 한전연수원교수 취임, 양중익 동아제약연구소장 취임, 양창욱 제일모직공장장 취임, 이성옥 중앙정보부 동경특파원 파견, 장세만 남양기업 설립 대표취임, 정홍식 엘지울산공장장 취임, 한운섭 (주)한라종합건설설립 대표이사 취임, 현순도 인천지방법원부장판사 부임, 홍성국 홍진통상설립 대표취임, 김덕호(진흥기업), 고수익(한양건설), 박시철(남광토건) 중동 진출 등 신상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졌으며 변화를 통하여 재도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재경총동문회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제1회 일고인의밤(1988.12.3.) 행사에 8기생 내외 40명이 참석하여 전체 400명 참석의 1할을 차지하는 열성을 보임으로써 동기생의 단합을 과시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다.
※ 동기회장 : 좌성욱, 강동현
<1990년대> 전진 또 전진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어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진 32년간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드디어 1993년 2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탄생한다. 김영삼은 ‘신한국창조’를 국정지표로 제시하고 과감하고도 중단없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선언한다. 1996년 3월 아시아지역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세계에서 29번째의 OECD 가입국이 되면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는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융실명제, 정당법, 정치자금법, 우르과이라운드협상 타결 등 문민정부가 취한 개혁작업은 법치가 아닌 인치(人治)라는 비판을 받았고, 기술발전으로 촉발한 산업구조의 재편과 지배계층의 교체에 따른 혼란이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급기야 대외 경상수지의 악화와 단기유동성 외환부족을 초래하여 외환위기로 내몰리며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러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게된다.
동창생 모두들 안정된 삶을 갈구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장성한 자녀들을 보며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꾼다. 그것은 오히려 지난 10년보다 더 절박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턴 생활에 얽매이기보다 좀더 명예로워지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컷 기 때문일 것이다.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김영배(외환은행), 고두승(제주은행 서울지점), 고택윤(평화은행) 지점장에 취임하고, 김용관(축협) 목우촌사업단장에서 제주지회장 취임, 강동훈 자영업(씨에프바비큐) 개업, 강훈식 자영업(싱크빅) 개업, 강용준(삼양그룹) 임원취임, 강택선 자영업(TS코퍼레이션) 개업, 고수익(솔베이코리아) 한국지사장 취임, 김덕호 자영업(팜스포츠) 개업, 김태중(현대정공) 임원취임, 박시철 (조선산업) 임원취임, 양중익(양지약국) 개업, 좌성욱(싸용그룹) 사장취임, 정홍식(LG화학) 임원취임 본사영전, 현순도 변호사개업 등 이제 정상을 향하여 앞을 달린다.
1994년 4월 강동현 동창은 재경총동문회 제7대회장에 취임한다. 5,000여 재경동문의 살림을 맡는 좌상에 올랐다. 총동문회의 결속과 발전을 견인한 총동문회장으로 지금도 명성이 높다. 강동현 동창의 열정과 희생의 덕에 우리도 함께 빛났다. 이 시기의 백미는 머니머니 해도 졸업 30주년 행사에 서울동창 부부 40명이 제주에 내려가 30년 묵은 회포를 풀고 온 것을 빠트릴 수가 없다. 졸업 때 그때 모습 그대로인데 벌써 30년이라니.. 아무튼 그때의 환대에 감사하고, 잊지못할 멋진 행사 준비에 수고하신 당시 8기회장 고두승과 동창여러분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그러나 명예와 부를 일찌감치 차지하여 부러움을 사던 박은상, 한운섭 두 동창이 불시에 유명을 달리하는 아픔도 같이했다.
※ 동기회장 : 박시철, 김태중, 고택윤
< 2000년대> 또 전진
이젠 사이버 세상을 넘나든다. Cafe를 개설(cafe.daum.net/jfh8, 주인장: 양중익)하여 동창들의 구심점이 되어 생각과 희망을 모으고 이끌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위안이 되고싶어한다.
세월을 붙잡아둘 수는 없는 것일까? 환갑이다.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렀다. 변화의 물결 속에 휘둘려 어느덧 황혼의 빛깔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린 그런 감상에 젖지 못한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도 없다. 계속 전진할 뿐이다. 무엇이 되어서 저 바다에서 만날까? 하던 1965년의 꿈을 지금도 꾸고 있다. 그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고통일 뿐이기에...
※ 동기회장 : 정홍식
첫댓글이 글은 모교 50년사에 올릴 재경8회 기록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작성한 것이네. 글의 형식이 요청에 맞게 작성됐는지 모르겠고.. 또 거명된 동창들에 대한 코멘트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 빠트린 동창은 없는지도 궁금하고.. 실명으로 소개한 부분이 부족한 듯 하여 못내 송구스러운데 모두들 넓은 아량으로 양해바라네. 혹 마음이 상하시다면 알려주시게 수정하여 올리게 할테니. 한정된 지면이라 충분히 소개하지 못함을 거듭 양해구하네.
시철아 이제야 꼬리말 다는 거 무삼 일인지 모르겠지. 내가 당신 글에 제일 먼저다 시피 꼬리말 달았었지. 요즘 바쁘기도 했지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게으름 때문인지 주눅이 들어서인지 진도가 나가질 못했다. 명문장에 내가 꼬리말 다는 것도 부끄러운 형편이었네. 하여튼 수준 높은 글 동창들 사이에 오래 기억되리라. 고치는 부분은 아마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명문장에 누가 감히 칼을 대겠는가. 칼을 댈 경우 그 칼이 아마 뿌러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번 제주 왔을 때 내가 부산엘 가서 만나지 못했는데 다음에는 사전에 전화하고 왔으면 한다. 멋쟁이 칼럼니스트 박 잘 지내시게.
첫댓글 이 글은 모교 50년사에 올릴 재경8회 기록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따라 작성한 것이네. 글의 형식이 요청에 맞게 작성됐는지 모르겠고.. 또 거명된 동창들에 대한 코멘트가 잘 되었는지 모르겠네. 빠트린 동창은 없는지도 궁금하고.. 실명으로 소개한 부분이 부족한 듯 하여 못내 송구스러운데 모두들 넓은 아량으로 양해바라네. 혹 마음이 상하시다면 알려주시게 수정하여 올리게 할테니. 한정된 지면이라 충분히 소개하지 못함을 거듭 양해구하네.
그리고 강성진 회장님, 원고가 늦어서 죄송하네. 그런데 며칠 공람시간이 필요한 것 같네. 빠트린사항이나, 수정할 것이 생기면 바로잡아야 하니까. 해당자들에게 일독을 권하여주게. 졸필 부끄럽네. 그럼 바톤을 넘기네. 다음을 수고하시게.
생이총 대단히 수고했네, 고맙다. 언제보아도 생이총이 문장은 멋있구먼. 동창들에게 잠간동안은 공람토록 하고 시간이 쫓기고 있어 동문회 사무국으로 늦지않게 넘기겠네 그리고 혹시 생이총이 원고가 조금은 수정되어도 양해 바라네. 거듭 거듭 고맙다. 수고했다.
생이총이 언제 이런 자료을 입수하였는지 놀랍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들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역시 생이총이 대단하다. 역시 그동안 동창들이 걸어온 인생길은 삶을 위한 몸부림 쳐럼 느껴진다. 글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귀절이 흘려 넘친다.
cafe 개설 소식을 빠트려서 7월5일 몇자 추가하였네. 큰 실수를 할뻔했네. 강회장님, 참고바랍니다.
시철아 이제야 꼬리말 다는 거 무삼 일인지 모르겠지. 내가 당신 글에 제일 먼저다 시피 꼬리말 달았었지. 요즘 바쁘기도 했지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게으름 때문인지 주눅이 들어서인지 진도가 나가질 못했다. 명문장에 내가 꼬리말 다는 것도 부끄러운 형편이었네. 하여튼 수준 높은 글 동창들 사이에 오래 기억되리라. 고치는 부분은 아마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명문장에 누가 감히 칼을 대겠는가. 칼을 댈 경우 그 칼이 아마 뿌러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번 제주 왔을 때 내가 부산엘 가서 만나지 못했는데 다음에는 사전에 전화하고 왔으면 한다. 멋쟁이 칼럼니스트 박 잘 지내시게.
제주에 벌초 온 생이총이 오늘 가겠다는 걸 내일 가라해도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 막무가내로 올라가려는데 저녁 비행기 시간이 여의치 않아 가질 못해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잠시 짬을 내어 들어와 꼬리말 달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