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위훈장군(偉勳將軍)의 履歷(두산백과사전)
(1) 권률(權慄, 1537~1599) 광주목사로 재직할 때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의 4만 의병 및 관군 중위장(中尉將)으로 북진하다 용인전투에서 패퇴했다. 남원에서 동복현감 황진, 위대기, 공시억 등 1500명의 병력을 확보, 전주로 가서 이광과 합류, 이치(梨峙)에서 고바야가와 다다가게(小早川隆景)의 주력부대를 맞아 야간기습 등의 전술로 크게 이겨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봉쇄하는데 기여했다. 이로 인해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했다. 여세를 몰아 관군 2300명과 의병 500명 등 2800명을 이끌고 서울탈환을 위해 북상하다 수원 독산(禿山)산성에 주둔할 때 왜장 우키타 히데이(宇喜多秀勝)를 격퇴했다.
1593년 2월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영을 쳐 왜적의 북상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2800명의 병력과 행주(幸州)산성에서 고바야가와의 3만 병력으로 공약할 때 2만4천명을 죽여 대승을 거뒀다. 이공으로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그러나 탈영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됐으나 얼마 되지 않아 한성부판윤에 복직되고 비변사 당상을 겸임했다.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됐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제독 마귀와 울산에서 왜적의 북상을 막았으나 명군 양호의 돌연한 퇴각으로 철수했다. 이후 순천 예교(曳橋)의 왜적을 공격했으나 명나라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2) 황진(黃進, 1550~1593) 1591년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일본의 조선정벌여부를 정탐하러 갔다고 오래지 않아 침략할 것을 예측했다. 1592년 동복현감 때 권율 휘하의 근왕병으로 참여 북상하다 용인전투에서 패한 후 진안전투에서 왜장을 사살하고 안덕원까지 추격했다. 이후 판관(判官)으로 승진, 이치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익산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으로 절도사 선거이를 따라 수원 독산산성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 전공으로 159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승진, 패퇴하는 왜적을 추적, 상주(尙州)까지 이르는 동안 연승을 거뒀다. 적의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권율과 곽재우와는 반대 수성파로 남아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장열하게 전사했다.
(3) 이억기(李億祺, 1561~1597) 왕족의 후예로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으로 출사한후 무과에 급제, 경흥(慶興), 은성(檼城)부사를 거쳐 1592년 전라우수사로 이순신을 도와 옥포, 당항포 등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순신이 원균의 참소로 하옥되자 이항복(李恒福), 김명원(金明元) 등과 무죄를 변호했다. 1597년 7월 16일 정유재란 때 3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우익장으로 출전, 분투하다 칠천량(漆川梁)해전에서 전사했다.
임란을 당해 여러 충성스럽고 지혜가 가득한 용맹한 무장들이 있었군요.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더불어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