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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청주] 성령의 칼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이사 1,10-17
† 복음 마태 10,34―11,1
★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백성의 거짓 경신례를 질타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번지르르한 제물이나 축제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 대신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우며,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은 이를 보살피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참된 경신례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집안 식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갈라서고 원수가 될 날이 올 것이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아르헨티나의 탱고 음악 작곡가이자 연주가로 아스토르 피아졸라
(1921-1992년)라는 꽤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들이 주로 술집에서 연주하는 탱고 음악을
새롭게 하여 독창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곧, 재즈와
클래식을 접목하여 탱고가 오늘날처럼 매력적인 현대 음악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밤에는 찻집이나 술집에서 탱고를 연주하면서도 클래식
작곡가로 성공하려는 야심에 차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음악의 중심지
파리로 가 최고의 작곡가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곡가는
피아졸라가 작곡한 현대적인 클래식 기법의 악보를 보고서 좋은 작품이긴
하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하였고, 이에 피아졸라는 크게
낙담했다고 합니다. 작곡가가 그를 위로하며 전에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는지를 묻자, 피아졸라는 마지못해 탱고였다고 답했습니다.
작곡가는 그에게 탱고 음악 하나를 피아노로 연주해 보라고 했고, 그는
망설이다가 연주했는데 반응이 이랬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마디에서 그녀는 연주를 멈추게 하고는 그의 손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거야말로 피아졸라야! 절대로 그만두지 말게!’ 후일 그는 자신의
딸에게 그 순간이 마치 계시 같았다고 기억한다. ‘그녀는 내가 나를
찾아내도록 도와주었다’”(『피아졸라: 위대한 탱고』에서).
피아졸라는 사람들의 통념에 타협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하고 참된 길을
찾으라는 현명한 선생의 조언 덕분에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길도 이러한 진정한 예술가의 길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시듯, 세상 사람들이 평화라고 말하는 시대의
풍조와 통념에 신앙의 본분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타협의 길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들려오는 주님의 소리를 굳게 믿고 꿋꿋이 걸어야 합니다.
설령 비난받고 세상사를 모르는 바보라는 비웃음을 들을지라도 결국은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인생의 참평화와 행복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성령의 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014년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마태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 10,34―11,1
성령의 칼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 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가짜 평화는 무엇일까요?
2014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11,1
어렸을 때 저의 커다란 유혹꺼리는 아마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비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이 자리를 이용해서 이제야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고백하고 싶네요. 물론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 고백을
이미 다 한 것이지만,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사실 공부하러 도서관 간다고 해놓고 하루 종일 만화방에 있으면서 만화만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참고서, 문제지 산다고 말해놓고서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의 비용을 마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부모님 심부름 갔을 때, 약간의
돈을 빼돌렸던 적도 기억나네요.
아무튼 어렸을 때, 저의 이 유혹거리를 이겨내기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유혹 앞에서 항상 흔들렸고, 그 흔들림으로 인해서 마음에 평화가 오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유흥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등으로
평화가 올 수 없었지요. 그러다가 드디어 전자오락실과 만화방에 입장하면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습니다. 제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어떨까요? 다시 평화로울까요? 죄 지었다는
생각과 함께 불안한 마음이 한 가득입니다.
이런 순간적인 평화는 참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할
평화는 어떤 평화가 되어야 할까요?
예수님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는데, 그렇다면 이 평화는 어떤 것인가요? 분명히
천사들도 말했던 평화인데, 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실까요? 순간의 기쁨, 순간의 위로를 통해서는 참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암으로
인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런데 마약 성분이 들은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고통을 동반하는 진통이 사라졌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오고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것이 참된
평화일까요? 아닙니다. 순간의 평화를 주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올 고통이기에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없지요. 여기서 참된 평화를 주는
것은 암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칼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간만 만족하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이 참된 평화를 가로막는 것들을 싹둑 자를 수
있는 칼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짜 평화는 무엇일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지대한 관심들,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이웃을 비교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속 좁은 마음 등등입니다. 이
가짜 평화를 과감하게 잘라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라고 내어준 칼을 들고서 싹둑 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어떤 값어치가 있는 일을 성취시킨
적이 없다. 나의 여러 가지 발명 중에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것은 꾸준하고 성실히 일을 함으로써 이룩된 것이다
(토머스 에디슨).
유혹에 맞서는 것은 누구? 바로 ‘나’.
어떤 수도승에게 한 사람이 와서 “저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잡념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도승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저고리를 벌려 바람을 멈추게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저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누가 바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수도승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다면 당신에게 덮쳐오는 생각들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맞서는 것은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들을 인해서 우리 역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유혹들을 누가 맞서야 할까요? 주님께서 알아서 맞서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맞서야 하고, 우리가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7월14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 10,34―11,1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수고한다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어떤 분들은 따끔한 조언을 해 줍니다.
어떤 분들은 날선 비판을 해 주십니다. 모든 말씀을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매주 회의를 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선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가지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타고 아들이 나귀를 몰고 갔을 때,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아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이 타고
아버지가 나귀를 몰고 가니까,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또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할 수 없이 나귀를 타지 않고 둘 다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또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어리석구나.’
교황님의 방한은 크게 3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
124위 시복식 거행,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입니다. 어떤 분들은
시복식의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황님께서 만나시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황님께서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우리를 찾아 주시는 귀한
손님입니다. 그분이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게 하고, 그분이 우리의 아픈
곳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황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교회를
위해서 큰 역할을 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교황님 방한의
주제는 ‘일어나 비추어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때로 갈등과 분열도 있을 거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양처럼 순수하지만,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서울 대 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성소국장 신부 -
◈ [수도회] 중심과 책임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요셉 수도원)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이사1,10-17 마태10,34-11,1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 10,34―11,1
중심과 책임감
누가 참 사람입니까? 사람이 되는 일만큼 어렵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아마 평생 일이 사람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온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to do)'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to be)'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단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복음에서 찾아낸 것은 중심과
책임감입니다. 중심이 있고 책임감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주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10,37).
그 누구보다도 주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흔들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습니다. 중심 부재보다 더 큰 피해는 없습니다.
정체성의 부재와 직결되는 중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마라."(RB72장)
이번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지내신 왜관 수도원 김영호 요아킴
수사님의 상본에 적힌 성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에 모신, '주님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바로 허례허식을 싫어하시는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들어내는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이사1,11-14).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알아 준다면 제발 이런 헛된 경신례는 집어
치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인 내가 싫어하는 일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이 빠져버린, 내 뜻과 무관한 제멋대로의 경신례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해도 이런
상태에서의 기도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10,38).
주님을 사랑하여 중심에 모신 이들임이 검증되는 것은 중심이신 주님을
따를 때입니다. 생각없이 그냥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제 십자가를 진, 철저히
책임적 존재가 되어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제 고유의
십자가입니다. 이 제 십자가를 내려 놓고 사람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책임적 존재가 되어 중심이신 주님을 항구히 따를 때
비로소 참 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제 십자가의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이웃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경신례의 정신을
사는 것이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6-17).
이런 사랑과 정의의 삶이 채워질 때 비로소 참된 경신례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책임적 존재의 사람이 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온다는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사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환대합니다.
이런 이들을 향해 시편저자는 화답송 후렴을 통해 말합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은 우리의 '중심'이신 주님과 각자의
'제 십자가'를 새롭게 확인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시편130,7).
아멘.
- 이 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기타]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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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2014년 가해 7월14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 10,34―11,1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권력쟁취를 인생목표로 삼고 검은 돈 좋아하는 어른들이 정말 싫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에 빠진 그 누구도 싫고요. 비록 내 부모형제라 해도요.
싫다는 건 그 삶을 저에게 주입시키는 모든 길을 잘라버리고 싶은 겁니다.
T.V.프로나 뉴스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괴로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늘나라 영원세상을 그리워하며 지금부터 준비하는 신앙인이라면 그렇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주신 칼을 잘 활용하는 것,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오 10,34)”
- 서울 대 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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