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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한복음 강론 1 빛과 어둠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14 말씀이 육신(싸르크스, 육체,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과 요한복음의 차이점
1) 클레로스 신학 해석 : 공관복음은 진리의 현장 중심 / 요한복음은 진리의 의미 중심
즉, 공관복음은 진리이신 메시아가 빛으로 오셔서 일어난 사건들, 그 현장에 대한 기록이 중심이 되어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물론 현장에 대한 기사들도 있지만 그 진리의 의미를 중심으로 두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공간 복음은 현장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고 요한복음은 의미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2) 요한복음과 영지주의(Gnosticism, 그노시스:영지, 영육 이원론, 유대교 신비주의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a.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색채가 있다?
요한복음은 영지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주로 오해를 많이 받게 되고 신학자들이 이런저런 해석들을 많이 내놓는다.
그 당시 영지주의는 사복음서 예수님 시대와 사도들의 시대와 사복음서가 만들어진 시대와 거의 겹친다. 영지주의란 신령한 지혜, 지식의 의미로서 아주 초월적인 지혜를 아는 것, 알게 되는 것이 영지주의인데 영지주의의 핵심은 영육 이원론이다. 영과 육체는 다르다는 것인데 이것은 또 헬라 철학하고 비슷한 흐름이다. 그러니까 이런 여러 가지 영향이 합쳐져서 당시에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인데, 그 근원으로 유대교 신비주의가 출발점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어쨌든 사복음서가 만들어지는 시기하고 비슷한 시기에 영지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은 진리의 의미 중심인데 색깔이 영지주의와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은 영지주의 색채가 있다라고 분석하는 자들이 있다.
요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래서 이 말씀도 빛과 어둠의 대결 구도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지주의 영향이 많이 들어온 것 같다는 주장들이 나오게 된다.
b. 요한복음은 영지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기록되었다?
반대쪽의 해석들도 있다. 요한복음은 당시 영지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가 되는 말씀이 14절 말씀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과 육신이 대결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인간들 안으로 들어오셨다 라는 이 흐름은 영지주의나 헬라 철학이나 조로아스터교나 이런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더러운 육체와 고결한 정신 이런 개념이 아니고, 빛과 어둠은 서로 상극이다, 물과 기름이다 이런 개념이 아니고, 진리가 인간의 형체를 입고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이야기로서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다.
옛 문명은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이 있고, 거기에 종교적으로는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게 있다. 그래서 정신과 영은 고결하고 고귀한 세계가 저 하늘에 있고, 여기는 지저분하고 더럽고 육체들이 사는 곳이니 육체를 떠나서 정신으로 가자는 이런 흐름이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복신앙은 거꾸로 인 형태로 있지만 그것은 민간 신앙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14절의 육신(싸르크스)은 인간의 본성으로 번역이 된다. 이 싸 르크스는 70인역에서 히브리어 바사르의 번역으로 쓰였는데, 바사르의 원래 뜻은 살덩어리 같은 부드러운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KJV 에서는 Flesh, 육체라고 번역을 한다. 그런데 NIV는 Sinful nature, 죄악 된 본성이라고 번역을 한다. 그런데 죄악 된 본성은 인간에게는 죄악 되지 않은 성품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개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성품 중에서 죄악 된 성품만 문제로 삼는다는 함정이 들어 있는 번역이 된다. 그런데 원래 뜻은 Human nature 로서 인간의 본성 전체로, 즉 “말씀이 인간이 되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진리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사렛의 아기로 태어나서 나중에 청년 예수로 자라나는 그 인간이 되었다 그런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 싸르크스가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다는 것은 초월적인 세계를 소망하는 옛 문명의 흐름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향인 것이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지주의니 뭐니 해가면서 옛 문명의 요소들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헬레니즘의 대표 격인 자가 어거스틴이었다. 기독교 안에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자였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마니교의 중진이었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종교적인 색채와 신플라톤주의라는 철학적인 색채를 다 가지고 들어와서 성서를 해석한 사람이 어거스틴이었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만든 신학과 교리 체계가 지금도 카톨릭과 개신교 전체에 밑바탕이 되어 있다. 인간의 옛 문명을 근간으로 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는 전통이 생겨버린 것이다.
말씀이 오신 것이다. 빛이 오신 것이고 진리가 오신 것인데 그 진리가 옛 문명 안에 있는 어떤 진리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새 문명을 가지고 오신 빛이고 새 문명을 가지고 오신 진리인데 그것을 옛 문명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온갖 오해와 오독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클레로스 신학에서는 공관복음은 진리의 현장 중심이고, 요한복음은 진리의 의미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이렇게 기록되게 한 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우리는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공관복음의 역할이 있고 요한복음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영지주의를 물리치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선신과 악신의 대결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상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충돌한다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며, 선신과 악신의 대결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선과 악의 충돌 개념이라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그렇게 말하지만 성서는 선과 악의 충돌이 아니다.
빗나간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을 여호와의 길로 옮기기 위해서 빛이 온 것이지 빛과 어둠이 충돌한다거나 하나님과 사탄이 대결한다는 그런 개념은 완전히 조로아스터교적인 개념이다.
욥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어전 회의를 하시는데 사탄이 참석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안도 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죽이지는 말고 네 생각대로 한번 해보라고 도란도란 의논을 하신다. 선신과 악신의 대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셨을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신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앞으로 탄생할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 어떻게 인간적인 유혹을 이겨내는가 하는 것을 본을 보이시는 장면인데 그 과정에서 사탄의 역할이 있는 것이지, 메시아와 사탄이 대결하는 장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광야로 인도를 하신 것이다.
이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기독교 교리에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지만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는 이 시궁창 같은 곳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신 것이고, 성서는 거기에 대한 구원에 대한 계시인 것이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탄 때문에 쩔쩔매시는 모습으로 성서가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실패자나 무능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로아스터교의 선신과 악신의 대결이라는 그 개념이 하나님과 사탄의 대결이라든가, 하나님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사탄이라든가 하는 개념 자체가 조로아스터교의 개념이지 성서의 계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영지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다.
* 요한복음은 교리적이다?
“요한복음은 교리적이다” 라는 분석을 많이들 한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은 사건 중심이고, 요한복음은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교리 해설서라고 보는 것과 똑같은 흐름이고 오류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클레로스 신학 해석 : 요한복음은 요한 사도의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메시아의 계시 중 진리를 이론적으로 명확히 밝히는 부분에 상대적으로 초점을 맞춘 기록이다
즉 공간 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 진리가 드러나는 기록이고, 요한복음은 그 배경에 있는 진리의 의미, 진리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역할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옛 문명의 이런저런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 해석할 수 없고,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오류가 영육 이원론으로 해석하는 헬라 철학과 영지주의 방향이고, 또 하나는 선신과 악신의 대결이라는 조로아스터교적인 해석 흐름이다. 이런 것들이 다 성서를 오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빛으로 오신 그 진리가 세상에 있는 옛 문명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옛 문명으로 빛을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오류가 되는 것이다.
영육 이원론(헬라 철학, 영지주의)
선신과 악신의 대결(조로아스터교)
옛 문명의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포인트들이 있는 것이다.
a.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됨
첫 번째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사단도, 에덴 동산의 뱀도 여호와가 창조하신 것 중에 가장 교활하다고 그러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도 아닌데 에덴동산으로 침입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대결하는 존재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개념인 것이다.
b. 이 빛은 사람들의 빛
이 빛은 어둠을 파괴하는 빛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빛인 것이다. 즉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빛인 것이다.
c. 빛이 어둠에 비침 – 그로 말미암아 지어진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
이런 개념은 옛 문명 안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사상에도 어떤 철학적인 사상에도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불교다. 불교에서도 빛과 어둠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명에 빠진 존재, 즉 빛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둠 속에 있는 존재라고 하면서 수도 정진을 해서 그쪽에서 빠져나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데로 가버리자는 것이다. 즉, 불교적인 흐름은 옛 문명의 속성으로서 초월적인 세계를 그리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의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리가 어둠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오신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옛 문명에는 없는 개념이다.
d. 그 빛을 영접하는 인간과 영접하지 않는 인간(어둠을 파괴하지 않는 빛, 옛 문명과 새 문명의 병존)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의한 선택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 그게 본문 13절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래서 그 빛을 영접하는 자와 영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빛은 영접하지 않는 인간들을 다 몰살하거나 어둠을 파괴하는 빛이 아니다. 그래서 결과가 옛 문명과 새 문명의 병존으로 나타난다.
기독교가 특히 중세 때 십자군 전쟁이나, 근대에 와서 식민지 개척할 때 선교사들이 같이 돌아다니면서 성경책을 들고 안 믿으면 몰살하는 짓을 했다는 것이나, 부시의 이라크 침공 등은 세계를 장악하는 빛이라는 엉뚱한 상상들을 하고 있는 것이고, 빛이 어둠을 파괴하러 온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정하신 자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빛이 오신 것이지 어둠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다 뽑을까요? 그냥 놔둬라. 괜히 곡식까지 다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옛 문명과 새 문명은 종말 때까지 병존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성서의 진리는 평화의 진리다.
e.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사도 공동체) 가운데 거하심
여기서 “우리”는 사도 공동체이다. 요한복음이 쓰여 질 때는 이미 사도 공동체가 형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요 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단수)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들(복수)이 되리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단수를 쓰셨고 빛의 아들들이 되리라고 했을 때는 복수를 쓰셨다. 그 이유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다. 즉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각자도생하는 자들이고, 각자 내팽개쳐지고 흩어져 떠도는 것을 예수님께서 마음 아파하신 것처럼 다 단수이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는 한 몸 공동체이고, 베드로 사도의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래서 복수가 되는 것이다. 전부 각자가 우주의 주인공이고 완전히 모래알처럼 흩어진 자들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래서 초점은 택하신 백성 집단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임하셔서 어둠을 다 걷어내는 개념도 아니고, 나를 믿는 자들은 어둠 속에서 각자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개념도 아니고, 나중에 종말이 오면 각자 천국에 집어넣어서 각자 삼층 맨션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택하신 자들을 뽑아내서 하나님의 자녀 집단을 만드시는 것이다. 한 몸 공동체를 만드시는데 남아 있는 세상을 파괴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초점은 택하신 백성 집단에 맞추어져 있음
* 어둠에 다니는 자(단수)와 빛의 아들들(복수)의 속성
그렇다면 어둠에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다니는 자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주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빛의 아들들의 속성은 어떻게 다른가?
요일 2:7 형제들이여 지금 내가 그대들에게 새 계명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계명은 그대들이 가진 태초부터의 옛 계명이며 그대들이 들어온 태초부터의 그 말씀이지만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그대들에게 새 계명을 쓰는 것이 되는 이유는 어둠이 떠나가고 이제는 진리의 빛이 밝게 비추어졌으니 이 계명이 그 분에게만이 아니라 그대들에게도 실제로 참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도 어둠속에 있는 것입니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므로 그 안에는 걸림돌이 없으나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으나)
11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므로 그 어둠이 눈을 멀게 하여 자기가 가야 할 곳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가 본질적인 차이다.
어둠 속에서 뿔뿔이 흩어져서 모래알처럼 각자 살아가는 것이 어둠에 다니는 자들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 자기 몸을 가렸을 때 그때부터 시작이 된 것이다. 천륜조차도 이해관계가 틀어지면 쫙 쪼개지는 것이다. 완전히 남이 된 것이다. 원래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었던 관계였는데 이제는 내 몸 쳐다보는 게 싫어 라고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에게 일어난 이런 말도 안 되는 변화가 각 사람에게서 수시로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고, 내일의 적이 모래의 동지가 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둠에 다니는 자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의 속성은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도덕적인 삶을 살든, 종교적인 삶을 살든, 순교를 하든,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다 성서의 계시와는 무관한 것이다.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인식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증인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인식하고 있는 집단의 현존 그 자체가 증인 집단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검증하라고 한 것이다. 그 검증의 기준은 하나가 되기 시작했느냐, 점점 더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느냐 그것이 검증의 기준이다.
죄는 빗나감이고 악은 빗나간 자들의 언행이다. 죄의 상태에 있는 죄인이라는 개념이 빗나간 자들이다.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난 자들, 인간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 그 자들에게서 나오는 언행은 전부 관계를 깨뜨리는 언행이다. 그게 죄와 악의 개념이다. 성서적인 죄악의 개념은 형무소에 갈 짓을 한 놈이냐?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거냐? 그게 아니고 여호와의 길이 아닌 인간의 길을 걸어가면서 관계를 깨뜨리는 짓만 하고 있는 것 그것이 죄악의 개념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나,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다, 눈 감으면 코 배어 간다는 속담은 인간은 절대 신뢰할 수 없고 다 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빛 가운데로 오게 되어서 빛의 아들들이 되면 걸림돌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가 되어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 남으로 보이는 것이며 그것이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자들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므로 그 어둠이 눈을 멀게 하여 자기가 가야 할 곳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성서적인 소경의 개념이다. 모두가 남으로 보이는 것 그것이 소경이다. 전부 주인공인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조연과 엑스트라들로 보이는 그것이 성서적인 소경의 개념이다.
요일 3:13 형제들이여 세상이 그대들을 미워하여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사망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시스템)
사망이라는 시스템은 가인과 아벨의 시스템이다. 나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제거해버리는 것이 가인과 아벨의 시스템이다. 이것은 전쟁 같은 국제 무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고 각 개인의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심지어 가정 안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가인과 아벨의 시스템이 어둠의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의 본질은 서로가 남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시스템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메시아가 가지고 오신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이며 그것은 택하신 자들이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인식하느냐 서로를 남으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으로 인식하면서 살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겐 전혀 관여 안 하신다. 파괴하지도 않으시고 억지로 끌고 가지도 않으신다. 왜냐하면 억지로 끌고 가면 휴머노이드 AI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 하나님은 그것들 데리고서 인형 놀이를 하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일 안 하신다. 정리를 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이 빛의 세계는 하나된 관계이다. 서로를 아끼고 돌보고 불쌍히 여기고 원망하지 않고 사랑하는 관계이고, 어둠의 세계는 즉 인간 세계는 타자된 관계이다. 서로 경계하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용한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살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언제 등에 칼을 맞을지 모르고 언제 내 코를 베어갈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고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다. 십계명에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웃의 것을 탐하지 않는 삶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완전히 경쟁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타자된 관계는 어둠의 세계의 시스템의 기반이다. 빛의 세계 시스템의 기반은 하나 됨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복음인데 그 출발을 빛과 어두움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빛과 어두움은 대결하고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와서 택해 놓으신 자들을 꺼내 가는 빛이다. 그리고 어둠은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 안에서 종교를 만들든 말든 전쟁을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빛의 세계 : 하나 된 관계(서로 아끼고 돌보고 불쌍히 여기고 원망하지 않고 사랑함)
어둠의 세계 : 타자 된 관계(서로 경계하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용함)
왜 선악 개념이 생겼냐 하면 피차 경쟁하는 구도 속에서 살아갈 때, 내 쪽이 옳다 내 쪽이 선하다, 저쪽이 옳지 않다 저쪽이 악하다 라는 개념이 있어야만 이 충돌 개념에서 내가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 정당화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결 구도라는 그 운명적인 구도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생각해 내는 것이 바로 선악 개념인 것이다. 선악 개념이 자기의 사고와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선하고 저 놈은 악하다 라는 그 개념이 있어야만 자기의 삶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서 선악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선해야만 하고 저 인간은 악해야만 해. 그래야 내가 내 삶에 나를 정당화시키고 나의 삶을 유의미한 삶으로 포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산다. 돈이 많든 적든, 나이가 어리든 많든, 그러니까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그 규칙으로 살아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AI 시대가 오든 휴머노이드가 되든 우주로 가든 인간은 그 구조 속에 속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
우리는 세상의 그런 경쟁 시스템 속에 들어가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것이 전도의 사명과 활용의 사명 두 가지인데, 그때 전도의 사명은 진리의 빛을 비추는 거니까 선명한데, 활용의 현장에서 평화의 빛을 비춘다는 것이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를 남으로 보는 것이 정상인 시스템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가서 그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전도의 사명은 좋은 진주를 찾아내는 거니까 그것은 명쾌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활용의 현장에서는 우리가 평화의 빛을 비춘다. 즉 그들의 승리하고 싶은 그 욕망과 승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 좌절과 슬픔과 비탄 속에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해줄 것인가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 다르다. 승리의 쾌감에 도취해 있는 자들도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이다. 누구나 엄청난 상처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할 부분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게 된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것처럼, 그 사람이 우리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을 때 우리가 진리의 빛을 슬쩍 비출 기회도 우리에게 오기도 하고, 또 일반적으로는 그 사람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우리 때문이라도 이 살벌한 세상에서 따뜻함을 한 번 느끼게 해 주면서 우리를 만나면 행복해하는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 세상을 바꾸는 게 우리의 사명은 아니다. 병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황마다 판단을 잘 해야 한다.
경쟁과 시기 질투와 서로 의심하고 서로 경계하는 그 살벌한 곳에서 우리가 어떤 상황을 어떻게 감당해야 되느냐 에서 기준은 하나다. 친절한 것이다. 거기서 나의 유불리 계산으로 맞서게 되면 완전히 수렁에 같이 빠지는 것이다. 거기서 나의 유불리가 동원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싸르크스의 발광을 짓밟고 어떻게 하면 가능한 친절하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우리의 기술적인 능력만으로 사람들이 감동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능력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따라서 두 가지 능력이 정말 균형이 잘 맞아야 한다.
우리의 조언이 상대방에게는 조언이 아니라 비난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 뱀처럼 지혜롭게 우리가 정말 날카롭게 계산을 하면서 치밀하게 계산을 하면서 세상에서 활동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 흔들리면 안 되는 것은 그 사람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마음이 유지되고 있는가 아니면 멸시하는 마음 또는 원망하는 마음 또는 조롱하는 마음이 내 마음에 스멀스멀 올라오는가 하는 것을 철저하게 체크를 해야 되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허남회 전도사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