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주요 박물관 기행을 담은 책 〈프롬나드 인 러시아〉(2018)로 문화·예술 애호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러시아 전문가 김은희 교수가 지병으로 지난 13일 타계했다. 향년 57세.|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김 교수는 모스크바국립대학교에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연구로 2001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외대를 비롯해 청주대, 국민대 등 여러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했으며, 월간 〈한국산문〉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한국문인협회와 한국산문작가협회, 한국노어노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모스크바한인회장과 민주평통 모스크바협의회장을 역임한 김원일 러시아민족우호대 교수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수용소 문학의 문법(2):솔체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나타난 극한 생존지구로서 수용소의 이미지〉(2021) 등 학술 논문, 〈현대 러시아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1, 2〉와 같은 번역서를 통해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고 소개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우리에게 생소한 러시아 미술 세계를 문학과 버무려 맛깔나게 풀어낸 칼럼과 저서, 러시아 전문 유투브 채널 '리드 러시아'(Read Russia) 등으로 더 친숙하다.
미술 작품에 담긴 러시아 사회와 생활 풍습, 인간적인 면모 등을 들려주는 에세이집 〈러시아 명화 속 문학을 말하다〉(2010),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2014)는 우리에게 생소한 러시아의 미술 세계를, 러시아의 문화·예술의 보고(寶庫)인 박물관 기행을 담은 〈프롬나드 인 러시아〉(2018)는 오랫동안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간직해온 러시아인의 정신 세계를 소개한 드문 역작(力作)으로 꼽힌다.
〈프롬나드 인 러시아〉는 푸시킨과 톨스토이 박물관, 체호프와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영지 등 모스크바 근교의 주요 박물관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목은 ‘모스크바를 걷다’라는 뜻이다. 김 교수는 생전에 러시아의 수많은 박물관을 방문만 해도 러시아의 예술과 문학은 물론, 숱한 역작을 탄생시킨 그들의 정신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일반인들도 쉽게 손이 가도록,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러시아 작가와 작품, 탄생 배경 등을 쉬운 필체로 열어간다.
김은희 교수가 연 유투브 '리드 러시아'/캡처
김 교수는 또 러시아 문학과 미술을 영상으로 소개하기 위해 유투브 채널 ‘리드 러시아’를 2021년 론칭했다. 막심 고리키의 자전적 3부작 〈어린 시절〉과 〈세상 속으로〉, 〈나의 대학〉 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란 테마로 새롭게 풀어냈다.
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반 부닌의 노벨상 수상작 〈아르세니예프의 인생〉과 유리 나기빈의 〈메아리〉, 〈청개구리 이야기〉등을 소개했다.
미술 분야에서는 '러시아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일리야 레핀의 대표작 ’기다리지 않았다‘와 ’볼가 강의 예인부들‘ 등을 비롯해 유형수(流刑囚)를 실어나르는 열차 한 칸의 모습을 옮겨 놓은 야로센코의 그림 ‘어디나 삶’과 러시아 전통 봄의 축제 ‘마슬레니차’를 그린 레비탄의 ‘봄', 베네치나노프의 ’봄 경작지에서‘, 카람진의 ’가엾은 리자‘ 등을 통해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끈길기게 삶을 이어간 러시아 민중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참고로 그녀의 번역서로는 〈현대 러시아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 1, 2〉외에도 〈겨울 떡갈나무〉, 〈유리 나기빈 단편집〉, 〈금발의 장모〉, 〈부랴트인 이야기〉, 〈에스키모인 이야기〉, 〈야쿠트인 이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