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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묵상글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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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
"나는 생명의 빵이다."
성경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글자 하나로 뜻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강조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제 복음에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차이가 있는 것이라기보는 강조점이 있는 것일 겁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라는 번역은 다른 것이 생명의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러니 다른 빵을 찾지 말고 당신을 찾으라는 뜻도 있는 거구요.
예를 들어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고 우리는 산삼이니 영지버섯을 찾는데
그런 것들을 찾지 말고 참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만나를 운운하는데 그것이 생명이 빵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하신 다음
오늘 다시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강조점이 '내가'가 아니라 '생명의'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은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당신의 살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은 죽음의 빵이 아니고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이며,
더 나아가 죽어 있는 빵이 아니라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씀이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효모와 유산균이 죽어 있는 살균 막걸리에 비해
생막걸리는 그것들이 살아 있는 것과 같이 생명이 생동하고,
그래서 그것을 먹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주는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약으로 치면 알부민 주사와도 같은 것일 겁니다.
제 친구가 살아 있을 때 아주 가끔 알부민 주사를 맞았는데
그것을 맞으면 신기하게도 반짝 생기가 돌곤 했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의 빵일지라도
그것을 믿고 간절히 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빵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마늘 빵보다도 맛없고 그래서 원치 않는 빵일 뿐입니다.
어제와 그제는 저의 식당에 젊은이들이 와서 봉사를 했습니다.
일은 어른들보다 서툴러서 제가 많이 그리고 더 힘들었지만,
식당에 생기가 돌고 저도 싱싱한 피를 수혈받는 듯 힘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근자에 만났던 다른 젊은이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인생을 낭비하고 특히 그 아까운 젊음을 허비하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젊은데 시들시들하고, 사는 것이 재미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의미는 없고 재미로 살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잃거나 가져본 적이 없이 살다가 그리된 것입니다.
어찌하여 생명이 주어졌고,
어떻게 해야 생명을 잘 살 수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기에
생명이 귀중하지 않고 생명이 있어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 소중한 이유,
태어나기는 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이
그래도 태어난 것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 영원한 생명을 생각지 않으면
젊은이건 늙은이건 사는 것이 다 허무하고 시들시들할 수밖에 없고,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모르고 살면 누구나 다 이렇습니다.
모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을 먹고
생기있게 살게되기를 비는 오늘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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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44)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곧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동시에 “살리는 빵”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어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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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은 선물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어도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의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 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닮는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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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떤 형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워낙 사교육비가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형제님께 “형제님 월급으로 세 아이 공부시키는 것이 만만치가 않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돈으로 어떻게 환산하겠습니까?”
아이 키우는 비용이 적지 않지만 키우는 기쁨이 훨씬 크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이 키우는데 기쁨만 있을까요? 고통과 시련도 분명히 있고, 기쁨보다 더 많은 힘듦의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작은 기쁨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지요.
커다란 이익을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기쁨으로도, 자그마한 사랑으로도, 자그마한 만족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오지 않을 큰 것만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십니다. 이 빵은 세상의 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순간의 만족을 주는 세상의 빵과는 달리,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그런데 이를 이 세상 안에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삶의 순간순간에서 느끼는 사람만이 생명의 빵을 체험할 수 있으며, 이런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 배불리 먹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로,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만나를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은총이라고 생각했기에, 과거 조상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총을 얻었던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은총을 얻게 된 것일까요?
커다란 은총이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 삶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느끼고, 또 그 주님과 함께하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적다고, 아니 없다고 말하며 힘든 삶이라면서 한숨을 내쉬고 눈물짓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상의 순간에서도 주님께 감사할 이유를 찾을 수가 있으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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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다(구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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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강의를 하면서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아름답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 내 마음 깊은 그곳에/ 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 우리 사랑은 영원히/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 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 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 말없는 눈빛으로 기도해/ 영원한 사랑을 위해/ 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 눈빛 순결한 사랑의/ 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저는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별처럼’이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영원한 사랑은 ‘갈망’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는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으로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수학적인 계산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도 물어보십니다. ‘여러분들도 내 곁을 떠날 것입니까?’ 베드로 사도는 대답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영원한 생명을 살았습니다. 스테파노 부제, 바오로 사도, 신앙의 선조들은 이런 삶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분들에게 물리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수학적인 방식의 영원한 생명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사랑과 갈망이 만나서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건들을 모아서 아이티에 있는 ‘꽃동네’로 보내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귀찮은 일입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일을 몇 년째 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의 사랑과 갈망은 굶주리고, 병들어가는 아이티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생명의 빵이 되고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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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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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 안에서 품어주는 사랑 ♣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오늘의 시대는 ‘감성의 시대’이자 동시에 냉철한 이성을 앞세우는 시대이다. 그러는 가운데 단편적이고 즉각적인 정서적 만족을 추구하거나 자신이 확보한 정보에 따른 성급한 판단에 길들여져가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영성생활도 좀 더 깊이 헤아리고 더 따뜻하게 품어주는 ‘땅의 영성’, ‘어머니의 영성’이 더욱 아쉬워지는 듯하다.
오늘 복음의 서두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기하고 있다(6,44-46). 더 강하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6,44)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란 말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온 이’(46절)임을 가리킨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6,45)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으리라”(6,45)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그분의 가르침을 알게 되는 것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배워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ㄴ)는 말씀은 이렇게 주의 깊게 경청하고 습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44절의 ‘엘쿠에인’(ελκὐειν)은 ‘이끌어준다’는 말인데 ‘온힘을 다하여 무거운 물건(배나 수레)을 끄는 것’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마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끌려가는 것이며 사람은 바라는 바대로 끌려간다. 진리, 행복, 정의, 영원한 생명에 끌려가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께로 끌려갈 것이다.”(PL XXXV 1608)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마치도 무거운 돌을 온 힘을 다하여 끌어당기듯이 우리를 당신 사랑에로 이끄시려고 한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예수와의 만남과 일치는 불가능하다. 먼저 그분이 이끌어주시기에 믿음의 삶, 영원 생명을 찾고 삶을 살 수 있다.
‘엘쿠에인’(ελκὐειν)은 ‘던진다’는 뜻도 갖고 있는데, 51절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과 연결 지어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를 시사해준다. 곧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을 예시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당신의 목숨을 온전히 던져 당신 전부(=살)를 우리에게 건네주셨듯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받아 얻기 위하여 매일의 삶에서 자신을 쏟아 부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몸을 모시며, 그분의 말씀을 음미하여 몸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전 삶을 통한 사랑의 품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사랑하여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곧 품는 것이며, 품는다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며, 마음으로 들어주고 따뜻한 정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품어주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들어주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며, 상대방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품어주는 것은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그의 약점이나 허물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이다. 품어주는 것은 함께 하기 위하여 기다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품어주는 삶을 통하여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죽음은 생명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형제자매를 살맛나게 해주는 길은 품어주는 사랑이다. 이렇게 품어주는 사람이 곧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생명의 빵을 모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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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0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기지은을 사도들에게만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부제 필리포스에게도 발휘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나, 남쪽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나 그리고 서쪽 해안지방의 아스돗과 카이사리아에게도 종횡무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가 한 곳에서 복음 선포 임무를 마치면 그를 잡아채듯 데려가셨습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악령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사도 8,6-8).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시켜 그에게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하셔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왕실 고관이었던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는데, 필리포스에게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청해 왔습니다. 필리포스가 그 대목을 보니, 고난받는 메시아의 셋째(이사 50,4-11)와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대망사상과 그 메시아가 영광 대신에 받게 된 수난의 운명을 내다본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과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 결과로 겪으셔야 했던 수난에다가 부활하신 이야기들을 그 고관에게 전해 주었더니 세례를 받겠다고 청해서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8,35-38).
그는 왕실의 고관이었으므로 그의 세례는 복음이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인접한 북아프리카 지방의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시 에티오피아인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자손들인 동시에, 바벨탑을 세우고 수메르 문명의 시조가 된 함의 아들 니므롯의 후손들이기도 했습니다(창세 10,6-8). 니므롯은 힘센 장사여서 많은 무리를 이끌었으며 신아르 지방에 왕국을 세우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10; 11,2-4). 그런데 니므롯과 그 수하들의 의도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흩어놓아 탑이 세워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세 11,4-8). 수메르 문명이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제 필리포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2천 년 가까이 우상을 숭배하던 문명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이에 반해 노아의 첫째 아들인 셈의 자손 중에서 4대손 에베르의 큰 아들인 펠렉과 작은 아들인 욕탄에게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맡기신 신앙의 문명은 바벨탑의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퍼져나갔습니다(창세 10,21.25).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은 수메르 문명을 탈출하여 바벨탑의 서쪽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고(창세 11,16-27), 욕탄은 후손들과 함께 바벨탑의 동쪽인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 동방에 하느님의 신앙 문명을 세웠습니다(창세 10,30). 그 후 2천 년 가까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 부활 이후 그리스도 신앙이 바오로와 그 후임자 선교사들에 의해 서향했다가 1천6백여 년이 흐른 후에 아시아에 다시 전해졌다가, 다시 2백여 년이 흘러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은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이 전해지던 그 무렵, 한민족은 욕탄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신앙 문명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조선 왕조와 유림들이 가한 백년 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단 받아들인 신앙을 굿굿하게 지켜냈습니다. 이 하느님 신앙 문명의 흔적은, 제천의식과 고인돌 유적, 천손의식과 홍익인간의 이념입니다.
욕탄과 그 후손들이 노아로부터 전수받은 하느님 신앙 문명을 동방의 여러 지역, 특히 가장 동쪽에 살면서 밝은 해를 숭상하며 제관의 복장인 흰 옷을 즐겨입던 배달민족에게 전해준 지 무려 3천여 년만에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과 만났으니, 그 과정이 실로 오묘합니다.
이벽의 5대조 이경상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다수 얻어왔으므로 이벽은 어려서부터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당시 간행된 천주교 서적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복음 진리가 들어온 과정이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에 의한 결과였다고 교회사가들이 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과정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필리포스를 움직이신 것처럼, 이탈리아 선교사인 마테오리치와 그의 초청을 받아 온 독일 선교사인 아담 샬 그리고 이경상을 통해서 복음 진리가 먼저 전해졌다가 150여 년, 다섯 세대를 거친 후에 그 5대손인 이벽을 통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한민족에게 전해지도록 섭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이 장구한 역사의 과정에서 유난히 선과 의로움의 가치에 민감하고 신앙 진리를 스스로 받아들였으며 또 박해도 능히 이겨내고 아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교회를 이룩할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성령께서 위 네 사람을 이끄시어 이룩하신 위대한 복음화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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