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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일반과 미사의 Q&A] (63) 전례 꽃꽂이에 대해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왔을 때, 제단에서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꽃꽂이입니다. 이를 “전례 꽃꽂이”라고 합니다. 전례 꽃꽂이는 세상의 꽃꽂이와는 다르게, 복음과 당일 전례주년의 의미들을 담고 있는 중요한 상징물입니다. 이번에는 전례 꽃꽂이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합시다.
가톨릭 안에서 “성 예술”은 오랜 역사를 지닙니다. 성 예술은 건축, 시각 및 조형 예술, 그리고 청각 예술인 성 음악, 전례에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도구와 의복으로 드러나는 거룩한 예술품으로 정의됩니다. 이 중에서 전례 꽃꽂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예술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례 꽃꽂이”는 풍성한 전례를 위한 하나의 예술적인 요소입니다.
전례 꽃꽂이는 단순히 장식을 뜻하지 않고, 세심히 전례력을 살피고,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장식을 해야 하는 것으로 일반 꽃꽂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 꽃꽂이는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멀리서 보아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꽃꽂이만이 아닌 전체적으로 전례의 공간을 배려하여 구성해야 합니다. 특별히 대축일에는 전례력에 따른 색의 선택도 신중해야 하고, 상징적인 구상도 전체적인 전례력에 따라야 합니다. 다른 성 예술도 마찬가지이지만, 전례 꽃꽂이가 제대 위에 자리할 때, 제대를 가리는 경우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전례 꽃꽂이의 색채에는 어떠한 의미들이 담겨져 있을까? 전례 꽃꽂이는 해당 상징에 맞는 색채를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 전통 안에서 각 색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백색은 하느님의 영광, 완전한 승리, 기쁨, 환희, 순결 등을 상징합니다. 백색은 그리스도교 이전부터 중요한 색으로 사용되었으며 신성한 색을 상징합니다.
홍색은 성령의 불, 순교, 하느님의 불타는 마음, 희생과 수난을 상징하지만, 승리의 색이기도 합니다.
홍색은 어머니의 보호색, 따뜻하고 활동적인 색으로 생명을 상징합니다.
황금색은 영광, 기쁨, 불변을 상징합니다.
자색은 회개와 보속, 위엄과 엄숙을 상징합니다.
녹색은 영원을 향한 성장, 세상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갈색은 고통, 통회, 보속, 수덕 등을 상징합니다.
짙은 갈색은 수도와 고행자를 나타낼 때 사용했으며, 검정색으로도 대체가 가능합니다.
하늘색은 신적인 특성, 거룩한 모습, 하늘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성모님을 드러내는 색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전례 꽃꽂이는 본당 사목적인 부분으로 적용됩니다. 곧 이 부분에 대한 결정권은 사목구 주임과 본당 전례분과 회의를 통해서 조정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례 꽃꽂이 봉사를 하는 이들 역시 전례 봉사자로의 마음 가짐으로 다가서야 하고, 전례와의 어울림을 늘 의식하며 다가서야 합니다. 주님께 봉헌되는 전례 꽃꽂이를 통해 우리는 은총의 색을 맛보고, 더욱 주님을 잘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알기쉬운 전례상식] 저는 믿나이다(Credo)!
우리가 타고 다니는 국산 자동차는 그 이름과 뜻이 다양하다. 세피아(92년), 스포티지(93년)에 이은 기아의 3번째 고유모델 크레도스(Credos, 95년∼2000년 생산)는 ‘확신하다’, ‘신뢰하다’를 뜻하는 영어 단어 ‘Credit’의 어원인 라틴어 ‘Credo’(믿다, 확신하다)에서 유래하였다. ‘고객들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자동차’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골라 유일한 가르침으로 이루고 신앙 고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는 신앙의 공통된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을 ‘신앙 고백’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크레도”(Credo), 즉 주일과 대축일 그리고 장엄 미사 때에 보통 “저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경 또는 신앙 고백을 바친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사 때에 바치는 신경 또는 신앙 고백에는 어떤 양식이 있고 이를 어떻게 바쳐야 하는가?
강론 후에 바치는 신앙 고백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첫 번째 양식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부르며 초세기에 열렸던 두 세계 공의회, 즉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에서 나온 신경이기에 큰 권위를 지닌다. 매우 오래된 이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과 서방의 양대 교회에서 공히 간직하고 있다. 이 신경은 제176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년 1월 8일∼1216년 7월 16일)가 설명한 최초의 미사 해설서(『제대의 신비』, 1197-1198년)에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동·서방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신경이므로 모든 주일과 대축일 그리고 성대하게 지내는 특별한 미사를 거행할 때에 우선적으로 바쳐야 한다.
두 번째 양식은 최근 복원된 신경으로 “사도 신경”이라고 부르는데,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으로 주님을 따르던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반영하고 요약하고 있다. 오늘날 특히 사순시기와 부활 시기에는 주님 세례(죽음-부활)의 의미를 기억하며 사도 신경을 바칠 수 있게 하였다. 초세기부터 세례를 원하는 예비신자들은 사순 시기에 여러 단계의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에 참여하였고 특히 “사도 신경”과 “주님의 기도”를 중점적으로 배웠으며 파스카 성야 때에 신자들 앞에서 공적으로 신앙 고백을 바쳤다(‘신경 전수’).
반면 신자들은 이때에 이미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참회를 하였고 파스카 성야 때에 그들 또한 세례를 준비하는 예비 신자들과 함께 이미 받은 세례를 기억하며 사도 신경을 바쳤다. 만일 세례 받을 예비 신자들이 없다면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를 벗어난 대축일과 주일에는 짧은 사도 신경보다 이미 세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모두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는 것이 좋다.
신경 또는 신앙 고백은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의미는 “성경 봉독에서 선포되고 강론에서 풀이한 하느님 말씀에” 모여 있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옳습니다!’라고 자발적이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데 있다. 두 번째는 “전례용으로 승인된 양식문으로 신앙 규범을 고백함으로써 신앙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고 찬양하는”(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7항) 데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은 사제와 백성이 함께 노래하거나 낭송하며 바칠 수 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68항 참조).
세례 받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공적으로 신앙 고백을 바치는 것(“저는 믿나이다”)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그 품 안에서 우리가 믿는 온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가톨릭 교회 가르침, 197항 참조)이다.
[신심 생활] 성모 호칭들 : 은총의 성모
성모님께 봉헌되는 많은 호칭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기원이 있다.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새 하와’, ‘상아탑’ 등과 같이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에서 비롯된 호칭들로부터, 교부와 성인들의 작품 혹은 대중적 신심이나 성모 발현 사건에 기초한 호칭들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호칭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가 하느님의 ‘은총’인데, 즉 성모님께 봉헌된 호칭들을 통해 우리는 그분께서 얻어 누린 하느님의 은총을 바라보며, 또한 그분의 전구를 통해 신앙인이 얻게 될 은총의 풍성함을 묵상하게 된다.
성모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루카 1,30 참조)을 통해 교회로부터 ‘은총이 가득하신 분’으로 고백되어 왔다. 그 삶의 시작부터 원죄에 물듦 없이 태어나셨고,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으며 동정녀의 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에 오르신 성모님의 삶은 모든 신앙인이 바라는 구원의 표지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점철된 복된 삶의 표상이 된다. 이에 성모님 자신도 하느님의 은총을 찬미하며, “이제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ㄴ-49)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은총의 충만한 수혜자이신 성모님께서는, 당신께 맡겨진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하느님께 은총을 구하는 ‘전구자’이자 ‘믿는 이들의 도움’이 되신다. 이러한 성모님의 도움을 성모송의 전구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특히 마리아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도로 알려진 ‘성모님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 안에서 그분의 전구자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천주의 성모님, 당신의 보호에 저희를 맡기오니 어려울 때에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마시고 항상 모든 위험에서 저희를 구하소서.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녀시여.”
3세기부터 봉헌된 이 기도는 초기 교회 공동체가 봉헌한 성모 신심의 모습을 전한다. 당시 교회는 성모님을 동정녀이시자 하느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는 동시에, 곤경 중에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해 주시는 은총의 통로로 바라보며 그분의 자애와 사랑에 자신들을 의탁했다. 이후 몇 세기를 거쳐 성모님의 전구자적 역할은 많은 교부와 성인 그리고 교황들의 신심적 고백을 통해 줄곧 강조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믿는 이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교회에 대비시켜, 영적 양식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는 교회의 모습 안에서, 모든 신앙인의 영적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역할을 바라보았다. 비오 12세 교황은 은총의 원천으로 하느님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신원과 당신께 의지하는 모든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시는 성모님의 역할을 전했다.
지금도 믿는 이들을 위한 은총의 전구자이자, 신앙인들의 도움으로 함께 하시는,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 ‘은총의 성모’ 마리아를 생각하며, 그분께 대한 마땅한 공경과 사랑을 드리는 참된 성모 신심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기도하는 교회] 예물 준비 예식에서 성직자가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물을 조금 섞는데 왜 그렇게 하는 건가요?
포도주에 물을 섞는 예식은 고대 근동의 관습에서 유래합니다. 물이 귀하여 식사 때 주로 마시는 음료가 포도즙이었습니다. 포도즙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효하는데 우리나라의 포도는 당도가 낮아서 포도즙이 초로 변하지만 근동에서 재배하였던 포도는 당도가 높아 발효하여 포도주로 변합니다. 오늘과 같은 냉장 시설이 없던 당시에 당도가 높아 높은 도수로 유지되면 오래 보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식사 때는 취하지 않으려고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마셨습니다.
중세 시대에 이 행위가 전례에 도입되었고 실용적 수준을 넘어서 신학적 해석이 더해졌으니, 이제 포도주에 물을 섞으면서 사제는 속으로 다음의 기도를 바칩니다. : “이 물과 술이 하나 되듯이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상징하고 물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인성(人性)을 상징합니다. 포도주와 물이 섞여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와 결합하면 그분의 신성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구원됨을 드러냅니다.
또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요한 19,34)에서 교회의 성사가 비롯되었는데, 포도주와 물이 섞이는 것은 우리 교회(물)가 성사에 참여하여 그리스도(피, 포도주)와 일치함을 의미합니다.
[신심 생활] 성모 호칭기도
교회 내에는 다양한 호칭기도(呼稱祈禱: Litania)들이 있다. 호칭기도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천사와 사도, 순교자와 증거자 등 여러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탄원 기도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여러 호칭기도가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모든 성인 호칭기도가 있고 그 외에도 예수 성심 호칭기도, 성 요셉 호칭기도, 103위 한국 성인 호칭기도, 124위 한국 순교복자 호칭기도와 특별히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호칭기도들도 있다.
가장 오래된 성모 호칭기도(Litaniae Lauretanae Beatae Mariae Virginis)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총 73가지의 호칭을 담고 있으며, 그중 동정성의 꽃(Flos virginitatis), 거룩함의 모범(Forma sanctitatis), 천상의 찬가(Hymnus cælorum) 등 지금 우리에게 조금 낯선 호칭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 16세기 ‘로레토의 호칭기도’ 혹은 ‘라우레타네 성모 호칭기도’라 불리는 기도가 등장하는데,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이 호칭기도는 이탈리아의 로레토(Loreto) 성모 성지에서 봉헌되던 기도로 순례자들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퍼지면서 보편적 신심 기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1587년 식스토 5세 교황으로부터 공적 인가를 받게 되었고, 이 기도의 전파와 권장을 위해 호칭기도를 봉헌하는 모든 이에게 대사가 허용되었다. 이후 17세기부터 여러 교황은 한결같이 이 기도의 가치를 인정하며, 다양한 호칭들을 추가하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2020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기도에 ‘자비의 어머니(Mater misericordiæ)’, ‘희망의 어머니(Mater spei)’, 그리고 ‘이주민들의 위로(Solacium migrantium)’라는 세 가지 호칭들을 공식적으로 첨가한다.
이 성모 호칭기도는 총 54개의 성모 호칭을 담고 있는데, 크게 6종류의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처음 3개의 호칭, ‘성모 마리아님’, ‘천주의 성모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는 모든 성인 호칭기도에서 유래된 것이고, 이어지는 14개의 호칭은 마리아를 ‘어머니(Mater)’로 칭하며 구원의 역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보여주며 그에 따른 찬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다른 6개의 호칭은 마리아의 동정성과 그 덕의 품위를 드러내며, 마리아에게 ‘동정녀(Virgo)’라는 호칭을 부여하고, 이어서 구약성경(‘계약의 궤’, ‘상지의 옥좌’ 등)과 교부들의 작품(‘지극한 사랑의 그릇’, ‘다윗의 망대’ 등)에서 유래된 13개의 다양한 호칭들이 자리한다. 이후 5개의 호칭은 교회의 어머니로서 신앙인에게 위로와 도움이신 마리아께 봉헌된 호칭들로, 특히 죄인들과 병자, 근심 중의 사람들을 향한 위로의 근원으로 마리아를 바라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13개의 호칭은 마리아께 ‘모후(Regina)’라는 고귀한 칭호를 붙이며, 마리아의 성덕을 기리고 그분이 받은 은총의 영광을 묵상케한다.
이러한 다양한 호칭들은 성모 마리아의 모범적 신앙을 묵상케 하는 동시에 그분의 전구에 대한 신뢰를 더해 단순하면서 아름다운 기도를 이루게 되는데, 이 호칭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어머니이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공경의 마음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란다.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성모 축일
전례 주년 안에는 시기별 주일(主日) 외에도 다양하고 중요한 축일들이 존재한다. 축일 중에는 매 주일처럼 반드시 미사에 참여해야 할 의무 축일과 그렇지 않은 선택적 축일이 있고, 기념되는 날짜가 고정된 고정축일과 날짜가 유동적인 이동축일이 있다. 또한 각 축일이 주는 의미와 중요도에 따라 대축일, 축일 그리고 기념일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이러한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례 주년 내 모든 축일들은 “한 해를 주기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마리아를 특별한 사랑으로 공경하며, 신자들의 신심을 위하여 순교자들과 다른 성인들을 기념하는 날”(『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8항)들로,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분이 이룬 모든 구원의 업적을 기념하는 동시에, 그 구원 역사의 참된 증인들인 성인들의 삶과 모범적 신앙을 기억하게 한다. 그 가운데 하느님 구원사업의 탁월한 협조자이신 성모님께 봉헌된 네 개의 다양한 축일들이 있다.
첫째, 과거에 성모영보(聖母領報) 대축일로도 불리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 역사의 서막을 알린다. 이 축일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성모님께 전해진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전하며, 이 축일을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 구원 역사의 중요한 협력자로 등장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주님의 종’으로서 ‘예’라고 응답하는 순명의 모범을 보여준다.(루카 1,26-38 참조)
둘째,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은 육화 강생의 신비와 깊이 연결된다. 이 축일은 예수 성탄 대축일로부터 시작되는 8일 축제의 마지막 날에 해당되며, 인간이 되신 하느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바로 마리아임을 전한다. 이 축일은 3세기 전부터 시작된 성모 신심을 바탕으로, 431년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마리아께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을 낳으신 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축일을 통해 나자렛의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낳은 ‘하느님의 어머니’, 즉 천주의 성모 마리아로 고백된다.
셋째, 주님 봉헌 축일(2월 2일)은 예수 성탄 대축일 이후로 40일째 되는 날로, 마리아가 유대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 사건을 기념한다. 이 축일을 통해 마리아는 시메온의 예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깊이 동참하게 되고, 이 동참으로 자신의 일생을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봉헌과 헌신의 길을 걷게 된다.
마지막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이 있는데, 이날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마리아가 지상의 삶을 다하신 뒤,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하늘로 올려졌다는 믿음을 고백한다. 동방 교회에서 먼저 기념된 이 축일은 처음에는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기념하였지만, 7세기부터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지면서, 서방 교회에서는 성모 안식(Dormitio) 축일에서 성모 승천(Assumptio) 축일로 바꾸어 봉헌하게 되었다. 이 축일을 통해 성모 마리아는 모든 믿는 이들이 믿고 바라는 하느님 구원의 참된 증거자요, 그 구원의 희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
전례 주년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을 시작으로 그분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 여정을 1년 주기 속에 담은 전례의 흐름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거행되는 다양한 전례와 축일들은 이 전례 주년을 기초로 하며, 전례 주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적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몸소 이룬 구원의 업적을 온전히 묵상하며 그 신비에 동참하게 된다.
전례 주년은 예수 부활 대축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을 각각 축으로 사순과 부활, 대림과 성탄 그리고 연중 시기로 나뉘게 되는데, 각 시기에 따라 전례 안에서 기념되는 구원의 다양한 신비들이 바로 신심 생활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대림 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이자 회개와 더불어 희망을 기념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제대 앞에는 네 개의 대림초가 마련되고, 매주 하나씩 밝히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힐 빛으로 오시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합당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대림초는 신심의 차원에서 ‘대림환’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대림환에서 네 개의 초는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려 온 4000년의 역사와 4주간의 대림 시기를 표현하는 동시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루카 1,78)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대림환의 둥근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믿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대림환을 장식하는 푸른 나뭇가지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신앙의 활기와 생명력을 표현한다고 전해진다.
성탄 시기가 가까워지면 각 성당이나 가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상징하는 ‘구유’를 꾸미게 된다. 이러한 신심 전통은 고대 성당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본격적인 교회의 신심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
1223년 성인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인간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강생의 신비를 더 깊이 묵상하고자 교황의 허락을 얻어, 그레치오(Greccio)라는 작은 마을에서 과거 베들레헴 마구간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 만든 구유는 요즘 볼 수 있는 화려한 구유와는 달리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별한 인물상이나 어떠한 장식도 없이 건초더미가 담긴 구유 옆에 소와 나귀를 배치한 채, 성탄의 신비를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다고 전해진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라는 이사야서 1장 3절의 말씀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구유는, 화려함으로 장식된 현대적 구유와 세속적 기쁨으로 혼재된 성탄의 분위기와는 달리 강생의 신비를 단순하면서도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 앞으로 맞이할 성탄 준비에서는 외적 구유만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올바로 모실 내적 구유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3년 10월 15일(가해) 연중 제28주일 인천주보 3면, 김태환 요셉 신부(연희동 본당 주임)]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I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서양권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公顯) 대축일을 전후하여 각 집을 방문하며 ‘집 축복’을 하는 신심 전통이 있다. 주님 공현의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음과 동시에 아기 예수께서 참 하느님이심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희망과 염원이 집 축복 예식 안에 담겨 있다.
집 축복 예식은 기도와 함께 축복된 분필로 집 대문 위나 문설주에 구원의 십자가를 표시하고 그 해의 연도,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아 그분이 구세주이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고 경배했던 세 명의 동방박사 가스파르(Caspa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사르(Balthasar)의 이름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적는데, 올해를 예로 든다면, ‘20+C+M+B+23’이라고 적게 된다. 특히 C+M+B는 ‘그리스도께서 이 집을 축복하소서(Christus Mansionem Benedicat)’라는 의미로도 해석되며, 그 집에 사는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피난처임을 묵상케 한다.
사순 시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이 시기의 대표적 신심 행위로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 있다. 초세기 문헌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부터 예수께서 돌아가신 골고타까지 행렬하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중세기에 당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신심 행위들을 하나로 모아 ‘십자가의 길’이 정리되었다. 물론 현재와 같이 14처 형식의 기도는 그 뒤에 이루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동참하는 신심의 전통은 초세기부터 한결같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의 전통은 또 다른 형태의 신심 행위를 낳게 되는데, 당신 아들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에 누구보다도 깊이 동참하시리라는 시메온의 예언(루카 2,34-35 참조)처럼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 함께 했던 성모 마리아의 믿음의 여정을 묵상하는 신심이다. ‘어머니의 길(Via Matris)’ 혹은 성모칠고(聖母七苦)라고 불리는 이 신심 전통은 이집트 피난 사건, 시메온의 예언,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리심, 십자가를 지신 예수와의 만남,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죽음, 돌아가신 예수를 안으심, 돌아가신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순간까지, 모든 순간을 믿음으로 감수하신 성모님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모든 신심 전통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대신한 구세주의 고통에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그 고통에 대한 자발적이고 실질적인 참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인천주보 3면, 김태환 요셉 신부(연희동 본당 주임)]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II
부활 시기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시작으로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의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교회는 구원의 완성이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부활을 통한 기쁨과 활력 그리고 구원의 동참에 대한 희망을 묵상하게 된다.
이러한 부활의 신비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는 신심 기도로 ‘빛의 길’이 있다.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낯설지만, 사순 시기의 대표적 기도인 ‘십자가의 길’에 비견될 만한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부터 성령강림 사건에 이르기까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 등을 묵상토록 돕는다.
사실 이러한 기도의 필요성과 의의는, 교회에서 승인된 다양한 형식의 ‘십자가의 길’ 안에서 이미 발견된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완성인 부활의 신비까지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15처)도 있고, 최후의 만찬을 시작으로 부활 사건으로 끝맺는 ‘십자가의 길’(16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염원들은, 성 칼리스토 카타콤 벽에 새겨진 작품에서 얻은 영감과 살레시오회의 사비노 팔룸비에리(Sabino Palumbieri) 신부의 노력으로 빚어진 ‘빛의 길’로 정리되고, 1990년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서 첫 ‘빛의 길’이 장엄하게 봉헌된다.
빛의 길은 ‘십자가를 통하여 빛으로(per crucem ad lucem)’ 나아가는 신앙의 신비와 구원 여정 속에서 그 일부를 차지하는 고통과 희생의 체험 중에도, 부활의 참된 가치인 해방의 기쁨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대중신심과 전례 지침서』 153항 참조)
빛의 길이 담고 있는 각 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마태 28,5-6)
2처.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함(요한 20,6-8)
3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요한 20,16-18)
4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심(루카 24,13-15)
5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며 당신을 드러내심(루카 24,30-31)
6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심(루카 24,38-39)
7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심(요한 20,22-23)
8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의 믿음을 굳건히 하심(요한 20,27-28)
9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한 21,7.13-14)
10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부여하심(요한 21,15-19)
11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맡기심(마태 28,19-20)
12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사도 1,9-11)
13처. 제자들이 마리아와 함께 성령을 기다림(사도 1,13-14)
14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된 성령을 보내심(사도 2,1-4)
이 빛의 길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의 노예에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살아가는 부활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성모 신심] 전례와 신심 생활
교회 역사 안에서 신심 생활의 전통은 신앙을 풍요롭게 하는 긍정적 효과와 함께 때로는 과도한 열정으로 문제를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올바른 신심 생활을 위한 다양한 고민과 노력이 이어졌고, 2001년 12월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는 『대중신심과 전례 지침서』라는 문헌을 통해 교회의 전례와 신심 생활 전통의 조화로운 관계를 도모할 필요성을 전했다.
문헌에서는 “전례와 대중 신심의 경계는 서로 다르지만 둘 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합법적인 표현”(58항)이라 전하며, 전례와 신심 생활이 지닌 각자의 가치와 고유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전례가 모든 교회 활동에 우선되는 중요한 영적 자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거룩한 신비의 거행인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헌장』 10항)이기에, 모든 신앙과 신심 생활의 근간이며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음을 밝힌다. 하지만 문헌은 동시에 교회 내 다양한 신심 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유익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백성의 신심 행위는 교회의 법률과 규범에 부합하는 한 적극 장려”(『전례헌장』 13항)되어야 하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대중적 신심은 무시될 수 없고, 무관심이나 경멸의 대상도 아니며, 오히려 올바른 신심 생활은 환영받고 장려되어야 한다고 밝혔다.(「25주년」 18항 참조)
우선 전례란 합법적으로 위임된 사람들이 공인된 전례서를 갖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으로 봉헌하는 공적 예배를 가리키는데(교회법 834조 참조), 여기에는 일곱 가지 성사와 준성사들, 즉 인준된 예식이 있는 축성 축복식 등이 있다. 교회의 공적 기도서라 불리는 『성무일도』 내용 역시 전례에 포함된다. 이에 비해 앞선 전례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공동체적 예배를 신심 행위로 지칭할 수 있는데, 다양한 기도(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삼종기도, 호칭기도, 성시간 등)와 하느님의 어머니께 대한 공경과 성인 공경, 성지 순례와 종교적 행렬, 종교무용과 성극 및 메달 착용 등이 신심행위에 해당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674항 참조)
사실 모든 신심 행위는 전례에서 기념하는 구원사적 신비들을 기초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심 생활은, 신앙의 중심이자 필수적 영역을 차지하는 전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지나치게 감수성에 의지하거나 미신적 요소가 섞인 신심 행위가 있었고, 전례와 신심 행위가 혼재된 모습이나 부적절하게 전례의 구조와 내용을 왜곡시킨 경우도 있었다. 또한 전례에 대한 적절한 신앙교육의 부족은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례 참여도와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신자들을 전례의 주변인으로 만듦으로써 감성적 신심 생활로 이끄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올바른 신심 생활은 결코 전례와 대립되지 않고, 오히려 전례를 통해 거행되는 거룩한 신비를 더 충만하게 체험하도록 돕는다. 이에 전례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신심 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더 풍요로운 신앙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기도하는 교회] 향을 드리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분향의 의미는 분향하는 대상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먼저, 제대와 십자가 그리고 성체께 분향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분향하는 것으로서 ‘공경’의 의미를 지닙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9항)
특히 제대는 이미 초세기부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총지침 298항) 제대는 십자가의 희생을 성사적으로 드러내는 표지이며, 제대 위나 주변에 놓아두는 ‘수난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있는’ 십자가(총지침 308항)는 그 점을 더욱 명확히 드러내므로 제대에 분향할 때에는 십자가도 함께 분향합니다. 그래서 제대에 분향할 때에는 분향 전후에 따로 절을 하지 않으며(총지침 277항) 십자가에 이르러 절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한편, 성체께 하는 고유한 절은 무릎 절이므로(총지침 274항) 성체께 분향할 때에는 향을 드리기 전후에 절을 하는 대신에 무릎을 꿇은 채로 분향합니다.(주교 예절서 94항)
사람에게 분향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를 지닙니다. 사제에게 하는 분향은 그가 받은 성품(聖品)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며, 백성에게 하는 분향은 세례성사 때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입니다.(총지침 75항)
반면에, 예물을 진설한 다음 예물에 분향하는 것은 위의 경우와는 달리, ‘봉헌’의 의미를 지닙니다. 예물에 대한 분향은 교회의 예물과 기도가 향이 타오르는 것과 같이 하느님께로 올라감을 드러냅니다.(총지침 75항) 제대에 진설된 예물은 성변화 이전의 상태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분향이 공경의 의미를 지니지 않으므로, 예물에 분향할 때에는 절하지 않습니다.(총지침 277항)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2. 미사 해설 – 성찬 전례 (26) 영성체 예식 – 평화 예식 (1)
평화 예식
126. 그다음에 사제는 팔을 벌리고 분명한 목소리로 기도한다.
✚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사제는 손을 모은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교우들은 응답한다.
◎ 아멘.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7,15).
제자들이 두려운 마음에 문을 닫아걸고 다락방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친히 오시어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굳게 잠긴 문을 열어주시고, 평화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이렇듯 제자들에게 허락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닫힌 문을 평화로 열어주십니다.
영성체 전 이루어지는 평화 예식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교회와 온 인류를 위해, 평화와 일치를 간구하고, 또한 하나의 빵을 나누기에 앞서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 예식입니다. 우리의 평화의 인사는 하나의 빵을 나누기에 앞서 하느님의 자녀들끼리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몸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거룩한 사랑의 행위라고 바라본다면, 우리 역시 이 사랑의 행위에 동참하기 위해 사랑과 평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기 교회 때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향한 입맞춤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눴습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1베드 5,14). 이 인사는 주님을 향한 공통된 믿음과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해 공동체원들을 평화로 묶어줍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 예식은 “서로 사랑하기 위한” 우리의 작은 몸짓이며, 주님의 평화에 발맞추는 거룩한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미사 때 평화의 예식을 통해 평화로 인도받고, 평화를 나누며, 평화로 하나가 되기 위한 초대를 받습니다. 다음과 같은 말로 말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다음 편에서도 평화 예식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2023년 11월 12일(가해)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대전주보 4면,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사목국 차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63. 미사 해설 – 성찬 전례 (27) 영성체 예식 – 평화 예식 (2)
127. 사제는 교우들을 향하여 팔을 벌렸다 모으면서 말한다.
✚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교우들은 응답한다.
✚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모든 이는 가벼운 절을 하며 서로 평화와 친교와 사랑의 인사를 나눈다.
사제는 부제나 봉사자에게 평화의 인사를 한다.
◎ 평화를 빕니다.
지난 편에서 평화 예식의 핵심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통해 우리가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곧, 성체성사로 주님과 우리가 이룰 친교를 이루기에 앞서, 함께 모여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주님의 평화를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의 예식 중 인사는 단순한 겉치레의 인사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전달해야 합니다. 설령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의견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전혀 친분이 없는 신자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서로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영성체 직전에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도록 도와줍니다. 나아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 공동체 안에 평화가 머무르도록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평화를 빌어주는 것이 바로 이 평화의 인사가 지닌 지향점입니다.
평화 예식에 대한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과 인류 가족 전체의 평화와 일치를 간청하며, 신자들은 성체를 모시기 전에 교회에서 누리는 일치와 서로의 사랑을 드러낸다. 한국 교구들에서는 평화의 인사로 가벼운 절이나 가볍게 안음, 손을 맞잡는 동작을 할 수 있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82항)”.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형식보다 인사가 담고 있는 분명한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논쟁과 두려움, 미움과 분열은 잠시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친밀하게 나눌 때 우리는 주님께서 일러주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하나될 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 우리가 할 수 있는 합당한 준비는 바로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의 평화를 건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주님 모시기에 합당한 영적인 준비를 갖추기를 원한다면, 평화의 인사의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평화를 빌어준다면 사제의 초대는 구체화될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다음 편에서는 빵나눔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알아볼까요]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 (5)
1. 화장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오랫동안 화장을 금지하던 가톨릭교회는 “장례식은 그리스도인 죽음의 파스카 성격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야 하며,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에, 또한 전례 색상에 관한 것에도, 더 잘 부응하여야 한다”(전례헌장, 81)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존중해 “교회는 죽은 이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경건한 관습을 보존하기를 간곡히 권장한다. 그러나 화장을 금지하지 아니한다.”(교회법, 1176조 3항)라며 허용했습니다.
지난날 교회의 가르침대로 매장을 고수하던 한국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과 교회법을 따르고, 화장이 주된 장법(葬法)으로 바뀐 오늘의 우리 사회현실을 고려해 ‘상장예식’에 화장 예식을 수록했습니다.
2. 화장 예식
‘상장예식’ 282~302쪽에 있는 대로 화장장에 이르면 화장하더라도 육신의 부활 신앙은 전혀 달라지지 않음을 밝히는 기도를 합니다. 독서를 봉독하고 화답송을 부른 다음 마침 기도로 마무리하며 시신을 사를 때 위령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시신의 뼈를 모으는 습골(拾骨)과 화장한 뼈를 빻는 쇄골(碎骨)을 지켜보는 유가족의 아픔과 슬픔이 지나쳐 부활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령기도와 장례미사에 있는 “나의 살갗이 뭉크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욥기 19,23-27)라는 기도를 바침으로써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따르는 자세를 드러내야 합니다. 유골을 봉안하기 전에 청원 기도를 바치고 무덤을 축복한 다음 봉안하는 동안에 시편 22(23)편이나 성가를 부릅니다.
3. 산골(散骨) 금지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
2016년 교황청이 죽은 이의 매장과 화장된 유골의 보존에 관한 훈령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Ad resurgendum cum Christo)’를 반포하고, 201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산골에 관한 질의응답’을 공포했습니다. 교회는 매장을 장려하지만, 육신의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부정하지 않으면 화장도 허락하고, 유골을 묘지나 교회가 지정한 장소에 보존하게 합니다. 죽음으로 영육이 나뉘어도 부활할 때 하느님께서 썩지 않는 생명을 주시고, 영혼과 다시 결합한다는 믿음과 부활할 육신에 대한 존경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골함을 묘지 공간의 수목‧화초‧잔디 등에 묻으면 비석이나 표지를 세우고 고인을 추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목장은 매장의 의미와 고인의 이름을 표시해 추모 장소라는 점과 육신이 부활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백 되어야 합니다. 봉안 기간이 지난 유골은 별도의 안치소를 마련해 매장의 형태로 영구하게 봉안하고 이름을 표기해 추모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4. 우제(虞祭)의 의미와 교회
우제는 시신을 묘소에 두고 돌아온 뒤에 놀란 그의 영혼을 달래는 제사지만, 이별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유족을 안정시키는 기능도 있습니다. ‘상장예식’은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서 어떤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신중하고 현명하게 검토하고,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적응을 사도좌에 보고하여 동의를 얻은 다음 도입하는…”(장례 예식서, 21)이라고 하는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위해 전통 상제례를 현대에 맞게 그리스도교적 상제례 예식서를 만들 것을 요망한다.”(사목회의 의안 4 전례, 16)라는 한국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의 우제를 그리스도의 부활, 성인들의 통공, 희망 등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해 수록했습니다. 이 예식을 통해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이별의 아픔을 달래면서 영원한 희망을 북돋아야 합니다.
5. 우제의 시편들
장례를 마치고 집에서 초우(初虞) 예식을 거행하고, 다음 날 초우와 같은 재우(再虞) 예식을 지낸 뒤 미사에 참례해 돌아가신 분과 통공을 다지며, 셋째 날 미사에 참례하고 묘소나 봉안당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지냅니다. 초우 때 바치는 시편 제30(31)편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다가올 어려움에서 보호받기 위해 주님을 향한 한없는 믿음을 나타내는 노래로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그분 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삼우 때 바치는 시편 제4편은 난관을 이겨낸 경험에서 생긴 주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어떤 아픔과 번민에 빠지더라도 주님께서 내 편이 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으면 모두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런 굳센 믿음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서 자기를 건져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에게 생기고,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처지든 평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던 이가 그분께 돌아갔지만, 주님 품에서 아무 걱정 없이 편히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머지않은 날 주님께 돌아간 이들의 뒤를 따라갈 것이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품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안식을 함께 누릴 것입니다.
6. 탈상(脫喪)과 사십구재(四十九齋)
탈상은 상(喪)을 벗는[脫] 유교 의례로 운명한 지 2년이 되면 대상(大祥)을 거행하고 상복(喪服)을 벗지만, 담제(禫祭)와 길제(吉祭)까지 마쳐야 후손에게 온전한 흠향(歆饗)을 받는 조상신이 됩니다. 이에 비해 사십구재는 죽은 이의 중음신(中陰身)이 바람직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를 비는 불교 의례입니다. 돌아간 이의 중음신이 좋은 곳에서 다시 나도록 정한 기한 동안 정성을 들이고 경을 읽는 것이므로 유교의 탈상과는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유교의 탈상이나 불교의 재(齋)로 죽은 이의 상(喪)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유교의 조상신이 되거나 불교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지 않으므로 탈상을 위한 제사나 새로운 생을 위한 재와 무관합니다. 따라서 의미와 목적이 전혀 다른 교회의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탈상이나 사십구재를 대체(代替)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선종한 이들의 영원한 안식과 남은 이들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유교 탈상의 대체가 아니라 효의 발로(發露)로 일정한 기간 삼간다는 의미에서 미사를 봉헌하고자 한다면 선종한 지 50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위령기도를 바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파스카 축제를 마무리하는 쉰 번째 날에 ‘종결하다’라는 의미로 제사를 지냈고, 신약시대는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의 새로운 파스카가 완성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이승의 나그넷길을 마무리하고 주님 안에 새로 태어난다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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