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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보는 민족의 기원
13. 漢나라 건국의 비밀
漢 나라는 잘 알려졌다시피, 漢족/夏華 족의 정체성을 만드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원대륙 최초의 통일국가 秦나라 이후에 들어선 漢 나라는 BC 202년에 漢고조 劉邦 에 의해 장안(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세워졌으며 중간에 왕망/김일제의 新국이 잠시 장악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낙양에 도읍을 옮겨 AD 220 에 멸망합니다. 전자를 前漢, 후자를 後漢으로 통칭하고 있습니다. 漢나라를 세운 劉邦은 태조라고 불리지 않고 고조라고 불리웁니다만, 이것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유방을 고조라고 칭하는데서 비롯되는 통칭입니다. 유방은 진나라 말기 장쑤성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엔 진나라 타도를 기치로 하여 군사를 일으켜 항우의 군대와 연합하였다가 후에 패권을 놓고 항우와의 전투를 벌여 결국 중원을 차지하는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유방을 고조라고 칭하는 점이나, 농부의 아들로써 그 출신이 명확하지 않게 기록되어있어 출생과정이 미스테리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漢나라의 수도 장안(서안)은 섬서성에 위치하고 있으며, 漢고조의 성씨인 劉는 원래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鄭나라 읍명, 혹은 하남성의 읍명으로 사용되었다고 춘추지리고는 밝히고 있습니다.
鄭나라는 섬서성 화현부근에서 하남성 신정시로 옮겼는데, 이런 이유로 두 지역모두 劉라고 불리웠던것 같습니다. 섬서 하남성은 바로 오르도스, 晉, 秦, 등의 민족과 나라가 겹치는 곳이므로 제 글에서 나오는 우리 조상의 부족들이 모두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劉라는 글자를 풀이해보면 卯 + 金 + 刀 가 되는데, 바로 이지역세 살았던 세종 족을 합하여 苗 + 金 + 刀 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가능성으로 시작해보았습니다.
즉, 오르(月/魏/苗) + 사카 (金/朔/)+ 다르(代/辰) 의 세 종족을 아우르는 지역/세력 이라는 뜻으로 그곳의 지명이 劉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보았습니다. 이지역이 바로 이들 세종족이 이합집산을 하던 바로 그곳이라 이 지역명이 원래 劉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던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漢나라의 건국과정을 살펴보자면,
우선, 한서(漢書) 주석에 의하면 한고조 유방은 準(편평할 준)이라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응소, 복건, 이비, 문영, 진작, 사고 등, 많은 이들이 유방을 準 이라는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응소는 융고야 준협권준야 (隆高也 準頰權準也) 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높이 솟아있다 그리고 뺨이 고르고 평평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같이 유방의 비범치 않은 얼굴모양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징에서 비롯된 고사성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隆準龍顔(융준용안) 입니다. 용준용안의 뜻은 원래 이마가 높고 코가 우뚝하다는 뜻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마가 넓은 시원한 인상을 말하거나, 빼어나게 잘생긴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쨌거나, 머리/이마가 높이 솟아있고 코가 우뚝하며 뺨이 평평한 범상한 인상이었음을 하나같이 지젹하고 있습니다. 한편, 漢書는 後漢시절 반고에 의해 집필된 기전체의 역사서로써 사마천의 사기를 보완한 책으로 유명한 책입니다. 한나라 당대에서 쓰여진 한나라의 역사로 생생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또 한가지 이책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는데, 漢書 券 九十九에 보면 劉씨는 원래 爲씨였는데 이것을 폐하고 劉씨성으로 바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月/오르/魏 와 같은 맥락으로 爲씨, 魏씨, 鬼씨, 衛, 基 씨를 모두 한 뿌리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爲씨는 漢나라는 물론 삼국(고구려)에도 유명한 귀족성으로써 이 때문에 漢과 고구려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많이 제기하고 있습니다.
魏書에서도 본래 위씨(爲氏)는 규씨(女+爲 氏) 성씨 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이 하백의 후손이라고 하며 규씨 성을 가진 것은 요왕검의 외가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즉, 하남 섬서에서 시작하는 오르/언/월 족에서 爲/魏씨등이 나온 것이고 , 魏씨가 鬼씨에서 나왔다하듯, 爲씨는 규씨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漢족의 조상이라 여겨지는 劉邦 은 과연 알타이/사카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바로 성씨에서도 이들의 정체성은 들어납니다. 이들이 爲씨에서 劉씨로 바꾼 이유도 바로 묘 + 금 + 도 , 즉 알타이와 사카족을 아우르는 의미를 가지기 위해 劉라는 글자를 고른게 아닐까요. 이들이 정한 漢이란 명칭도 苗 + 大 + 水 입니다. 漢의 뜻은 은하수로써 모든 별을 아우르는 강을 의미하며, 辰의 의미처럼 月, 日 등을 포함합니다. 한국의 지명이나 역사서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을 중화사상 때문이라, 해석하고 있지만, 漢이란 명칭자체가 알타이와 사카족을 총칭하는 글자로써 사용했던 것이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漢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 것도 위/월씨, 劉씨, 알타이, 漢 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유추가 되는 명칭이라 생각합니다. 즉, 漢세력을 대표하던 월지 세력이었기에 漢강이 오르/아리 수라고도 불리웠다는 이야기이지요...
신라 문무왕비에도 漢,이나 星漢등의 글자가 나오는 것은 원래 漢이란 글자가 아사달 민족을 통칭하는 글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듯, 漢나라의 劉씨 황제들은 알타이/사카 계통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또한, 바로 이곳에서 秦과 晉이 멸망하고 三韓이 세워졌고(BC 194년), 또 이곳에서 漢이 세워진 것이라면(BC202년), 비슷한 곳, 비슷한 시기에 두 나라가 동시에 생겼나는 의미인데, 어찌된 것일까요...
삼한/마한은 조선준왕이 연의 위만에게 속아 왕위를 빼앗기고 바다를 건너 韓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韓왕을 자처한다고 써 있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아사달이라던지 조선이란 나라와 韓은 관계가 없는 단어였습니다. 하∙은∙주/조선/숙신 시절 周나라의 姬씨가 韓이라 칭하며 세워진 韓말고는 딱히 조선과 관계되는 韓이란 명칭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韓의 도읍지가 평양이기도 하며, 준왕이 세운 도읍지가 평양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韓의 평양은 하남/섬서에 위치한 평양을 말하고있음은 자명하구요, 준왕의 기록도 바다를 지나 韓地에 가서 韓王을 자처했다는 기록은 고비사막을 지나 晉(韓)의 땅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혹자는 장안과 평양이 같은 곳이라고도 합니다. (元사에 보면 동녕로 본 고구려 평양성(東寧路 本 高句麗 平壤城) 역왈 장안성(亦曰 長安城) 이라고도 나오는데, 평양과 장안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앞뒤문장을 연결하여 해석하면, 晉왕이 살던 곳에 고려왕이 살았는데 평양성이라하고 이를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해 기자준왕이 다다른 韓은 하남/섬서의 韓原 외에는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또 기록상으로도 삼한의 위치를 晉의 지역으로 상정하기도 한다는 점은 전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또, 여러 사서에서 秦나라시절의 노역을 피한 秦人인들이 韓의 땅으로 피해가서 辰韓을 형성한다고 나오는데, 이것도 생각해보자면, 秦나라 당대에는 三韓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秦어를 쓰는 秦인들을 요령에까지 데리고 와서 노역을 한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노역을 맡은 이들은 그곳 토착민을 쓰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秦어를 쓰는 秦인들이 피해들어간곳은 바로 옆동네 韓原이 아니였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같은곳에 나라를 세운 기자조선준왕과 漢유방은 과연 어떤 관계인걸까요...
여기서 유방의 휘호가 準이였음을 상기한다면 유방과 준왕의 관계는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기자조선의 준왕도 이름이 準입니다. 기자조선의 성씨는 基씨로 상나라의 왕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나라는 하나라에 이어서 산동에서 섬서/하남까지 이르는 나라였고 爲씨가 규씨의 후손이라 밝힌 것처럼 箕씨와 鬼씨와 魏씨도 서로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상나라는 산동의 대문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나라로써 대문구는 편두, 새토템, 태양숭배로 유명한 동이족 문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양, 달, 산(불), 즉, 아(月).사(日). 달(山) 을 의미하는 문양이 그려진 팽이형 토기가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고조선의 유민이 모여 만든 辰韓 (삼국사기)의 풍습에 편두가 남아있는 것은 바로 대문구 문명에서 비롯했던 것이고 이를 이어받은 상나라도 아마 편두풍습이 있던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후에 이들 상나라 세력 鬼方의 후손 쿠샨을 이어 신라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즉, 기자조선의 지배층에 편두가 있었다는 말인데..기자조선의 후예, 준왕도 韓의 땅에서 韓왕을 자처하였다면, 바로 이 준왕도 편두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韓과 漢이 관계가 있다면, 즉, 조선준왕이 편두라면, 漢유방은 어떨까요..? 이 해답은 유방의 용모를 묘사한 準/용준용안/융고야 준협 권준야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漢방의 특이한 용모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이들이 보기에 보통 특이했던 것이 아니였던 모양입니다. 특히 이마가 높고 코가 우뚝하며, 뺨이 평평하다는 묘사는 바로 편두의 특징과 동일합니다. 즉, 용준용안은 다름 아닌 편두의 모습을 나타낸 고사성어인 것입니다. 韓의 준왕은 후사가 없어 멸절한 것으로 묘사되어있는데 그 의미는 그 후로 韓의 지배층이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국명도 처음엔 韓이였으나 辰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 지배세력의 변화를 암시합니다. 위략(魏略)에는 준이 해중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준의 일정무리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준의 자식들이 조선에 남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漢의 유방의 경우 규씨에서 유래된 위씨로 알려져 있고, 劉는 원래 그 지역명이라 합니다. 劉邦 의 邦자 자체도 나라/무리 라는 뜻으로 유방이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劉의 세력을 나타내는 뜻에 가깝게 보입니다. 劉 라는 지역명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지역에 웅거하던 오르/도스/사카 세력을 아우르는 지역명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상하게도 漢나라는 태조가 존재하지 않고 기록상 고조만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고조 유방은 즉위 7 년 만에 죽고 그 이후로는 한혜제가 등장하는데 중간에 呂황후의 섭정있은 후에 어렸던 혜제가 장성하여 황위를 이어받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즉, 유방과 혜제사이에는 어딘가 부드럽지 못한 세력의 이동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결론을 말하자면...기자조선 준왕이 고비사막을 지나 三晉 의 하나인 韓原을 점령하고 韓왕을 자처하다가 준왕(유방)의 대에서 기자조선 세력이 이 지역의 대권을 잃고, 爲/魏 씨 세력이 점령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箕씨에서 韓씨로, 또 爲씨로 주도 세력의 성씨가 바뀌고, 준왕의 韓에서 아사달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辰으로 바뀌었다가, 爲에 의해 밀려나 서쪽으로 이동하며 辰/월지국 이 되며, 섬서/하남의 爲씨들은 국명을 漢으로 정하는데 漢 혹은 劉 자체가 이곳의 아사달족을 뜻하는 국명과 성씨가 아닐까 합니다. >
爲씨/魏씨에게 밀린 辰은 韓의 준왕세력이 그 代에서 주도권을 잃게 되고, 이동하면서 중앙아시아의 月氏세력들과 秦유민들까지 통합해가면서 魏씨주도의 月枝國이 세워지는게 아닐까요. 이들 月枝세력은 이동하면서 곧 대월지 소월지로 나뉘며 소월지는 감숙지역, 대월지는 중앙아시아를 이동하다가 결국 인도북부에 정착하게 됩니다.
초기에 辰을 세우며 주도했던 기자조선세력은 이후 월지세력에 복속되는 세력이 되었으며,후에 조선의 유민, 秦인, 또 황제헌원의 후손 韓인의 결합세력인 이들이 辰韓이 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후에 월지 5국 때까지도 이들의 정체성은 계속 남아있어서 ad 2 세기에 쿠샨이 굽타와 파르티아에게 밀려 감숙, 타림분지로 올라갔다가 그 지영의 오손 등의 멸망세력과 결합하여 훈족을 형성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아틸라의 모습은 상, 기자조선, 진한, 쿠샨에서 보여오는 편두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韓이라는 부족명을 가지고 있고 ( 훈이라고 발음하기도하지만, 많은 경우 헌/한 이라고 발음하고 있습니다. 동영상의 바로 첫 부분, 아틸라 더 한 을 소개하는 발음을 잘들어보세요. 헝가리의 헌도 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xPoYllGSmNw )
나중에 합류한 오손유민은 후에 설명하겠지만, 塞족, 연독국 사람들과 섞여사는 구조였다고 기록에 나오므로 이들이 국가를 함께 세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고 봅니다.
오르도스/사카에서 보이는 말위의 동복/구리솥도 역시 오르도스/언덕/흉노의 정체성을 가지던 조선세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보이는 편두의 기록은 바로 이들 기자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들의 옛 발음을 비교해보면
漢 은 (s)ŋārs / ŋ̥ānh 즉, (슨)아르/ (응)안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의 s 발음은 묵음으로도 발음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곳에 위치하는 낙양이 한반도에서 漢陽이 되고,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유민 낙랑의 樂자라든지, 朔족의 (s)ŋark 등의 발음이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漢江은 아리수라고도 알려져있습니다. 즉, 漢을 "(슨)아르" 로 발음하기도 했다는거죠. (슨은 묵음에 가까운...) 어쨌든 漢의 발음은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언/아르/위 등의 발음으로 魏/爲/오르와 통하는 발음일 듯하며, 역시 항상 언덕족 중에서도 언족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르도스에서 나온 匈奴나 漢이나 혈통적으로는 서로 큰 구분이 없음을 알수 있고 다만 이들이 하은주/조선에서 비롯된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이냐 유목생활을 지속하는 집단이냐의 차이로 갈려졌던 게 아닐까 합니다. 漢은 티벳-장족어를 쓰는 중국인들의 언어가 아니라, 알타이/韓 어를 쓰는 종족을 상징하는 글자인 것입니다.
14. 朝鮮, 漢, 辰, 三韓, 蜀漢, 城漢
전 글에서 韓과 漢의 관계를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漢은 기자 준왕이 건국한 韓의 후신이며 爲씨가 세력을 잡으며 韓을 밀어내고 漢으로 국명을 바꾼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들 몇몇 중요한 글자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보면..
a. 漢의 옛발음은 <(s)ŋārs / ŋ̥ānh> 에 가까워 <(승)아르 /(응)안> 으로 발음될듯합니다. 이들이 아리 (한강/아리수) 라고 발음되는것이 이상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b. 朝鮮의 발음은 다르사르/다르단 에 가깝고 뜻은 아사달과 같음도 전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c. 辰의 경우 여러 군데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글자/발음으로 우리민족과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日+月 을 모두포함하는 별/달 이라는 뜻으로써 옛 발음은 "다르" 에 가깝습니다.
朝의 발음도 "다르"에 가깝고, 숙신도 "辰", 고조선의 유민도 "辰/辰韓", 후에 발해도 "大辰" 이라 칭합니다. 모두 아사달 부족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d. 韓 이란 단어는 황제헌원에서 내려온 夏/周에서 나온 개념에서 비롯되었으며 夏의 옛발음은 gara/gyara 로써 이들 후손은 姬성을 쓰고 韓씨라고 발음하기도 합니다. 희姬라는 발음은 복희 에서 나온듯하며 복희의 뜻 자체가 밝고 희다 라는 뜻인 듯 합니다. 이것이 가라 로 발음되는 것은 복희와 여와의 병합을 의미하며 희/키 + 아르 = 기아르 에서 비롯된 게 아닐가 생각해 봅니다. 후에 韓이란 의미는 기자조선이 건국한 韓으로 이어집니다.
e. 조선은 신기하게도 천독/연독/신독이란 이름을 남기는데, 이것이 바로 언덕/오르도스와 같은 의미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이들이 인도북부로 내려가 사카와 신독 등의 이름을 남긴 세력과 후에 비교를 통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렇듯, 독/덕/다르 라는 세력이 代족/ 辰/도르/타이 등의 이름으로 내려오는데, 이들은 한반도/요동/산동의 비파형 청동기 세력에서 태동되었던 것으로 전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예맥의 辰, 혹은 염제의 단)
조선에도 천독/연독 에서보듯 毒이란 발음으로써 다르/덕의 흔적이 남아있게 됩니다. 후에 漢 을 세우는 초기 세력이 기자조선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 후에 이곳에서 등장하는 魏,蜀,吳 의 蜀漢의 국명도 심상치 않은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유비의 蜀漢은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蜀이란 글자를 사용하는데, 중국 정사에 속하는 진수의 삼국지에는 원래 조조의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며 기술되어집니다. 그 후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에만 촉한을 정통으로 보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진수는 삼국을 통일한 晉시대 인물로써 유비의 漢을 漢이라 기술하지 않고 蜀이라 기술하는데, 이것 때문에 蜀韓이라 불리 웁니다. 최근에 발간된 오카다 히데히로, 전 동경대 교수가 펴낸 "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이란 책에서는 이것을 魏의 정통성을 살리기 위하여 유비의 漢을 일부러 蜀으로 기술하였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은 월/아르 족과 대/독족이 대대로 살던 곳입니다. 유방의 漢은 魏/爲씨가 주도 세력이었으나, 유비의 蜀漢은 독/덕 족을 표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진수는 유비가 세운 나라이름 그대로 기록하였지만, 나관중의 소설에서 이들을 漢과 직접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촉한이라 기록한듯합니다. 蜀의 경우, 현재 촉이라 발음하지만, 대부분의 이를 유사한 다른 글자들은 "독"이라 발음되 는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獨,),
이들 毒, 蜀, 代 등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지속적으로 보이는데, 특히 代족은 하남, 섬서, 오르도스 지방에서 오랫동안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이들이 후에 北魏를 세우는 탁발씨와도 관계가 있으며 북위의 의 원래이름이 代국이였던 사실....탁발씨라는 성씨의 발음자체가 대족/덕족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탁발씨는 5호16국 중 선비 계열이라하며, 조조와의 관계로 북위를 칭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조의 위나라나 탁발의 代나라(代족)은 뿌리가 비슷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代의 옛 발음은 턱/더/러/ Ł(h)ǝ̄uks 등이 되겠습니다. 후에 漢의 국명이 또 나오는데 저족의 이웅이 蜀을 표방하는 成국을 만들었다가 후에 漢으로 바꿨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이를 成漢국이라 칭하며 前秦의 전신입니다.) 저족이라면 티베트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굽타와 파르티아에 밀리면서 이동한 월지세력입니다. 후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들이 蜀 과 成 과 漢 을 연결시켜 국명을 짓는데 중국어로써는 이들의 연관관계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蜀은 말씀 드린데로 "독"에 가까운 발음이고 成은 옛발음으로 deŋ/뎅/덴 이란 발음입니다. 모두, 덕/다르/단 등의 발음과 닿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蜀을 표방해 덴(成)이란 국명을 짓고 이를 후에 漢으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 이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5. 朝鮮, 樂郞, 漢
낙랑은 漢나라가 위만조선(bc 108년)을 무너뜨리고 세운 漢4군으로 알려져있는 지명입니다. 하지만, 조선과 낙랑을 동일한 단어로 많은 사서기록에 남아있으며 이미 군현이 아니고 국가의 형태혹은 조선의 유민을 낙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낙랑국과 고구려와의 접촉기록등은 낙랑현이 존재할 당시에도 낙랑국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낙랑은 조선을 잇는 국가였고 이들이 위만조선등이 망하고 漢사군에 일부 복속되었지만, 일부 한반도(평양)에 세력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로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하는 나라나 왕들에게 낙랑 태수 등의 명칭이 항상 따라 다니는것으로 보아, 한반도에 낙랑이란 국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낙랑군은 요령/갈석산 부근, 위만조선의 지역을 말함)
위만조선은 요서에 위치하고 있었고, 당시에 요동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곳은 고구려/읍루/숙신/동예 등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는 그 위치인 요서에 한사군을 설치했던 것이고 이에 밀려온 낙랑은 한반도에 터를 잡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하북과 요서에 낙랑이 위치했음을 여러 기록과 조선현이란 존재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낙랑군이 무너지면서 한반도의 낙랑이나 신라등에 합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랑의 유물로 보아 오르도스계통 (선 흉노) 청동기/철기문화를 가졌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당시 중원의 문화와 확연히 틀리며 기자조선 등은 오르도스계통의 유물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낙랑인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a. 삼국사기를 보면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낙랑인들은 스스로(我)를 阿殘 (아잔)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원래의 무리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라 합니다. 즉, 언(덕) "아"를 쓰며 오르도스의 오르/아족임을 나타냅니다. ( 오르도스 청동기와 낙랑인의 청동기가 거의 유사함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이 더 높아보입니다.)
b. 통전에는 조선의 유민이 나뉘어 70여개 나라를 만들었는데 모두 땅이 사방 백리였다“
c. 후한서에는 "서한이 조선의 옛 땅에다 처음에는 4군을 두었다가 뒤에 2부를 두었다..일흔 여덟 나라를 세웠는데 각기 만호씩 되었다.
d. 후한의 응소는 "낙랑은 옛 조선국이다"라고 했으며
e. 신당서에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f. 史記 夏本記 太康地理志에는 "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장성(長成)의 기점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곳은 바로 하북성 창려현의 만리장성이 끝머리 진황도가 위치하는 곳입니다.
g.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도..
< "辰韓사람들은 도망쳐 온 중국의 秦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낙랑군 주민 출신이다" 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기자조선세력과 秦세력의 연합이 辰韓 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대동강 유역 낙랑토성지에서 출토된 기와에는 대진원강(大晉元康),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등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대진원강등은 서진의 혜제의 연호로 보면 서기 291년부터 299년간 사용된 연호입니다. 이부분에대해선 고민 해봐야할 부분인 듯합니다. 낙랑은 기자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로 보고 있는데, 기자의 상나라는 朔 (사카)족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朔의 옛발음은 (s)ŋ̥rāk 로써 (승)락/스락/삭 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락랑과 통하는 발음입니다. 또 낙랑을 盧龍으로 기록하기도 했느데 (龍은 언덕이란 뜻으로 롱/농 등으로 발음됩니다.) 즉, 낙랑의 발음과 뜻 모두, 朔(사카)와 언덕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a. 아사달 ( 언+ 사카 + 덕) 과 기자조선이 모두 이곳 오르도스 하남/하북/섬서에서 나왔고
b. 낙랑은 옛 조선국이라는 기록되어있고,
c. 낙랑의 국명이 사카/언덕을 뜻한다면 기자조선의 후손이란 의미와 잘들어맞고
d. 낙랑인 스스로 언덕 阿자를 사용하여, 阿殘이란 표현을 했던 것으로 보아, 아(언덕)세력에서 남겨진 이들임을 확인 시켜주고 있습니다.
f. 신당서는 평양성을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당서 시절은 이미 漢나라 시대가 아니므로 한4군이 없어진 시기입니다. 이것은 평양성에 정착한 낙랑국에 낙랑현이 무너지면서 이들 유민이 유입된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g. 또한 수서와 북사에는 "신라는 옛 낙랑의 땅에 있다"라는 기록을 남겨서 신라가 갈석산, 혹은 평양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섬서/하남/오르도스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오르도스에서 아사달에 기자가 조선을 세우고 周나라의 팽창으로 기자조선은 하북, 요령, 한반도북부로 이동하게 되고,
b. 그후 오르도스는 흉노와, 晉, 秦 등이 웅거하는 곳이 됩니다. 秦이 통일을 했다가 망하면서 위만이 조선을 점령하고 준왕은 晉의 땅에 韓을 세웁니다.
c. 준왕의 韓은 辰이라 고치며 서진합니다. 섬서/하남은 爲/魏씨가 장악하며 국명을 漢나라로 고치고 劉씨로 개성합니다.
d. 漢나라가 생기며, 韓국은 서진하지만, 남은 조선유민은 동쪽으로 밀려나가며 위만조선지역의 준왕후손세력들과 합칩니다.
e. 이들 하북, 요령의 기자조선 유민이 낙랑이 됩니다.
f. 漢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위만조선이 무너지며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합니다.
g. 낙랑의 일부가 점령당하며 낙랑군이 되지만, 한반도로 낙랑국은 들어오게 됩니다. (한사군의 위치는 하북/요령이며, 한반도를 통치한 것이 아닙니다.)
h. 당시 한반도는 숙신, 읍루, 동예 (일부 조선세력)등의 세력이 있었으며 낙랑등 4현 세력이 한반도로 밀려오면서 본격적인 기자조선/위만조선의 세력이 한반도로 유입됩니다.
e. 바로 이즈음 ad 1세기경, 漢이 쇠퇴하여 漢4군도 유명무실 해질 무렵, 요령/산동/만주에 삼한이 들어서고 이중, 고구려가 부여세력에 기반하여 강대해지면서 낙랑군을 무너뜨리고 낙랑인들은 신라 등에 흡수되게 됩니다. 낙랑이 원래 기자조선세력임을 고려하면 조선유민 진한과 동질세력이기에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f. 북한의 평양에 낙랑의 유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 낙랑국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곳에 漢4군과 관련된 유물이 나온는 것은 낙랑현에서 유입된 유민들의 유물들이 아닌가 합니다. 한편, 또,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는데, 왕씨와 낙랑국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입니다. 왕씨와 기자를 연결시키는 기록이라서 기자조선-낙랑-왕씨의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청나라 말, 요미원 著 <北朝胡姓考-북조호성고> 外篇第二 東夷諸姓 에 나와있는 <왕씨>편에는 낙랑 왕씨/하남왕씨 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거슬러 올라가면, 기자의 후손인 朗斯왕씨와 이어진다고 합니다. (낙랑과 기자조선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
[王氏]
樂浪王氏 本姓拓王 高麗族也 姓纂十九鐸氏族略五拓王氏下引家狀云...[樂浪人, 遠祖羆, 後魏伏波將軍, 鎭武川, 賜姓拓王氏] 又廣十九鐸拓下云...[又虜複姓,周書王秉, 王興,並賜姓拓王氏]
낙랑왕씨, 본성은 탁왕씨(複姓),고려족이다... 성찬십구탁씨족략오에 '탁왕씨'아래.. 가문을 이룬 상황에 이르길 낙랑인의 먼 조상은 '비羆' ,후위의 복파장군, 무천진으로 탁왕에서 사성 받았다. 중략
또 복성이던 주서의 왕병,왕흥도 나란히 탁왕씨에서 성을 하사 받았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낙랑인이 원래 阿殘 이라 칭했고 阿는 "나"로도 발음했던 것으로 보아 비羆씨가 아니라 羅씨를 말하는듯합니다. 즉, 먼 조상은 라씨이고 후위의 복파장군 무천진으로 탁왕씨를 사성받았다가 맞는 해석 아닐까 합니다.
무천진은 오르도스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북위를 건국한 탁발씨의 가장 핵심적인 군벌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월지, 漢등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爲,魏 씨와 닿아있고, 탁은 代족과 닿아있습니다. (북위의 원래 이름은 代국 입니다.) 대국-북위-북주로 이어지는 북조국가의 기록중에 周書 왕맹전을 보면,
按周書-卷二十 王盟傳云.. [王盟, 其先樂浪人. 六世祖波, 前燕太宰. 祖珍,ㅇ 魏黃門侍郞, 贈幷州刺史樂浪公. 父羆,
伏波將軍, 以良家子鎭武川, 因家焉. 大統中賜姓拓王氏子励 字醜興..]
왕맹의 선조가 낙랑인이고, 육세조 왕파는 전연 태제, 왕진은 위나라 황문시랑으로 병주자사 낙랑공으로 제수 받았다고 나옵니다. 왕맹의 아버지가 위에 말한 비羆 (라 羅), 즉, 위나라 복파장군으로 아들 왕려에 이르기 까지 막강한 무천진의 집안을 이어온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천진의 왕씨들은 낙랑의 후손이며, 당시 무천은 당시의 대 (代, 오르도스 동부)에 있던 곳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으니, 낙랑의 인적구조가 삭 + 롱 = 사카 + 언덕 족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이 북위의 중요한 핵심 세력이였음을 생각하면, 이 지역에서 나온 아사달, 조선, 낙랑, 삼한 등 한반도로 들어온 세력 이외에도 남아있던 魏/北魏/北周 세력들은 한 뿌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알타이/韓 어를 쓰는 세력들이였습니다. 또한 前考(전고) 마한신고(馬韓新考)를 보면,
處士 王基 字 洪業 樂浪遂城人 其先出自有殷, 周武王剋上, 封箕者於朝鮮, 子孫因而氏焉.
<즉, 처사 왕기는 자가 홍업으로 낙랑을 세우는 사람이다. 基는 은나라에서 나왔다. 주나라 무왕이 은을 이겨,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니 이로 인하여 자손이 성(씨)을 삼은 것이다>기자는 기의 땅에 봉해져서 箕子라고 되었다하는데, 이 기록들을 모두 확인해보면 기자조선의 준왕과 위만조선에 남아있던 기자조선의 무리들중 왕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北魏宗室의 왕비 王氏의 묘지는
夫人,王氏. 樂浪遂城人也. 燕儀同三司武邑公波之六世孫.
聖祖幽營二州刺史廣陽靖后道岷之第三女.
翼齊二州刺史燕郡康公昌黎韓麒麟之外孫
부인 왕씨, 낙랑을 세운 성씨, 연때의 의동삼사이신 무읍(武川의 지명)공, "파" 의 육세손이시고. 성스러운 조상의 땅, 유주,영주의 이주 자사 겸, 광양의 정후도민의 셋째 따님이시고 익주(하북), 제주(산동) 이주자사겸 연군(북경)의 강공이자 창려(낙랑속현)의 한기린(韓麒麟)의 외손이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즉, 왕씨는 낙랑을 세운 성씨로써 무진천이 있는 무읍의 공, 파의 후손으로 낙랑의 땅으로 알려진 유주, 영주 등의 벼슬을 한 정후도민의 딸이며, 익주, 제주.....하략. 이라든 뜻입니다. 왕씨는 기자의 후손으로 말하고 있고, 유주(베이징),영주 등을 낙랑의 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이 또한 북위의 핵심 세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箕書 에는
盟先世本樂浪人,後徙武川 按樂浪本朝鮮地,漢武帝朝鮮滅置四郡. 樂浪其中一 이라고 하면서 是 此族原出 高麗可知 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즉, 왕맹의 선조가 낙랑인이고 뒤에 무천으로 옮긴 사실과 ,낙랑은 본래 (옛)조선 땅으로써 漢의 무제가 이곳을 멸하고 4군을 설치했는데 낙랑은 그 중의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낙랑의 땅이 원래 유주, 하북에서 요동으로 옮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유주하북에서 요동에 한4군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조선의 위치는 전글에서 바로 낙랑국이였던 산동, 하북, 요동으로 지목한바 있습니다. 또한, 성씨변증권십사 왕씨아래에 이르길
(姓氏辨證卷十四王氏下云)河南王氏,其先代人,姓拓王,隨魏南徒居中國,始改爲王氏』此所謂, 『代』,蓋武川之泛言。可知拓王氏初自樂浪徒武川,
太和中隨孝文遷洛陽,改姓王氏。大統中賜姓,蓋西魏時循例復舊耳。隋大司徒王誼,卽王盟之姪孫,而 隋書稱「 河南洛
陽人。是其明證。
하남왕씨는 그 선세가 代 인이다. 성은 탁왕이고 위나라가 남쪽으로 옮겨왔을 때 따라오게 되면서 왕씨로 고치기 시작했다. 수서에서도 이들을 하남 낙양인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들의 출신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나타내는 대목입니다. 즉, 하남 왕씨와 낙랑왕씨는 같은 뿌리이며, 이들은 무천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길때 왕씨로 바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위의 왕씨에 관련된 기록은 청수산방의 한담님의 글을 편집하여 올린 내용입니다 ) 이처럼 기록들을 따라가다 보면 낙랑과 왕씨, 또 그들의 지명인 平陽 혹은 平壤이란 지명이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낙랑은 기자조선의 후예로써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낙랑인들이 고구려 혹은 특히 신라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도 이들이 조선의 후예였기 때문이며, 또한 전한과 후한사이에 新을 세웠던 왕망과 김일제는 바로 기자조선의 후예들로써 (기씨와 삭방), 漢나라의 魏씨에 반기를 들어 서로 갈등했었고, 실패한 新유민과 낙랑의 후손들이 진한/신라로 진입한다는 것은 놀랍운 일이 아닙니다. (김일제족의 신라진입은 통상 알려진 경로가 아니라, 휴도족에서 휴밀/도밀의 천축국 세력이 되었다가 이들이 다시 成漢/前秦이 되면서 신라로 진입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드립니다.) 낙랑군이 요령이라는등, 한반도 평양이라는등등의 이견이 많습니다.
학계에서는 요령부근에서 낙랑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한반도 평양에서만 발견되므로 한반도 낙랑만 인정할 수 있다. 라는 의견인 듯한데, 일단 낙랑형 유물은 오르도스형 청동기와 유사하므로 이들의 유입은 흉노계나 조선유민의 이동과 궤를 같이한다 할 수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낙랑은 옛 조선의 땅에 있다..라는 기록은 고조선은 한반도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더불어 낙랑을 한반도에서 찾는 것도 일면 타당하며, 낙랑군이 요령에 있다해도 그것은 조선의 변방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만조선의 원래 위치가 하북/요령/만주일부 였다면...한사군은 다름 아닌 조선의 위체에 한사군을 설치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기자/위만 조선의 유입은 낙랑국의 한반도 건국과 한사군 유민,삼한의 한반도 유입과 더불어 본격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마치 백제에게 망한 마한이 한반도 남부에서 임라로 다시 부활한 것과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타클라 마칸에 있던 마한 (이 부분은 후에 설명)이 이동하여 요령에 다시 자리 잡았던 이유도 기자조선의 후예 마한이 요령의 조선 유민들이 많이 남아있기에 그 곳을 정착 장소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월지/삼한 세력과 하북 요령의 낙랑, 한반도 숙신이 합쳐지며 한민족의 윤곽이 들어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晉 의 도읍지였고 漢의 도읍지였으며 바로 옆 평양에서 조선 준왕이 정복했던 韓이 생겨났던 도시가 평양/낙양 입니다. 준왕의 韓이 밀려난 자리에, 魏씨들의 漢이 생겨나면서 이 지역에 또 다른 조선의 유민은 스스로 언덕세력의 阿殘이라 부르며 후에 그들의 국명을 樂浪이라 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한반도 마한의 평양지방에 머무르게 된것이고 지금의 漢강(아리수)부근에는 후에 爲/魏씨세력의 월지/마한이 자리 잡으면서 자신들의 출신인 漢의 도읍지였던 낙양을 떠올리며 漢陽일 부른게 아닐까요. 그리고, 그들의 부족명을 따라서 爲/魏수 (아리수/오르수) 라고 부른것이 아닐까요.
숙신,상나라,기자조선,오르도스세력들을 형성하는 북방세력(빗살무뉘) 사카가 朔方 일거란 추측을 하였습니다. 이것의 옛 발음이 sŋ̥rāk 이기도 하지만, 漢 시대에는 ŋ̥rāk 이라 불리웁니다. 바로 북방민족을 뜻하는 朔의 발음이 漢대에는 (응)락 이라 불리우는것이죠. 周시절 동방기지로 이곳을 洛邑이라 정하면서 낙이란 발음이 정착된 이곳..바로 북방민족 朔족의 주무대었고 후에 낙랑을 만들어낸 최초의 발생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16. 秦, 辰, 韓과 인도
秦에대해선 전 글에서도 간략히 소개드렸지만, 이미 은나라 시절에 嬴씨 성이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분파된 여러 성씨 중 趙씨가 秦의 직접조상이 된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秦인은 조상의 터전인 大丘란 지명을 가는곳 마다 남겼습니다. 秦나라의 초기 도읍지도 大丘(犬丘) 입니다. 신라의 초기 터전도 大丘입니다. 또 공자의 " 丘는 殷의 후손이다"라는 말은 본인을 뜻하는것이 아니라 丘로 대표되는 부족들이 아닐까 합니다. 大丘의 옛 발음이 dhac/thac + khwǝ 로써, 대커/쌔커와 가깝게 발음될 것이란 말씀도 드렸었죠. 그 뜻은 물론 큰 언덕을 말합니다. 또 비단 혹은 중국을 뜻하는 서방의 명칭으로 seres/sares/ sereka 등등이 있고 이것은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細 (옛발음 seh) 보다는 차라리 한국어의 실/시르 와 더 가까워보인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秦도 역시 seres, sina 등으로 불리웠을 겁니다. 그것이 기원전후로 해서 인도 북부지역으로 비단교역이 몰렸으며 그 지역을 seres라 불렀을 가능성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전글에서 晉이 곧 三韓이요 이들이 초기에 韓이란 명칭을 가진 기자조선의 준왕체제였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이 韓에서 辰국을 표방하며 조선과 三晉과 秦을 포괄하는 세력으로써 출발하지만, 곧 魏의 세력과 月氏등의 세력이 지배층을 형성하며, 月枝國이란 이름으로 중앙아시아를 장악합니다. 이들 세력은 기본적으로 소호금천을 조상으로 삼는 秦나라, 魏나라,趙나라에 조선준왕세력까지 합류하게 되니, 殷나라와 매우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곳에 韓(夏/周)나라가 합쳐지면서 소호금천과 황제헌원의 결합세력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 辰/韓 세력은 어떤 이유에서건 감숙근처에서 이동을 시작하여 소월지를 남긴채 西進하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앙아시아의 강력한 大月支국은 인도 서북부 펀잡 지방에 자리 잡았던 알렉산더의 그리스계 박타르/박트리아를 인도 북부까지 밀어내면서 . 결국 박트리아는 월지의 침입을 받고, 그 후 사카의 침입을 받으며 점령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카는 박트리아옆 간다라를 점령하며 헬레니즘 간다라 문화가 꽃피게 됩니다.) 당시 인도 북부에서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이들 saka족은 설도많고 말도 많았습니다. 후한서에서나 등장하는 이 塞(saka)족은 바로 秦에서 비롯된 大丘세력이고 사카의 뜻이 큰땅/언덕 이라는 것을 나름대로 밝혀보았습니다. 후한서에서는 이들 大丘세력이 塞족(사카)인줄 모르고 월지에 의해 밀려나 천산부근 오손의 땅에 머무를 때 발음이 전해 오는 데로 塞족이라 적은게 아닌가 합니다. 오손은 바로 사카가 살던 땅이라 알려져 있고 또 그곳에 연독세력도 함께 살고 있어서 오손은 사카족, 연독족이 함께 사는 부족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塞족/연독족의 정착지...바로 조선준왕의 韓세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이 오손과 월지에 쫓겨 이동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바로 大丘/사카 세력이며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漢書등에서 그냥 음을 빌려서 색塞족이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당시 천산에는 연독과 塞족이 살았었고 그곳을 오손이 점령하여 섞여 살았다고 나옵니다. 후에 이들은 월지에 의해 다시 오손도 이주하게 됩니다.
17. 박트리아, 토카라, 월지, 사카, 신라
기원전후 인도를 정복한 월지5국중 鬼霜족이 세력을 키워 쿠샨(귀상)왕조로 통일되고 다시 이들이 쇠퇴 할 무렵, 바로 혜초가 이곳에 방문하여 왕5천축국전을 씁니다. 이것이 바로 월지5국을 말하는 것 일겁니다. 혜초가 여행을 떠난 시기가 8세기 즈음이므로 천축국이 매우 쇠퇴해졌고 불교도 역시 쇠퇴해있음을 안타까워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8세기에는 쿠샨국은 인도북부에서 감숙으로 밀려나있는 상태였습니다.)
혜초는 박트리아지역을 토카라라고 표현하였는데, 박트리아가 大夏로 표현된것은 박트리아가 건국초기부터 토하라 라고 불리웠던 건 아닌듯합니다. 이미 아케네메스왕조의 페르시아시절 박트리아 州로서 그 이름은 존재했었고 그후 알렉산르로 제국에 속해 있다가 그의 부하였던 세레오코1세의 시리아의 州로도 속해있었다가 이들이 쇠퇴할 때 박트라 (지금의 발흐) 에 수도를 정하고 지방 세력에서 나라로써 독립하게 됩니다. 토하리 혹은 토카라 인에 대해 찾아보면, 기원전 1800 년 전부터 타클라마칸/타림 분지에 살던 민족이며 인도-유러피언 언어를 쓰는 종족이라고 추청 합니다. 서방의 많은 학자들이 토카라 인을 월지인과 동일하게 보며, 이들이 쿠샨왕조를 이루고 박트리아를 정복했다가 AD 9 세기경에서야 돌궐인들에게 동화되었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토하라에 대한 몇가지 의문과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a. BC 18000년부터 이들의 이름이 원래 토-카라 였다고 가정한다면...
b. 서방에서 월지인과 토카라인을 동일시보는 이유는 박트리아가 후에 토카라 라고 불렸기에 박트리아를 정복한 월지인이 토카라 인이라 추측하여 일하게 보는 것인지..
c. 혹은 이들의 풍속과 외모가 타림의 토-카라인과 닮았기에 박트리아를 정복한 월지인을 토카라라 부른 것인지
d.실제 역사적으로 夏와 타림의 토카라와 박트리아의 토카라가 실제로 관계있는 것인지 ...
모두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부족한 정보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든 경우를 고려하더라도 이런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a. 타림분지에 사는 토-카라인은 BC1800년전에 토-카라인이라 불려왔다면 바로 이들이 정말 夏人 들일수도 있겠습니다. ( 商은 BC 1600년대부터 BC 1046년에 존재했다고 추측합니다.) 좀 더 서방의 외모를 한 혼혈집단이고 인도-유러피언 언어를 구사하였다는 추측도 맞을듯합니다. (한문의SVO 어순의 기원은 최초 권력자들인 夏인들이 이란- 인도 언어를 구사했기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b. 토카라와 월지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단지 월지인이 박트리아를 점령한 후 이들이 토-카라라고 불리웠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토카라가 박트리아를 점령하였기에 토-카라 라고 불리웠다는 점은 이해할수있겠지만, 토카라가 애초에 왜 토-카라라고 불리웠는지는, 월지인을 왜 토카라라고 칭하였는지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토-카라인이 원래 bc1800년 부터 존재하던 夏인이고 이들이 大夏라는 이름으로 오래전에 박트리아를 정복한 토착민일수도 있겠지만...)
좀 더 개연성있는 해석을 해보자면, 秦이 망하고 나서 바로 그 타림에 살던 이들이 연독/塞족이라고 후한서에 나온다는 점이죠. 이들은 바로 준왕의 韓나라의 구성과 같은 부족구성입니다. 또 이들 韓은 夏의 후손들도 구성원으로 포합되죠. 이들이 월지와 오손에 밀려 인도북부로 밀려온 것은 잘 알려진 기록인데, 이들이 먼저 박트리아를 점령하며 외부에서 大夏(大韓)이란 발음, 즉 토-카라 로 불리웠다는 추측입니다. 그 후에도 우여곡절을 격고 나서 월지5국은 천축국이라 불리우며 한때 인도대부분을 점령하는 대 제국을 이루나 후에 서쪽의 파르티아의 침입을 받고 인도 토착세력인 굽타왕조의 번성으로 점점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게 됩니다. 이 모든일들이 약 BC2세기에서 AD2세기 사이에 생기는 일들이란 것이죠. 그런데 이 지역의 역사와 신라의 역사에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단 박혁거세로 시작하는 신라의 기원을 박트리아(박트라, 토카라)로 대칭해 보았습니다. 朴赫 居西干은 명칭에서도 보듯이 서쪽에 사는 왕이란 뜻입니다. 朴의 옛발음은 phōk 이고, 赫의 옛발음은 확인이 안 되나 현재 중국어의 발음으로는 xi, he 등으로 발음되고 있습니다. 서방의 복희에서 시작하여 박트리아, 페르시아등에서도 보듯, 이들은, ㅂ/ㅍ을 사용하여 밝다, 희다, 하다(크다),넑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은듯합니다. 즉, 박혁거세는 박트리아에 BC1세기경에 박트리아에 있던 그리스계 지배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박혁의발음은 또한 박트리아의 수도, "발흐"와도 관계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BC 90 년에 이미 사카족이 박트리아 간다라에 침입하기 시작하였고, 인도-그리스계, 인도-스키타이계라는 명칭이 지도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인도-그리스계가 사카가 장악한 간다라를 뜻하며, 인도-스키타이계가 바로 월지/사카인이 장악한 박트리아를 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둘다 인도 서북부에 위치하며 위쪽이 간다라, 아랫 쪽이 박트리아입니다. 이 과정 중에 인도 북부/북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바로 신독세력입니다. 즉, BC 2-1세기에 박트리아에 사카와 월지가 침입하여, 그리스계를 몰아내며 BC 90년에 사카족이 간다르를 침입합니다. 이 과정은 박혁거세(박트리아)에 석탈해(사카)의 등장과 유사합니다. 또 이들 세력이 월지(알지)와 함께 침입한다는 사실도 동일합니다. 참고로 이들 간다라지역과 박트리아지역이 바로 실크로드의 중심지역으로써 이지역을 seres/sares/ sereka 라고 발음한다는 것입니다. 이지역이 바로 신라의 전신이라 한다면, 왜 신라가 초반에 사로,시로,시라,시라키 등으로 불리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석탈해는 용성국/다파나국 왕자로써 바다를 건너 처음엔 김수로지역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박트리아/간다라/신라 지역을 점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수로의 가야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유물로도, 태극문양, 쌍어숭배, 불교, 등과 관련이 깊어 보입니다. 또한 가야/가라 란 말을 써온 종주국으로써 韓/夏와 연관성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인도 북동부에 budha gaya 란 곳이 남아있으며, 허황후의 아유타국도 인도북부의 중간쯤에 위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역은 바로 신독국으로 표시되는 지역으로 바로 조선천독/신독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곳입니다. 즉, 조선준왕이 韓에서 韓왕을 자처했으므로 이곳출신인 秦인, 韓인, 朝鮮인이 韓의 주요 세력이었다고 보입니다. 이들이 부족에 다라 사카/秦/殷족, 韓/夏족, 조선/신독족 등에따라 韓이라는 통칭아래 각기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닌가합니다. 그런이유로 박트리아로 침입한 사카족을 大韓/大夏로도 불렀던 게 아닌가 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천축국지도중 제일 오래되었다는 일본 호류지사 천축국 지도를 보면, 석탈해는 인도-스키타이지역(박트리아) 에서 김수로의 韓에 진입했다가 실패하고, 간다라지역으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다라 지역은 박트리아지역으로 토착세력을 밀어내고 석탈해가 장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탈해의 용성국/다파나국은 신독/사카의 인도-스키타이이라 불리는 지역과 지명상 연관이 크며, 多婆那 국이란 명칭이 大阪과 발음이 같다고 말씀드렸고, 그 뜻을 봐도 페르시안 외모의 혼혈인들이 많은 나라임을 암시합니다. 벅혁거세와 석탈해사이에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이 존재하는데, 이들도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카족이 박트리아/간다라지방을 다스린 것이 BC 57 년 (아제스왕)이고 AD 20년엔 남인도의 도시 아리카메두와 로마와의 무역으로 번영하였으며, 그다음 AD 26년에 파르티아왕 곤도파레스가 이 지역을 다스렸고, AD 50년 즈음에 간다라 미술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박트리아/간다라(박혁거세)가 남인도, 아리카메두와 무역이 성하였고 (남해차차웅, 유리), 사카족에 의해 동서혼합문명인 헬레니즘, 간다라문화가 태동하고 (석탈해, ad 57- 80 ), 그후 파르티아가 잠시 장악 (파사이사금)의 과정과 매우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이것이 과연 우연이기만 한걸까요.. 또한 석탈해는 국호를 사로, 시로, 시림에서 계림 鷄林 으로 고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바로 이시기가 간다라 지역을 사카가 점령한 시기( bc50-ad50)입니다. 또한 계림이란 명칭이 간다라 라는 명칭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혹은 간다라안의 그리스문화와도 계림이란 이름이 관계가 있을수도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연관성은 고대문자로 알려진 가림다 /가림토 글자의 명칭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간다라에서는 그리스 문자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문자가 쓰이고 있었고 이와 비슷한 문자를 월지국/천축국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이를 "카로슈티" 라고 불렀다합니다. 그런데 이 글자가 우리가 알고있는 가림-토, 가림-다 문자와 매우 닮아있고 발음 또한 매우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간다라의 글자를 우리가 가림(다)로 기억하고 있다면, 가림과 비슷한 발음의 "계림" 또한 간다라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이런 연유로 그리스의 옛글자가 한글과 닮았고 발음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라는 주장들이 생긴것이 아닌가 합니다.)
간다라의 글자를 "카로(슈티)"라고 부르는 부분도 가림=계림=카로 등의 발음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전에도 글에 남긴적 있습니다만, 신라/가야의 그리스, 로마풍 갑옷/투구나 유물들, 특히 일본에서는 神代 문자로 알려진 가림다 글자와 간다라의 카로슈티글자는 모양과 발음이 놀라울 만큼 서로 닮아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가림다 문자가 일본에서 神代문자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것은, 후에 설명하겠지만, 일본의 국가 형성 초기에 신라가 큰 역활을 하였고 이시대가 바로 진무천황 (神武)이후 이어진 미스테리의 10대의 천황시기의 글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신라를 살펴보면 그전까지는 중원과 교통하지 않다가 후기 신라가 되어야 중원의 문화를 받아드리게 되는데, 신문왕이 신라인의 이름과 명칭등을 중원과 같은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기억하던 문자생활과 현재 문화교류의 당사자들인 중원과의 혼선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이두"와 같은 문자시스템을 고안한 것도, 이들이 표음문자를 사용했던 경험이 있기에, 중원과 틀리게 생소한 본인들의 명칭 등의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를 사용한 표음시스템을 고안해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라 혜초기 이들 천축국을 여행한 것도 다만 불심을 확인하는 것 말고도 아련한 그들의 뿌리를 확인하는 작업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혜조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간다라국 여행일지도 남깁니다. <카시미르국에서 산을넘어 서북쪽으로 한달 쯤 가면 간다라국에 이른다. 왕과 군사들은 모두 돌궐인이고 토착민은 胡族이며 바라문 (婆羅門) 도 보인다. 이 나라는 전에 계빈왕(아프간계열)의 통치를 받았으나 돌궐왕이 한부락의 병마를 데리고 투항하였다가 후에 돌궐군대가 강해지자 계빈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되었다....하략> 즉, 간다라국은 돌궐인으로 보이는 왕과 귀족들이 점령했다는 뜻입니다.
돌궐은 기록상 AD 6 세기부터 강력해지면서 중앙아시아를 제패한 국가로써 辰韓이 다르가르, 즉 돌궐일 가능성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만. 돌궐의 비문에 보이는 kok. turk 의 kok은 높다 라는 뜻이라고 풀이하는데 전글에서 말씀드렸듯, 높다,크다 넓다의 의미로 "ㅋ" 라는 발음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사카계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며, 그러므로 辰韓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앞뒤가 잘 맞는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간다라는 진한/사카/신라인들의 전신이고 혜초가 이곳을 방문한 시기가 이미 8세기 이후이므로 법흥왕(前秦)이후 지배층의 변동이 있었던 신라인들은 기원전후 시절의 간다라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가던 무렵으로 보입니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법흥왕 세력 역시 천축국 출신이지만, 인도지역에서 밀려나면서 감숙지역에서 유목민으로써 200여 년 간 성한, 전진 등의 나라를 세웠던 장본인들이라, 중원과 한반도에 몇 백년을 지내면서 그 뿌리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갔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당시 간다라는 페르시아, 알렉산더, 그리스/박트리아, 사카, 파르티아, 월지/쿠샨 족이 점령하면서 동서 문화교류의 핵심을 등장하면서 독특한 불교/불상 문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이들의 최 전성기가 기원후 50년에서 쿠샨왕조 시절입니다. 중원의 前秦 등과 한반도 일본에도 간다라는 영향을 매우 많이 끼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석굴암이 그 대표적 유물이죠. (사실 前秦이 바로 이들세력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간다라 ( Gan Dhara ) 의 명칭은, mahajanapadas라는 고대인도 왕국의 명칭이라 하는데, 간다라가 후에 칭해진 명칭인지 그당시 명칭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Gan-dhara라는 발음은 大辰, (큰 다르 )와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일본에 남아있는 구다라 라는 표현도 "큰다라", 즉, 大辰 을 의미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렇듯, 간다라와 월지5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나서 곧, 쿠샨(귀상)왕조로 다시 통일됩니다. 귀상족에 의한 천축국 점령은 월지5국의 일부세력을 이동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라 봅니다. 바로 이들이 후에 설명할 마한세력이며, 이들이 바로 타림분지에 정착하게 됩니다. (타클라 마칸) 후에 쿠샨족마저 파르티아와 굽타왕국에게 밀리면서(2세기) 이들이 북상하여 일부는 오손과 합쳐 Hun(韓계열)족으로.. 일부는 사-마르칸트세력으로.. 일부는 천산, 타림지역으로, 일부는 감숙의 소월지와 병합하는 등.. 여러 갈래로 나눠지게 됩니다.
한편, 중국측 기록에서는 이들 사카족의 출신을 塞족에서 찾고 있는데, 이들은 오손과 함께 한서 서역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 사마천의 사기에는 塞족이 등장하지 않고 있어 많은 역사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
오손국이 원래 塞족의 영토였고 대월지가 서쪽의 塞족을 격파하자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갔고 대월지가 그 땅을 차지했으며 후에 오손이 월지를 밀어내고 그땅을 차지했다 합니다. (그래서 오손은 그곳에 살던 塞족과 연독과 섞여있는 나라라고 기록합니다.) 이후로 흉노가 대월지를 격파하자 대월지는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그곳의 대하를 정복하게 됩니다. 오손이 점령한 塞족의 땅이란 곳은 천산부근으로써 카스(카쉬가르, 소륵)보다 북서쪽에 있는 휴순과 연독등은 모두 옛날의 塞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서 봐야할점은 후에 인도북부의 사카라고 여겨지는 塞족이 천산지역의 카스 북서부에 존재했었고 (BC 1세기까지), 연독이란 부족도 그곳에 함께 살던 존재라는 것임을 한서 서역전은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韓에 조선준왕(연독)세력과 秦의 大丘세력(사카)을 통털어 塞족이라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파르티아와 굽타에게 밀린 월지/쿠샨족이 당시 망했던 오손유민과 합쳐져 韓이란 이름으로 서진하면서 한족/훈족으로 불리웠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또 훈족의 지배층이 편두를 했다하는데, 바로 기자세력들 편두를 한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월지의 쿠샨족도 편두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北史와 魏書에는 월지5국이 代국에서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북위핵심세력이 월지 5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사항입니다. ) 또한 아유타국의 허황후 묘비에 아유타국은 남 천축국의 나라로 殷/商, 梁, 魏, 邪 나라들의 먼 후손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들 월지 5국이 섬서, 하남의 晉의 땅에서 비롯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어도 우리는 믿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산동, 대문구문명을 이어받은 商나라 계열들인 기자세력등이 편두를 하였고 또 상나라계열의 鬼方계열도 편두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쿠샨인의 편두 모습은 이곳에서 확인하세요..=
http://blog.naver.com/eujin2010/30091675443
당나라시절의 학자 안사고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깁니다. <새석성상근"塞釋聲相近..... 塞의 음은 sok로써 불교경전에서 말하는 석종(釋種) 이다. 塞와 釋은 음이 비슷하고 원래 같은 성을 가리킨다> 즉, 색족과 석종은 같은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색족이 불교에서 말해지는 "석"이란 발음과 관계가 깊다는 이야기이죠. 정리하자면....
a. 石씨과 釋씨, 塞 등을 모두 석가와 관계짓고 있다.
b. 신라 석씨(사카)를 지칭하여 자장법사의 찰리종족이라 언급한점 ( 昔은 "착"이라고 읽기도합니다)...
c.김유신/산다라, 사다함 등 신라인들의 이름에서 보이는 특이한 인명들..
d.조선천독과 인도천축이 같다고 기록에 남아있는점..
e. 塞족이 천산 카쉬카르위에 위치하면서 연독/천독 사람과 섞여 살았다는 기록. 등을 보면 조선, 천축, 사카, 塞 모두 서로 관계가 깊은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塞의 경우, "새"라는 발음으로 아마 서양에도 알려져 있는듯한데, 한국의 발음으로 "색"이란 발음이 남아있으니 더욱 사카/석과의 관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천축과 인도천축은 서로 같은 뿌리이고, 이들 천축국에서 부도가 나왔다는 곽박의 기록은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참고로, 가장 오랜 지리서라고 여겨지는 산해경 곽박의 기록을 다시 한 번 보여드리자면....
郭璞云
天毒/天竺國 貴道德 ,有 文書 金銀 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
곽박이 말한다.
조선천독(朝鮮天毒)의 천독(天毒)이라는 말은 천축국(天竺國)이라는 얘기다.
도덕(道德)을 귀하게 여겼고 문자, 금은(金銀), 돈(錢貨)이 있다.
부도(浮屠)가 이 나라(조선)에서 나왔다.
진(晉)나라 대흥4년에 천독국의 호왕(胡王)이 진귀한 보물을 선물했다.
18. 인도-사카족
사카족은 천축국을 형성하는 중요한 부족중의 하나입니다. 서방에서는 이들을 보통 인도에서 석가가 탄생했다던 Sankya라는 사람들과 관계를 지어서 생각하기도 하고 이란계 명칭에서 보이는 스키타이의 또 다른 명칭으로 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塞족을 언급하며 관계 지어 생각하는데, 제 글에선 바로 이들 塞족이 중원의 朔方, 秦의 大丘족과 동질 세력인 사카/다카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들이 강성하던 시절, 이들과 동맹을 맺고자 13년 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장건의 여정을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엔 전혀 언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대에 반고의 한서 장건전에 塞국을 언급한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곧 사카국은 토착민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들 범 월지국 계열이 초반엔 조선준왕의 주도로 韓국, 혹은 辰국 이라 불리웠다는 것이 제 추측인데, 준왕이 오기 전부터 이미 韓에는 원래의 韓/夏인들과 秦의 유민이 있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秦이 망하면서 또한 秦의 지역에 이들 유민이 존재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인도 북부까지 이동하면서 사카/塞/大丘 족이 아닐까 라는 추측을 했었습니다. 이들 秦인 혹은 사카인들이 대대로 大丘에서 터전을 잡아왔었다면 당시 인도 북부의 辰 어딘가에도 大丘 가 존재하지 않을까요? 大丘는 언급한대로 dhac/thac + khwǝ , 즉 대커/쌔커 라고 발음됩니다. 실제로 사카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지역에는 현재 다카( 방글라데시의 수도, Dacca)라는 도시가 존재함을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아유타국이 있었고, 부다가야 지방이 있습니다. 현재의 인도 지도를 보면 인도 북동부에 호리병같이 동아시아 쪽으로 나와 있는 인도 영토가 있습니다. 바로 아쌈지방이라고 부르는 곳인데, 이곳의 몇몇 사람들은 거의 한국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특히 naga land 라고 불리는 지방은 우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이고 요즘은 그들도 한국에 친밀감을 느끼며 한류열풍이 크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아마도 월지/쿠샨/辰/韓 인들이 ad2세기 이후 밀려나면서 퍼져나간 지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 naga land의 옛 수도 이름이 바로 wokha입니다. 月枝의 옛 발음이 바로 (ng)wat - ke 입니다. 그리고 이곳 주민들은 스스로를 Tang-kuhle 이라고 칭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秦나라에서 만리장성을 쌓던 세력인데, 그곳에 다른 왕조가 들어서면서 인도 북부로 내려왔다는 구전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우연이기만 한일일까요... 이들은 왜 스스로 단쿨 이라 부르는지, 왜 도시의 이름이 wokha 인지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naga land는 작은 지역이지만, 여러 부족이 섞여 말이 잘 안 통할정도라고 하는데, 그중의 일부는 바로 월지/쿠샨/사카 족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19. 사카와 휴도국과 월지국
흉노는 夏나라 걸왕 시절부터라고 기록이 나오긴 합니다만, 이들이 강성해지면서 존재를 부각시킨 것은 기원전 3세기 말에서 기원전후 즈음입니다. 이들이 처음 시작된 곳은 바로 오르도스 부근, 하남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BC215년 秦나라의 몽염이 오르도스, 하남지방의 흉노를 정복하면서 그때가지도 조직적이진 않았던 유목민족 흉노가 세력 간에 결집이 일어납니다. 묵특선우의 등장으로 동으론 동호를 정복하고, 서로는 月氏를 밀어내고, 남으론 백양, 누번을 정복하며 대 제국을 건설 하면서 漢고조를 세력권아래 둡니다. (3세기말) 후에 등장한 漢무제가 공격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결국 BC 119 년 곽거병에 의해 흉노는 오르도스에서 무위 등의 지역을 다시 잃게되는데 이때 바로 김일제의 휴도국이 漢에게 점령당한 시기가 됩니다. 이 휴도국이 위치햇던 곳이 바로 武威(무위)라는 곳으로써 한나라는 무위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이때 휴도국과 함께 서역을 책임졌던 흉노의 혼야왕이 전쟁에 크게 패하면서 책임을 두려워하여 휴도왕을 죽이고 이들 세력과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후에 한나라의 위청이라는 장수가 죽으면서 한나라의 공격도 무뎌지고 결국 한 무제4년 (bc89)에 흉노와의 전쟁을 그칩니다. 그 후에 주변국들과 한나라는 지속적인 전쟁을 벌여 위만조선지역에 한4군을 설치하며, 위만조선이 멸망하게 됩니다. 한나라는 중간에 新나라의 반란을 겪으며 다시 후한으로써 3세기 초까지 세력을 유지합니다. 여기서 이래저래 한국역사와 휴도족의 관계를 이어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주로 석탈해의 알지세력이 휴도세력이란 해석입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않을까요. (석탈해의 알지는 사카+월지 세력이 박트리아를 공략했던 사건이라 본 글에서는 해석합니다. 즉, 사카(석탈해) +월지(알지) 입니다.)
휴도족은 위에서 말씀 드린대로 BC119 년에 한무제에게 점령당합니다. 이맘때 천축/월국은 5부가 태동하여 AD 60년에 드디어 쿠샨이 나머지 4부를 압도하면서 천축국 통일을 이룹니다. 여기서 5부란, 귀상 (貴霜),휴밀(休密),도밀(都密 혹은 高附),쌍미(雙靡),힐돈(?...) 을 말하며, 쿠샨이 바로 귀상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휴밀과 도밀의 존재입니다. 같은 "밀"을 쓰면서 둘간에 좀더 친밀한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으며, 또한 휴,도 라는 글자가 휴도국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일찍이 사카국은 원래 스키타이와 비슷한 세력으로 황금세력을 알려져 있고 불교가 융성했던 나라이면서, 동 서양에 kim씨를 퍼뜨린 세력으로 서방에 알려져 있습니다만, 바로 휴도족 또한 금인제천을 드리며 후에 이들 세력인 김일제가 金씨를 하사받는 것을 보면 원래 휴도국은 금과 관련 있는 민족이며 금인을 모시는 세력 이였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또 석가모니의 탄생은 보통 BC 6세기 까지도 올라가는데, 이 당시에 중원에서나 인도에서도 불교를 받아드린 세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혹자는 석가모니의 원래 탄생지가 감숙이란 설도 있습니다.
휴도국의 왕자 김일제는 한무제로 부터 金씨를 하사받았다고 나오지만, 역시 金과 전혀 상관없는 이에게 金씨를 하사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금인제천 혹은 금과 관계있는 부족이였기에 金씨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씨는 김일제 전에도 사실 등장합니다. 秦본기에 진나라 승상 " 김수"에 대하여 언급도 기록되어있으며, 漢무제의 어머니의 전남편도 "김왕손"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漢에 반기를 들고 왕망과 함께, 新을 건국합니다. 이것이 AD 8- 23 년의 일입니다. 즉, 휴도국이 BC119년에 한무제에게 점령당하면서 이들 잔존 세력이그들의 본거지 바로 밑의 인도지방 월지국에 합류하면서 휴밀, 도밀의 세력권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23년에, 新나라가 멸망하면서 이들 김일제 세력이 천축국의 휴밀, 도밀세력에 합류했던게 아닐까라는 추측해봅니다. 여기에 관한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월지의 5흡부를 원래는 도밀(都密) 대신 고부(高附 : 카불)이라고 표현 했었는데, 후한서 서역전엔 도밀 이라는 표현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귀상이 다른 4흡부를 병합하여 쿠샨왕조를 세우고 그 세력이 간다라에까지 미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록은 AD125경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후한이 세워진 후 (AD 23-125년)에 고불이 도밀로 이름이 바뀌는데 바로 新나라가 멸망한 시기입니다. 여기서 씨족/부족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흡후 (翕侯)는 옛발음으로는 hǝp-gwā 로써, 돌궐에서 쓰이는 葉護 (엽호, 야브구) 와 통하는 어원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후에 등장하는 돌궐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신기하게도 문무왕릉 비문에서도 葉이란 글자가 발견됩니다.
<枝載生英異 (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 란 글귀인데 투후란 글자에서 김일제와의 연관설이 나오게 됩니다. 여기서 칠엽(7葉) 이란 글자가 나오는데 이를 두고 7대를 내려왔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듯합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월지/사카와 돌궐에서는 葉을 부족을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枝자 같이 말이죠). 즉 문귀에도 써있듯 (月)枝 에서 (투)후제천으로 내려오는 7잎(7부족)이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月가지에서 내려오는 7개의 잎이라는 뜻이란 얘기죠. 신라의 칠지도와 비슷한 칼이 남아있다고 하는데...바로 원래 칼집에 작은 칼이 여섯 개가 붙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도 백제의 칠지도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7葉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즉, 우리가 알고있는 팩트를 나열해보자면...
a. 사카족은 BC 2세기에나 인도북부를 점령한 외부세력이였고,
b. 그 사카족이 불교를 번성시킨 종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c. 이들이 바로 석탈해 석씨의 시조일거란 가능성과,
d. 석가모니도 역시 "석"자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고,
e. 휴도족은 이미 기원전에 금인을 가지고 있었고,
f. 이들은 金씨와 관련 깊다고 알려져 있으며,
g. 인도의 사카족도 동서양의 kim씨와 관련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h. 석가의 탄생이 감숙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며,
i. 그 지역이 바로 秦때의 사카족 지역입니다.
(휴도국이 있던 곳이 감숙, 오르도스, 금성 근처 "무위" 입니다.)
j. 신독국은 바로 오르도스 아래에 맞닿아 위치하고 있습니다.
k. 휴도국이 망하고 한무제가 오르도스를 점령한시기 BC119 년이고 이 즈음에 월지 5부가 세력을 통합하면서 그중 귀상부가 AD 60년에 쿠샨왕조를 세웁니다.
l. 5부에 휴밀과 도밀 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연관성을 볼때 혹시 한무제에게 밀린 휴도국이 바로 밑의 월지/신독으로 들어가 금인제천의 불상과 함께, 불교를 꽃피웠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이곳 오르도스지역에서 후에 石勒 (석륵, 역시 석씨) 가 後趙를 세우게 되는데, 바로 이 오르도스 지역이 사카족 세력의 본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그렇다면, 석탈해의 昔씨가 과연 불교의 원산지라는 중천축국의 걸리질씨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자장법사가 삼국유사에 남겼듯이 신라 김씨가 찰리씨와 관계가 있는 걸까요? 걸리 질의 다른 성씨가 찰리씨라고 익히 알려져 있긴 합니다만..
昔은 "옛석"으로도 읽지만, 섞일 착 으로도 읽습니다. 다시말해 "cha" 라는 음가가 남아있다는 말이죠. 바로 석씨와 찰리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이지 않는 대목입니다. 즉, 일단 가능성에 불과합니다만, 휴도국이 한무제에게 밀리면서 월지/신독국에 진입하여 휴밀과 도밀을 형성하면서 사카족의 김씨를 만들어낸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들이 역시 불교의 발전에 한몫하면서 말이죠....
20. 천축/쿠샨왕조의 흥망과 이동
인도중북부에서 감숙성, 사마르칸트에까지 이르던 쿠샨왕조는 226년 파르티아 대신 페르시아의 사산조 왕조가 쿠샨의 서쪽을 점령하게 되고 인도 내부에서도 기존 토착민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쿠샨/월지국은 점점 인도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3세기 들어서는 인도에는 굽타왕국(280)년에 들어서면서 감숙, 사마르칸트지역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7세기 들어 당나라가 이곳에 영토를 확장하면서, 쿠샨/천축/월지국은 망하게 됩니다. 즉, 인도에서 밀려난 쿠샨/천축/월지 세력은 그 후로 페르시아 사산조 왕조와 당나라의 압박으로 2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이동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동으로, 북으로, 서로 흩어져가며 유라시아 전역에 그들의 흔적을 남깁니다.
a. 이들 일부 세력이 서진하면 사마르칸트 등의 지역에 쿠샨계통의 세력이 생겨납니다. (사마르칸트는 현 우즈벡의 아프랍시아 벽화는 신라/고구려인 사신도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사마르칸트는 아프카니스탄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 밑의 테르베즈시는 그 유명한 꼬깔모를 쓴 쿠샨왕자 두상 유물로 유명한 쿠샨-박트리아 문화권이었습니다. )
이시기에 서진한 세력 중에는 유럽침공으로 유명한 아틸라 더 훈족도 있는데, 이들이 후한과 선비의 연합공격으로 밀려난 북흉노의 후손(155년)이라는 설도 있으나 훈족의 세력이 커진 시기가 4세기에서 5세기임을 생각하면 시간차가 많이 나기 때문에 정설로 받아드려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틸라의 탄생년도를 410년으로 보는데, 5세기에 훈족이 가장 강력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 왕족의 풍습중에 편두가 보이는데 이것은 여타 흉노와 구별이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동로마(비잔티움)에게 422년 조공을 받고 지속적으로 동로마 서로마를 공격하나 453년 아틸라가 죽고 헝가리 등으로 세력이 흩어집니다.
b. 또 많은 세력들이 북진을 합니다. 이들 천축세력이 인도 북부의 사르나트, 보드가야 (지금의 네팔지역)등의 지역에서 감숙, 돈황까지 바로 북동진 하기 힘든 이유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맥아래를 통해 감숙으로 올라가거나, 아님 대부분 천산산맥 쪽을 거쳐서 타림이나 감숙으로 들어갔던게 아닐까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실크로드 길로 알려진 길로써 옛부터 동서양의 교통로로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길입니다. 즉, 천축세력이 어떻게 천산을 거쳐 요령까지 이를 수 있는지는 바로 초원의 실크로드 길과 더불어 불교의 이동경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드가야 혹은 인도 북부지역에서 천산의 카쉬(가르),쿠차 등을 거쳐 고비사막바로 위의 돈황과 만불사를 기점으로 크게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한 세력은 낙양과 장안을 거쳐 중원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또 한 세력은 요동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즉, 불교의 이동은 승려와 책만 이동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실제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한의 요령형성의 인도북부에서 요령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이동경로를 보면 그 비밀을 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1-2세기 즈음에 漢/흉노/선비의 혼전 중에 이들 천축/월지/사카세력은 초원의 실크로드 (천산산맥-돈황-운강, 평성)을 거쳐 몽골지역을 거쳐 요령에 삼한이라는 세력권을 형성한다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후에 삼한/삼국에 새로 합류하는 세력들은 이들 천축세력이 감숙 등을 통해 중원의 나라들, 즉 흉노/선비족/漢/5호16/남북조에 섞여들어 갔다가 다시 한반도의 삼한/삼국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漢나라 이후의 중원 국가들은 만리장성 이남에 주로 거주했고 그 위로 흉노나 선비, 오환 등이 존재했지만, 더 북쪽인 몽골지역은 아직 타이트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곳이 그리 느슨하기도 하고 또 토착민 자체가 돌아다니는 유목민 위주의 지역이기에 대규모 세력의 이동이 용이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실크로드의 중심에 서있었던 천축국이 이 길의 존재를 모를리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중원의 나라들은 이들 북쪽의 유목민 초원지대에 대해 그다지 지식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이동이 그리 어렵지 많은 않을 수 있다는 추측입니다. 北魏傳 을 보면 월지5국은 代국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연관성을 전혀 생각해내지 못한 역사가들은 허황된 이야기로 치부해 왔었습니다만, 北魏라는 나라가 代족과 관계있어 보이는 선비/탁발부가 세운 나라이며, 이들이 바로 천축 월지국 출신이었기에 代國 -> 월지5국 -> 북위 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본인들의 이야기이니까요. 이 기록은 三晉와 월지5국과 北魏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