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강순희
끝까지 버릴 수 없는 것에는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다.
가끔 L 교수님의 손 편지를 꺼내어 한 장 한 장 읽어보곤 한다.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은 짧지만 소중했다. 교육대학 학생으로 2년, 졸업 후 3년 정도에 불과하다. 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뜨셨기 때문이다. 수술 받고 퇴원했을 때 잠시 댁으로 찾아뵌 일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졸업을 앞둔 시점부터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교수님은 졸업생을 포함해 모든 제자에게 편지 받은 순서대로 답장해 주었다. 강의와 논문 작성…, 바쁜 일정 속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느라 헤매던 탁상공론, 젊음의 치기로 긁적거린 어설픈 철학도 어깨 다독이는 목소리로 다 받아주었다. 교수님의 단아한 필체에 담긴 칭찬과 격려는 늘 따뜻했다.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에는 80년의 봄, 시대 상황에 따른 고민과 평생을 바친 교직의 회한을 토로하는 내용이 있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예리하고 지적인 인상이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띤 교수님은 남을 존중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전화 받을 때는 “네 ○○○입니다.”라며 이름을 말했고 누구에게나 높임말을 쓰고 자신을 낮추었다. 무엇보다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우리 문화에 대한 긍지를 마음속에 굳건히 다져주었다. 시대정신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백성들이라 했다. 한 올 한 올 씨줄과 날줄을 엮어 투박하고 질긴 역사라는 옷감을 짜서 우리 앞에 펼쳐 놓은 것은 그들이기에…. 거대한 누각樓閣의 동량棟梁이기보다는 그 기둥을 떠받치는 작은 조약돌이 되기를 원했다. 별처럼 빛나는 교사를 꿈꾸는 우리에게 능력에 앞서는 것은 사랑이며 서두르지도 쉬지도 말고 참된 공부를 하여 인격을 닦고 실천에 옮기라고 늘 가르쳤다.
교수님의 강의가 좋아서 2학년 때 국사 과목을 심화 과정으로 선택했다. 어쩌다 보니 열 명쯤 되는 국사 심화반의 반장이 되었다. 강의에 앞서 우선 칠판을 깨끗이 지웠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나의 노트를 펼쳐보고 진도를 확인한 후 칠판 가득 판서하며 교수님은 늘 열정적인 강의를 했다. 강의실 옆은 연구실이었고 앞쪽의 작은 문을 통해 연구실로 드나들 수 있었다. 항상 몰래 가서 주전자와 컵을 씻어두고 수돗가에서 걸레를 깨끗이 빨아 여기저기 먼지를 닦았다. 교수님께 개인적인 질문을 받거나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하는 것이 어렵고 부끄러웠다. 선배들이 가끔 찾아와 연구실에 화사하게 꽃꽂이해 놓은 것을 보면 좋으면서도 은근히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언젠가 찾아온 선배님과 교수님이 토마스 만의《마의 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듣고 그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대구 시내의 임시 강사 자리를 교수님이 소개해 주었다. 7주씩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정식 교사가 되기 전, 호된 실습을 하게 된 셈이다. 첫 월급을 타서 벨트와 지갑 세트를 샀다. 몇만 원 월급쟁이로는 너무 과한 선물이라고 나무랐지만 기꺼이 받아 주었다.
손 편지 외에 또 다른 선물이 있다. 졸업 후 연구실로 잠시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졸업생들의 추수 지도를 위해 학교 현장에 나갔을 때 필요해서 찾아보니 없어서 아쉬웠다며, 사신도가 있는 달력 종이에 싼 두툼한 물건을 건네주었다. 가격표를 까만 사인펜으로 지운 ‘국사 대사전’이었다. 선물의 의미만큼 두껍고 두 손으로 들어도 무거웠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늘 갖고 다녔지만, 그 사전이 닳도록 활용하지는 못했다.
손 편지와 사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교수님과의 만남이 바로 인생의 선물이었음을 새삼 깨닫고 있다.
2023년 여름호/ 수필춘추 통권 102호
첫댓글
훌륭한 스승님으로 부터 받은 가르침과 손편지, 그리고 국사대사전 ,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생의 선물이네요.~~
너무 일찍 타계하셔서 많이 아쉽겠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오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강의실에서 "항상 몰래 가서 주전자와 컵을 씻어두고 수돗가에서 걸레를 깨끗이 빨아 여기저기 먼지를 닦았다."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문학모임때 커피서비스며 궂은 일에 앞장서시는 아름다운 모습에 모임에 가고 싶습니다. 언젠가 수필춘추 편집장이 제게한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여성분의 원고는 손댈 곳 없이 깔끔하고 좋다고 했는데 강 선생님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선물은 꼭 물품이 아니라도 마음에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이 진정한 선물입니다. 좋은 선물 오래 간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