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얻은 행복
남편은 검단산 자락에 땅을 조금 빌려 여러 가지 채소를 심었다. 밭에는 아욱, 근대, 상추⸴ 쑥갓⸴
그리고 방울토마토, 고구마 등을 심었으며 해마다 빼놓지 않는 것은 오이와 수세미다. 나는 오이가 어렸을 때
유난히 맛이 있어 좋아했고 수세미는 설거지 할 때 잘라 쓰면 그릇이 상하지 않고 삶을 수도 있으며
또한 버려도 공해가 없어 난 남편에게 꼭 심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요즘 날이 가물어 남편이 날마다 밭에 가 물을 주었으나 오늘은 내가 나섰다.
아침은 언제나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더군다나 청랑한 음색으로 맑게 도르르 구르는 새소리를 들으며
몽실몽실 연녹 색으로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버드나무를 보면서 걸으니 몸이 둥실둥실⸴
마음이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밭에 다다르자 대지는 연녹색의 파란 싹들이 땅에 쫙 깔려있었으며 산허리를 감고 있던 운무도
땅으로 내려앉았는지 대지에 구름이 깔려 서기가 서려 있음이 느껴진다. 바람이 불자 함초롬하던
파란 싹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하는지 환희의 송가를 부르며 “쏴아”
하는 합창 소리를 내며 질서정연하게 바람의 흐름 따라 춤을 추는 것이다.
나는 손가락을 이 싹들 사이에 가만히 넣어보니 어린 풀들은 옹알이를 하며 잇몸으로
내 손가락을 지그시 물고 있다. 풀들의 앙징스런 모습이 옛날에 내가 안고 젖을 먹이던 아가들 같았다.
나는 어린것들을 정감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나도 고향의 품에 안긴 듯 편안하다. 역시 푸름은 모든 것들의 모태가 되나 보다.
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갈라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속에서 늦게 나온 작은 떡잎이
씨의 껍질을 쓰고 시간이 벗겨주기를 기다린다. 나는 이 모습이 얼마나 신통한지 마음 같아선
내가 껍질을 얼른 벗겨주고 싶은데 그것이 ‘拔苗助長’ 가 아닌가 싶어서 참고 있다. 이 세상 그 무엇 하나
신비스럽지 않은 것은 없지만 작은 씨앗으로 인해 우주가 태동을 느낀다는 생각에 나는 몸에 전율이 흐른다.
우선 잡초를 뽑았다.
잡풀을 뽑고 또 뽑았으나 어지간해선 조금도 줄지 않는다.
이 종자의 끈질긴 생명력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오죽해 땅의 천생연분은 호미라는 말이 있을까.
그만큼 쉴 새 없이 잡초를 제거해야 심은 알곡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또 잡초는 뽑혀서도 흙냄새만 맡으면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아주 말려 죽이려고
뿌리를 하늘 쪽으로 보게 했다. 무슨 숙명적으로 원수진 사이 같다.
그러자 별안간 내 몸에 인간본능의 잔혹함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껴 나 스스로 당황한다.
이것도 생명이라 태어날 때는
반드시 나름대로 본분이 있을 텐데.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죄가 아닌가 싶다.
잡초를 어느 정도 뽑고 다음엔 물뿌리개로 물을 준다. 처음엔 할 만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힘이 든다.
점점 힘이 더 들자 물 한 방울이 얼마나 아까운지 물이 허튼 곳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내 혀가 쏙 나오는 것이다. 마치 이 물을 받아먹을 것 같다.
난 이럴 때면 진저리를 치면서 “이그, 간사한 인간아” 하며 스스로 자책한다. 그리고 물을 주다 조금이라도
옆의 밭으로 흐를 것 같으면 화다닥 놀란다.
나는 또 “아이고! 미치겠네. 아무리 힘들어도 이웃이라 일부러 물도 주고 풀도 뽑아 줄텐데”하며
내 인색함이 이런 데서도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 밭은 주인이 심어 놓고 통 돌보지를 않아 채소밭이라고 할 수가 없다.
잡초는 이 땅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저희끼리 살을 비비며 사랑을 나누니 잎에는 아롱진 햇살이 흐르고
바람 따라 춤을 추는 초록 잎들의 춤사위는 힘차고 경쾌했다.
그러고 보면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것들 중 어느 것이 귀하고⸴ 천하고, 좋고⸴ 나쁜 것은
다 인간이 만들어 낸 기준이다. 세상사를 무작위의 작위, 무기교의 기교인 인공적이 아닌
자연상태로 그대로 둔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훨씬 더 풍성하고 곱고 아름다울 것이다.
저희끼리 밝은 태양 아래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맘껏 호흡할 수 있으면 비록
잡초일망정 꽃보다 더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일을 끝내고 큰 나무 그늘에 앉아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햇살은 산 정수리부터 오색 빛으로 쫙 부챗살 퍼지듯이 퍼져 온 들판이 은빛 물결로 출렁거렸다.
들의 푸른 것들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투명했다. 더군다나 물을 주고 난 다음이라 물방울을 품고 있는
이 풀들은 그 자체가 영롱한 보석이었다. 아름다운 것이 어찌 새싹뿐이랴. 주위에 있는
나뭇잎 하나하나 섬세하고 유연하니 고운 옥 조각 같이 이 경치는 우아하고 수려하다.
나는 지금 신록을 마냥 보고 있기에 푸름에 녹아든 내 피는 맑은 淡綠색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얼굴에 송알송알 솟아있는 땀방울도 저 이슬처럼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마치 옹달샘에서 싱그러운 샘물이 퐁퐁 솟듯이 내 가슴에 기쁨과 환희가 넘쳐흐른다.
이렇게 풍성한 자연이 다 내 앞에 펼쳐져 있어 이 부자된 기분, 이 행복감을 어디에 비할까.
단 20평의 땅에서 두세 시간 정도 땀을 흘린 것뿐인데.
수십 원이 넘는 땅 주인이 땅을 수십 조각내 임대해서 조무래기 돈 줍는 것이 아주 작아 보인다.
많이 갖고 적게 갖는 것도 다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눈을 들어 먼 산을⸴ 흰 구름을 보니 마치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게 되듯이 내 마음은 잠깐이라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계에 잠겨 무상무념의 생각이 든다. 장자의 ‘物我一體’ 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까?
손을 펴니 온 세상이 다 내 것인데 손에 뭘 쥐려고 하니 무엇이 쥐어질까.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에 참되고 진정한⸴ 옹망 졸망한 행복 주머니가 지천에 깔렸는데
난 무엇을 얻으려,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평생을 갈망하고 허기지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 더 밭을 둘러본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나머지는 자연의 몫⸴ 신의 몫이다. 내버려 둬도 가지 줄기에선 알아서 가지가 열릴 것이고
오이나 토마토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열매가 맺히면 신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위 분들과 나눌 것이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 바람결에 가늘고 여린 속삭임이 귓가 언저리를 맴돈다.
너무나 좋은, 짧은 만남이었다고, 언제나 이렇게 우리 서로 조화로운 교감으로 같이 호흡하면서
아름답게 살자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진정 행복한 날이었다.
낭만 몇년 전 씀
첫댓글 타샤 튜더의 삶을
보는 듯 아름다운 삶입니다
낭만님~ 존경합니다^^
달님이랑님 반가워요,
요즘 활동을 좀 못해서...
달님이랑님 저에게 빛나는 앞날을 알려주시네요,
저도 타샤튜터 같은 비슷한 삶을 살고 싶어요,
아주 조그만 흉내라도 내면서...
타샤튜터의 책을 사 보렵니다. 늘 건강하시고 늘 예쁘게...
낭만님의 글 솜씨는
허얼 !..
오래전에
작가라고?,,
하는 말에,
깜놀 이지요.
울, 쟌방에
대단한 인물입니다
박수 좀,
춰, 줘야지라요
감사해요 파이프 문
이 더운 여름 잘 견디시어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