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금요일(2016년 5월 27일)
2021.05.2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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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예루살렘 입성을 전합니다.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여러 곳을 둘러보시고 저녁이 되어서는 베타니아로 나가서 머무시지요.
이튿날 베타니아를 나오시면서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에 가서 무엇이 달렸는지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여린 것이 없자 그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물건을 사고파는 환전상들의 탁자를
뒤 엎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사야 예언서에서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56,7)라는 말씀을 인용하시고 다시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예레 7,11)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전의
사람들을 비판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평소에 떠드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버릴까 궁리를 하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군중이 주님을 존경하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이 나서서 주님께서 하신 성전정화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지 않는 것은 성전정화를 부르짖는 주님을 왜 못 마땅하에 여기느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세가 있는데 이것을 관리하는 것은 성전을 장악하는 사두가이파이고
또한 성전에서 일하는 수석사제이라고 봅니다.
돈이 모이는 데는 부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성전 세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바칠 제물인 가축들을 성전 돈으로 환전해서 거래하는데 과정에서
환전상들은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부터 고정적으로 상납을 받는 이들은 성전에서 힘을 쓰는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생기는 수입원인 돈 줄을 위협하는 예수님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위증하는데 이 성전사건과 이때 하셨던
말씀을 내세우기는 합니다.
날이 저물자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 베타니아로 다시 나가십니다.
그 이튿날 베드로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가 생각나서 주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도 이 무화과 나무의 저주 이야기를 놓고 의아하게 생각이 듭니다.
‘아니, 인자하신 주님께서 열매가 열리는 철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서 열매가 아니라고
저주를 하시다니...’라는 생각과 ‘왜 연약한 무화나 나무를 말라 죽게 하시지?’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색하게 이 말라빠지는 ‘무화과를 놓고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하실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우리가 보아도 자연스럽지가 않고 어색합니다.
성서학자들 중에 몇은 이 대목을 놓고 많은 분석을 해 놓고 이대목은 예수님께서 하셨다기 보다는 초대 마르코 교회공동체가 유대인들에게 박해 받는 상황에서 편집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살아 생전에도 유대인들이 끈질기게 박해하고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게
하더니 이제는 그리스도교라고 하면 쌍심지를 켜고 사사건건이 시비를 걸고 박해를 하는
유대인들이 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는 유대인들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유대인들이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한편의 마음을 이 비유의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의 마음조차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말씀은 그래도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25절)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가시화되고 유대인들의 박해는
노골화가 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유대인들이 해도해도 너무했다는 생각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연후에도 진행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에 대한 미움의 마음을 솔직하게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주님께서 다른 기회에 하셨던 ‘용서’에 대한 주님 말씀을 이어서
붙인 것입니다.
신앙인의 과제를 이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매일 주님께 기도하고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반대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우리도 똑 같이 밉고 때로는
‘제발 없어져라.’라는 말까지 입 밖으로 내 비칠 수도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유대인들 처럼 밉고 또 꼴 보기 싫은 사람은 늘 내 주위에 있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천국에서나 진드기처럼 달라붙는 미운 사람이 없겠지요?
어떻게 하겠어요? 솔직한 우리 심정에는 ‘미운 사람은 이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마르코 복음 사가가 저주의 무화나무 이야기 끝에 ‘용서’의 주님의 말씀을
붙이 듯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옹졸함과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고백하며 ‘용서’의 마음과 함께
미운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밉고 싫은 마음이 가시지 않겠지만, ‘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새기며 지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며 ‘멋져부러’의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