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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신문을 통해 본 용인 '30년'
용인신문은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용인의 역사를 기록해오며 풀뿌리 언론의 사명을 다해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30년으 세월은 한 세대를 넘어서 역사가 바뀔 만큼의 긴 세월이었습니다.
용인군 시절부터 시로 승격되고 다시 특례시로 지정되기까지 용인신문이 직필정론의 본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애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변함없는 성원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창간 30주년을 맞아 용인신문은 창간부터 2022년 오늘까지 본지가 기록해온 중요한 기록들을 묶어
'용인군-용인특례시' 언론으로 본 '용인 30년' 발간을 준비 중입니다.
'용인 30년'은 연도별 주요 기사를 축약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제작하는 과정에 많은 기사를 제외해야 했지만 핵심기사는 충실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용인 30년'을 만들면서 지난 용인시의 30년은 강산이 세 번 변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섯 번은 변했을 만큼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창간 당시 18만 5000명에 불과했던 시 인구는 120만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용인신문은 지난 30년간의 급격한 용인개발과 성장을 비켜보면서 많은 문제점을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문화도시 용인을 꿈꾸며 밑거름이 되고자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꼐서 '용인 30년'을 일독해주시고 부족한 점은 애정으로 체워주실 것을 진심으로 바랍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1992년 창간시기 개발광풍 문제점 진단
1995년 지방선거 민선군수 부활 기쁨 함께
이듬해 인구 25만명 도시 성장 '시 승격'
창간 10돌, 난개발 후폭풍 속 대안 제시
2014년 3월 24일 지령 1000호 발행 '금자탑'
창간 30돌 동안 '지역문화 살리기' 앞장
창간부터 10주년까지(1992.12.04~2002)
용인신문 창간 당시 용인은 수지면을 중심으로 엄청난 투기 열풍이 몰아쳤다.
1993년부터 1996년 3월 1일부로 용인시로 승격되기까지 서부 용인은 수도권 택지개발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용인지역의 야산 곳곳이 파헤쳐지고 골프장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금어리 쓰레기 매립장 건설과 운학.호리 일대에 석유비축기지가 들어서면서 주민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고
개발 논리와 환경보호운동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윤병희 후보가 1960년 이후 첫 민선군수에 당선되었고
홍영기 이성근 이강우 후보가 광역의원이에 당선되었다.
경기도지사 선거는 이인제 후보가 당선되었다.
2기 군의원 선거는 10명의 후보자 중 현역의원 8명이 무더기 낙선하였다.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를 맞이면서 주민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관 주도 개발에 제동이 걸리고, 주민의견을 반영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지방자치제는 주민의 의식변화에 크게 기여했다.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했다.
시 승격 당시 용인시 인구는 25만 명, 행정기구는 3구 1실 4국 3담당관 17과 72계 5개 사업소로 확대 개편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군내 사조직 하나회가 척결되고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96년 4월 11일 제 15회 총선이 실시되어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고 용인시 선거구에서는 신한국당 이웅희 후보가 근소한 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1997년 말 IMF 금융위기가 강타하여 유사 이래 가장 엄혹한 경제 한파가 몰아쳤다.
IMF 한파는 용인 지역경제에도 엄청난 피해를 불러와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였다.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가운데 경기침체로 지방세 체납이 용인시 1년 예산의 10%에 달하고
개발지역의 집단 민원이 급증했다.
건교부가 죽전택지개발지구를 고시하면서 주택조합 예정지구는 포함시키고 골프장은 제외하자
1998년 11월 죽전-보정리 이장단과 지역 토지주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면서 연대투쟁을 벌였다.
중앙정부는의 일방적인 택지개발지구 지정은 경기도는 물론 용인시의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1990년대 말부터 수지지구 입주가 시작되면서 도시기반 시설이 미미하여 집단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건교부가 동백지구 개발권을 독점하면서 개발부담금을 활용하여 경전철을 건설하려던 용인시의 계획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어야했다.
윤병희 시장이 거액을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용인시장 흑역사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러한 가운데 토지개발공사가 토지주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시공사를 앞세워 주택조합과 계약을 체결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 동안은 민원과 난개발이 뒤엉켜 시 당국과 주민의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용인신문은 김윤후 장군이 승전한 처인성 전투가 현재의 평지성이 아니라 산성이었다는 것을 현장 조사를 통하여
최초로 제기했다.
1999년 죽전 2지구 건교부 개발승인으로 108만 평 부지에 5만 7500명이 입주하는 대규모 주택단지 조성계획이 발표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남북정상회담이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열렸다.
제16대 용인지역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감사원의 감사로 용인시 공직자 4명이 중징계를 받았고 구제역이 발생하여 축산농가의 피해가 컸다.
농축협이 통폐합하면서 용인시의 농축협도 구조조정을 피하지 못했다.
지역의 축협은 사실상 농협에 흡수되었다.
2001년 8월 23일 IMF구제금융을 모두 상환하였고, 같은 해 12월 4일김대중 대통령은 IMF를 졸업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건교부가 2008년까지 수도권 남부지역 교통 대책으로 광역철도망 건설계획을 발표하여 용인시민의 기대감이 높아졌다.
용인시는 2011년까지 1조 3000억 원을 투입, 10대 테마마을을 조성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용인관광비전 21'계획을 발표했다.
2001년 12월 14일, 행정타운 입찰 심사를 실시하고 본격적인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다.
2002년 지방선거 용인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정문 후보가 당선되었다.
한나라당은 손학규 후보가 경기도지사에 당선된 것을 비롯하여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압승으로 연말 대선에서 유리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용인신문은 창간 10돌을 맞아 지역언론의 뿌리를 튼튼히 내렸다.
용인신문 20주년까지(2003~2012)
용인신문 창간 10돌을 넘기면서 용인지역의 개발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여러 시행착오를겪어야 했다.
이 시기 용인시의 가장 큰 현안은 경전철을 둘러싼 것이었다.
용인시는 동백지구의 주택 건설업체들에게 교통 대책 미비를 이유로 사업승인을 무더기로 반려하였다.
용인시의 적법한 권한 행사는 대형건설업체에 비해 을의 위치에 감수해야 했던 과거의 관행을 무너트린 것으로써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정착되면서 가능해진 것이었다.
일부 주민의 반대로 3년 동안 표류하던 수지 하수종말처리장 부지로 죽전 2동 군량 뜰로 최종확정되었다.
거대 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민심의 역풍을 맞아 제17대 총선에서 집권 열린우리당이 대승을 거두었고
용인지역 총선에서 용인갑은 열린우리당 우제창 후보, 용인을 한나라당 한선교 후보가 각각 승리하여 여야가 의석을 양분했다.
경기도가 수원시 이의동 일대 337만 평의 광교지구 신도시 건설을 발표하면서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일대를 포함시켜 행정구역을 둘러싼 용인시와 수원시의 갈등이 극심했다.
동백지구 분양권 전매가 극성을 부려 용인지역의 주택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2004년 용인신문사가 주최하는 제1회 용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제2회 대회부터는 용인신문사와 용인시가 공동으로 주최하여 용인시는 물론 경기도를 대표하는 마라톤 축제로 자리잡았다.
보정역이 개통되면서 용인시 전철시대가 개막되었고 문화복지행정타운이 완공되어 용인시의 행정처리능력 제고는 물론
시민의 이용 편의도 크게 향상되었다.
용인시의 3개 구청이 개청되고 포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용인시 공직자 수도 1781명으로 증가했다.
용인신문이 창간 13주년을 맞아 (주)한길라서치와 공동으로 시민 700명에게 전화 면접으로 실시한 용인시민 의식 조사에서
시민 85.3%가 문화기반시설 확충을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꼽아 용인시으 문화인프라 구축사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였고 용인지역선거도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용인시장 선거에서는 서정석 후보가 토박이 출신 이우현 이정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광역의원 선거구 4곳 모두 한나라당이 석권했고, 조양민 후보가 용인시 최초의 선출된 여성 도의원이 되었다.
18개 지역 의석과 2개의 비례대표 의석이 걸린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16석을 얻어 2석에 그친 열린우리당을
압도했다.
2006년 2월부터 동백지구에 입주가 시작되었고 12월에는 용인지방공사, 경기지방공사, 민간업체가 공급하는
흥덕 첨단 주택단지가 분양되었다.
흥덕 주택단지는 용인시 아파트 개발지구 중 녹지율이 가장 높다.
2007년 12월 19일 제16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평양에서 노무현-김정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용인시는 2009년까지 하수종말처리장 12곳을 증설하여 지역 하천의 수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로 하였다.
경전철 건설공사가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주민혈세를 먹는 하마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당초 2009년 4월 완공을 목표로 했던 경전철 건설공사는 최소 4년이 늦은 2013년 12월에나 완공될 것으로 밝혀졌다.
용인신문은 경전철 설계 당시부터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사가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도 비판과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용인신문이 창간 15주년을 맞았다.15년 동안 용인시 인구는 18만 5000명에서 80만 명을 넘어섰다.
2008년도 용인시 예산이 1조 3634억원으로 확정되었다.
단국대학교가 죽전캠퍼스로 이전을 완료하였고 신세계백화점 죽전점이 오픈하였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세계경제를 위기에 빠트리고 한국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경기체감지수는 IMF 경제위기를 능가할 정도로 경제가 침체되어 시민 생활이 더욱 악화되었다.
광우병 사태로 이명박 정권이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첫 해에 치러진 제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어 원내 과반석을 확보했으나
40석 남짓이 박근혜계여서 불안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러한 가운데 공창에서 학살된 친박계가 대거 당선되었다.
용인시의 새로운 문화 랜드마크로 백남준 아트센타가 개관하였다.
경안천과 금학천이 복원되고 용인 구도심 16개 구역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9년 5월 23일 검찰수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자살로 서거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국민의 애도 물결이 이어졌고 500여만 명이 빈소와 분행소를 찾아 직접 조문했다.
같은 해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서거하여 석 달 만에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떴다.
게다가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여 용인시 모현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제2경부고속도로가 용인 동부권을 관통하는 건교부의 발표로 처인구민의 기대가 높아졌다.
신종플루가 급격히 확산되어 용인마라톤 대회가 취소된 가운데 용인시가 경기도 씨름왕 선발대회를 9연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용인시가 경정철 건설공사로 인한 재정 악화로 936억 원의 지방채권을 발행하였다.
2010년 치러진 재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용인시장 선거에서는 민주당 김학규 후보가 당성되었다.
반면 도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비례대표 포함 5석을 차지하여 3석에 그친 민주당에 승리했다.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강세 현상은 이어졌다.
한편 용인시 예산은1조5010억 원으로 편성되었다.
한나라당의 반대로 표류하던 무상급식안이 극적으로 타결되어 시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김학규 사장은 용인 경전철 사업자를 해지하여 시행사인 (주)용인경전철이 국제 중재재판소에 제소했고
1심에서 용인시가 패소하며 5150억 원을 시행사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용인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았고, 제18대 대통령에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용인신문 21주년부터 30주년까지(2013~2022)
용인경전철이 2013년 4월 개통되었다.
용인신문이 2014년 3월 24일 지령 1000호를 발간하였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야가 무승부를 거둔 가운데 용인시장에 새누리당 정찬민 후보가 당선되었다.
20대 총선부터 용인시 국회의원 선거구가 4개로 조정되었다.
용인시가 지명탄생 600주년을 맞았다.
201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하여 최초의 국가장이 치러졌다.
용인시를 상대로 용인시 주민소송단이 제기한 경전철 첫 공판이 열렸다.
2016년 4월 13일 치러진 제20대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하였다.
용인시 선거는 여야가 2석씩 양분하여 균형을 이루었다.
용인시 인구가 100만을 돌파하여 대도시 반열에 올랐다.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12월 9일 국회에서 가결되었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전원일치
판결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곧바로 구속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 9일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 다음날인 5월 10일 취임했다.
용인시가 2017년 12월 30일 채무제로를 선언했다.
(용인시 도시계획 2035)가 수립되었다.
용인시는 2035년 전체인구 150만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처인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쾌적한 전원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김정은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이어 북미 정상회담도 싱가포르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2차례 열렸으나 성과없이 끝났다.
2022년 제2대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0.73% 간발의 차로 승리했다.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김동연 민주당 후보가 초박빙 0.15% 표차로 승리하고
용인특례시장 선거는 국민의힘 이상일 후보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용인 미르 스타디움에서 용인시에서 최초로 2022년 경기도체육대회가 열렸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2020년 3월 11일 WHO의 팬데믹 선언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660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2022년 현재까지 종식되지 않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세계 경제는 극도로 침체되었고 한국경제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리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운석열 정부와 국민의힘,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은 대화보다 강경 대결로 치닫고 있어
경제위기 극복은 요원한 실정이다.
특히 2022년 10월 29일 밤, 이태원의 핼로윈데이 참사는 기뜩이나 우울한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꽃다운 청춘의 명복을 기원한다.
용인신문은 30주년을 맞아 인프라를 갖출 수 있도록 앞장서기로 하였다. 김종경 본지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