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일반]
20대에 조선인
유일 백화점 경영 박흥식…
해방 후 반민특위 구속 1호로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94년 5월 10일 91세
---- 박흥식----
1932년 29세 청년 기업인 박흥식
(1903~1994)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앞서 23세 때인 1926년 종이 제조 회사
선일지물(鮮一紙物)을 설립한 그는 5년 만인
1931년 서울 종로 2정목(현 종로 2가)에
있는 백화점 화신상회를 인수했다.
1932년 5월 건물을 증축하고 기념
행사를 열었다.
1등 상품으로 20평 기와집을 내걸었다.
그해 7월 바로 옆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동아백화점을 인수·합병했다.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양대 백화점이
합쳐 규모를 키운 것은 크게 환영할 일로
여겨졌다.
----1932년 5월 11일자 2면----
“쓸쓸한 종로에도 동아백화점과
화신상회가 웃둑 서서 잇슴으로 경성
북촌에서 조선인 경영의 백화점이
잇다는 것을 눗기게 되고 따라서 조선인
상업계의 면목을 세우게 되얏든 바
량방에서는 영리주의에서 경쟁 본위로
고객을 쟁탈하다가 결국은 균열을
생기게 하야 서로 공존공영의 기회를
엿보든 중이더니 지난 십륙일 새벽에
남산장(南山莊)에서 화신상회 사장
박흥식(朴興植)씨와 동아백화점주
최남(崔南)씨 사이에 타협이 성립되야
동아백화점의 경영 일체를 화신상회
대표 박흥식씨에게 양도한다는 각서를
맨들어 조인까지 되얏슴으로(…)
이에 대하야 모 조선인 상업가는
말하되
“지금 형편으로 조선인이 소 자본으로
경영하는 백화점에서 영리 본위로
고객을 쟁탈한다는 것은 멸망을 보는
것이 어둔 밤에 등불 보는 것 갓슴니다.
이 기회에 동아백화점과 화신상회
가 합병하얏다는 것은 고객으로 보면
엇덜는지 모름니다만은 경영주
로 본다면 정당 시기이외다.
아무조록 합병 후에도 백화점의 본색
을 일치말고 경영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임니다”
고 말하얏다.”
(1932년 7월 22일자 석간 2면)
----1932년 7월 22일자 2면----
화신백화점은 1933년 자본금 100만원,
신·구관 건평 800평, 종업원 320명,
하루 매출 1만7000원으로
“종로 상가에 군림”
했다.
당대 신문은
“사장 박흥식씨의 헌신적 노력으로
업무가 일취월장되어 가는 중”
이라고 전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경성 유일의
백화점이라는 자부심도 컸다.
당시 신문은 ‘저명 상공 소개’ 시리즈
제1편으로 화신백화점을 다뤘다.
“대경성(大京城) 안에 다섯 개나 잇는
백화점 중 조선 사람의 경영으로 단
하나인 화신은 종로 한복판에 용립(聳立)
하야 잇서 상가(商街)에 군림하야 잇는
바 이 화신의 유래가 어떠하며
그 내용이 어떠한가 이를 소개함도
의미 업는 일이 아닐 것이다.
저명 상공 소개의 제일일(第一日)은 화신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933년 8월 30일자 4면)
----1933년 8월 30일자 4면----
화신은 일본인 소유 백화점과 경쟁해
1934년 경성 시내 백화점 5개 중
세액 납부 기준으로 미쓰코시(三越)·
조지야(丁子屋)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히라타(平田)와 미나카이(三中井)가
뒤를 이었다.
박흥식은 백화점에 이어 도매업인
‘연쇄점’으로 사업 부문을 확장했다.
“사업가로서의 두뇌가 명석하다기보다
영롱하고 포부가 비범한 씨는 지금의
백화점 화신으로만 만족치 안코
그 사업망을 일대 확장하야 안출(案出)한
것이 연쇄계획점(連鎻計劃店)이엇다.
화신의 연쇄점은 얼는 쉽게 말하자면
지방 상인에게 대규모로 도매하는
것이라겟는데 이에 대하야 세간에서는
화신의 연쇄점이 안 된 다른 중소업자들에
게 큰 타격을 주는 결과를 초치하리라
하야 걱정하는 사람이 업지 안으나
사업가로서의 박흥식씨의 계획은 자본
경제의 최첨단을 것는 상방침(商方針)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업는 일이다.”
(1934년 8월 5일 자 석간 4면)
----1934년 6월 7일자 5면----
조선일보·동아일보에 이어 세 번째
한글 신문인 조선중앙일보가 1934년
주식회사로 발족할 때 박흥식은
여운형·최선익·윤희중·김동성·홍증식
등과 함께 창립 발기인
(1934년 4월 4일 자 석간 2면)으로
참여했다.
조만식·명제세·이인·김도연·이극로·
서춘·현상윤 등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박흥식은 서른 갓 넘은 나이에 이미
손가락에 꼽히는 조선인 기업인었다.
“새파라케 젊은이로 실업계에 이만콤이나
출세하기는 퍽 드문 일”
이었다.
당시 신문은 박흥식을 키운 홀어머니에게까
지 주목했다.
“그 어머니를 소개하자니 그 아들의
내력을 말하게 됩니다만- 박(흥식)씨는
원래 평안남도 룡강(龍岡) 출생으로
열세살 때 아버지를 일코 편모 김씨
손에서 여지껏 자라왓습니다.
어려서부터도 장사에 천재를 가젓든지
보통학교 겨우 하나 마친 몸으로 장사를
시작하기는 열여섯 살 때입니다.
그래가지고는 여러 번 패하기도 햇습니다
만은 싸우고 또 싸와서 결국 오늘의 그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슴입니다.
장사에 그런 수완을 가진 그에게 또한
경리에 눈밝으신 어머니가 게신 것이
엇지 우연이라 하겟습니까.
박씨의 어머님은 박씨가 상계로 헤매여
다니며 가사를 도라보지 못하엿슬 때
적지 안흔 큰 살림을 전부 도마터서
정리한 것은 물론 박씨의 장사 설계며
감독 지휘를 일일히 하섯답니다.(…)”
(1934년 6월 7일 자 5면)
----1938년 11월 10일자 8면----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35년 화신백화점 평양 지점이 문을
열었다.
이해 종로 화신백화점 건물이 화재로
불탔으나 1937년 지상 6층, 지하 1층
규모로 재건축했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갖춘
최신식 빌딩이었다.
1938년 화신 연쇄점은
“동양 유일의 연쇄식 경영체”
(1938년 1월 11일 자 석간 2면)로서
전국 400여 점포에 이르렀다.
1938년 4월 24일
“이왕(李王·영친왕 이은)’과
동비(同妃·이방자) 양 전하”가
화신백화점을 찾았다.
“양 전하께옵서 조선인의 민간 사업을
어시찰하옵신 것은 이번이 처음”
(1938년 4월 25일 자 석간 2면)이었다.
1938년 11월 화신백화점과 선일지물
등을 통합해 자본금 800만원
“조선인 경영으로는 최초의 대회사(大會社)”
(1938년 11월 10일 자 석간 8면)인
화신상사를 창립했다.
박흥식은 1939년 11월 인터뷰에서
“나는 잠자리에서도 계획 서류를 놓고
궁리하는 게 일”
이라며
“나는 사업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1939년 11월 3일 자 석간 4면)라고 했다.
----1939년 11월 3일자 4면.----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예술인도
후원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가
체포돼 1935년 2월 석방되자 주요한·
김동원 등과 함께 대전 형무소까지
마중을 나갔다.
독일 유학 12년을 마치고 귀국한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등 예술가·
지식인을 후원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동메달을 딴
손기정·남승룡에게 후원금, 수해 입은
동포를 위해 성금을 냈다.
일제가 요구하는 거액의 ‘국방 헌금’도
출연했다.
일본 정신 발양 간담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윤치호·신흥우·백관수·송진우·김성수·
유억겸·김활란 등 당대 명망가와
함께였다.
이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조선시국대책조사회 위원, 생활개선위원회
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발족한 반민특위에
제1호로 구속됐다. 미국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1949년 1월 11일자 2면----
“반족배(叛族輩) 조사에 분망한 반민행위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김상돈씨는
십일 박흥식 체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급 반역자로 지목되는 자가 비단
하나뿐이 아니겠는데 박흥식을 먼저
체포한 이유는 도피할 우려 내지 반민법
추진을 방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금명간 미국으로 떠난다는
정보도 있든 터로(…)”
(1949년 1월 11일 자 2면)
박흥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무죄
판결을 받았다.
5·16 직후 부정축재자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화신백화점은 1950년대 새로 탄생한
백화점들과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흥한화섬’ ‘화신소니’ 등
제조업에 뛰어들었지만 예전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화신그룹은 1980년 부도를 맞으며 해체됐다.
1994년 5월 10일 별세했을 때 부음 기사
제목은 1단 크기였다.
----1994년 5월 11일자 31면----
“전 화신그룹 회장 박흥식씨(91)가 10일
오후 2시 11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박씨는 한국 최초의 무역회사인 화신산업의
창업자이며 화신백화점, 화신소니,
화신레나운, 흥한합섬 등을 경영, 그룹
규모로 키웠으나 자금난을 이기지 못한 채
지난 80년 화신백화점 부도로 파산했다.”
(1994년 5월 11일 자 31면)
이한수 선임 기자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착한 사람
이 당시에 이런 큰 기업을 경영 할려면 친일은
불가피 한일,...
그러지 않고 기업을 운영했으면 금방 망했을 것이다.
지금도 정경유착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대우그룹 한순간에 분해되는 것을 보면.....
설반테스
독립자금 몇푼 대면 친일은 없어지고 독립 투사라는
식의 광화문 영감식 사고는 역겹기 그지없다.
일제에 비행기 헌납한 게 박흥식 아니냐?
얼마나 땡겼으면 비행기를 내고도 짭짤하냐?
rcbhe
누가 뭐래도 현재 대한민국의 초석을 다진 분들이
기업인들이다.
그들은 독립자금도 몰래주고 그들의 경제적 성과가
지금의 우리나라를 만든 기초가 된 거라 생각한다.
그들을 욕하는 인간은 자신들은 국가를 위해
세금을 얼마나 냈고 국가를 위해 한일 무엇인가?
오직 자기 먹고살기 바뻐 연명하지 않았는지
그에 비하면 기업인들은 영웅이다.
회원19694499
저분이 누구건, 김좌진 홍범도보다 백번 나은
인물이지요.
2004년 요양원 90대 신씨 할머니 진술: ~~
해방이되니까 가장 좋은 점이 독립군이 없어져서
좋았더라, 하시더랍니다.
양사
67년 동아방송에 중학교 합격자 발표 듣고 84번 버스
타고 조계사 앞에 내려 화신백화점에 교복 맞추러 갔지요.
며칠 뒤 교복 입고 모자 쓰고 흑석동 84번 버스
정류장에 내려 올라오는데 어르신들이 내 모자
교복을 만지며 부럽게 쳐다보았지요.
73년 대학 입학 때도 화신백화점 맞춤 교복 입고
배지 달고 종로 2가 다방 미팅 나갔지요.
멸극 히마와리
친 계몽령 극우들도 하루빨리 단죄해야 한다.
가짜보수박멸
박정희의 졸개들에게 뽀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망해버린 회사....
Davidavid
지금 민속촌을 이 공장을 되팔아서 번 돈으로
정영삼이가 사들인 겁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능한 기업인 박흥식씨가 92세에
강남의 세방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해방 이후 가장 부자였고 당시 이병철은
저리 가라였습니다.
이 사람을 죽인 사람은 우리 정보부에 고약한
공작원들이 었습니다.
경제 비사를 언젠가는 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이 중앙일보가 이 이야기를 해서 참 반가운데요.
제게 연락하시면 제가 이 문제를 더 상세하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회사의 기술부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메일:changseok.kang@gmail.com 으로
연락주시면 경제 5개연 1차 개발 계획 실행의 비화를
기사화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Davidavid
박흥식 회장은 우리나라 해방 후 나타난 대단한
실업가 였습니다.
경제개발 알차 5개년 사업에 뛰어들어 한국에
세계 섬유센터를 만들겠다는 큰 꿈을 안고
우선 비스코스 인견사 공장을 정부가 50% 지원하고
박흥식 회장이 나머지를 부담하는 방식으로 세우기로
했지요.
그런데 정부에서 약속한 50%를 질질 끌면서 주지
않아 박 회장의 사재를 다 털어 제주도에 땅과
심지어 신신 백화점까지 팔아서 공장 건설에
투입했는데. 정부에서 돈을 제대로 주지 않은 이유가
정보부에게 와이로를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공장이 어려움 중에서도 박 회장의 노력으로
완공되어 가동됐는데, 회사가 잘 되니까 전부 투자
지분을 갖고있던 산업은행에서 회사 공장을
불하 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인척 되는 정영삼이라는
도그마 인천에 탄소 회사 사장이 산업 명과
결탁하여 흥한 화학 섬유 회사를 지금의 민속촌 주인인
정영삼이가 권력을 이용해 산업은행과 짜고
박흥식 회장보다 2천만원 싸게 입찰해...
Whistle
한국의 선두 기업인들이 권력에 휘둘리던 시절에
국제 양정모회장은 전두환에 밉보여 거덜 났고
겁없이 대통령 출마했던 정주영 회장은 김영삼에게
철저하게 보복당해서 결국 아들 몽헌까지 비명으로
떠나게 했던 경제인들의 암흑시대....
원조 박흥식은 KBS 라디오 연속극 광복 20년인가에서
강도 당하는 수모도 겪은 사실상의 현대 벤처
기업인인 셈이지....
왕년의 명동신사
고등학교때 화신백화점에서 교복을 사입은게
엇그제 같은 일인데 ....
박흥식씨 이름석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양재천
일제 강점기에 조선 토종 경제인으로 일본 자본과
경쟁한 대단한 인물입니다.
친일 행위였다고 말하지만 일제 강점기 사회에서
사업 환경을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