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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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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高麗史)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기타 역사서나 개인 문집 등에
기록된 고려(高麗)시대의 역사 기록을 보면, 반도(半島)의 지리, 지형, 기후, 주위의
여러 국가와의 관계 등에 이해할 수 없는 기록들이 다수(多數) 등장하고 있다.
재야사학 중에서 대륙조선(大陸朝鮮)을 주장하는 부류와 아시아 조선(朝鮮)을
주장하는 부류들을 뺀 나머지 부류들은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
이후의 “조선(朝鮮)”은 반도(半島)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高句驪. 百濟.
新羅)은 최후(最後)로 신라(新羅)에 의해 통합(병합)되어 이어오다가 “왕건(王建)”
이란 걸출한 인물에 의해 소위 “삼한통일(三韓統一)”을 이루게 되는데, 어떤 이는
이때부터 “반도(半島)”왕조라는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고려(高麗) 중기 이후에
“반도(半島)”로 이주(移住)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어떤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반도(半島)로 이주(移住)했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그저 그럴 것 같다는 식의 감정적인 말만
되풀이 할 뿐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가 많다. 왜냐하면
이동(移動), 또는 이주(移住), 천도(遷都) 등의 어떤 정황도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심증(心證)으로, 어떻게 고려(高麗)가 대륙에 있었겠는가하는
반도사관에 익숙해진 사고의 결과일 뿐이다.
아래 기록들을 보면서 하나하나 더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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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高麗 史4卷-世家-顯宗 : 三 月 癸 未 幸 西 京 : 3월, 계미, 서경(西京)에 (임금이)
행차하였다.
2) 高麗 史4卷-世家-顯宗 : 甲 午 王 宴 群 臣 於 長 樂 宮 誅 金 訓 崔 質 等 十 九 人.
: 갑오, 왕이 장락궁(長樂宮)에서 뭇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김훈. 최질 등
19인을 주살(誅殺)하였다.
3) 高麗 史6卷-世家-靖宗 : 己丑設八關會御靈鳳門受百官賀賜.遂幸興國寺行香移
御長樂宮. :
4) 高麗 史3卷-世家-穆宗 : 癸 未 改 西 京 爲 鎬 京. : 계미, 서경(西京)을 호경
(鎬京)으로 바꿨다.
※ 半島(반도)의 북쪽에 있는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이라 했다는 것 그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북쪽에 있는 평양(平壤)을 어떻게 서(西)쪽에 있는 서울
(京)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서경(西京)을 또 “호경(鎬京)”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호경(鎬京)”이 반도(半島)의 평양(平壤)이라고 했을 때 안 될 것은 없다. 문제는
북쪽에 있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고 또 이곳을 대륙의 장안(長安) 서쪽에 있는
주(周) 무왕의 소도(所 都)였던 “호경(鎬京)”이라 이름 했다는데 있는 것이다.
호경(鎬京)은 주(周)나라가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한 후엔 서도(石)
또는 서경(西京)으로 불렸다. 당연히 이해되는 사안이다.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서울(京)을 옮겼으니 당연히 서쪽에 있는 “호경(鎬京)”은 서쪽의 도읍지였으니
“서경(西京)” 또는 "서도"라 했을 것이다.
다른 사서의 기록은 제쳐두고라도 “원사(元 史)”는 고려(高麗)의 조정(朝廷)사정
이나 산천지리(山川地理)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처지였다. 이러한 원사(元史)에서
조차 『東 寧 路 本 高 句 麗 平 壤 城 曰 長 安 城, 樂 浪 地 : “동 녕 로”는 본래
고구려의 평양성(平壤 城)이다, 이르기를 장안 성(長安城)이라 한다. 낙랑(樂浪)의
땅이다.』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동국(朝鮮)의 지리서인 “여 지 승 람(輿地勝覽)”에서 조차 『 고구려(高句驪)의
평양성(平壤城)은 왕검성(王 儉 城)이며, 장안 성(長安 城)이며, 호경(鎬京)이요,
유경(柳京)이며, 낙랑군(樂 浪 郡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수십 번도 더 설명한 내용이다. 참고로 “장락궁(長樂宮)”에 개한
지명대사전의 원문내용을 첨부한다.
【 長 樂 宮 : 在陝西長安西北故城中.漢書高祖紀.五年.治長樂宮.七年宮城.雍錄:
未央在漢城西隅,而長樂乃其東隅也,漢都長安.兩宮初城,朝諸侯君臣及於長樂,
不在未央也.自惠帝以後皆居未央宮,以長樂常奉母后.故凡語及長樂者多曰東朝. :
장락궁은 섬서(陝西) 장안의 서북에 있는 옛 성이다. 한 고조기에 의하면, 5년에
장락궁에서 다스렸다. 7년 궁성이었다. 옹 록(雍 錄)에, 미앙궁은 한성(漢城)의
서쪽 모퉁이에 있고, 장락궁은 동쪽의 모퉁이에 있다. 장안(長安)은 漢(한)의
도읍지다. 양 궁(장락궁과 미앙궁)은 처음 성이었다. 제후 및 군신들이 장락궁
에서 조회를 했다. 미앙궁은 존재하지 않았다. 혜 제(惠帝) 이후 미앙궁에서 모두
살았으며, 장락궁은 모후(母后:왕의 어머니)를 모셨던 곳이다. 본시 무릇 많은
이들이 장락궁(長樂宮)을 동조(東朝 :동쪽의 조정朝廷)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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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高麗 史3卷-世家-穆宗 ; 冬 十 月 幸 鎬 京 齋 祭. : 겨울 10월, 호경(鎬京)에
행차하여 재계하고(齋) 제사를 지냈다.
6) 高麗 史6卷-世家-靖宗 : 十 一 月 丙 午 朔 至 自 鎬 京. : 11월, 병 오 초하루에
호경(鎬京)에 이르렀다.
7) 高麗 史4卷-世家-顯宗 : 築 西 京 皇 城. : 서경(西京)에 황성(皇城 : 황제가 있는
서울의 성)을 쌓았다.
8) 三國史記 - 高句麗本紀 - 安原王 : 八 年, 築 長 安 城 : 8년, 장안(長安)성을
쌓았다.
9) 三國史記 - 高句麗本紀 - 平原王 : 二 十 八 年, 移 都 長 安 城 : 28년,
장안(長安)성으로 도읍(都邑)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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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 “5) - 9)”까지는 호경(鎬京)과 장안(長安)에 관한 사항이다.
호경(鎬京)이란 지명(地名)이나 도읍지(都邑地)의 이름으로 반도(半島)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호경(鎬京)에 고려(高麗)의 황제(皇帝-황성(皇城) 가
황성(皇城)을 쌓았다는 말은 당시 고려(高麗)의 왕은 “황제(皇帝)라 칭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또한 장안 성(長安 城)을 쌓고, 장안(長安)성으로 도읍(서울-皇城)을 옮겼다는
말은 장안(長安)이라는 도회지가 있고, 이 도회지(都會地) 안에 장안 성(長安 城)
이란 성(城)을 쌓았고, 이 성(城)은 황제(皇帝)가 살아갈 황성(皇城)이었다는
내용이다.
고구려(高句驪)의 『안원왕(安原王)은 장안 성(長安 城)을 쌓았고, 그 후 평원왕
(平原王)은 장안 성(長安城)으로 서울을 옮겼다.』고 한 것을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에서는 반도(半島) 평양(平壤)의 장안 성(長安城)으로 옮겼다고 설명한다.
그러면 반도(半島) 평양(平壤)에 장안 성(長安城)이라는 황성(皇城)이 어디에
존재(存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속이고, 거짓말 하는 것도 정도(程度)가 있는 것
이다.
결과적으로 고려(高麗)의 당시 서경(西京 : 서쪽의 서울)은 호경(鎬京)이었으며,
이곳은 “평양(平壤)”이었다. 또한 이곳 장안(長安)주위는 고려의 선대 국인
고구려(高句驪)의 영토였으며, 광역의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며, 후에 ‘낙랑군’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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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高麗 史4卷-世家-顯宗 - ❲東 女 眞 百 餘 寇 慶 州.❳ ❲甲午黑水靺鞨阿離弗等六人
來投分處江南州縣. : 동여진(東女眞) 백여 명이 경주(慶州 : 東都 : 鷄林 : 東京)를
노략질하였다. 갑오 일에 흑수말갈(黑水靺鞨) “아리 불” 등 6인이 와서 투항하자
이들을 나누어 강남(江南)주현(州縣)에 살게 하였다.
➊ 반도(半島)의 지리, 지형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KBS
드라마속의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➋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위치에 대해서 “반도사관 및 식민사관 론”을 신봉하는
무리들은 반도 북방의 흑수(黑水)주위에서 살던 종족이라고 못 박고 있으나 이는
한마디로 한없이 유식(有識)한자들의 무식(無識)한 소행이다. 너무 유식한 분들은
자신들 앞가림 때문에 무식(無識)한 소릴 한다하더라도 본인(필자)같은 사람은
앞가림을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옛 역사서 기록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➌ 舊唐書/ 本紀/ 下 :〔15년 十 一 月(中略). 癸 酉,薛延陀仁羅,僕骨,迴紇,靺鞨,
霫之眾度漠,屯于白道川.命營州都督張儉統所部兵壓其東境;兵部尚書李勣為
朔方行軍總管,右衛大將軍李大亮為靈州道行軍總管,涼州都督李襲譽為涼州道
行軍總管,分道以禦之 :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回紇), 말갈(靺鞨), 습(霫)”>
등의 무리가 사막(漠)을 건너 백도 천(白 道 川)에 진을 쳤다. 명을 받은 영주도독
“장 검”의 여러 부대를 통솔하여 그들의 동쪽지경을 압박하고, 병부상서 “이 적”이
삭방행군총관과 우위대장군 “이 대량”이 령 주 (靈 州 : 오원서북방)도 행군총관,
량 주 도독 “이 습 예”가 량 주 도 행군총관이 되어 나누어서 길을 나와 방비하였다.>
▶ 설연타 및 동라, 박골, 회흘 등은 “천산의 동서남북”지방에 있었다.
말갈(靺鞨)과 습(霫)등은 현 동북삼성의 “길림성과 흑룡강 성”에 있었다고 해설하고
있는 종족이요, 국가다. 이러한 자들이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머나 먼 천산(天山)산맥 북쪽과 그 동쪽에 나타나 설연타 및 동라, 박골,
회흘등과 연합작전을 편다는 것은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입장에서 보면 희극적인
소설(小說)이다.
위의 기록은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 말갈, 습>등의 종족들이 무리를 이뤄
백 도 천(白 道 川)에 진을 쳤으며, 이들을 사막(沙漠)을 건너갔다 (度 漠)는 것이다.
이들이 사막(沙漠)을 건너 “백도 천”에 배수진을 쳤다면 위의 기록으로 보면
최소한 1)고비사막 북쪽이나 2) 그 서쪽의 돈 황과 옥문관의 북쪽지방과 3) 준
가리 분지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말갈(靺鞨)은 읍루요, 읍루는 숙신이다. 말갈다음엔 여진(女眞)이다.
➍ 자치통감 唐 紀 2 9 / 玄 宗 中 之 上 / 開 元 十 四 年 :〔是歲,黑水靺鞨遣使入見,
上以其國為黑水州,仍為置長史以鎮之. (注) ➡黑 水 靺 鞨 在 ▶流 鬼 國 西 南,
女 真 即 其 遺 種 也 : 현종 개원 14년, 이때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면 입 견(入 見)
하였다. 상(上 : 당 현종)이 그 나라를 흑수 주(黑水 州)로 하고 거듭 진(鎭)에 장사
(長史)를 세웠다.
(주) 흑수말갈은 유괴국의 서남에 있다. 여진 곧 그 유종이다. 〕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유 귀 국(流 鬼 國) 서남(西南)”에 있다. 】 “유귀 국”
이란
나라의 위치를 찾아낸다면 그토록 말썽 많은 흑수말갈의 존재를 확실하게 밝힐 수
있다. 통전(通典)과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북해(北海)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북해(北海)의 북쪽에 있었던 “유 귀 국”에서 서남(西南)방향이면 그 지방은 도대체
어디일까? 계속 알아보기로 하십시다.
➎ 通典 邊防 傳 : 北 狄 七 <庫莫奚.契丹.室韋.地豆于.烏落侯.驅度寐.霫.拔悉彌.流鬼.
迴紇.骨利幹.結骨.駮馬.鬼國.鹽漠念>
<流 鬼> : ➡流 鬼 在 北 海 之 北.(중략). 통전 변방 전의 북적 7 :
『유 괴 국』은 북해의 북쪽에 있다.- 위 자치통감에 “유 괴 국” 서남(西南)에
말갈에 있다고 했으니 결국 『북해의 서남쪽에 말갈(靺鞨)이 있었다.』는 결론이다.
결국 <黑水靺鞨(흑수말갈)>의 동북(東北)지방에 “유 괴 국”이 있었다. 현재의
지형도로 보면 <카자흐스탄의 발하슈 호> 동쪽지방이다.
또 하나 【北海】를 어느 곳에 위치했다고 비정(추정)하느냐에 따라 흑수말갈
(黑水靺鞨)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1) 北海 : 바이칼 호수 : 이곳의 서남지방은 신 강성 알타이산맥까지다.
2) 北海 : 천산(天山) 북 방 지대 : 이곳의 서남지방은 신 강성 “소 륵 과 우전사이”가
되며,
3) 北海 : 고비사막 : 이곳의 서남지방은 주천. 돈 황. 옥문관지방이 된다.
어느 쪽으로 “북해(北海)”를 비정하여 갖다 놓아도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흑룡강 성의 흑룡 강을 <黑水흑수>라 하여 이곳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었다고 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결국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학자들에 의해 조선의
역사는 뿌리 채 흔들린 것이다. 이런 빌어먹는 거지같은 일이 있었으니!!!!!!!!!!!!!!!!!!!
조선사가 이 모양이 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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➏ 新 唐 書 卷 220. 列 傳 145. 東 夷 (高 麗. 百 濟. 新 羅, 日 本. 流 鬼) 중에서
〔流 鬼〕【본인 주 : 북해의 북쪽에 있다고 하는 “유귀”열전이 동이(東夷) 곧
고구려. 백제. 신라. 일본 편에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
〔流 鬼 : 去 京 師 萬 五 千 里, 直 黑 水 靺 鞨 東 北, 少 海 之 北 : 유괴, 경사로부터
15,000 리 떨어져 있으며, 곧바로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동북이며, 소해(少 海)의
북쪽이다.❳
▶ 당시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유 귀 국(流 鬼 國)의 서남(西南)지방에 있었다고
자치통감이나 통전 모두 같은 위치로 기록하고 있다. 즉 “유귀(流鬼)”는
<북해(北海)의 북쪽지방>에 있었다고 하니 그곳은 신 강성 천산산맥의 북쪽이
북해(北海)였다. 그 북쪽지방이면 구소련의 당노산맥 서쪽지역일 것이다. 그
『서남(西南)지방이면 신강성의 서북지역과 현 카자흐스탄지방이다. 』이곳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있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으며,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들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습(霫)등이 ‘설 연 타’ 외 ‘동라’, ‘박골’,
‘회흘(回紇)’과 연합하여 당(唐)나라에 대항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朝鮮)의 영토”가 『아랄 해』동쪽과 동남쪽지방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및 타지키스탄 동부지방으로부터 신강(新疆)까지
미쳤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겠지만 자신들이
천년, 이천년을 살아 체험한 것이 아닌 이상 역사서를 믿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만”과 “독선”일 뿐이다.
※ 이러한 대륙의 역사 기록을 보면 ; 도대체 대륙(大陸)의 왕조(王朝)들은 어디에,
어느 곳에 황성(皇城)을 두고 있었으며, 영토(領土)는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화하(華夏)의 원조 격인 전한과 동한(前漢과 東漢), 삼국지(三國志)로 유명한 삼국
(三國)과. 태 원(太原) 유수였던 “리 연”이 건국했다는 당(唐), 주원장이 건국했다는
명(明) 등의 쟁쟁한 황제의 나라들은 도대체 대륙의 어느 구석에 있었는가?
대륙의 역사서 기록으로 보면(이러한 나라들이 존재했었다고 한다면), 한(漢)은
마한(馬韓)의 영토(領土)속에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 영토 속에 있었고, 삼국
(위. 오. 촉)은 백제(百濟)의 영토 속의 소국(小國)이었으며, 당(唐)나라는 오아시스의
서남쪽에서 신라와 실크로드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 나라였으며, 명(明)나라는
고려(高麗)의 제후국(諸侯國)으로 서남쪽 지방정부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결과로 보면 소위 말하는 『황제 국(皇帝 國)은 조선(朝鮮)이 유일하며,
조정(朝廷)은 중앙 조정이라 하여 “중조(中朝)”라 칭했음이 틀림이 없다. 』
11) 高麗 史4卷-世家-顯宗 - ❲定安國人骨須來.甲寅宋福州人陳象中等來獻土物.
鐵利國首領那沙遣黑水阿夫閒來獻.辛酉廣南人陳文遂等來獻香藥.宋泉州人陳億來投.
是月大食國悅羅慈等一百人來獻方物.大食國在西域.九月辛巳大食蠻夏詵羅慈等
百人來獻方物.八月壬午宋廣南人李文通等三人來獻方物. ❳: 안정국【감 숙성에 있던
소국】사람 “골 수”가 왔다. 갑인, 송나라 복주【福州 : 복건 성】인 “진 상중”등이
토산물을 바쳤다. 철리 국(鐵利 國) 수령 “나소”의 사신 흑수아실간이 와 토물을
바쳤다. 광남【廣南 : 광동 성 및 광서 성】사람 “진 문수”등이 와 향료와 약을
바쳤다. 송나라 천주【泉州 : 복건 성】사람 “진 억”이 와 투항했다. 시월 대식국
【大 食 國 : 石 國으로써 “사라센”을 말하는 것으로 현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람 “열 라 자”등 일백(一百)인이 와 방물(토산물)을 바쳤는데, 대식국은
서역(西域)에 있다. 9월, 대식(大食)국의 만하(蠻 夏).선 라 자(詵 羅 慈)등
일백(一百)이 와서 방물(토산물)을 바쳤다. 8월, 송나라 광남(廣南)인 “이 문 통”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12) 高麗 史6卷-世家-靖宗 -❲甲寅東蕃首領大信等來獻駱駝.契丹遣夏州觀察使
趙安仁來賀生辰. ❳갑인, 동번(東蕃)수령 “대신”등이 와서 낙타【駱駝 : 고려(高麗)를
반도로 비정할 경우 동번(東蕃)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바다 건너 열도(列島)를
동번(東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낙타(駱駝)란 동물은 열도에서 자생할 수 없다. 】
을 바쳤다. 글란(契丹)이 하주【夏州 : 영하 성 황하주위 : 글란(契丹)이 파견사를
보내 고려 황제의 생신을 축하했다면 고려와 근접해 있는 관찰사를 보냈을 것이다.】
관찰사 “조안인”을 보내 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13) 高麗 史9卷-世家-文宗 - ❲冬 十 月 壬 午 冊 封( )平壤侯琇綵棚樂部供張甚盛王
率宮嬪太子諸王潛幸觀禮.乙卯以子朝鮮侯燾( )林 侯 熙 進 爵 爲 公( )檢 校 司 空
金 官 侯. 檢 校 司 空 卞 韓 侯.❳
13-1) 高麗 史10卷-世家-宣宗 - 庚辰以朝鮮公燾林公熙守太保;常安侯琇
扶餘侯( )金 官 侯( )卞 韓 侯 守 司 徒 ; 辰 韓 侯 愉 守 司 空.
13-2) 高麗 史10卷-世家-獻宗 - 己 亥 以 朝 鮮 公 燾( )林 公 熙 守 太 師 ;
常 安 公 琇 扶 餘 公( )守 太 保; 辰 韓 侯 愉 漢 山 侯( )樂 浪 伯 瑛 守 司 徒.
▶ 고려사에 나오는 몇 구절을 보면 : 『平 壤 侯. 朝 鮮 侯. 金 官 侯. 卞 韓 侯.
朝 鮮 公. 常 安 侯. 扶 餘 侯. 辰 韓 侯. 樂 浪 伯 』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기록이
눈에 띈다. 반도(半島)에 있었던 대륙왕조의 일개 제후국(諸侯國) 나라에서 이러한
관작은 언감생심【焉 敢 生 心 : '어찌 감(敢)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는가.】
감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평양(平 壤) 후 : 평양 지역의 제후(諸侯)
조선(朝 鮮) 후 또는 조선 공 : 제후국 조선의 왕
금관(金 官) 후 : 금관 지역의 제후(諸侯)
변한(卞 韓) 후 : 변한 지방의 제후(諸侯)
상안(常 安) 후 : 상안 지방의 제후(諸侯)
부여(夫 餘) 후 : 부여 지방의 제후(諸侯)
진한(辰 韓) 후 : 진한 지방의 제후(諸侯)
낙랑(樂 浪) 백 : 낙랑 지방의 제후(諸侯)
반도(半島) 고려(高麗)!!!!!!!!!! 송나라 및 요(遼)를 상국(上國)으로 모시는
처지라고 우리는 늘 상 가르쳤고, 배워왔다. 이러한 대륙의 제후국(諸侯國) 처지에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의 봉건왕조 체제아래서는 말이다.
사방(四方)에 제후국(諸侯國)이 있고, 중앙(中央)에는 황제(皇帝)가 있어, 사방의 제후국을 통치한 것이 봉건 왕조 체제하의 법칙이요, 수천 년 내려온 하늘의 이치(理致)였다.
고려(高麗)는 반도(半島)에서 존재할 수 없는 제후국(諸侯國)을 거느리고, 수천 리 먼 변방의 나라는 『동번(東蕃). 서번(西蕃). 북적(北狄). 남만(南蠻)』등으로 호칭했으며, 이들 모두가 살고 있는 곳을 가리켜 “사해(四海)”라 했으며, 이들을 가리켜 구이(九夷)라 했고, 총칭 동이(東夷)라 칭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高麗)를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한다는 것은 “역사왜곡”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고려(高麗)는 대륙(大陸)의 황하(黃河)연변에 황도(皇都)를 갖고, 서쪽의 장안(호경=장안=평양)을 서경(西京)으로 한 중조(中朝)의 핵심세력으로, 사해(四海)를 다스렸다.
2010년 06월 27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