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번째 편지 - 사고로 아들을 잃은 친구에게 띄우는 편지
지난주 이런 외신이 전해졌습니다. <한국 국적의 마흔 살 00씨는 지난 2일 LA 시내 한인타운의 한 주택에서 LA 카운티 정신건강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출동한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친한 고등학교 동창 아들에게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런 카톡을 보냈습니다.
"엄청난 소식을 들었네. 뭐라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너와 통화할 용기가 없어 문자로 위로를 전하마. 그 무엇도 지금은 다 소용이 없을 거야. 그저 하나님과 시간에 의탁할 뿐. 시간이 흘러 통화할 자신이 생기면 전화하마. 힘들고 힘들지만 이 또한 지나간다네.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 지낼 수밖에...."
그러나 그저 시간을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감정이 복잡하여 예전에 읽었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자식 잃은 마르키아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De Consolatione ad Marciam)>를 다시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친구에게 편지를 쓸 용기가 생겼습니다.
"친구야. 어떻게 이 편지를 시작하여야 할지 모르겠구나. 사건이 터지고 보름이 되도록 주위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말이다. 눈물은 그 또한 얼마나 흘렸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구나. 아내와 다른 가족을 위로하느라 너는 울음을 삼켰을지도 모르겠구나.
이 말이 너의 가슴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너와 같이 자식을 잃은 부모는 많았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리기 바란다. 비극 중에 비극이지만 이 비극은 오래전부터 반복되고 있는 일이란다. 너와 같은 입장의 부모도 많았다는 말이지.
그래서 그분들을 위로하려는 시도도 꽤 많았고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서기 40년경, 3년 전 아들을 잃고 여전히 슬픔의 고통에 잠겨 사는 저명한 로마 가문의 부인 마르키아 여사에게 보낸 편지이지. 나는 이번에 다시 그 글을 읽어 보았다네.
3년간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더군.
"모든 시도는 허무하게 끝났지요. 친구의 달콤한 위로도, 친척들의 권위도, 아버님의 훌륭한 유산인 그 학문들도, 모두 쓸모없는 위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큰 고통도 가볍게 만든다는 시간이라는 자연 치료제도 당신 안에서는 그 힘을 잃었지요."
친구에게 이제 2주의 시간이 흘렀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냐에 따라 슬픔의 2주가 3년 아니 평생이 될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더군.
"슬픔은 광기에 휩싸여 결국 괴로움과 함께 고통으로 변모하지요."
친구의 슬픔이 고통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네.
세네카는 자식을 잃은 두 여인의 비극적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네.
한 여인은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이고, 다른 여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였다네. 두 여인은 그 비극적 상황을 정반대로 대응한 모양이야.
"옥타비아는 살아가는 내내 끝없이 울며 한탄했고, 어떤 위로의 소리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하나의 얽매여 온 정신을 쏟았던 그녀는 자신이 쉬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살아가는 내내 장례식에 있는 듯했지요. 그녀가 일어날 용기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눈물을 멈추는 것이 아들을 두 번 잃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죠."
"반면 리비아는 무덤에 아들을 뉘며 아들도 고통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칭송하거나, 그의 생전 모습을 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기꺼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에 대한 기억과 함께 살았던 것이지요."
역사상 비슷한 비극을 겪는 부모들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하고 나머지 생을 살아갔을 거야. 나는 친구 부부가 <리비아>의 현명함을 따르기를 간절히 바란다네.
이 편지의 상대방인 마르키아 여사는 <옥타비아>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세네카는 이렇게 이야기하지.
"당신은 좋은 것들은 잊어버린 채 당신의 운명을 나쁘게만 보고 있지요. 당신이 아들과 함께 지내며 즐거웠던 순간들, 어린 시절 사랑스러운 재잘거림과 성장하던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사건의 마지막 모습만 움켜쥐고 있어요."
"고요한 바다와 상냥한 바람은 조타수의 기술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역경이 몰아쳐야 가능하답니다. 그러니 굽히지 마세요. 굳건한 걸음을 내디디세요. 요란한 소리는 처음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운명의 질투는 평정심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뻔한 이야기가 친구에게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야. 세네카도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
"운명이라는 놈이 통곡으로 극복된다면 그 통곡도 가져다 씁시다. 대낮은 눈물로 지나가게 하고 한밤은 슬픔이 집어삼키게 하세요. 찢어지는 가슴을 쥐어짜며 얼굴을 때리는 등 온갖 폭력을 동원해 비탄을 키우세요. 하지만 아무리 가슴을 쥐어짜도 이미 죽은 자를 다시 불러올 수 없다면 고통은 그만 보내주세요."
세네카는 마르키아 여사를 위해 현실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이런 속임수를 제안한다네. 퍽 일리가 있어.
"슬퍼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 그 자체로는 견딜 만한 것이 분명합니다. 집을 비웠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니까요. 그들을 보고 함께 즐길 기회가 없다 해도 말이에요."
세네카는 3년간 슬픔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마르키아 여사에게 아들이 외국에 가 있어 잠시 볼 수 없을 뿐이라고 자신을 속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네.
우리네 현실 삶에서도 자녀들이 외국에서 살면 어쩌면 평생 한 번 만나지 못하고 서로 그리워하기만 하고 지내는 사이가 있지 않은가.
"죽은 사람들을 잠시 (외국으로) 떠난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속입시다. 우린 그들을 멀리(외국으로) 보냈고 곧(몇 년 아니 몇십 년 후) 뒤따라(외국으로)가겠다며 먼저 보낸 것입니다."
친구여, 자네 아들이 한평생 아프리카 오지에서 그들을 돕겠다는 숭고한 결심을 하고 2주 전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생각하게나. 그곳은 너무 오지라 편지도 전화도 연결이 안 된다네. 그래도 그는 그곳에 잘 지내고 있는 거라고 믿자는 거지.
이러면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은 그리움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세네카의 처방이라네. 어찌 마음이 좀 움직이는가.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답게 마무리를 이렇게 하였다네.
"저마다의 끝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끝은 처음 놓인 그대로 머물 것이며, 어떤 노력과 영향력으로도 뒤로 밀리지 않을 것이에요. 그렇게 당신의 아들은 계획된 대로 삶을 마쳤다고 여기세요. 그는 자신의 수명을 지녔으며 그리고 정해진 시간의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친구여, 천천히 이 비극의 늪에서 빠져나오게나. 자네라면 충분히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믿네. 시간이 흘러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서로 통화하세나."
2024.5.14.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