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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제43장 劍의 하늘 海天
객방(客房), 침상 위에는 금침이 개어진채 단정히 놓여져 있었다. 이미 밤이 깊었 거늘 창 밖을 내다 보고 있는 한 여인(女人)이 있었다. 취의를 걸친 면사여인, 바로 무영초객과 같이 있던 그녀였다.
(어머니는 어째서 무영초객으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인가? 아무런 이유도 가르쳐 주지 않고…)
그녀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무림에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리고 또 아버님은 누구인지…? 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이때였다. 똑!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대체 누가…? 무영초객은 이미 잠이 들었는데…)
여인은 문을 열었다. 순간,
"아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경탄을 토해내고 말았다. 백의미서생…!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급격히 설레인 것이다. 백의미서생은 누구인가? 표리천영, 바로 그였다.
"낭자, 미안하오. 하나 꼭 알아볼 것이 있어서…"
취의여인은 그의 영준한 얼굴에 경탄한 자신에 대해 수치심이 생겼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마음은 곧 쌀쌀한 음성을 토하게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너무 무례하군요. 야밤에 아녀자의 방을 찾아오다니… 날이 밝은후에 다시 오세요."
그녀는 문을 닫으려 하였다. 하나, 그보다 먼저 표리천영의 손이 그것을 제지했다.
"낭자, 급한일이오. 해천검궁의 위치를 좀 가르쳐 주시구려."
"해천검궁…?"
취의여인의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어떻게 이자가 그것을…? 그렇다면 나의 전음을…?)
그녀의 눈을 빠르게 표리천영을 살폈다.
(고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표리천영이 첫 눈에 그녀의 무공을 알아보듯이, 취의여인 역시 그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취의여인의 태도는 즉시 변했다.
"놀랍군요… 우선 방으로 들어오시죠."
"고맙소."
표리천영은 짧게 대꾸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취의여인은 침상에 걸터 앉았고, 표리천영은 하나 뿐인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취의여인이 먼저 물었다.
"해천검궁의 위치를 알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죠? 그곳은 무림에서조차 신비에 가려진 곳인데…"
표리천영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박혀있었다. 추호의 잡념도 섞여있지 않는 맑은 시선이었다.
"그것은 사적인 일이라 말해 줄 수 없소."
취의 여인은 다소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돌아 가세요. 저도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표리천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소생은 반드시 알아야 하오. 때에 따라서는 강압적인 수를 써서라도…"
일순, 취의여인은 내심 발끈 화가 났다.
(감히 내게 그런 말을…)
그녀는 평생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를 아는 모두가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으며, 무림에 나와서도 그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데, 감히 강압적인 수를 쓰겠다니… 취의소녀는 더욱 냉랭하게 말했다.
"강압적인 수요? 그렇다면 무력을 쓰겠단 말인가요? 흥! 전음을 엿들은 일부터 시작해서 파렴치한 것 투성이군요."
표리천영은 그 순간 자신의 실례를 깨달았다. 그로서는 사실 그녀에게 대답을 강요할 만한 아무런 자격도 없지 않은가! 그는 곧 정중히 사죄를 했다.
"낭자, 미안하오. 소생이 급한 마음에 실태를 보였구려."
그의 태도는 추호의 가식도, 비굴함도 없었다.
"…!"
취의여 인의 눈이 다시 온화한 기색을 되찾았다.
(놀라운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선 하기 힘든 것이거늘…)
표리천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 가르쳐 주시오. 해천검궁의 위치를…"
취의여인의 마음은 어느새 그에 대한 호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좋아요.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어요."
"조건…?"
표리천영의 반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무런 조건없이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않아요?"
표리천영은 내심 자조이 고소를 머금었다.
(마(魔)의 제황임을 자처하는 내가 이런 구차한 행동을 하다니… 차라리 내 스스로 찾으리라!)
그는 신형을 일으켰다.
"낭자, 미안하오. 소생에게는 조건에 응할만한 그 아무것도 없오이다."
그가 신형을 일으키자,
"…!"
취의여인은 내심 놀랐다.
(그는 분명 해천검궁을 알아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한 조건이란 공자의 성함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예요."
방을 나서려던 표리천영의 신형이 멎었다. 취의여인을 돌아보는 그의 눈에 얼핏 고마운 기색이 스쳤다. 하나,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조건에 응할 수 있겠군요."
취의여인은 표리천영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해천 검궁은 천만대산(天萬大山)의 숲의 바다 해림(海林)에 있어요."
표리천영은 속으로 되뇌였다.
(천만대산의 해림(海林)…?)
이어,
"낭자, 고맙소. 소생의 이름은 표리천영이라 하오."
그의 마지막 말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표리천영은 어느새 천만대산(天萬大山)을 향해 신형을 날린 것이다. 일순, 취의여인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을 받았다.
"표리천영… 그가 뇌공천신 표리천영일 줄이야…"
그녀는 어둠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데…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예감…! 그녀는 무슨 예감을 느낀 것인가? 밤(夜), 밤 은 깊어가고 있었다.
× × ×
천만대산(天萬大山)---! 중원오악(中原五嶽)보다 오히려 더 거대웅장함을 지닌 거악(巨嶽)이었다. 남방에 위치한 천만대산은, 그 따뜻한 기후로 인하여 온갖 나무와 기화이초가 만발 한 곳이었다. 가히 전인미답(前人迷踏)의 밀림이었다.
…
월광(月光)이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이때, 달빛이 뿌려지는 천만대산의 능선을 넘는 한 인영이 있었다. 백의를 걸친 미서생, 그는 바로 표리천영이었다. 암천(暗天)을 가득 메운 별들은 금시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문득, 표리천영의 걸음이 멈춰졌다. 주위를 흩어보던 그의 맑은 시선은 약간 찌푸려졌다.
(으음, 그녀에게 자세히 묻지 않은 것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군.)
그는 벌써 두 시진 이상을 천만대산 에서 헤맨 것이다. 하나, 숲의 바다 해림(海林)을 찾을 수 없었다. 하긴 워낙 방대한 천만대산이었으니… 지리를 모르는 표리천영으로서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기분이었으리라. 이때, 걸음을 옮기려던 표리천영의 두 눈이 일순 반짝였다.
(저것은…?)
불빛, 하나의 불빛이 어둠속에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이 밤에 웬 불빛이…?)
스스… 순간, 그의 신형은 어둠을 가르고 소리없이 흘렀다. 초로의 노인(老人), 한 손에 등(燈)을 든 노인이었다. 노인은 무덤가에 앉아 있었다. 무덤, 그것은 너무나 오래되어 무덤이라기 보다는 조그만 봉분에 지나지 않을 정도 였고, 그 앞에는 하나의 비석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노인의 얼굴엔 슬픔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심한 얼굴, 인생의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얼굴이었다. 하나, 안목이 있는 자라면 알수 있을 것이다. 무심한 듯한 얼굴에 그려진 긴 세월의 한(恨)을… 노인은 조그만한 봉분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백군(白君)…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의 말은 마치 다정한 정인(情人)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어둠을 무서워했지… 여기 등(燈)이 있으니 안심하고 잠들어라… 내가 너를 지켜줄 테니…"
문득, 노인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흩었다. 그의 눈은 이 순간 예리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이때 였다.
"노인장…"
말과 함께 표리천영이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그가 나타난 곳은 노인의 뒤였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몸을 돌리지 않았다. 표리천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인장… 실례지만 말좀 묻겠소이다."
"물어보시오."
노인의 어조에는 억양이 없었다. 표리천영은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았다.
"혹시… 이 근처에 해천검궁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오?"
일순,
"해천검궁!"
노인의 신형이 순식 간에 한 바퀴 핑그르 돌았다. 그의 두 눈에서는 칼날같이 섬뜩한 한광(寒光)이 스치고 자나갔다. 표리천영은 내심 흠칫했다.
(무서운 안광이다. 필히 범상한 노인은 아닐 것이다.)
노인의 두 눈이 본래의 무심함을 되찾았다.
"해천검궁은 왜 찾으시오?"
표리천영은 얼른 둘러댔다. 타인에게 어머님에 얽힌 비화(悲話)를 늘어놓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의 검학(劍學)이 천하제일이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오."
노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비검(比劍)을 하겠단 뜻이오?"
그의 말은 찬바람이 일 정도로 싸늘했다. 표리천영은 짧게 대꾸했다.
"그렇소."
노인은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핫…"
표리천영은 잠자코 있었다. 노인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물어왔다.
"자네는 하늘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하나?"
표리천영은 고개를 저었다.
"벨 수 없소."
노인은 더 애기할 것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게. 해천(海天)은 곧 하늘(天)이네. 아무도 벨 수 없는 것이지."
이어, 그는 타이르듯이 말을 이었다.
"해천검궁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 또한 세상을 알려고 하지않네. 다른 사람 같으면 노부가 벌써 손을 썼을 테지만 자네는 기도가 비범하여 그냥 놓아주는 것이네."
표리천영은 그 말에도 격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해천은 하늘이 아니라 천만대산을 가리는 작은 처마에 불과하오. 어찌 하늘이 세상을 떠나 숨어만 지내겠소."
순간, 노인의 눈에 이채가 번쩍였다. 이어, 그는 돌연 좌수(左手)로 표리천영의 가슴에 있는 옥당(玉堂), 현기(玄機), 거궐혈(巨闕血)을 동시에 찍어갔다. 그 속도는 가히 섬광(閃光)과 같았다. 손에서 아무런 경풍도 일지 않았으며, 살기조차도 내뿜지 않았다.
(역시… 숨은 고수다!)
표리천영은 흠칫 했다. 하나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우수를 들어 가볍게 공세를 차단시켰다.
"…!"
노인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이어, 그의 몸이 다섯 개로 변하더니 들고 있는 등이 역시 다섯 갈래로 나누어지며 표리천영의 오대혈을 찍었다. 슈… 슈슉…! 이번에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어둠을 갈가리 찢었다. 그러나, 표리천영은 여전히 제자리에 선 채로 쌍수를 교차시켰다. 이어 음유한 공력이 소리없이 방출되어 노인의 공세를 무위로 만들었다.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대단하다…!"
이어 그는 등(燈)을 내던지더니 우수를 쭉 뻗었다. 순간, 표리천영은 대경했다.
(검공(劍功)…!)
물이 흐르듯, 바람이 스쳐가는듯, 그의 자연스런 손은 막힘이 없이 뻗어왔다. 이제까지의 무공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피할 곳이 없다…!)
표리천영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생각하는 순간, 표리천영의 신형이 빙글 돌아가며 우수를 쭉 뻗었다. 파앗… 그의 우수(右手)는 돌연 삼백 육십개의 환영을 그리더니 그 수영(手影)이 한곳으로 폭사되었다. 두 기류가 마주치는 순간, 꽈르르르--- 릉---! 우지끈… 엄청난 여파가 주위의 나무들을뿌리째 날아가게 하였다. 그 속에서,
"윽…!"
노인의 신음성이 터져나 왔다. 그의 앞에는 깊이 패인 발자국이 세 개나 있었다. 표리천영의 앞에는 단지 한 개의 족인이 있을 뿐이었다.
"이… 이럴 수가?"
노인의 안색이 홱 변했다.
"지옥파천검결… 어떻게 사천마종제의 무공을…?"
아아!
--- 지옥파천검결!
바로 마천제황동에 칠백 년 전 사천마종제가 남긴 천인마학(千人魔學)중의 하나였다.
(대단한 노인이다. 수공(手功)으로 펼친 지옥파천검결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표리천영은 내심 놀랐다. 더욱이, 겨우 오성의 공력을 사용했지만 무림에 나온 후 자신을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게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때, 노인은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옥파천검결을 익혔다고 해도 해천검궁의 일관(一關)을 겨우 통과할 정도에 불과하네."
"…!"
표리천영은 생각했다.
(일관…? 그렇다면 무슨 관문(關門)이 있다는 말인가?)
그는 내 색치 않고 물었다.
"만일 지옥파천검결보다 한단계 위인 천이백 년전의 천형마도(天刑魔刀)의 천형마천도결을 안다면…?"
"…!"
노인은 경악했다.
(대체 이 자가 누구이기에… 이미 실전된 무학을 알고 있단 말인가!)
사천마종제(邪天魔宗帝)!
천형마도(天刑魔刀)!
비록 시대를 달랐어도, 무림 최강의 인물로 그 시대를 풍미했던 천하마종들이 아니던가? 천하제일인(天下 第一人)이라 자처했던… 한데, 그런 그들의 무학을 알고 있다니… 노인이 어찌 알겠는가? 표리천영의 일신에 각 시대를 풍미 했던 천인마종(千人魔宗)들의 무학이 담겨 있다는 것을… 하여튼 이내, 노인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간신히 이관(二關)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네."
"…!"
표리천영은 내심 놀랐다.
(해천검궁… 대체 얼마나 엄청난 곳이기에 사천마종제와 천형마도의 무학으로도 겨우 이관을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실로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하나, 표리천영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사천마종제 와 천형마도가 살아 합공을 해도 본인의 십초지적(十招之敵)밖에는 안되오."
"…!"
노인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역력했다. 노인의 시선은 표리천영의 전신을 예리하게 흩었다. 이어,
"노부가 어쩌면 사람을 잘못 보았는지도 모르겠군. 자네의 말대로 어쩌면 해천은 하늘이 될 수 없을 지도 모르지… 노부는 그 사실이 두려웠어. 해천은 반드시 하늘이어야 하니까…"
노인의 얼굴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떠올랐다. 이윽고, 노인은 소매를 슬쩍 저었다. 휙…! 허공섭물의 절기로 떨어져 있는 등(燈)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노인의 허무한 시선은 먼 동편을 향했다.
"이제야 날이 밝으려나…? 한(恨) 많은 밤(夜)은 길기도 하군."
어느새… 동쪽 하늘에는 여명(黎明)이 비춰오고 있었다. 일순, 노인은 쓸쓸히 신형을 돌리며 말했다.
"해천검궁은 정동 방향으로 쭉 가면 되네. 일관(一關)… 그곳은 검동(劍童)이 지키고 있으니 조심하게. 꾀가 많은 놈이니까…"
그의 신형은 이내 멀어져 갔다. 표리천영은 그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선배의 고명을 가르쳐 줄 수 있겠소?"
노인의 허허로운 음성이 바람결을 타고 들려왔다.
"허허헛… 이름은 이미 오래 전에 잊었거늘… 그저 무명한노(無名恨老)라고만 기억해 두게."
(무명한노(無名恨老)…?)
표리천영은 내심 중얼거리고는 그가 일러준 대로 걸음을 옮겼다.
× × ×
숲의 바다… 해림(海林)! 그야말로 밀림과도 같은 숲이었다. 그곳을 지나자, 깊은 계곡이 나타났다. 칼날같이 깎아지른 계곡은 그 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깊었다. 그러한 계곡과 계곡의 사이에는 긴 목교(木橋)가 놓여져 있었다. 조그만 나무 조각을 칡넝쿨로 이어서 만든 다리였다.
그 가운데, 한 동자(童子가 앉아 있었다. 십오세나 되었을까? 무척이나 귀엽고 활달하게 생긴 백의동자(白衣童子)였다. 동그랗게 큰 눈은 얼굴의 반이나 차지하고 있었으며, 만면에는 온통 짖궂고 장난스런 기운이 가득 했다.
단지, 특이한 것이라면, 그의 가슴에 안겨져 있는 짧은 죽검(竹劍)이었다. 죽검(竹劍)! 그것은 일견해도 썩은 나무조각도 벨수 없을 정도였다. 한데, 백의 동자는 그것을 매우 귀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표리천영! 그는 목교(木橋)를 건너 백의동자의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자네는 검동(劍童)이 분명한 것 같은데…? 여기가 일관(一關)인가?"
백의동자는 정좌한 그대로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표리천영은 어른스레 대답하는 백의동자의 태도가 귀여웠다.
"자네의 그 말은 무슨 뜻인가? 이곳은 분명 일관일텐데…"
표리천영이 부드럽게 물었다. 허자, 검동(劍童)은 그의 위 아래를 흩었다.
"귀하가 이곳을 통과하자면 일관이나, 어려움을 알고 그냥 돌아간다면 무슨 관문이 되겠소."
표리천영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렇다면 나는 이곳을 통과해야 되니 일관이 분명하군."
검동(劍童)은 다시 표리천영을 흩어본 후 입을 열었다.
"정말 이곳을 통과하겠소?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물론이네."
표리천영이 끄덕이자 검동(劍童)은 태연스레 자리를 권했다. 마치 이 목교가 자신의 안방이나 된 듯이…
"좋소. 그럼 누추하지만 앉도록 하시오. 문제를 내겠으니…"
"고맙네."
표리천영은 서슴없이 앉았다. 검동(劍童)은 곧 입을 열었다.
"본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오. 검도(劍道)를 알아야 하며, 나아가 인도(人道)를 깨우쳐야 하며, 천도(天道)를 예측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오."
검동(劍童), 그는 어른스레 말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 중 이곳은 검(劍)의 도(道)를 시험하는 곳이오."
이어, 검동(劍童)은 품속에서 한 개의 화선지는 꺼내었다.
"나는 한 가지의 놀이를 끝내고 일장을 시험한 뒤 한 가지의 질문을 하겠소. 귀하는 이중 어느하나라도 받아내지 못한다면 지는 것이오."
그리고, 검동(劍童)은 화선지를 반으로 찢어 표리천영에게 한 조각을 건네주었다.
"무릇 검이란 마음에 있으니 비록 종이라 해도 검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귀하도 알고 있을 것이오."
표리천영은 그가 건네주는 종이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검동(劍童)은 씩 웃으며 다시 말했다.
"우리는 지금부터 놀이를 시작하오. 이 종이를 통해 될 수록 가느다란 검기(劍氣)를 발출하여 이 나무에 구멍을 내는 것이오."
그는 표리천영과 자신의 중간지점을 종이로 쓱 그었다. 순간, 엷게 패인 검흔(劍痕)으로 한 가닥 선(線)이 생겨났다.
"이 목교를 끊어지게 하는 사람이 지는 놀이요. 나는 이것으로 첫 번째 승부를 정하겠소. 자, 내가 주인이니 먼저 시범을 보이겠소."
이어, 그는 종이를 살며시 세워 가볍게 흔들었다. 팡! 가벼운 파공음에 이어 목교 에는 극히 미세한 구멍이 생겨났다. 표리천영은 검동(劍童)의 심후한 내공과 무공에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놀라운 소년이다. 무림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사실, 이러한 종이를 통해 검기를 발출 한다는 것조차 보통의 무림인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한데, 그 검기의 양을 조절하여 실같이 가느다랗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나무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흥미있는 놀이군. 그럼 가르침을 받아보겠네."
표리천영 역시 종이를 들어 강기를 쏟아내었다. 팟! 팍…! 두 사람의 손은 차츰 빨라졌고 목교의 중간은 곧 끊어질 듯했다.
"…!"
"…!"
두 사람의 이마에는 땀이 솟았다.
언제 다리가 끊어질지 모르는 것이 아닌가? 밑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절벽, 두두둑… 칡넝쿨이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게 했다. 팍! 표리천영의 강기가 또 하나의 구멍을 뚫었다. 이제 목교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단 한 가닥의 얇은 칡 넝쿨 뿐… 검동(劍童)의 이마에 식은 땀이 가득했다. 한데 일순간, 검동(劍童)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쳤다.
(후후… 너는 나에게 속았다!)
검동(劍童)의 강기가 그 마지막 한 가닥을 향해 폭사되었다. 순간, 파팟! 목교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두 사람의 신형이 아래로 휙 꺼졌다. 이때,
"받아랏!"
쌔--- 애--- 액! 검동(劍童)은 표리천영을 향해 맹렬하기 짝이 없는 일장을 날렸다. 펑!
"윽…!"
표리천영의 신형이 빙글 돌아가며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검동(劍童), 그는 끊어진 목교를 붙잡고 절벽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비긴 셈인가? 첫 번째는 내가 졌고, 두 번째는 그가 나의 일장을 받지 못했으니… 아무렴 어때? 그는 세 번째 문제를 들을 수도 없을 텐데…"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절벽 위로 신형을 휙 날렸다. 한데,
"…!"
절벽 위에 사뿐히 내려선 검동(劍童)의 안색이 홱 변했다. 태연히 앉아 있는 사람, 그는 분명 조금 전에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 표리천영이 아니던가? 표리천영은 빙그레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세 번째 문제를 낼 차례네. 아마 무슨 질문을 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검동(劍童)은 어린아이 답지 않게 재빨리 평정을 되 찾았다.
"귀하의 무공은 조금 쓸만하구려."
검동(劍童)은 내심 염두를 굴렸다.
(어쩌면 이자는 나를 문지기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줄지도 모른다.)
검동(劍童), 그는 사실 해천검궁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문지기에 불과한 몸이다. 그는 이곳에서 한 가지의 도(道)를 깨우치지 못하면 영원히 해천검궁의 검사(劍士)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순,
(그렇다. 그 문제를 물어보자!)
검동(劍童)은 마음을 결정짓자 이내 입을 열었다.
"마음 속에 검(劍)이 있다는 것은 검도인(劍道人)이라고 다아는 사실이오. 그렇다면 검 속에 마음(心)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말해 보시오."
그는 말을 해 놓고 귀를 기울였다.
(말하지 못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고, 대답을 한다면 나는 검사(劍士)가 되어 검학(劍學)에 입문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 해천검궁! 과연 놀라운 곳이었다. 일개 검사(劍士)도 아닌 검동(劍童)의 지혜가 이토록 심후하다니… 하여튼 이때, 표리천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검(劍)이 마음(心)에 있다는 것은 초(招)에서의 탈피를 뜻하는 것이네. 무릇 초식이란 검을 가두기 마련이며, 그것은 결국 검(劍)과 마음(心)을 분리시키는 것이네."
표리천영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때문에 검(劍)속에 마음(心)이 있다면 그 검은, 초식의 제한을 받지 않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라도 펼칠 수도, 거두어 들일 수도 있는 것이네."
그것은 정녕 검학(劍學)의 심오한 구결이었다. 찰라,
"…!"
검동(劍童), 그는 내심 부르짖었다.
(살았어! 나는 이제 검사(劍士)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검동(劍童)은 빠르게 말했다.
"좋소, 귀하는 이제 일관을 통과했소. 그러나 이관(二關)은 결코 무공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곳이니 조심하기 바라오."
검동(劍童)은 표리천영을 향해 포권을 해보이고는 짧게 말을 이었다.
"그럼 가보시오."
"고맙네."
표리천영은 미소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관(二關)을 향해 서…
五卷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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