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한 결혼식과 연회까지 끝나자 늦은 밤이 되었다. 현덕도 취한 발걸음을 홍등으로 밝혀놓은 신방으로 옮겼다. 시녀의 안내로 방에 들어선 현덕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벽에 하나 가득 걸려있는 것이 모두 창검이었다. 더구나 시녀들도 모두 패검을 차고 단도를 달고 있지 않은가? 동오의 복병이 의외로 여자로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덕은 십여 명이나 되는 시녀들을 훑어보며 탈출로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덕이 긴장한 것을 눈치챈 늙은 시녀 하나가 공손하게 다가와 말했다.
“귀인께오선 아무 의심하지 마십시오. 아가씨께선 어려서부터 무예를 좋아하셔서 언제나 시녀들과 격검(擊劍)을 즐기셨습니다. 방이 이런 모양인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시녀들이 무기를 치우고 물러가자 그때서야 현덕은 안심을 하고 손부인과 초야를 치렀다. 현덕은 손부인의 거처에 머물면서 황금과 비단을 시녀들에게 후히 뿌려 인심을 얻었으며, 손건을 형주로 보내 일이 잘 진행되었음을 알리게 했다. 이로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연회를 베풀어 사람들을 만나니 오국태는 더욱 현덕을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현덕을 죽이려고 불러들여서 여동생을 헌납하고 어머니의 사랑까지 받게 만들었으니 손권의 심사가 좋을 까닭이 없었다. 손권은 시상의 주유에게 사람을 보내 일이 엉뚱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손권의 사자가 왔다고 하자 주유는 급히 그를 맞아들였다. 사자가 말했다.
“국태부인께서 일을 주도하시는 바람에 아가씨가 진짜로 유비의 부인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농담이 진담이 되어 버린 격입니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회신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주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정도로 놀랐다. 그때부터 좌불안석으로 서성이던 주유는 간신히 한가지 계책을 마련했다. 편지를 쓴 다음 단단히 봉해서 손권 앞으로 가져가게 했다. 일각이 여삼추로 주유의 회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손권은 바로 밀봉을 뜯고 주유의 편지를 읽었다.
- 제가 일을 꾸밀 때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거짓으로 꾸민 일이 진실로 이루어져 버렸으니 이 계책을 이용한 새로운 계략을 꾸며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번 혼인으로 양가가 맺어지긴 했으나 유비는 효웅이며 관우, 장비, 조운과 같은 용장과 제갈량과 같은 모사를 거느리고 있어 절대 남의 밑에 숙이고 있을 인간이 아닙니다.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유비를 동오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궁실을 화려하게 지어주어 그자의 기상을 무너뜨리고 미녀들을 보내주어 오락과 유희에 빠져 이목을 잃어버리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발을 묶어두면 관우, 장비와 맺은 정도 멀어지게 되고 제갈량과도 사이가 나빠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뒤에 병사를 일으켜 형주를 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될 것입니다. 지금 이자를 돌려보내면 교룡이 구름과 비를 만난 격이 되니, 끝내 못 속의 이무기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깊이 생각하여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손권은 다 읽고 난 후 장소를 불러오게 해 주유의 글을 보여주었다. 장소가 다 읽은 후에 말했다.
“공근의 계책이 제 생각과 똑같습니다. 유비는 본래 미천한 곳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동안 천하를 분주히 뛰어다닌 탓에 부귀영화를 누려볼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멋들어진 궁궐을 만들고 아름다운 여인과 황금, 비단을 내리면 그것들을 누리고 쓰는 재미에 빠져들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공명, 관우, 장비 등과도 소원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서로 간에 원망이 생겨날 것이니 그때가 되면 형주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 어서 공근의 계책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장소가 주유의 계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자 손권은 크게 힘이 났다. 즉시 궁궐의 동쪽을 개조하여 꽃과 나무를 심고 새 건물을 올렸다. 서둘러 공사를 마무리한 다음 현덕을 불러 그 집을 내주었다. 더불어 아름다운 여인들 수십여 명에 황금과 패옥, 비단 등을 한껏 내주어 현덕을 보배 속에 파묻히게 만들어버렸다.
국태부인은 손권이 현덕을 아끼느라 해주는 일로 알았기 때문에 다만 흐뭇할 뿐이었고, 현덕은 평생 누려보지 못한 호사에 빠지자 형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본래 현덕은 좋은 옷을 입는다든가 귀족스러운 생활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주유의 계략이 현덕의 그런 심성을 파고들어가자 과연 현덕은 헤어나지를 못했다. 주유의 이런 계략은 춘추시대의 진문공(晉文公)의 고사로부터 온 것이다.
진나라의 공자 중이(重耳)는 진나라 왕위계승의 북새통에서 달아나 망명 공자가 되었다. 중이는 언젠가 귀국하여 왕위를 되찾고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는 대망을 잊은 적이 없었지만 수십 년 지속된 방랑생활에 지치기도 했다. 그러던 때에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 제환공의 환대를 받는다. 제환공은 좋은 집과 미녀를 내려주었다. 물론 손권과 같은 꿍꿍이가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중이는 오랜만에 찾아온 편안한 생활에 푹 빠져 고국 진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유의 계략은 바로 여기서 가져온 것이었다. 망명 공자 중이는 뒷날 다시 방랑에 나서 결국 진나라의 왕위에 오르고 춘추오패의 두 번째 패자로 군림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진문공이 다시 방랑길에 나서게 된 것은 그의 가신들이 주군이 뜻을 저버렸을까 두려워해서 한가지 계책을 만들어냈던 때문이었다. 현덕에게도 그런 충성스런 가신이 붙어있었다. 조운은 현덕이 형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경구에 머물러 있자 조바심이 일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 공명이 조운에게 비단주머니를 줄 때 열어볼 시기를 명시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비단주머니를 열 때가 드디어 왔다. 공명은 연말이 되면 두 번째 주머니를 개봉하라 이야기했었다. 조운은 두 번째 주머니를 열어보고 즉시 공명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조운은 현덕의 거처로 찾아가 보고를 드릴 것이 있다고 말을 넣었다. 현덕이 나타나자 조운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주공은 깊은 화당(畵堂)에 머물고 계시니 형주 생각은 나지도 않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는데 그렇게 툴툴대는 건가?”
“군사가 사람을 보내 알려왔는데 조조가 적벽에서 패배한 복수를 위해 정병 50만을 몰고 형주를 도륙내러 오고 있다고 합니다. 위급하기가 이와 같으니 주공, 속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현덕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형주로 조조가 내려온다면 아무리 동오에 있다고 한들 모를 리가 없는 큰일이었다. 조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안사람과 상의해서 알려주지.”
말을 얼버무리고 일어나려는데 조운이 순순히 물러나지를 않는다.
“주모(主母)와 상의하면 주공을 못 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야기하지 마시고 조용히 있다가 밤에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일을 지체하면 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됐다. 자룡은 그만 물러가 있도록 해라. 나한테 다 방법이 있다.”
현덕이 언짢은 얼굴로 일어났다. 조운은 일말의 불안함이 남긴 했지만 그대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현덕은 현덕대로 심사가 복잡했다. 처음 동오로 올 때만 해도 혼인을 하는 대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와서 보니 위험은 없었고 즐거움은 컸다. 손부인은 이제 스물이 된 어린 나이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자기 욕심만 풀고 청상과부를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손부인은 현덕을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몸이라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는 도저히 없었다.
현덕이 방으로 돌아오자 손부인이 방긋 웃으며 다가와 앉았다. 밝은 얼굴의 손부인을 보자 현덕은 더 마음이 아파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마음 아파하십니까?”
현덕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손부인이 그런 일을 이해할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생각해보니 난 바람처럼 타향을 떠돌며 살아생전 부모님께 효도 한번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소. 조상에게 제사도 제 때 지내지 못하고 있으니 대역불효하기가 나만한 사람이 또 있겠소? 올해도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아프구려.”
손부인이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더니 말했다.
“부군께선 왜 소첩을 속이십니까? 자룡 공이 왔을 때 제가 이미 다 듣고 말았습니다. 형주가 위급하다 하니 부군이 돌아가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다른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덕은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손부인의 의자를 붙잡고 말했다.
“부인이 이미 알고 있다니 내가 솔직하게 말하리다. 사실 나는 돌아갈 마음이 없지만 형주를 잃는다면 세상사람들이 모두 나를 비웃을 것이오. 하지만 돌아가려면 부인을 데려갈 방도가 없소. 그래서 고민 중이었다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군이 가시면 소첩도 당연히 따라가야지요. 부군이 어디로 가시든 소첩이 따라갈 것입니다.”
“부인의 마음을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오. 국태부인과 오후(=손권)가 부인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오. 부인이 나 유비를 가련하게 여긴다면 잠시 헤어지는 것을 허락해 주오.”
현덕은 그렇게 말하고 애절하게 흐느꼈다. 손부인이 한편으로는 당황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덕이 자신을 아껴주는 마음에 감동했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손부인이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울음을 그치십시오. 제가 어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부군과 함께 형주로 가겠습니다.”
“국태부인께서 허락한다 하셔도 오후는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대체 왜 오라버니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오후는 형주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소. 내가 이곳에 있으면 형주는 주인이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니, 나를 이곳에 묶어두고 형주를 차지할 생각인데, 어찌 내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겠소?”
손부인도 손가의 자손이었다. 현덕의 말을 듣는 순간 손권에게 이 일이 알려지면 동오를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잠시 신음 소리를 흘리던 손부인이 새로운 의견을 냈다.
“아까 제사 말씀을 하셨죠?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설날에 하례를 드리고 나서 조상들에게 강변에서 제사를 올리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그 길로 그대로 형주로 가버리는 거에요. 어때요?”
현덕이 깊이 감사하며 말했다.
“그처럼 해준다면 죽어서도 잊지 않겠소. 이 일은 절대 아무한테도 말해선 안 되오.”
현덕은 상의한 내용을 조운에게 따로 알려 준비를 갖추게 했다.
“설날에 자룡은 먼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도록 해라. 나는 제사를 지내러 간다고 말한 뒤 안사람을 데리고 달아날 작정이야.”
조운이 명을 받고 물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안 15년(210년) 설날이 되었다. 손권은 문무관료들을 모아놓고 조회를 열었다. 현덕은 손부인과 함께 오국태를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손부인이 인사를 마친 후 말했다.
“지아비의 부모와 조상 묘가 모두 탁군에 있어 설이 되어도 찾아가 볼 수 없으니 날마다 상심하고 있습니다. 오늘만이라도 강변에 나가 북쪽을 향해 제사를 올릴까 합니다.”
“효도하려는 건데 누가 말리겠느냐? 네가 시부모님을 뵌 적은 없지만 지아비를 따라 제를 같이 올리는 것이 도리다. 다녀오너라.”
손부인과 현덕은 모두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성을 나섰다. 손권은 신년행사에 정신이 팔려 현덕이 성을 나선 것을 알지 못했다. 손부인은 홀몸으로 귀한 패물만 챙겨 수레에 올랐고 현덕은 말을 탔다. 수하 몇 기만을 거느리고 재빨리 떠나 잠시 후 이미 대기하고 있던 조운과 합류했다. 오백 명의 군사가 앞뒤를 호위하여 부두를 향했다. 이때 손권은 신년 축하주를 거나하게 마신 뒤 정사를 파하고 후당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다. 현덕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밤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그러나 손권이 깊이 잠이 들어 어떤 조치도 취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