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님
그 옛날에 어릴 때 비오면 학교가기 싫어요, 좋아요?
비오면 성당오기 싫어요, 좋아요?
비와서 싫어도 학교가야 했던 이유가 뭐예요?
배워야 되니까. 물론 엄마의 매가 무섭기도 했죠.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워야 해요.
제가 한평생 피정지도를 하고 산 거 아시죠?
지금은 옛날보다 1/10 정도로 줄이고 있는데, 정말 다양한 그룹을 만나죠.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그룹 피정시키는 강사분들이 즐겨 꺼내는 이야기가 있어요.
신부 수녀들 피정시킬 때는 잘 안하는데, 평신도들에게는 자주 묻죠.
‘나누어 드린 종이에 여러분 인생에서 정말 소중하다 여기는 것 10가지 적어보세요.’
하고 시간을 드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적으시겠어요?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자식, 본인, 돈, 건강, 종교, 희망, 시간, 신앙, 남편, 아내.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편과 아내는 꼴찌예요.
그리고 신앙도 위가 아니라 아래서 세 번째였어요.
그러고 난 다음 또 질문을 드려요.
‘지금 인생이라는 바다에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났어요.
배가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해 위의 물건중 하나씩 버려야한다고 할 때 무엇부터 버리겠습니까?’
버리는 순서대로 줄을 긋고 마지막 하나만 남겨두라 했어요.
제일 먼저 남편을 지워요. 그 다음에 희망, 시간도 버려요.
그리고 제일 마지막 하나가 남겠죠?
마지막까지 내 가슴에 움켜쥐고 가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슬프게도 신앙을 택한 사람이 많지 않아요. 거의 없다고 봐도 되요,
여러분 같으면 신앙을 분명히 선택할 것이라 믿고 싶죠?
맞아요, 그렇게 되어야지요.
여러분들 그렇게 되라고 김웅열신부를 이 성당에 보내주신 것 아닙니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첫 번째는 하느님이시고, 마지막 죽을 때 품에 안고 가야 될 것도 하느님이시다.’
생각은 그렇게 하는데, 막상 절박한 상황에 닥치면 그렇게 안 되니 문제죠.
아무튼 저도 나름 열심히 훈련시켰는데, 하느님이 몇 번째이신가요?
오늘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두 주인을 가질 순 있어도 분명히 순서는 있어요.
여러분들 자식이 위해서 기도 하시지요?
그런데 그 자식에게 축복 주는 분이 누구예요? 하느님
그런데 평상시에 하느님보다 아들이 하느님 위에 더 먼저 올라가 있어요.
하느님 생각하는 것은 하루에 얼마 안 되고, 오직 머릿속엔 자식만 있어요.
여러분 건강을 주시는 분은 누구예요? 하느님
하루 종일 몸뚱아리 건강하게 하려고 오만 것 먹어요. 좋고 맛있는 것.
하지만 여러분이 몸에 들이는 정성 100분의 1이라도 하느님께 드리고 사는가?
내 몸 안 아프게 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애쓰지만 하느님께는 정성을 안 드려요.
주님은 3분의 1도 안 바라셨어요. 5분의 1도 원치 않으셨어요.
주님은 10분의 1만 달라고 그러셨어요.
내가 언젠가 평일 미사 때 한번 한 것 같은데, 절벽에 매달린 회장이야기요.
등산을 좋아하는 어떤 회장님이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었어요.
날은 어두워오고 헤매다가 낭떠러지로 미끄러지게 되었어요.
막 굴러 떨어지다 튀어나온 나무뿌리 하나를 손에 잡았죠.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죠.
아무리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밤에 누가 있겠습니까?
팔의 힘은 점점 빠지고, 하느님께 소리 질렀죠.
‘하느님, 주님, 예수님, 성령님’ 12사도 이름까지 다 불렀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낼모레 본당신부님 영명축일인데 죽으면 큰 일 나요.’
아무튼 그냥 살려달라고 있는 소리, 없는 소리 다 해댔죠.
그런데 예수님이 들으신 거예요.
저 밑이 너무 시끄러워 내려 보시다 물으셨죠.
‘넌 누구냐?’ ‘네, 서운동성당 회장입니다.’
‘그래? 그렇게 살고 싶어?’
‘그걸 말씀이라고 하세요? 저 빨리 살려주세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보내주세요’
‘지금은 너무 어두워 다른 사람 보낼 경황이 없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물론이죠. 말씀만 하세요. 그대로 할게요.’
‘그래? 그럼 잡고 있는 거 놔라.’
회장이 놓았겠어요? 안 놓았겠어요?
‘예수님,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이 나무뿌리 놓으면 저 죽어요.’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서?’
‘그래도 이것은 못 놓아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해’
그래서 이 사람은 이제 믿을 사람도 없고, ‘하느님 말고 딴 사람 없쑤?’
그러다 그 나무뿌리가 휘청이며 부러지고, 회장은 떨어졌어요.
그런데 세상에! 떨어져보니 땅바닥에서 30센티 위에 매달려있었던 거예요.
그 30센티 위에 나무뿌리를 잡고 매달려 살려 달라하니!
그러니 그것을 보고 예수님은 ‘잡은 거 놔라.’
하지만 회장은 ‘절대 못 놔요!’
그 회장은 얼마나 창피했을까요? 그래도 명색이 회장인데..
그냥 절벽에 떨어져 죽어도 천당 간다는 믿음을 가지고 놓았다면
예수님에게 ‘네 믿음이 너를 살렸구나, 회장될 자격이 있다’ 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절벽에 매달린 회장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본당 신부와 교우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고부간의 생각, 부부간의 생각, 어른과 아이 간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느님의 생각에 맞추어 살려 애쓰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인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대로 자신에게 맞춰 사는 사람을 우리는 종교인이라 부릅니다.
그 회장은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 이었어요
왜? 이것 놓으면 죽는다는 것은 자기 생각이었죠.
그러나 하느님은 그 사람이 못 보는 것까지 다 보시는 분이지요
우리식대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라틴어 격언에 그런 말이 있죠. ‘인간이 계획하면 하면 하느님은 부수신다.’
또 ‘인간의 지혜보다 하느님의 지혜는 늘 한발 앞서 계신다.’ 도 있습니다.
온갖 머리를 짜내서 ‘정말 완벽해!’ 라고 했지만 한 순간에 부서질 때가 있죠.
우리는 한치 앞을 못 내다봐요. 내일도 모르잖아요? 오늘 저녁도요.
일주일 후에 분노하고 있을지 기뻐하고 있을지, 상처를 주었을지 받았을 지도 모르죠.
가장 지혜로운 사람보다 주님은 늘 한 발 앞서 계세요.
우리는 못 보는 거예요.
‘하느님이냐? 내가 붙들고 있는 이 나무뿌리냐?’ 무엇을 선택해야합니까?
또 이런 얘기도 제가 여러 번 했었을 거예요.
어떤 무신론자가 죽어 지옥에 갔더니, 절대 지옥에 오지 말아야할 사람을 만납니다.
자기 친한 친구인데, 성당에 열심히 다녔던 사목회장이에요.
그래서 무신론자 친구가 그 사람에게 ‘어찌된 일이야? 나야 뭐 원래 성당도 안 다니고 막 살았으니
죽어서 여기 오겠지만 너는 그래도 명색이 본당 총회장인대 왜 왔어?
하며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커지니,
‘여보게 조용히 좀 해. 내가 창피해. 옆방은 본당 신부님 계시고, 내일은 2층에 주교님도 오시기로 되어있어’
구원은 시간과 직책의 문제가 아니라 응답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한 평생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 살았느냐, 세례명이 있느냐?
얼마나 긴 세월동안 천주교 신자로 살다 죽었냐, 얼마나 긴 세월동안 사제생활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얼마나 성실하게 응답해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응답은 다른 말로 열매입니다.
즉, 사제로 맺어야 할 열매가 있고, 수녀로 맺어야 할 열매가 있고,
평신도로 맺어야 할 열매가 있고, 꾸리아 단장이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책은 벼슬이 아닙니다.
그걸 벼슬이라고 착각하면 목에다 힘주고 꼴불견 이지요.
사제직은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는 거예요.
신자들 밑에 살아가야 되는 것이 사제요, 주교들이죠.
권위는 ‘내 권위 인정 해 줘’ 해서 생기는 게 아니죠?
세상에 권위를 권력과 연결되어 찾기 위해 총을 쓰고 쿠테타를 일으키곤 하지만,
‘하느님의 권위는 낮아지는 겁니다.’ ‘바보가 되는 겁니다.’
또 구원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비록 느릿느릿 걷더라도 끝까지 하느님을 향하여 방향만 잡혀있다면
빨리 가다 넘어지거나, 빨리 가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 헤매는 것보다 백번 나아요.
그러니 가브리엘 형제 힘내란 말입니다.
우리 형제가 풍을 맞아 일반인의 10분의 1 속도지만, 그래도 매일 성당 안을 돕니다.
가브리엘 형제님, 성당울타리 안에서 걸으면 축복이 내려올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는 예전 건강 주실 겁니다.
방향만 확실히 잡으면 분명히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의 축복이 내 축복보다 크게 느껴질 때, 내 축복을 잊고 감사를 망각합니다.
영세 받던 그 날의 기쁨, 피정 받고 눈물 흘렸던 그 마음으로 우린 돌아가야 됩니다.
사제들은 서품 받았을 때의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고,
수도자들은 허원 받던 날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고,
한마디로 영적 초심의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애씁시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둔다고 우리는 분명히 맹세하고 세례 받았습니다.
내가 소중한 열가지중 첫 번째에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올라가야 되고,
마지막 끝까지 절대 놓지 않아야 될 것도 하느님 입니다
저도 나중에 심판 받을 때 ‘주인 몇을 섬기고 살았느냐?’ 분명히 물으실 겁니다.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실 겁니다.
‘예, 주님. 정말 힘들고 어려웠지만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려고 애쓰다 왔습니다.
자비 지극하신 심판으로 저를 심판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2019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22)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