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오후 3시쯤, 선동열(48)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최동원 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의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동원의 어머니 김정자(77)씨가 문상을 마친 선동열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건강해라, 건강해야 된데이…”라며 애써 슬픔을 삭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식을 앞세우는 슬픔을 참척(慘慽)이라 했는데, ‘다 아들 같은’ 이들의 조문을 받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그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 순간에 야구공을 손에 쥐여 주었다.
‘불세출의 명투수’ 최동원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9월 14일은 1982년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사상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최동원은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그때 뛰었던 23명의 대표 선수들 가운데 이미 심재원, 김진우(이상 포수), 김정수(외야수), 장효조 등이 최동원에 앞서 유명을 달리했다.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를 주름잡았던 투, 타의 천재 최동원과 장효조는 공교롭게도 한가위를 전후해 일주일의 시차를 두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항암 치료 거부하고 식이요법 투병올해 1월 어느 날, 당시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일행과 함께 최동원 전 감독을 만나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에게선 병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의 얼굴은 맑고 평온해 보였다. 최동원은 “강원도 정선에서 단식을 하고 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면서 야채 약간을 곁들여 밥 반 공기 정도만 비웠다. 단식 후 보식기간이었다. 그는 별반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주위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투병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가 숨진 뒤 동생인 최수원 KBO 심판위원에게서 들은 바로는 최동원은 그 무렵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식이요법으로 몹쓸 병을 다스리고자 했다.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다는 강인한 투병 의지를 그런 식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최동원의 야구 인생을 크게 좌우한 일은 한국시리즈 4승 기록과 선수협의회 결성 파동이다. 한국시리즈 기록은 불멸의 대기록으로 한국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남겠지만, 선수협 파동은 뒷날 그의 야구 인생길이 고난의 행군으로 점철되게 한 멍에로 작용했다. 그의 야구 기질과 인성을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최동원 전 감독은 평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록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혼자서 4승을 거둔 것과 그해 페넌트레이스에서 27승을 따낸 것이다. 그는 지난 4월 필자에게 “한국시리즈 4승 기록은 앞으로 영원히 깨질 일이 없을 것”이라며 장담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해봐야 타이기록밖에 나올 것이 없으니까”라고 웃으며 덧붙이기도 했다. 하긴 그렇다.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 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그의 기록은 영구불멸일 테니까.
27승 기록을 떠올리는 것은 최동원으로선 일정한 아픔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그는 “1983년에 장명부가 30승을 올렸지만, 내가 1984년에 작성한 27승도 대단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한 시즌에 20승 이상 기록한다는 것은 무리가 많이 따르게 된다. 사람 몸은 정직한데 그런 성적을 내자니 아무래도 후유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팀 형편 때문이었지만 선수 생명이 단축됐다는 측면에서 그는 아쉬움을 곱씹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도 “능력 있고 잘하는 후배들이라도 15~17승을 하면서 1~2년이라도 유니폼을 길게 입는 것이 은퇴 후 후회를 줄이는 길”이었다. 그는 “그렇다고 무조건 제 몸을 아끼라는 뜻이 아니라 제 몸을 체크할 줄(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계훈련을 치르고 시즌에 들어가 ‘내 몸이 이 정도 되는구나’ 하고 적절한 수준을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선수협 파동으로 야인의 길선수협의회 파동은 1988년 9월 13일 밤 최동원의 주도로 7개 구단 선수대표가 대전 유성에서 기습 회동, 296명의 등록선수 가운데 142명의 회원 가입으로 노조 전 단계인 협의체 결성으로 비롯된 일이다. 최동원은 그때 선수협의회 회장을 맡았고 9월 30일에는 첫 이사회도 열었지만 구단들의 ‘팀 해체’ 으름장과 집요한 와해 공작으로 결국 무산돼 버렸다. 대기업을 모체로 두고 있었던 구단들도 노조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때였으니, 선수협의체 결성 시도 자체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었다.
꼿꼿한 성격의 최동원이 나서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동자로 낙인 찍힌 최동원은 그 일로 인해 롯데 구단에 미운털이 박혀 그해 시즌 후 삼성의 김시진과 맞트레이드 됐다. 타의로 팀을 떠나야 했던 그는 옮겨간 삼성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태 뒤인 1990년 은퇴하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는 서른 둘, 이른 나이였다.
최동원은 그 과정에 대해 “시대적으로 그렇게 흐름이 갔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트레이드는) 굵고 깊은 나무뿌리가 뽑히는 일이었다. 맥이 탁 풀리고 의욕을 상실했다. ‘평생 해온 게 이것이었나’ 하는 생각에 모두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롯데가 이미 삼성 선수들을 다 받았고, 내가 마다한다면 트레이드를 성사시킨 분이 다칠까 염려스러웠다. 돌이켜보면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준 삼성 구단이 감사했다. 가면서 무난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990년 시즌 후 용퇴를 결심했다”고 길게 설명했다.
그 사건은 최동원이 야구계 지도자의 주류로 성장하지 못하고 야인이 돼 외곽으로 떠도는 계기가 됐다. 최동원이 부산에서 지방의회 선거에 나서는 등 한때 외도를 했던 것도 그 같은 시대적 상황이 작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손해 보더라도 조용히 살고 싶다”그는 야구 유니폼 등번호 11번이 상징하는 것처럼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고, 굽히지 않았다. 어느 야구인은 그의 성정을 대나무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그야말로 올곧은 성품이었다. 2008년 한화 2군 감독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그의 실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던 듯하다. 주위에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2010년 6월 한 야구동호회 사이트에 그가 번호가 좋은 휴대전화를 팔았던 사실이 노출되면서 그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 글은 여기저기로 전파됐고 일부 언론이 기사화도 했다.
그럴 즈음에 최동원과 직접 통화를 하고 그의 생각을 들어본 일도 있었다. 최동원은 대뜸 “참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잊어주면 편한데 왜 나를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등산도 다니고 잘 지내고 있다. 누가 그런 얘기를 전해줘 그러려니 하고 있다”고 말했다.
MBC ESPN이 방영한 ‘날려라 홈런왕’(2010년 3월 15일~6월 7일)에 출연한 것을 끝으로 다른 일 없이 소일하고 있던 최동원은 “한번 안 좋았던 사람들(항암 치료를 받았던 자신을 지칭)은 늘 신경 쓰면서 병원 체크를 해야 하니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생활이 어렵지도 않고 잘 살고 있으니까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다”고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다. 자존심이 손상받은 데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최동원은 “예전엔 내가 한 말도 아닌데 기사가 나고, 뒤통수를 맞는 일도 많았다. 선수생활 할 때야 이름 석 자 나기를 바랐고 돌출행동도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 들어 조용히 사는 게 편하다. 전 같으면 불같이 화냈겠지만 좀 손해 보면서 그러려니 하면서…. 내가 한발 뒤로 물러서서 맘 편히 살자, 그런 생각을 늘 한다”고도 말했다. 그의 어조는 가라앉아 있었다.
최동원은 고향 쪽에서 감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마지막 순간까지 접지 않았다. NC 다이노스가 제9구단으로 참여하게 되고 김택진 구단주의 “어릴 적 우상은 최동원 투수였다”는 발언이 알려지자 감독에 대한 희망을 다시 품었던 것으로 주위에 알려졌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최동원은 ‘너무 빨리’ 떠났다. 오로지 야구를 사랑했던 한 사내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깊은 슬픔만을 남겨놓은 채 먼 길을 갔다. 최동원은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엇갈렸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야구인이었다.
전성기의 최동원
5년 연속 200이닝 두 자릿수 완투… ‘철완’ ‘고무팔’ 수식어
고 최동원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의 위대함은 역대 한국 프로야구 투수 가운데 유일무이하게 1983년 데뷔 후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을 던지고 두 자릿수 완투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그에게는 ‘철완’이나 ‘고무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호사가들이 흔히 최동원의 전성기와 선동열의 전성기를 자주 비교하곤 하는데, 선동열도 인정했듯이 ‘연투 능력과 과감성’은 최동원이 분명 한 수 위였다.
최동원의 1차 전성기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연세대를 졸업하고 1981년 실업야구단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한 그해 17승1패를 올리며 최우수선수, 최우수신인, 최다승을 따냈을 때일 것이다.
1983년 프로 전향 후에는 1984년이 최절정이었다. 기록으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1984년은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5게임에 등판, 4승(1구원승) 1패를 올리며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롯데 자이언츠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해다. 삼성이 시즌 막판에 져주기 극을 연출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골라잡은 것은, 최동원의 존재를 과소평가한 큰 실수였다. 그해 최동원은 페넌트레이스에서 무려 284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27승 6세이브 13패, 223탈삼진을 기록했고 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최동원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동열과의 세 차례 정면 승부는 최동원이 정점을 지나고 있던 1986년 4월 19일에 처음으로 성사됐다. 첫 일합에서 최동원은 완투대결 끝에 0-1로 완봉패 했다. 최동원은 그 경기에서 3회 초 해태 타이거즈 송일섭에게 솔로 홈런 한 방을 내줬고, 그것이 결승점이 됐다.
두 번째는 설욕전이었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8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둘은 다시 맞겨뤘다. 최동원은 그날 9회를 완투하며 39타자를 상대해 투구 수 150개, 산발 7피안타 무실점으로 2-0 완봉승을 거뒀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선발 맞대결로 불러도 좋을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 번째 정면충돌은 1987년 5월 16일 사직구장에서 펼쳐졌다. 결과는 두 투수가 혼신의 힘을 다한 15회 연장 끝에 2-2 무승부였다. 신은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 선동열은 “처음에는 어차피 선배와 겨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먹고 던졌는데, 세 번째 15이닝 무승부 때는 자존심을 걸고 던졌다”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두 투수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