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굴뚝과 나팔꽃 / 유창성
뜨거운 양철굴뚝으로
나팔꽃 줄기가 타고 오른다.
나팔꽃 줄기는 타고 오르면서,
뜨거움도 모른 채
양철굴뚝을 겁도 없이 부둥켜안을 뿐,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양철굴뚝은 이미 뜨거울 만큼 뜨거워져 있다.
나팔꽃 줄기가 양철굴뚝을 부둥켜안는다
부둥켜안고는 겁도 모른 채,
뜨거움도 모른 채, 꽃을 피운다
뚜뚜뚜뚜… 나팔을 불어댄다
놀라워라,
서로 다르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뜨거운 그대
망설이면서도 어떻게든 닿고 싶은 날,
내 몸 태워가면서도
그대에게 오를 수밖에 없는 마음,
타 버려도 내 몸이 다 타 버려도
성난 그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
사랑이란, 저런 것 아니겠느냐
꽃 피워 물고 성난 그대를 향해
나팔 빼어 불며 다가서는 것,
성난 양철굴뚝 하나를 온몸으로 품어 버리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낙지 / 유창성
낙지가 집을 다 가져가 버렸다
낙지가 집을 다 삼키어 버렸다
그물 깁다가 아버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수협 돈 대출금까지 다 가지고 가 버렸다
자꾸만 목에 낙지발이 걸린 것 같았다
자꾸만 목에서 낙지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형은 울지 않았다
어머니도 울지 않았다 다들,
목구멍을 뭔가가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그날부터 였다,
흐물대는 낙지발 같은 어둠들이
집안 곳곳으로 흘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끊어도, 끊어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나날은 시작되었다
꿈틀대는 지독한 저주의 말들이 시작되었다
아버진,
애초부터 쓰러지지 않았다 전했다
아버진,
작은 각시네 집으로 살러 간 것이라 전했다
집도, 돈도 다 가지고 가 버린 것이라 했다
집안 곳곳에선 구경도 한 적 없는 낙지가,
어머니와 형을,
먹여 살려 주고 있었다
어린 나는 매일,
바다로 나가 아버질 기다렸다
당연하게도 아버진 올 리 없었다…
그해 겨울, 불어온 바람은
낙지가 대大 풍월이라 전했다
신생의 바다 / 유창성
바다를 보다 말고 소설 쓰는 김씨가 문득 묻는다
저그 건너가 김 아무개 꺼고 저그는 이모 선생이 써묵어부렀다는디
저 나란히 떠 있는 두 개의 섬은 임자가 있을라나?
가만히 보니 말은 안 하지만 김씨도 욕심나는 눈치다
자신의 이름 석자 걸린 땅 하나 갖고 싶은 거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함을 넘어 너무나 비장하기까지 하여
나는 문득 농을 치고 싶어진다
왜 임자 없으면 가서 해적질이라도 할라요?
글고 저그는 뭐 저 멀리 낙도다요 다 임자가 있제라
그의 표정이 더욱 물살처럼 구겨지다 말고.
그믄? 누가 먼저 침 발라 브렀는가? 잉? 말을 혀봐
해적은 아니라도 내 저그다 이름 석자 걸어보고 싶은디…
그는 어찌 안 될까 하는 표정이다 너무 진지하여
이러다 의 상할까 싶어 그만 풀어주기로 한다
암이라, 저그 이름 석자 이미 걸어분 놈 있재라
몰것소, 그놈한티 말을 잘 하믄은 될 것도 같고.
금세 반기는 뱅어눈으로 변해서는 나를 보면서
그려? 그게 누구단가, 아 이 사람 질질 끌지 말고 말해보소
우선 내가 저 섬을 우째 해 볼라믄 그 사람을 알아야재
근께, 그 사람이라, 근디 그 사람보다 잘 적을 자신은 있고?
몇 번이나 확신을 받고 나서야, 나도 그만 풀어준다,
그 사람이라… 바로 앞에 떡하니 앉아 있소!
그때까지도 무슨 말인가 한참이나 생각하던 김씨가
그제서야 자신이 당했단 걸 깨달았는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는다
아마, 오늘 밤에는
저 앞 수많은 섬들 중 몇은 임자가 생길 것 같다
새로운 신화 하나 씌어질 것 같다
누군가 이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바다,
자꾸만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깊어가는 밤이다
명태국은 시원하다 / 유창성
명태국을 먹다보면
섬뜩해질 때가 많지요,
가끔이지만 목구멍에 날카로운
낚싯바늘을 달고 있는 생태들
보곤 하는데요, 궁금하여 전화해 본
수산청 산하 명태연구소 직원은 농담처럼
그들의 죽음 일러줍니다
직접적인 사인을 알 수 없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죽는 것 아니겠냐는
너무나 간단한 이치,
그러면 며칠 만에 뭍으로 올라오냐 했더니
이삼 일 정도라고
친절히 일러줍니다
무엇이 걸린지도 모른 채
생존해 있었을 그 시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에도
너무나 짧았을 그 시간,
눈도 못 감고 여기까지 온 명태를 보다보니
문득,
명태국을 먹다 말고,
괜스레
내장 안쪽부터
서늘합니다.
새떼들 날아간 저쪽 / 유창성
63빌딩 천문관측소,
창밖을 보던 노인 하나
그대로 돌진하려다 사람들에게 제지당한 저녁,
멀리 내려다보이는
지상으로 발악하듯 끌려 내려가던 그 저녁,
몇 미터 상공 밖에선
새떼들 날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 바로 앞에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
한없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왔을
지상에서의 높이,
노인은 그것마저 굴욕이라 여겼던 걸까요
때 낀 손으로 차가운 핫도그를 씹어 삼키다
사레 걸린 것처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그런 때,
삶이 문득 굴욕으로 여겨질 때,
매번 아무 일 없다는 듯
떠나온 지상으로 애써 발길 돌려야 할 때,
흘러간 옛 노래 속 가사처럼 되짚어 보게 되는
저 새떼들의 행렬,
어쩌면 마지막 망명길에 오른
노인의 고함소리에,
나도 그만 훌쩍 투신해 버리고 싶은 이 저녁.
유혹하듯
날고 있는
저 새떼, 새떼들. 날아간 저쪽으로 훌쩍 가고픈 이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