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근대 초기 유럽 대륙을 뒤흔들어놓은 사건인 30년 전쟁은 그 기간과 참화와 파장이 거대했던것만큼이나(물론 최근 연구들을 통해 그 거품이 많이 꺼지긴 했다) 많은 학자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이러한 대전쟁을 일어나게 하였는가는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30년 전쟁에 대한 최신 이론 자체가 국내에서 접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데 있다. 서양사 관련 최신 도서 번역에 있어서, 국내 현실은 매우 암울하지만, 30년 전쟁은 지금까지도 번역된 통사가 1930년대 책인 형편이니,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하겠다. 제프리 파커 선생이 편집을 담당하여 1980년대에 출간된 관련 도서마저도 지금은 상당히 낡은 연구라는걸 감안하면 더더욱 문제가 많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30년 전쟁과 관련된 여러 논쟁 중에서도 특히 뜨거운 주제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그 기원에 대해서 다루어보고자 한다. 영국내전의 기원과 관련된 필자의 지난번 글처럼 긴 연재는 사정상 불가능하지만, 최근의 학계 논의에 대해서라도 간략하게 요약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일단 개설서나 교과서 등을 통해서 익숙한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17세기 초엽, 신성로마제국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갈등이 점차 극에 달해가고 있었고, 제국은 이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없었다. 제국은 서로 대립하는 프로테스탄트 동맹과 가톨릭 연맹 두 진영으로 쪼개졌으며, 이 지경까지 왔을 때에는 전쟁은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러한 서술은 과연 얼마나 사실과 근접한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신성로마제국의 체제-내부적 위기?
198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를 전쟁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역사로 보았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과 맞물려서 오래도록 정설의 위치를 차지했다. 어떤 학자는 당시 제국의 상황을 봤을때 전쟁이 더 일찍 터지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서술은, 종파 갈등이 극에 달해가면서 동시에 제국의 체제가 무력해졌다는 데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제국 운영의 핵심을 이루는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과 제국의회(Reichstag)가 기능을 상실하고 무력화되었다는 서술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는 이와 상당히 다르다.
제국대법원은 신성로마제국의 최고 사법기관으로, 제국 구성원들 간의 알력과 다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한때는 제국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그저 느리고 비효율적인 기관 정도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는 상당히 과장된 서술이다.
물론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종파 간 문제가 새로운 변수로 대두되면서, 제국의 사법체계가 일부 약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몇몇 사건들을 제외하면 사법 행정은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결과다. 실제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까지 대법원이 처리하는 사건과 대법원에 재소된 사건들 관련문서들을 상세히 조사해보면, 당시 사법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을뿐 아니라, 제국 구성원들이 제국의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높았음이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제국의회는 어떠했을까? 가령, 1608년 도나우뵈르트 사건에 항의해서 개신교 강경파들이 의회를 나간것과, 1613년에 프로테스탄트 동맹이 의회에 참석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을 예로 들면서 이것들이 제국의회가 무력화된 증거이자, 30년 전쟁으로 곧장 이어지는듯 서술한 예가 그동안 많았다.
그러나 제국 의회 내에서의 알력은 중세부터 늘 있어온 현상으로, 이때의 모습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으며, 반드시 붕괴의 징조라고 해석해야 할 것도 아니다. 필자가 예전에도 여러번 관련 글을 썼지만, 전쟁이 났다는 것을 알고서 역사를 해석하는 '뒤로 읽기'는 역사적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1613년 당시에도 의회 거부를 선언한 강경파 프로테스탄트 동맹은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심지어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 가운데에서도 소수였다. G. Mortimer 선생의 지적대로, 당시 소수파였던 강경파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이 제국의회 참여를 거부한 것은 말 그대로 그들이 '소수파'였기 때문이었고, 제국 의회 내의 다수결 대결에서는 이길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입장에서 본다면 의회 내의 분란들을 대전쟁의 징조로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많다. 오히려 많은 증거들은 전쟁 직전까지도 대부분이 제국의회를 통해 유지되던 '합의의 정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제국 체제의 저력과 약점
국내에 관련 연구 소개가 부족 탓이 크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그 초기부터 그것이 존재한 전 기간에 걸쳐서 무수한 오해를 받고 있는 국가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성로마제국=합스부르크=가톨릭의 챔피언'이라는 공식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실과 크게 동떨어진 오해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신성로마제국이 사실상 다종파로 구성된 제국임을 인정한 사건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단순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이 제국의 수장이었다. 황제 본인이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대놓고 가톨릭의 챔피언을 자처한다는 것은, 본인이 제국 내의 특정 세력의 수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이런저런 말이 많아도, 신성로마제국이 그 장구한 세월동안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버텼다는 것은 대부분의 황제들이 이러한 '제국 통치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황제들은 '가톨릭 챔피언'이 아니라 '아우크스부르크 체제의 챔피언'을 자처하였다. 특정 세력을 밀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세력들의 균형을 유지하는 공정한 중재자 노릇을 떠맡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노력이 대체로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세력균형이 갑작스럽게 무너지지 않는 한 이 체제는 불안하긴 해도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누군가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이런저런 체제적 문제점들을 지적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특정 체제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곧 '붕괴하기로 예정되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어떤 시대든, 어떤 체제든 문제가 없는 시대와 체제는 없다. 그 문제점들에만 집중하면 어떤 시대든 지옥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폐단을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억제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려는 노력이 있었느냐와, 그 불가피한 폐단들을 스스로 관리할 역량이 있었느냐는 점이었다. 최근 연구는 그런 면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구조적인 면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도 극소수를 제외하면, 제국 구성원들의 제국 체제에 대한 충성심은 비교적 확고했다. 그 극소수 반가톨릭, 반합스부르크 파라 하더라도 제국이 붕괴하는 것을 바라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는 1606년까지 이어진 대투르크 전쟁에서 제국 정부가 비교적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잠재적인 문제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종파간 갈등은 이때까지는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으나, 이후 잉글랜드의 예(필자의 예전 명사연재 게시물 참조)가 보여주듯, 요건이 맞으면 폭발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카를 5세의 결정으로 제국과 스페인이 분리됨으로서 제국 정부가 예전처럼 스페인의 막강한 인력과 물력을 곧바로 동원하지 못하게 된 것, 오스만의 공세와 같은 외부적 요인들도 통제가 어려운 불안요소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러한 문제점들은 어떤 시대에나 있었으며, 더 심각한 사태의 여러 조건들은 될지 몰라도, 그 사태를 필연으로 만드는 조건은 아니다. 그것이 대전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더욱 복잡한 요소들이 상호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국제주의적 관점
이번에는 내부적인 면에서 시선을 돌려서 외부적인 면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30년 전쟁의 진짜 기원이 제국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있었다는 주장도 꽤 오래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C.V. 웨지우드는 30년 전쟁에서 종교 문제는 사실 피상적이었고, 사실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오던 프랑스-합스부르크의 대결의 연장선이라고 주장한바 있다. 웨지우드의 책은 현재 국내에 번역된 유일한 30년 전쟁 관련 서적이라 이미 읽으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앞서 서술했다시피 무려 70여년 전에 쓰여진 상당히 오래된 책이라 읽을때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많다.
이와 비슷하게 휴 트레버 로퍼는 30년전쟁의 기원은 사실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전쟁에 있다고 주장하였고, 제프리 파커도 유사한 주장을 제기한바 있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이 정확히 반박했듯이, 이러한 관점들의 가장 큰 약점은, 내부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날수도 있는 상황'은 설명할 수 있어도 '왜 결국 일어났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와 상황이 여러 면에서 상당히 유사한 동서냉전기를 본다면, 17세기와 유사하게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었지만 결국 일어나지는 않았다. 만약 일어났다면 30년 전쟁과 비슷하게 "~~한 조건들 떄문에 일어날수밖에 없었다"는 결과론이 지금쯤 홍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스페인이건 프랑스건 네덜란드건 30년 전쟁의 개전 자체에 있어서는 미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점도 강력한 반박이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오랜 갈등구도는 이후 전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지, 전쟁의 발발 자체와는 큰 연관이 없다. 네덜란드에서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결국, 외부요인설도 앞서 살펴본 내부 체제문제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건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음 글에서는 이 시기 제국 내의 주된 갈등이었던, 종파 갈등의 양상과 그것이 과연 전쟁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나의 문제를 다뤄보도록 하겠다.
첫댓글 오 재밌네요 ㅎㅎ한국쪽에는 번역이 잘 안되어 있는 분야라서 더욱 관심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국내에선 30년전쟁쪽은 책보단 학생님 연재글의 영향이 강한데 여기서도 신교도 동맹은 율리히 계승분쟁으로 유명무실해졌다고 하더군요. 상호간 긴장은 어느정도 있었지만. 다만 연재글은 보헤미아쪽을 더 중시하는 감이 있던데 루돌프2세가 여러모로 실정을 거듭하다가 동생이 봉기하자 보헤미아 신교 귀족들이 황제에게 뻗대다 상당한 수준의 자유약속을 얻어냈는데 마티아스 이후의 후계자 페르디난트가 개신교 박해로 악명이 높고 하필 대리인들 중에 악명높은 강경파가 있었고 거기다 약속에서 미처 규정 안 된 교회령내 신교교회 문제로 분쟁이 생기자 강경한 신교도 귀족들이 투척사건을 일으킨거라 서술되어있는데 이거랑
최신 연구가 연관이 있나요?
@롱기누스 보헤미아의 투척 사건은 제국 정부 고위직을 개신교 신자에게 개방하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가장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예전 서술들은 당시의 행정문서와 당대 기록들보다는 조금 뒤의 연대기에 더 많이 의존하는 문제와, 영미권 역사서술의 오랜 반가톨릭주의 전통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30년 전쟁과 관련해서 가장 최신의 논의는 피터 윌슨 선생의 2009년 저작 Europe's Tragedy이니 참고하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mr.snow 그럼 종교 포함 모든 면에서 삽질을 거듭하는 루돌프 2세에게 빡친 보헤미아 귀족들이 마티아스의 반란으로 위기에 빠지고 도주해온 황제를 위협해서 받아냈던 보헤미아 왕국 내 종교 자유 및 보헤미아 귀족들의 권리 증진 약속 문제는 의외로 30년전쟁과는 연관이 없다는 거라고 봐도 되나요?
@롱기누스 보헤미아의 상황이 30년 전쟁의 직접적 기원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누가 실정을 하고 삽질을 하고 탄압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내러티브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는 점입니다. 루돌프든 마티아스든 기본적으로 중재를 중시하는 온건파에 속한 사람이고, 가톨릭과 개신교 강경파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온건파 진영 내에서 지지를 받으며 상태를 유지해나갔습니다. 페르디난트 본인도 강경한 이미지와 달리 얼마든지 프로테스탄트 쪽과 타협할 의지가 있었고요.
@롱기누스 프라하의 투척 사건을 주도한 소수 강경파 개신교 귀족들은 페르디난트의 약속을 믿을 수 없다면서 보다 실질적인 보장을 요구하며 대립한 것인데, 그리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투척 사건이라는 초강수를 쓴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1차 대전과 같은 위기관리의 문제로 보이는데..(특히 왕되겠다고 나서버린 가을왕님의 뻘짓...ㅡㅡ;)
엥 사소한 거긴 한데 팔츠 그 양반은 겨울 왕 아니었나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