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일까..... 어둔 방안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어올렸다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따뜻한 햇살 하나가 동여맨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다. 아파트의 가지런한 앞모습보다 뒷골목을 닮은 내 작은 가슴 속 풍경은 지나온 삶의 흔적 만큼이나 서글프고 어지럽다. 아직도 내 안에 더 많이 버려야 할 것들로 쓰레기통은 넘쳐흐르고, 복잡하고 슬픈 기억들이 전신주에 매달린 전선들처럼 출렁이며 엉겨 있다. 자꾸만 뒤돌아보고 아파하며 가는 이 길이 내 길의 전부인 줄 알았다. 세상 끝으로 등 떠밀릴 때마다 오로지 그 길에만 매달렸고, 새처럼 비상하고 싶어 사방으로 수없이 부딪쳐 봤지만 언제나 그 길만 보였다. 희망도 체념도 내겐 늘 똑같은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고난은 없으며, 어둠의 터널에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의미를 새삼 느끼면서......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고, 슬픔 만한 거름이 또 어디 있으랴,는 구절을 되새겨본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중에, “안으로 들어가는 길만이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다”라는 글이 있다. “The way in, the way out.”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들어가야만 그 고통 속에서 영생의 길을 발견할 수 있고, 나의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듯이, 더 나아가 남의 고통에 우리가 동참할 때만이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게 됨을 안다. 아파본 사람이 그 아픈 마음을 더 알 수 있고 사랑과 관심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됨을 안다. 향기 없는 죽은 꽃에 나비와 벌이 모여들지 않듯이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 사랑을 주려면 먼저 내가 그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고 그 사랑을 감사할 줄 알아야 베풀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의 천사
난 어렸을 적, 고아원 옆에서 자랐다. 그래서 새 학기 될 때마다 장래 희망란에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고아원 원장이라 썼고, 지금도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 학교를 함께 지어 교육하며 생활하는 일이나, 소셜 워커가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다. 그 꿈을 도와주듯 이제 11살이 된 뇌성마비 내 아들. 육신의 날개는 아직 달지 못했어도 걸을 수 없는 다리로 무릎 꿇고 기도 드릴 줄 아는 내 영혼의 천사를 통해 우리보다 더 아픈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깨어있는 한올 빛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멀쩡한 바퀴도 제대로 굴러가기 힘든 세상을, 슬픔으로 고장난 내 바퀴, 아직 걸을 수 없는 아들의 바퀴로 더디 구르면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다. 성치 못한 바퀴로 구르는 수레지만, 그 속엔 꿈과 희망이 있고, 사랑 가득한 어린 아들이 타고 있고, 따뜻한 이웃들이 지켜주기에..... 분명 난 혼자가 아니었음을 또한 감사해 본다.
어느새 아들의 몸무게가 내 무게의 절반을 훨씬 넘어버렸다. 11년을 안고 업고 다녔는데, 얼마 전부터 등에 업고 내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아들은 엄마 등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따뜻하다고 말한다.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들은 귀에다 속삭인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아냐, 내가 더 미안해. 그리고 나도 사랑해!” “이 담에 엄마가 할머니 되어 다리에 힘 빠지면 그땐 내가 꼭 업고 다닐게.” 서로 더 많이 미안해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다 보면 두 어깨에 힘이 솟는다. 보기에 안쓰럽다고 이웃 사람이 나 대신 아이를 안고 계단을 올라가면 “고맙습니다”라는 말 대신에 “무거워서 미안해요”라고 말한다. 식사 때 입맛이 없다고 조금만 먹으면, “엄마, 그래도 억지로 먹어! 우리는 아프면 안 되잖아, 나도 어쩔 땐 억지로 먹어.”라고 부추긴다. 아들의 ‘억지로’라는 그 말 때문에 ‘바로 네가 내 힘이구나’하는 고마움까지 든다.
아들과 나,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세월도 꽤 흘렀다. 가진 것도 남은 것도 없는 삶이지만, 몸도 마음도 하나님 안에서 쑥쑥 잘 커주는 아들이 너무 고맙기만 하고, 부족한 만큼 아파하며 채워져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 본다. 아들과 내게 아침 이슬같이 투명하다 못해 너무 차디차고 슬펐던 지난 시간들. 그러나 이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 않다. 뒤를 돌아보며 한숨짓고 힘들어하기보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다.
그와의 결혼은 평범치 못한 내 삶의 서곡이었는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힘든 유학 생활 속에서 어렵게 내 안에 잉태된 생명은 내 인생의 또 다른 길을 예비하고 있었다. 아직 낳을 때가 안돼 그것이 산통인지도 모른 채 밤새도록 아파하다가 결국 아침이 되어서야 혼자 걸어간 스웨디시 병원 응급실. 난 그곳에서 아이와 산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괜찮다는 사인을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했고, 걸어들어간 지 한 시간만에 바로 3.1 파운드의 칠삭둥이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발가락 다섯 개의 지문이 어른의 엄지손가락 지문 크기와 똑같을 정도로 조그마한 몸뚱이였다. 보통 신생아의 반도 안 되는 아들에게 크고 푸르게 자라달라는 의미의 한국 이름 태청과 Ludwig이라는 미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Ludwig은 Ludwig van Beethoven에서 따온 이름이다. 청각 장애인이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대성한 음악가처럼 아들도 그렇게 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4파운드의 정상아로 퇴원하여 집으로 온 아들은 엄마의 안전한 뱃속이 아닌, 험한 세상 속에서 감당키 어려운 수난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장미꽃도, 가시도 감사
백일도 돐도 치르지 못한 게 딱해 보였던 친구는 사진이라도 찍어주고 싶다며 사진관에 데려다 주었다. 선천성 뇌성마비라는 결과가 나온 날부터 아들과 나의 인생은 그렇게 특별해졌다. 처음엔 눈도 못 맞추고 목도 못 가누는 아들을 안고 “엄마”라는 말이라도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수없이 울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도 좋으니 함께 대화하게 해달라고 기도에만 매달렸다. 소리를 내는 연습을 위해 Speech Therapy를, 앉지도 못하고 흐늘 거리는 몸과 뻣뻣한 다리를 위해 Physical Therapy를 다녀야 했다. 손으로 뭔가를 집고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Occupation Therapy 등 여러 가지 병원 스케줄이 이어졌기에 그때부터 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아이가 우선이 되어버렸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도 못하고, 그 사랑을 느끼지도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아파하면서 아이의 삶은 시작되었고, 원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삶을 나는 눈물로 출발해야만 했다.
식구, 친척, 친구 하나 없는 시카고라는 땅에서 아들과 내가 살아내야 하는 일이 장애보다 더 무서웠다. 몸도 마음도 약했던 나는 처음엔 너무 막막하여 날마다 아이를 안고 울기만 했다. 이렇게 울다가 죽을 것 같았지만, 말도 못하고 우는 나를 쳐다만 보고 있는 아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살아 보기로 했다. 남들은 장애를 고쳐 보겠다고 미국으로 이민까지 오는데, 사는 것이 힘들다고 이런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베이비 시터에게 아이를 맡기고 일을 다니면서 중간에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뛰어다니며 바둥거려도 보았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내 형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면서까지 일하겠다고 버틸 수 있는 용기와 인내는 없었다. 결국 일의 선택폭이 좁아졌을 뿐 아니라 내 사정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일을 마치고 아이를 찾아 집에 오면, 아이에게 물리치료를 시켜야 했기에 시간은 늘 부족했고 몸과 마음은 나날이 지쳐갔다. 밤이면 기도를 하면서 죄책감으로 가슴 아파 울어야만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간들 속에서 삶의 방법과 생각들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나름대로의 한계에 부딪혔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을 빨리 포기하는 일이 중요해졌고, 그때부터 하늘만 바라보는 하늘바라기가 되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도, 온전치 못한 아이를 감당해야 하는 일도 내 마음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 줄 수 없었고, 물질이 이 아이를 걷게 해주진 않음도 깨닫게 되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장애와 현실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찾게 되었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음을 감사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상태가 나아져가는 아들을 보며, 두 발로 땅을 딛고 걷게만 된다면 이 가난마저도 사치로 여기리라 했다. 걷지 못한 아들의 다리로 하여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었고, 아들의 장애를 통하여 하나님은 먼저, 나를 주인으로 여기던 이전의 잘못된 삶을 치유하시며 새롭게 빚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신앙이었는데, 내게 특별한 선물로 주신 아들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동안 보고 느낀 그 어떤 아픔도 장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장애는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 세상과 하늘나라를 연결시켜 주는 축복의 디딤돌이었다.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남은 인생에서 특별한 비전까지 가지게 해주었다. 절망과 고통이 점철된 시간이 아니라, 주어진 순간순간 속에서 희망과 기쁨, 사랑의 보화들을 조금씩 캐내며 느낄 수 있었으니, 이런 아들이 지금 내 옆에 있음을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엄마’라는 말을 그렇게 듣고 싶어 울며 기도했는데 이제는 한국말과 영어를 너무 잘하는 청산유수가 되었다.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 나 꼭 걷게 해주세요!”라고 날마다 기도하는 아들은 내 든든한 기도의 동지다. 너무 능청맞게 한국말을 잘해서 아들의 별명은 어딜 가나 ‘영감’으로 통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도 “어머, 얘는 꼭 영감 같애”라고 말하곤 한다. 전라도 사투리에 억양이나 말투도 나이 드신 분들을 닮았다.
일어나, 걸어라!
아들은 5년 전, 하반신 10군데의 근육을 이완시키기 위한 대수술을 받았다. 그 수술을 위해 거의 2년 동안 발의 각도를 조금씩 꺾어서 깁스(Cast)를 발끝부터 무릎까지 하고 다녔다. 두 다리를 깁스해놨으니 무겁기도 하고,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고, 아프고 답답해서 너무 힘들어했다. 밤에 갑자기 다리가 쥐나면 새벽 두세 시라도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딱딱한 다리를 주물러 줄 수도 없고 온몸이 뻣뻣해진 아이를 업고 가면 의사는 기계로 깁스를 잘라 내고, 그 다음날 또 다리를 꺾어 깁스를 했다. 그런 상태에서도 물리치료는 계속되었고, 한 번씩 깁스를 기계로 잘라내어 발 각도를 확인하여 다시 맞추곤 했다. 빛을 보지 못한 다리엔 까만 털이 빽빽히 자라고 있었다. 까치발처럼 되어버린 뒤꿈치로 땅을 딛고 일어서게 하려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아이의 다리를 수없이 꺾어 주어야 했다. 오직 걷기 위해, 아니 예수님이 언젠가 꼭 걷게 해주신다고 실제로 믿고 있는 아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운동시키는 일이 전부였다.
수술 후, 병원에 입원한 채 하루종일 시간시간마다 물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브레이스(A.F.O-Braces)라는 플라스틱 신발을 발끝부터 무릎 밑까지 밤낮으로 신고 있어야만 했다. 더운 여름인데도 양말에 플라스틱 신발을 신고, 밤이면 그 위에 하반신을 온통 스폰지에 나무가 끼워진 기구(Knee immobilizer)로 칭칭 감고 발을 크게 벌린 채 천장만 보고 자야만 했다. 병원에선 온도가 맞아서 그래도 견딜 만했지만 퇴원해서는 너무 더워 날마다 땀에 절어 있었다. 두 발로 걷는 게 아들의 소원이지만, 맨발로 마음대로 뒤채거나 엎드려서 잘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아이는 안다.
애기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 저녁으로 근육을 이완시키는 독한 약을 먹어야 했고, 4년 전에는 잠자다가 갑자기 간질 증세까지 나타나, 어쩌면 간질 예방약을 평생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몸을 풀어주고 이완시키는 약이라서 졸립고 힘이 없어 학교에서 잠이 들 때도 있고, 깨워도 못 일어난다는 전화가 오곤 한다. 처음 간질 증세가 나타났을 땐,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는 아이가 더 잘못될까봐 응급실로 가는동안 운전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떨린 적도 있다. 잠자다가 나타나는 증세인지라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하루가 제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밤엔 아무 일 없이 잘 자고 아침을 맞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 축복인가를 깨닫곤 한다. 힘들어 하면서도 걸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을 보면 현실의 무게도 그 어떤 슬픔도 다 참을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긴다.
2년 전 어느 여름날, 아들과 내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날따라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주저앉아 일어날 마음조차 없었다. 아들에게 그냥 넋두리하듯 사정해봤다. “꼭, 한 번만. 엄마 위해서 한 발자국만 너 혼자 걸어줘라. 응?” 무섭다며 마다하는 아들을 억지로 붙잡아 세워놓고는 손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겁에 질린 아들이 넘어질 듯 말 듯하면서 한 발 두 발을 떼어 놓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믿어지지 않았다. 날마다 그렇게 기도했으면서 말이다. 혼자서 아무 것도 의지 않고 한 발씩 걷고 있었다. 아들은 나보다 더 놀란 듯했다. 넘어지면 또 일으켜 세워달라면서 걷고, 넘어지고 확인하고 또 걷고, 자기 다리를 쳐다보면서 “엄마, 나 이제 걸을 수 있나봐! 예수님이 걷게 해주셨나봐!”하고 너무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날 첫발을 떼는 기적을 체험하자 우리는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도 주저앉지만, 너무 행복하고 좋아도 주저앉는다는 것을 우리가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아들은 매우 바쁘다. Physical Therapy, Occupation Therapy, Swimming Therapy 등을 다니고, 가야 하는 병원도 다양하다. Children’s Memorial Hospital, Masonic Hospital, RIC(Rehabilitation Institute of Chicago), 소아과 병원, 특수과 병원 등..... 매일 두 시간 반씩 집에서 운동도 한다. 다리를 풀어주는 스트레칭과 Tread mill로 워킹 연습을 하고, 다리 근육에 쇼크를 주는 전선을 붙인 채 허리에 기계를 차고 혼자 걷는 연습을 한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엔 큰 소리로 기도를 한다. 주기도문으로 시작해서 가슴에 박혀서 아예 외워버린 자신의 기도와 성경 구절들을 낭송한다.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맨 마지막 성경 구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이다. 어려서 걷지 못했을 땐, “예수님, 나 꼭 걷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이제는 “예수님이 걷게 해주셨다고 말하고 싶어서 꼭 걷고 싶어요!”라고 간절한 소망을 말한다. 그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고쳐주셨음을 자랑하는 다리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두 발을 땅에 딛고 걸어야 하는지 어린 마음이지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력하여 걸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승리겠지만, 예수님을 위한 노력의 결과는 하늘나라 승리가 된다는 것을 우린 안다. 때로는 맨발로 기계에서 연습을 하는데 발을 높이 들지 못하니까 살이 닳아져서 빨갛게 살점이 뜯겨 나간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과의 싸움이고 인내의 훈련이라는 것을 아이는 안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서 많이 걸어서 늘 깨끗한 신발이 빨리빨리 닳아져 버리고 자꾸만 새 신발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바래본다.
하나님 돈통
돐이 되기 전부터 물리치료에 익숙해졌지만, 언젠가부터는 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아프다하고 힘들어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보상심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거실 끝에서 끝까지 50번을 걸으면 1불씩을 주고, 더 걸으면 액수가 올라가고, 일주일 중 하루는 Special Day로 정해 다른 날의 두 배를 주기로 약속했다. ‘돈이 도대체 뭔지’ 어떻게든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훈련하는지 모른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서 걷고 돈도 버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면서 말이다.
아이의 지갑 옆에는 십일조 통이 있다. ‘하나님 돈통’이라고 부른다. 1불을 번 날엔 10센트를 넣고 공돈 10불이 생기면 1불을 넣는다. 어렸을 때부터 아들에게 생긴 돈은 함께 감사 기도하며 모두 아들에게 주었다. 십일조를 드릴 때, 아깝다는 불평 없이 당연하게 하나님 몫으로 생각하는 순수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본다. 수학 점수는 별로인데 운동량에 대해 자기가 받을 돈과 십일조의 액수는 정확하게 안다. 주일 헌금과 때에 맞는 감사 헌금을 할 줄 알고 매월 작정한 선교비도 자신의 돈으로 직접 낸다. 그동안 모은 십일조가 꽤 되어 다리를 절단한 어느 북한 자매에게 의족비로 전부 보냈다. 걷지 못하는 이의 아픈 마음을 아들은 분명히 안다. 그 자매가 의족을 끼우고라도 걸을 수 있고, 또 계속 전도하기를 바라면서 기도할 뿐이다. 2년 전, 아는 분이 교통사고로 힘드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는지, 어느 날 그분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아무도 모르게 성탄 카드 속에 20불을 넣어 드린 적이 있었던가 보다. 아파서 일을 못하시게 되면 굶으실까봐 쌀 한 포대 꼭 사시라고..... 그분이 아이 돈을 어떻게 받느냐고 전화하셨길래, 아이의 마음을 그냥 받으시라 대답하곤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 그 후 언젠가 그분 집에 갔을 때, ‘나누는 삶은 생명의 의무’ 라는 문구와 함께 그 20불짜리가 작은 액자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에 어려운 분이 있으면 이 액자를 보면서 실천하시려고 만드셨다 했다.
가끔 내 지갑이 마를 때 아이의 돈을 빌려 쓰기도 한다. 어머니의 날이나 내 생일에는 꽃이나 구두를 사라고 아이가 돈을 준다. 작은 것의 소중함을 우린 안다. 하나님은 부족함 속에서 참 부유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현재 누리는 삶에 더 많이 자족하며 감사할 줄 알게 하셨다. 아이는 가진 것을 다른 사람, 특히 힘들고 아픈 사람을 위해 줄 줄도 알고 자연스럽게 나누는 행동도 한다.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는 동안, 그 소중함을 깨달아 남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고, 받는 것보다 남에게 줄 때 더 행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아이는 자연스레 깨우친 듯하다. 말로는 수없이 착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대해 배웠겠지만, 실제로 해보지 않고는 그 맛을 모르듯이 스스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물질을 아끼고 하나님의 돈을 구별한 후 나머지를 잘 사용하는 습관이 몸에 밴 듯하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돈은 지갑에 들어갔다 나갔다 무지 바쁘다. 주위의 조그만 일에도 영감님처럼 간섭하면서 작은 기쁨을 나눈다. 하지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돈을 안 쓰는 정말 구두쇠다.
출처:http://logosmissio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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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간증글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