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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대성님
주 안에서 님에게 주님이 베푸신 은총으로 문안을 전합니다.
님께서는 마가복음 16장 12절인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참조. KJV 흠정역, “그 뒤에 그들 중의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그분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라.”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내용에서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며 이를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두 사람에게 보이셨는데 다른 모습으로 보이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모습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아니면 두 사람의 영적 소경을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해석인가요?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하오니, 님이 궁금해 하시는 것과 함께 이 구절의 내용이 무엇을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님이 궁금해 하시는 내용이 있는 구절을 한글개역개정에 의해서 다시 보겠습니다.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이 구절에서 님이 알고자 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이것에 어떤 의미에서 말씀되고 있는지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에서의 ‘다른 모양’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님은 (1) 다른 모습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2) 아니면 두 사람의 영적 소경을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해석인가요?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른 모양으로’는 님이 제시한 또 다른 한글번역성경인 킹제임스흠정역에서는 ‘다른 모습으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모양’으로도, ‘다른 모습으로’도 어떤 것으로든지 번역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모양’이 곧 ‘다른 모습’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죠.
그런데, 이 다른 모양, 곧 다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할 때,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궁금함을 갖게 합니다. 님께서 말한 바와 같이 (1) 다른 모습이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이 아니라는 의미인지요 (2) 아니면 두 사람의 영적 소경을 말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해석인지요.
여기서의 ‘다른 모양’, 곧 ‘다른 모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있도록 암시해 주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2)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3)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5-9)
여기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분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을 당함에 있게 하셨으며 또한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하심으로 그분의 본체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을 취함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여기에서 보는 대로의 사람의 모양을 취하심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모양’(모습)이란 말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2절에서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심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제3일만에 부활하신 후에 있은 일에서입니다. 안식 후 첫날, 곧 안식일 그 다음 날에 있은 일입니다. 제자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골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고 하는 동네로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눅 24:13).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의 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그 두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걸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두 사람과 나눈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서 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른 모양(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비단 제자 두 사람에게만 있은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었습니다(요 20:14; 21:4. 참조. 요 20:19-20, 24-28). 심지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서는 유령이라고까지 외치며 두려워하기도 하였고, 예수님이 자신이 유령이 아닌 그들의 주님이심을 알려주었는데도 의심을 풀지 않고 있기도 하였었습니다(눅 24:36, 42).
제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함에 있었는지요.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양(형체)가 과연 신령한 몸을 취하셨기 때문인지요. 그래서 부활하시기 이전에 모양(형체)과는 다른 모양(형체)의 형체이기 때문에 알아볼 수 모양(형체)이어서 제자들이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요. 이러한 이해는 옳지 않습니다. 즉 맞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에수님을 뵌 마리아가 너무 기쁜 나머지 “선생님”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붙들려고 할 때 “나를 붙들지(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요 20:16-17) 라고 하였었습니다. 에수께서 부활하신 몸은 부활하시기 이전의 몸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즉, 부활하시기 이전의 모양(형체)과 부활하신 이후의 모양(형체)은 알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양(형체)이 아닙니다. 부활하시기 이전의 모양(형체)과 부활하신 이후의 모양(형체)은 같은 모양(형체), 곧 동일한 모양(형체)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린 몸을 보여 그 못 박히고 창에 찔린 곳에 손가락과 손을 넣어 확인하게 하며 자신을 알아보고 부활하신 주님께 믿음을 갖게 하셨으며(요 20:24-28), 또한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셔서는 고기를 잡게 하셨으며, 제자들이 아침 식사를 위하여 구운 생선과 떡을 나눠 주며 먹게도 하셨으며, 예수님 자신이 먹을 것을 제자들에게 달라고 하시고 제자들이 주는 생선을 드시기도 하셨습니다(요 21:14; 눅 41-42). 이렇게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이전의 모양(형체)과 부활하신 이후의 모양(형체)이 다르지 않고 동일합니다. 그러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시고 또한 그들에게서 사라지기도 하시는 신비한 능력, 곧 이적을 행하시기도 하셨습니다(눅 24:15, 31, 36; 요 20:19-20). 그렇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몸일지라도 아직 하늘로 올리워 가시지 않고 땅에 계신 동안은 그 몸은 부활하시기 이전의 몸의 모양(형체)와 같은 동일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다른 모양’,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어떤 것에서 인지요. 이를 알 수 있는 구절이 누가복음 24장 15-16절에서 말씀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다른 모양,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아직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그들의 눈을 가리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늘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을 나타나셨는데, 그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이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는 이전의 형체(모양, 모습)와는 전혀 다른 형체인 신령한 몸을 입고 계셨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제자는 예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비로소 알아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이전의 몸의 모양(형체)은 부활하시기 이전과 동일한 그 몸의 모양(형체) 그대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하지만 하늘로 올리우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의 모양(형체)은 땅에 있은 동안에 입고 계신 예수님의 몸의 모양(형체)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곳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형상으로서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비록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이 시.공을 초월하는 능력을 나타내시는 신비함을 보이실지라도, 이는 예수님의 몸의 모양(형체)가 부활하시기 이전과는 다른 모양(형체)에 있는 것에서가 결코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권능이 일으키셨으며, 그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는 권능을 행하시는 것에서였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님의 이야기에서도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상태가 영적 소경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옳지 않습니다. 영적 소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그 따름에 있지 않은 자들의 상태를 가지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흑암에서 벗어나 광명한 세계를 보는 눈을 뜬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경우는 영적 소경이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두 제자의 경우는 주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셔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의도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원어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의 원문에서 우리 한글성경(개역개정)의 ‘가리워져서’에 해당하는 단어는 ‘붙들다’, ‘억제하다’를 뜻하는 미완료형 수동태로 3인칭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번역하면 “그것들이 붙들렸다(억제되었다/억제당하였다)”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나 그들의 눈”을 뜻하므로 “그러나 그들의 눈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억제되었다”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눈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억제 당함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의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시는 의도적인 눈가림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심은 곧 있게 될 일인 제자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실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있게 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이를 때까지 일시적으로 그들의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가리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때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잠시 잠간이며 곧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두 제자의 눈을 가리셔서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 곧 모세의 글로부터 시작하여 선지자들이 기록한 글의 모든 예언이 예수님 자신을 두고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란 사실을 설명하여 줌으로써 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왜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줌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셔서 함께 하시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로소 알아보고 예수님에 대해 믿음을 갖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다른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터에 막상 대할 때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 작용하기도 하였겠습니다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이미 알려주셨던 말씀인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할 것이나 제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기다림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고전 15:3-4)이란 것에 대해서 그 기대와 그 기다림에서 맞이할 준비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할 때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과연 부활하신 예수님이신가에 의혹을 품과 오히려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 또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6개월을 자신들의 주님과 함께 동생동행(同生同行)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얼굴과 그분 몸의 모습을 알지 못하겠는지요. 그런데 그와 다름없는 것은, 그들 스스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하였습니다. 즉, 보고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에 의해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리고 또한 실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도무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정함에 가리어 있었습니다. 이 또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있었던 것과 같이 그들 자신 스스로에 의해서는 마음이 열리지 않는, 곧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굳게 닫아 놓으심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발휘되고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시는 중에 몸소 자신을 보이시며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한 증거로 보여 주심으로써(행 1:3)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음이 단지 제자들의 입에서 말해지는 주장에 의해서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신(고전 15:3-9) 것에서 그들의 의심을 제거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우리의 눈이나 귀가 하늘로부터 계속 그 기능을 부여 받기 전에는 제대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든 감각의 연약성을 인정하라는 것이 이 본문의 교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말입니다. 소위 ‘사실’이라고 하는 ‘역사적 팩트’(historical fact)를 자신들의 눈으로 볼지라도 단지 본다고 하는 그 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믿음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이를 행하여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가져야 할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까지 여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까지 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인 모든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에서,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있는 일임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여기에 그 이해에 있게 하시고, 그래서 그 인정에 있게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수납하게 하시고,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 따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여 가는 증인에 있게 하시는, 참으로 그들의 마음에 일말의 의혹도 남음이 없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의 믿음의 주님이시오 온 세상에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함에 자신들의 목숨이 함께 함을 기뻐하며 그 즐거움에 있으면서 해 나가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함에는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서도, 그리고 예수님의 열 한 제자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성경대로의 예수님’을 알게 하시는 데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리워 가시기 전까지의 땅에 계신 동안에 가지신 시간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 나가시는 것에서 의도적으로(섭리론적으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눈이 가림에 있게 하셔서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으며, 또한 제자들에게는 마음에 자신들과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지에 대하여 아직도 의심하는 자들도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정 의도하신 바인 자신을 성경 그대로 죽으셨고 또한 성경 그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성경대로의 예수님‘이심을 알아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6장 12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에서 알게 되는 내용이며,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이상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예수님에 대해서 참으로 진지함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대로 말씀해 주심에 의하여 좀 더 자세하게 알아나가는 것에 일조가 되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님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에 바른 이해를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장마가 물러가고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더위가 참기가 쉽지 않지만, 이 또한 우리 몸이 거부할 것이 아닌 받아들이며 견뎌가야 할 것이기에 잘 지내시기 바라며,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최근에 원어성경에 관심을 가져서 한 까페에 가입을 했는데요. 너무나 엉뚱하게 해설을 하시고, 기독교 목사님들을 폄하하면서 성경을 모르는자들이 목사하면서 말씀 팔아먹는다는둥 글들이 많아서 한번 여쭤봤습니다.
말씀 홍수시대에 개혁주의를 따르며 하나님 말씀 분별하기가 정말 힘든것 같습니다.ㅠ
안녕하세요. 정대성님. 님이 원어성경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시다기에 바른 이해를 위해 본 답글에 원문과 관련된 글 약간을 보충하여 설명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단. 회원들의 읽기의 편리를 위해 원문의 단어와 그 발음은 의도적으로 생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