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의 두려움
1997년에 개봉된 <콘택트(Contact)>는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의 철학적 담론과 조디 포스터의 이지적 연기가 돋보이는 SF드라마이다. 여성 과학자가 우주수송기로 18시간을 여행하여 여러 개의 웜홀을 통과해서 베가성(직녀성)에 이르러 죽은 아버지를 만난다는 줄거리이다. 영화 속에서 연구자들은 베가성으로부터 발신된 디지털 신호를 해독하여 우주수송기를 만들어내었지만, 수송기가 작동되어 지구의 시공간 속에서 증발한 시간은 몇 초에 불과하였다. ‘증명되지 않는 존재는 믿을 수 없다’는 상식적 합리론에 따라 그녀의 외계 체험은 부인되었으나, 그녀가 찍었던 비디오카메라 필름은 18시간의 정적을 담고 있었다.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정색하고 논할 뜻은 내게 없다. 여성 과학자가 베가성으로부터의 발신을 감지하고 흥분하는 장면과 그녀가 수송기로 웜홀을 통과하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접속>, 미지의 존재와 만나는 희망과 두려움을 이야기
같은 1997년에 개봉된 방화 <접속>(The Contact, 1997)은 장윤현 감독이 인간 대화의 문제를 탐색하고 한석규와 전도연이 잔잔한 연기를 펼친 멜로드라마다. 실연 후 원치 않는 삼각관계에 빠진 한 남자와 허무한 짝사랑에 마음고생을 하는 한 여자가 PC통신상에서 접속을 한 후, 각자 지금까지 얽혀 있었던 관계를 벗어나서 진정한 만남을 이룬다는 줄거리이다. PC통신을 하던 사람끼리 실제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낡은 소재로 되었지만, 사람들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만 서로 접속할 수 있다는 모티브는 현 사회의 병통을 가리켜 보이는 진단적 의의를 지닌다. 나는 특히, 단절의 현실을 인간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희망적이어서 이 영화가 좋다.
두 영화는 똑같이 ‘접속’을 제목으로 사용하였다.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는 두려움과 희망을 이야기하였다는 점에서도 공통성이 있다. 20세기 말의 두려움과 희망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얕은 독법으로는, 두 영화는 모두, 삶의 허무한 여러 관계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접속’을 시도하려고 하는 인간 의지를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드러낸 것만 같다.
실상 새롭고도 참다운 접속을 시도하려는 인간 의지는 현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부각된 것은 아니다. 남을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진정을 토로한다는 뜻의 오언(晤言)이 한문고전 속에서 주요 테마로 되었던 것은 정녕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시경』 진풍(陳風) 「동문지지(東門之池)」에서 ‘어여쁜 저 아가씨와 노래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말을 하고 싶어라’, ‘어여쁜 저 아가씨와 얘기하고 싶어라’라고 열렬하게 노래한 것을 생각해보라. 오가(晤歌)·오어(晤語)·오언(晤言)을 남녀 사이의 만남에만 제한할 필요가 없다. 완적(阮籍)은 「영회시(詠懷詩)」에서 “저물녘에 벗을 그리워하나니, 함께 얘기하여 맺힌 마음을 쏟아내련다(日暮思親友, 晤言用自寫)”라고 하였다. 두보(杜甫)의 시(「大雲寺贊公房」)에서는 “함께 얘기하여 뜻이 맞는다면, 어찌 입을 꽉 다물고 있으랴(晤語契深心, 那能總鉗口)”라고 하였다.
‘접속의 결단’, 뭔가 남다른 지적 결실의 계기
우리 정신사에서 무언가 남다른 결실을 맺은 선인들은 대개 미지의 인물과 ‘접속’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연암 박지원이 이광려를 찾아가 ‘당신은 문자(한자)를 몇 글자나 아우?’라고 대뜸 묻기 직전에, 다산 정약용이 신작의 사마루 집을 방문하여 『상례사전』을 내놓고 일독을 청하기 직전에, 그 분들이라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으랴. 하지만 그 분들은 과감할 수 있었다. 파편화의 상태를 극복하려 하였기에. 시교(市交)와 면교(面交)를 부정하고 성대한 만남을 꿈꾸었기에.
지금 우리의 지적 풍토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그런 접속의 결단이 아닐까? 아무래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심약함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