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광고지에서 본 이중섭 그림 전시회를 다녀왔습니다. 경복궁 근처 화랑인데 도록에 있는 화가의 연보를 보니 1972년에 이중섭의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리면서 이중섭이 일반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입장료가 5,000원이어서 전시회에 가 볼 마음이 생기었기도 하지만, 갖고 있던 <<이중섭 - 편지와 그림들>> 책에 있는 그림을 실제로 본다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그림들이 표구가 되어있어 한 두 점의 그림을 제외하고는 책에 있는 그림들과 그다지 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그림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차별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그림 감상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도화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 물감에 물을 많이 섞기도 해서 주글주글하기도 한 그림, 자신의 아이가 직접 그린 그림이 훨씬 가까운 생동감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화가를 비롯해 예술가라는 프로 타이틀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에는 후대가 되새겨볼 그 시대의 사회상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이 아침입니다.
중세 조선조에서(이 구분이 정확한 지 모르겠지만) 근대로 이행하는 일제강점기 이후 미군정기의 '조선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한 화가 이중섭을 그림으로 잘 파악하지는 못해도 그가 잠시 피난해있던 제주도의 작은 방에 써 붙여놓은 것을 조카가 암송하여 전한 이중섭의 詩로 화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 시는 1951년, 그의 나이 35세, 우리나라 나이로는 36세에 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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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릅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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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피난지에서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내기에 '삶은 외롭고/서글프고 그리운 것'이었겠지만 대부분 누구나 36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왠지 삶이 서글퍼지기 시작하면서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그런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둘째를 시댁에 맡기고 첫째는 돌보며 작은 중소기업에 다니던 그 나이의 저 또한 그래서 그 나이 즈음 시를 읽기 시작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화가가 아내에게 '삶은 외롭고/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고 다복다복 다독이며 달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합니다. 부러운 모습입니다. 책에 실린 부인의 젊은 시절 흑백 사진은 짙은 색 힐의 앞코가 소의 굽을 연상케도 합니다. 이중섭은 서른 여섯의 팔팔하면서도 성숙한 세대로 접어드는 나이에 가족을 부양하지는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맑게 두 눈 열고 // 가슴 환히/ 헤치다'라고 했으니, 외마디 절규와도 같은 이 말이 원초적인 그림들과 함께 마음을 울립니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생동감이 살아있으면서 슬프고, 따스하면서도 피안의 구름 너머 푸르름과도 같은 분위기가 전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아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은 '가족' 그 자체로 치환될 수 있는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아마도 30대에 이 전시회를 보았다면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화가 박수근과도 친분이 있었던 이중섭이니 정전후 미군정기의 신미술 예술가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몇 달 전 읽었던 유신시대를 겪은 김광규 시인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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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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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시 모음집에서 이 시를 읽게 되었을 때에, 나는 글을 쓸 때 '개인적'이기에 결말에 나 개인의 결기가 있고 시인은 '사회적'이기에 결기를 가져가기 어려운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휘이 죽 이야기를 하고,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구나,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중섭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본 지금 드는 생각은, 아직 부모 형제의 울타리 안에 자의식이 함께 있는 대가족제의 유산이 마음에 있는 이중섭은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활력을 보여주고(비록 헐벗었지만),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핵가족화된 상황의 가장이 되는 시인 김광규의 세대는 옴짝달싹하기 어려워지는 형국인 것이구나...다시 생각이 되어집니다.
80년이 되어 사건이 터지고 군사독재 철폐, 미군 철수 그리고 통일의 문제로 운동권의 이슈가 제기되었는데, 그 중에서 군사독재 철폐는 대통령 직선제를 성취하고, 통일의 문제는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더불어 현재진행형의 문제가 되고, 미군 철수는 어떻게 되었더라, 신문을 잘 안본지 꽤 되어서 흐름을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 어학연수가는 중학생 아이들이 꽤 된다는 전해듣는 이야기로 이 시대의 추세를 가늠해보는 정도입니다. 지금 무엇이 가장 큰 우리사회의 문제이겠는가, 중국의 변화와 미국의 대처? 그렇게 귀결이 되려나, 유럽은 또 어떻게 한반도와 연관이 되는 것일까, 궁금해지고 걱정이 되고 그렇습니다, 내 아이들이 살아낼 당장 몇 십 년 이후의 변화된 사회가 걱정스레 다가옵니다.(2015년 1월 18일 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