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인과는 인연이 깊다. 1970년대 초 나는 갈 데가 없어 세계문학전집을 새로 내는 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번역이 다 끝나고 교정 단계에 있는 전집의 마지막 마무리로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새로 손질하는 일 등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일이 급해지자 아예 몇이 여관을 잡고 먹고 자면서 일을 했는데, 그때 회사와 인쇄소와 우리 사이를 오가며 일을 보아 준 이가 서정춘 시인이었다.
나는 그가 시인인 것을 알지 못했다. 허름한 점퍼 뙈기를 걸치고 구부정하니 몸을 구부린 채 술값이 모자란다면 회사로 달려가 술값을 조달해 오고, 교정지가 필요하다면 인쇄소에 가서 교정지를 빼오는 그를 회사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는 말단 직원쯤으로 알았다. 사실은 그도 나와 같이 회사 일이 바빠서 임시로 고용된 처지였는데, 일이 다 끝나고 임시고용인들을 해산하는 자리에서 그는 사장의 “서정춘은 계속 우리하고 일하지” 라는 말과 함께 재고용되었다.
두 달여 함께 일했지만 나는 그때처럼 그가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장이 우리가 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알았는지, 서정춘이 그 전해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시인이기도 하다고 덧붙임으로써, 그 자리는 그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공식 소개되는 자리이기도 했던 것 같다.
헤어지기 직전 그는 나를 대폿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것이 제대로 된 첫 취직이라는 것, 고향이 전남 순청으로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 어릴 때부터 하도 굶어 지금도 언제 또다시 굶을지 모른다는, 말하자면 기아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대개 이런 얘기들을 그는 했던 것 같다. 그 무렵 발표하기 시작한 내 시를 좋아한다는 말도 했다. 그 자리가 아마 내가 그로부터 술을 얻어 마신 첫 자리였을 것이다.
우리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어 달 뒤부터 내가 그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막 <창작과 비평>에 ‘눈길’, ‘파장’ 같은 시를 발표하고 있었는데, 그는 “형님하고 같이 일하게 되다니 기쁘요” 하면서 “두고 보시요잉, 형님 시가 앞으로 대단히 높게 평가될 테니까” 하고 듣기 좋은 예언을 해서 기분이 좋아진 나는 종종 그를 술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밤이고 낮이고 구별 없이 일에 매달렸다. 술을 마시다가도 인쇄소에 전화를 해 보고는 “안 되겠어요, 내가 가 봐야지” 하고 달려나가곤 했다.
그렇다고 회사로부터 제대로 대우를 받는 처지도 못 되었다. 나나 다른 직원에 비해서도 대우가 터무니없음을 우리가 분개하면 그도 같이 분개하다가도 “사장이 나만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제작에 차질이라도 나면 큰일” 이라면서 매일처럼 출근은 제일 일찍 하고 퇴근은 제일 늦게 했다. 결국 그는 이런 성실성, 정직성, 부지런함으로 해서 내가 5년 만에 그만둔 이 출판사에서 30여년을 근무, 정년으로 퇴직을 했다. 영세 규모를 벗어나기 힘든 출판계에서는 아주 드문 경우이다.
서정춘 시인 얘기를 하면서 나는 첫 시집 <농무>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서정춘 시인이 아니었던들 <농무>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자비 출판으로라도 시집을 내야 하는가 고민할 때, 내야 한다고 격려하고 윽박지른 것이 바로 그였다. 자비 출판이라고 하지만 그가 제 돈을 들여 뛰어다니면서 제작비를 깎고 또 깎았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낸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시집이 나왔을 때도 그는 제 시집 나온 것만큼이나 반가워했다. “누가 아요, 형님 시집 때문에 내 이름이 문학사에 오를는지.” 그는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내가 나무라면 직접 좋은 시를 쓰는 일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를 찾아 주는 일도 중요하다는 뜻의 말을 하곤 했다.
그와 함께 5년을 있는 동안 시 얘기도 많이 했던 것 같다. 대개의 아침이 전날 그가 읽은 시 얘기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그의 시에 대한 안목은 대단해서 그때 나는 두어 신문에 시 월평을 쓰면서 그의 말을 크게 참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 5년 동안 번듯한 문예지에서 그의 이름을 본 일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시에 게으른 것 같지도 않아, 나는 종종 그에게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추궁하고는 했는데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공부가 덜 돼서요.” 시는 쓰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면 그는 한 유명시인을 예로 들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설사하듯 시를 쓰는 거라면 나도 못 쓸 것 없지요. 그 양반의 시 천 편이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한 편을 못 당할 걸 아는데 어떻게 함부로 시를 쓴다요. 천천히 쓰지요. 좋은 시 다섯 편만 남길라요.”
벌어먹는 데가 달라진 뒤에도 가다오다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빼놓지 않고 “형님, 그 시 좋습디다.” 또는 “그 신 좀 떨어집디다요.” 하고 한마디 했다. “자넨 언제 시집 내는 거야, 시인들이 모두 미친 듯이 시를 써 대니까 덜 쓰는 것도 좋지만, 구두쇠도 지나치면 돈에 녹이 슨다구” 하면서도 나는 언젠가는 그가 좋은 시 몇 편 들고 나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1955년 깊은 겨울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시집을 내 준다는 데가 있어 낼 생각인데 해설을 써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워 단박에 허락을 하고 그가 만나자는 곳에 나가 시집 원고를 받았지만, 그 순간 실망했다. 시가 겨우 34편이었기 때문이다. 30년 동안 쓴 시가 겨우 34편이라니 이건 시에 대해서 인색해도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내 이런 핀잔에 그는 “나가 무슨 할 말이 있겄소.” 하고 머리만 긁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시 몇 편을 읽는 순간 내 실망은 기쁨으로 변했다. 시에 인색을 떨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결과가 시에 다 나타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옥같은 시, 이런 말이 비로소 실감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읽는 시 한 편 한 편이 다 주옥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력 30여 년에 시집이 한 권. 그것도 34편의 작은 시집! 과연 시에 대해서 인색하기 짝이 없는 구두쇠다. 그러나 시집을 꼼꼼히 읽어 보면 인색하게 군 보람이 있다는 느낌이다.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지만, 에피그램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몇 마디로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 그의 시들이다.
여러 새가 울었단다
여러 산을 넘었단다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단다
- 단풍놀이
말하자면 이 시는 붉고 노란 단풍을 즐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회상하는 시다. 이 시에는 아픈 과거에 대한 한 맺힌 울음이 있고 용케도 살아왔다는 안도의 한숨이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다.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성장기를 보냈는가를 더 명료하게 알게 하는 시는 첫머리에 실린 ‘1959년 겨울’ 이라는 부제가 붙은 <30년 전>이다.
어리고, 배고픈 자식이 고향을 떴다.
--- 아가, 애비 말 잊지 마라
가서 배불리 먹고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란다
- 30년 전... 1959년 겨울
자식을 배불리 먹일 능력이 없는 “애비”는 “배불리 먹고사는” 것을 가장 값있는 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식을 떠나보내며 배불리 먹고사는 곳 그곳이 고향이지 고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인이 늘 말하던 기아공포라는 말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그의 말에 따르건대 그는 유년시절, 소년 시절을 굶주림 속에서 살았으며, 한때는 오로지 밥을 먹기 위해서 순천 바닥을 양아치로 떠돌았다고 한다. “제 얼굴이 험상궂지요잉. 이게 다 그때 하도 고생을 해서 그렇당께.” 언젠가 그가 술에 취해서 하던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험상궂기는커녕 그지없이 아름답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까지 갖고 싶어진다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돋보기만한 이슬방울이고
이슬방울 속의 살점이고 싶다.
나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
보태 버릴수록 차고 달디단 나의 살점이
투명한 돋보기 속의 샘물이고 싶다
나는 샘물이 보일 때까지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하면서
나는 이슬방울만 보면 타래박까지 갖고 싶어진다
- 초로
시인은 어린이의 순진함과 마술사의 솜씨를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말은 시를 얘기할 때 흔히들 하는 소리지만, 이 시를 읽으니 정말 이 말이 실감난다. 어린이의 순진무구함과 장인의 빼어난 말솜씨가 없이는 이런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시집의 해설에서 “돋보기를 통한 이슬방울과의 교감, 이슬방울로의 귀의, 샘물로의 승화 연결 등이 보탤 데도 깎을 데도 없는, 극도로 아낀 말을 통해 그려진 시다. 돋보기가 타래박으로 바뀌는 대목도 재미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단단한 돌을 끌로 쪼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비단 나 하나만이 아니리라. 그러나 이 시의 더 큰 미덕은 절대순수를 지향하는 그 맑고 깨끗한 시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리디어린 이슬방울에게 나의 살점을 보태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삿됨이 없어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돋보기로 이슬방울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들어 내리기도 한다는 감각적 표현도 주의를 요한다. 이 감각적 표현이야말로 그의 시의 활력의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쓴 일이 있다. 결국 발상의 순진함, 감각적 표현이 그의 시를 살아 있는 것이 되세 한다는 얘기겠는데, 이런 요소는 다른 시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 죽편(竹篇) 1...여행
밤 기차 - 대 - 고향, 연상의 끈을 따라가 보면 이렇게 되겠는데, 깊은 밤 칸칸마다 푸른 불을 밝히고 달리는 기차를 보면서 마디가 굵은 대나무를 연상하고 그 대나무에서 대꽃이 피는 마을을 연상하는 것이 이 시의 대강이다. 대꽃이 피는 마을은 고향일 수 있지만 너무 먼 데 있는 이상향일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하고 쉼표를 찍어 한 박자 쉰 다음 하이픈을 그음으로써 “대꽃이 피는 마을” 이 얼마나 먼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먼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깊은 괴리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에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하다
쩍쩍 줄금이 난 데를 불안한 듯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
- 균열
“내 오십 사발의 물사발”은 바로 이 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 물사발이 “날이 갈수록 균열이 심”해지는 것은 생활과 세월 탓, 이런 감정은 보편적이어서 호소력이 잇다. 그 균열 사이를 “불안한 듯 / 가느다란 실핏줄이 종횡무진 짜고 있다”도 실감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시의 가장 아름다운 곳은 마지막 연의 “아직 물 한 방울 새지 않는다” 의 역설과 “물사발의 균열이 모질게도 아름답다”의 반어, 앞 구절에서 “언젠가는 새겠지만 아직은” 하는 오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뒷 구절에서는 “균열도 또한 아름답지 않으냐”는 체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또 이 마지막 연은 꿋꿋하게 늙은 대나무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다.
서정춘 시인은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 같은 시 다섯 편만 남길 수 있다면 족하다는 말을 한 바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시를 우리 시문학사에 보태게 되었다.
내가 이 글을 쓴 다음다음 해 서정춘은 <봄, 파르티잔>이라는 시집 한 권을 더 냈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당나라 고승 황벽 선사의 시 “한번 추위가 뼛속까지 스미지 않고는 / 어찌 진한 매화의 향기를 얻으리”를 인용해 놓고는 “이것이 칸딘스키의 화두며 그것이 나에게로 다시 내던져진 터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에 대한 그의 결벽성이 어데 연유하는지 짐작하게 하는 발언이다. 결국 그는 한마디 절창이 있을 수 있다면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도 견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탐미주의자인 것이다. 다음은 표제 시 <봄, 파르티잔>의 전문이다.
꽃 그려 새 울려 놓고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소식
- 봄, 파르티잔
지리산이 나온다고 해서 이 시를 사회역사적 관심의 시로 읽는다면 잘못이다. 도시를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간 봄과 이 세상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 파르티잔을 지리산을 고리로 연결,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가 여기서 추구하는 것은 “매화의 향기”와 같은 진한 아름다움이다.
하늘이 조용한 절 집을 굽어보시다가 댓돌 위의 고무신 한 켤레가 구름 아래 구름보다 희지고
있는 것을 머쓱하게 엿보시었다.
- 경내(境內)
조용한 절 집 댓돌 위의 흰 고무신과 하늘의 구름과의 대비, 아마도 독자들은 이 짧은 시에서 눈이 부시어 볼 수 없는 고무신과 구름을 동시에 머릿속에 보게 되리라.
서정춘 시인은 한마디 절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시인이다. 그 버리는 것 속에는 생활까지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가 그의 길을 갈 때, 우리 시의 폭은 좀 더 넓어지리라.
균열이 심한 물사발 혹은 마디 굵은 대 같은, 서정춘 / 신경림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
흑!
흑!
첫 시집 <죽편>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