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평생 드나든 동대문시장, 서울이 따뜻하다
40년 전 어머니 옷감 뜨던 광장시장… 이제는 딸 한복감 뜨러 찾고
광장시장 먹자골목과 대중옥에서 대폿집 참맛 누린다… 동대문시장은 영원한 내 구역
서울 종로4가 광장시장 1층 복판에 주전부리와 안주 좌판이 300개쯤 늘어서 있다. 이 먹자골목 초입 '회 원조집' 좌판 할머니에게 사석원이 인사를 건넨다. "건강하시지요?" 40년 넘게 횟집을 하며 '선임하사'로 불리는 할머니도 환한 미소로 그를 반긴다. 좌판 골목이 동서와 남북으로 교차하는 복판엔 죽집이 있다. 40여년 전 그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호박죽·팥죽을 그대로 판다.
종로 쪽 전(煎)골목 첫 집, 30년 된 '오순네' 주인 오순씨도 반색하며 그를 맞는다. 따끈한 모둠전과 막걸리 한 통을 자동으로 차려낸다. 먹기 좋게 자른 간전·고추전·생선전·호박전·산적·동그랑땡·빈대떡 한 접시가 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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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사석원은 광장시장에 오면 전집과 머릿고기집, 횟집까지 세 군데는 기본으로 들른다. 안주 하나에 3000~5000원, 이곳에선 비싼 축에 드는 회도 1만~2만원이다. 셋이서 배불리 먹고 거나하게 마셔도 5만원이 채 안 든다. 저녁 8시쯤이면 악사들이 나온다. 주당들은 연주를 들으며 팁 2000원으로 기분을 낸다. 그는 "먹자골목에 앉아 있으면 그대로 흥겨운 축제"라고 했다. 그는 광장시장 42년 단골이자 영원한 '동대문 키드'다.
사석원은 1960년 신당동 중앙시장 부근에서 태어났다. 청계천에서 염색공장을 하던 할아버지가 6·25 후 처가까지 마흔 넘는 식구를 건사하던 대가족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을 따라 중앙시장부터 황학시장, 청계천시장, 광장시장까지 이어지는 '동대문시장 벨트'로 마실을 다녔다.
광희초 2학년 때 할아버지 사업이 기울면서 어머니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아버지 대신 벌이에 나섰다. 어머니는 동대문시장 어느 양재학원에서 디자인과 재단을 배워 양장점을 냈다. 그는 옷감 뜨러 다니는 어머니를 따라 광장시장을 드나들었다. 2층 옷감가게들을 돌고 나서 1층 먹자골목에서 순대며 떡볶이, 머릿고기 먹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사석원은 일곱 살 돼서야 말문이 트였을 만큼 늦됐다. 옷본을 뜨는 어머니 곁에서 그림 그리는 게 일이었다. 그는 "어린 눈에도 어머니가 옷 그림을 참 잘 그리셨다. 그 솜씨가 내 그림의 핏줄"이라고 했다.
그는 면목중, 대광고, 동국대 미대를 다니며 동대문 밖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다. 철 들어 아버지께 술을 배운 뒤로는 광장시장 먹자골목을 다시 드나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동양화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도 동네 포장마차, 안주 굽는 아주머니를 그린 것이었다. 그는 상금 500만원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가 2년 만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편찮았고 집에 빚도 쌓였기 때문이다.
그는 입시 고액과외에 나서 1년 만에 집안 빚을 다 껐다. 그러곤 다시 미술에 매달렸다. 그는 88년 무작정 인사동 가나아트갤러리를 찾아갔다. 샘플 작품을 싣고 돌아올 용달비 1만5000원이 없어서, 퇴짜 맞으면 버리고 오겠다고 맘먹었다. 가나아트는 그의 작품을 모두 사 줬고 그와 전속작가 계약까지 맺었다.
첫 전시를 석 달 앞둔 89년 봄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떠나셨다. 남의 옷을 그리도 많이 지었으면서도 어머니 옷장엔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었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도우셨는지 그는 개인전 첫날 작품을 모두 팔았다.
사석원은 지난 5년 아내와 함께 광장시장 2층을 찾는다. 무형문화재 구혜자 침선장(針線匠)으로부터 한복을 배우는 고교생 딸을 위해 옷감을 뜨러 온다. 40년이 흘렀어도 광장시장은 그대로다. 어머니가 뜨던 양장 옷감이 딸 아이 한복감으로, 펄럭이던 천막 천장이 비바람 막아주는 아크릴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는 대포 한잔하러 광장시장 왔을 때도 꼭 뭔가를 사 들고 간다. 중독시키듯 맛있다는 '마약 김밥' 몇 줄, 전(煎)과 머릿고기 몇 점, 그리고 건어물가게에 들러 딸이 좋아하는 보리 굴비를 산다. 광장(廣藏)시장은 이름처럼 참 많은 것을 품고 있다. "동대문 빼고 다 판다"는 동대문시장의 서쪽 입구답다.
사석원은 광장시장 먹자골목에서 대폿집의 참맛을 누린다. "긴 나무의자에 끼어 앉아 어깨 비비며 먹다 보면 너 나 없이 말 섞고 어울리는 게 바로 옛 대폿집 분위기"라고 했다. 그가 동대문시장 일대에서 또 하나 자주 가는 대폿집이 청계천 9가 뒷골목 대중옥이다. 재개발 공터 옆에 붙듯 남은 50년 누옥(陋屋)에서 노신사부터 트럭 기사까지 고릿한 원초적 선짓국에 탁배기 한 잔을 곁들인다.
그는 대중옥과 광장시장을 비롯해 전국 대폿집을 순례한 기행문집 '막걸리 연가'를 썼다. 이 책 출판기념회를 한 달 전 대중옥 안채에서 열었다. 술친구 서른 명이 모여 머릿고기에 막걸리를 기울였다. 그는 대중옥 차림표를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올려놓았다. 전화기를 열 때마다 입맛을 다신다.
사석원은 "서울이 좋고 동대문시장이 좋다"고 했다. 그는 긴하게 대접할 사람이 있으면 광장시장 오순네로 모셔 간다. 모두 예외 없이 좋아한다. 그는 "동대문시장이야말로 진정한 내 구역"이라고 했다. 그는 중2 아들이 어서 커서 오순네 데려가 막걸리 한잔 건넬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