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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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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알베르 까뮈 장 폴 사르트르 데이빗 크로넨버그 영화 <카프카>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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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나지 않는 동화란 없습니다. 동화란 어느 것이나 다 피와 불안의 심처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이것이 모든 동화의 유사성입니다. 표면은 다릅니다. 북유럽의 동화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동화같이 풍부하고 공상적 동물상으로 차 있지는 않으나, 알맹이인 동경의 깊이는 같은 것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Kafka)라는 성(性)은 체코어로 '검은 까마귀'라는 뜻이라고 한다. 카프카는 유서를 통해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모든 작품을 출판하지 말고 소각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만약 이때 브로트가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카프카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몇몇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출판되기는 했지만 워낙 소량이 인쇄되었고 그나마 판매율이 저조했던 탓에 초판이 출판된 후에도 수년 동안 시중 서점에서 초판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유서를 읽은 후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네, 카프카!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네." 체코의 수도 프라하 출생. 부유한 유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폐결핵으로 41세의 생애를 마쳤다. 평범한 지방 보험국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며, 카프카 문학의 독자적인 세계도, 그가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떠나지 않았던 프라하의 유태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환경의 소산이다. | |
1906년 6월 18일 프라하 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 카프카는 어차피 글을 쓰는데 지장만 없다면 어떤 직업을 갖던지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부모가 원하는 법과를 졸업했다.
고전적인 포즈를 취한 프란츠 카프카 -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근무하게 된 카프카는 노동자들의 실상을 살펴보게 되면서 고교 시절부터 간직해온 사회·정치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클라우스 바겐바흐는 카프카를 서민대중편에 선 그 당시 유일의 작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1920 - 1921년의 프라하광장의 카프카 - 카프카의 친구이자 작가이고, <밀레나에의 편지>의 초간본 편집인인 빌리 하스는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막내 여동생 오틀라(Ottla)와 그의 남편 -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엘리(Elli), 발리(Valli), 그리고 오틀라(Ottla). 카프카는 그 중에서도 특히 오틀라와는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가까왔다. 그러나 이 세 자매는 제2차 대전 중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되고 만다. 카프카는 20세기의 광기를 미리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유산 상속인으로 엘리의 딸 마리안네 쉬타이너와 오틀라의 딸 파트코바만 생존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펠리체 바우어(1914) - 펠리체 바우어는 카프카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여인이었다.
도라 디아만트(Dora Dymant)는 프란츠 카프카 최후의 여인이었다. 1923년부터 사귀기 시작한 그들은 한때 베를린에서 동거했고, 1924년 카프카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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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소속된 보헤미아 왕국(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1883년 7월 3일 태어났다. 이 무렵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제국에서는 1848년 프란츠 요세프1세에 의해 이른바 '유태인 해방령'이란 것이 내려져 도시로의 유태인 이주에 대한 제약이 풀리고 난 얼마 뒤였다. 해방령 이전까지 유태인은 '유태인령'이란 법령에 의해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도시마다 유태인 거주에 대한 제한을 두고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과 어머니 율리에 뢰비는 해방령을 전후해 프라하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의 부모는 열심히 일하여 프라하 상류사회에 갓 진입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이들 부부에게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 헤르만의 가계(家系)는 푸줏간을 했었고, 어머니 뢰비의 가계는 양조장을 했는데 어머니쪽 집안에는 탈무드 학자를 비롯한 의사 등의 직종에 진출한 비교적 지식인 계층이었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평생을 두고 자신의 아버지와 갈등까지는 아니더라도 긴장 관계 아래 놓여 있었다. 학자들에 따라 해석은 조금씩 틀리지만 클라우스 바겐바하는 카프카 가(家)의 정신적 유산으로 건강, 강인함, 지구력, 언변술 등 생활력과 사업욕과 정복욕 등을 들고 있으며, 반면에 뢰비 가의 유산으로는 고집, 민감성, 불안감, 정의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 자신은 부계 혈통으로 상징되는 성격들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을 갖지 않았다. 그의 꿈. 문학을 한다는 그의 긍정적인 소망들은 늘 아버지로 상징되는 현실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적인 요소가 매우 짙은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카프카는 "아버지와 저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말하면 저는 카프카의 가계이지만 어미니쪽인 뢰비가의 사람입니다. 카프카 일족의 생활욕, 사업욕, 정복욕에 의해서가 아니고, 뢰비가 특유의 민감성에 의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실제로 카프카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고, 현실적이고 빈틈없는 사업가. 아버지 헤르만의 눈에는 틀림없이 아들 프란츠가 몽상가로 비췄을 것이다. 어린 카프카의 눈에 아버지는 지독한 일벌레에 가족은 안중에도 없이 사업의 성공에만 몰입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카프카는 어려서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다섯 차례나 이사를 하는데, 이것은 아버지의 사업 성공에 따라 점점더 도심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과정이긴 했지만 카프카에게는 불안을 돋우는 일에 불과했다. 카프카의 어머니조차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어린 카프는 유모, 보모, 식모, 가정교사 등 줄곧 남의 손에 의해 키워졌고, 그의 나이 두 살 때, 그리고 네 살 때 동생인 게오르크와 하인리히가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마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어린 카프카는 늘 혼자였다. 이런 카프카에게 동생들이 생긴 것은 그의 나이 여섯 살 때인 1889년 여동생 엘리(Elli)가, 또 1년 뒤에는 발리(Valli)가, 그리고 그 2년 뒤에는 오틀라(Ottla)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세 자매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의 광기에 희생당하고 만다. 그들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었다.(다만 엘리의 딸 마리안네 쉬타이너와 오틀라의 딸 파트코바만이 살아남았다.) 제국의 변방에서 다시 또 변방인이었던 유태인으로 자수성가하여 프라하의 상류 사회에 막 편입된 사람답게 헤르만 카프카는 장남 프란츠를 잘 교육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공용어였던 독일어를 가르치기 위해 독일어 학교에 프란츠를 입학시킨다.(우리가 영어를 죽어라 배우는 것처럼 당시 프라하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제국의 지배어였던 독일어를 배워야만 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유태인답게 자신이 고생스럽게 살아온 시절을 보상받고, 신분상승을 위해 아들을 자기 자신의 인생설계에 맞게 키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사업을 물려받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승을 위래 독일어 교육을 받아 관료사회에 자식을 진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열망이 강한데 반해서 아들은 섬세하고, 내성적인 존재였던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린 아들이 밤중에 물을 달라고 칭얼거리는 모습에, 아버지는 나무라다 못해 내복만 입은 카프카를 추운 발코니 밖으로 내쫓고, 문을 잠가 버리기 까지 했다. 학교에 간 프란츠 카프카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에서 비엔나,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다 간 화가 에곤 실레를 생각해보면 이 무렵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이 처해있던 대내외적 현실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민족 구성이 가장 복잡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오래 전부터 복잡한 민족구성과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치 체제로 인해(나폴레옹 혁명의 반동으로 발생한 보수반동적인 메테르니히의 비인 체제 역시 오스트리아가 중심이었던 점에 주목하시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1891년의 보헤미아 박람회를 계기로 체코인의 민족의식이 점차 싹트면서 합스부르크 왕조에 저항하자 비엔나의 제국 정부는이에 대해 강권으로 맞서게 된다. 이런 저항과 탄압은 그후로도 약 30년간 지속되었고,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제국 정부는 유태인을 탄압하여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4년제 기초학교를 마친 프란츠를 바라보는 아버지 헤르만의 심정은 착잡했을 것이다. 아들 프란츠에게서는 상인으로서의 기질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프란츠를 실업학교로 진학시키는 대신 인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했다. 당시 체코는 국립대학도 독일어 프라하 대학과 체코어 프라하 대학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일곱 개 독일어 중고등학교 중에서 황실 및 왕실 부설 중고등학교(프라하 구시가지에 위치)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평생을 두고 교유하는 몇 명의 중요한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카프카에게 사회주의적 지식을 전수해준 루돌프 일로비, 시오니스트 후고 베르크만, 훗날 노동자재해보험국에 카프카를 추천해 준 보험국 사장의 아들 에발트 펠릭스 프리브람, 그리고 오스카 폴락이 그들이었다. 특히 오스카 폴락은 매우 조숙하였기 때문에 카프카의 예술과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외부 세계와 단절하며 살았던 카프카와 세상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독일어 프라하 대학으로 진학한 카프카는 주로 문학과 예술사 강의를 들었으나 전공은 법학으로 결정지었다. 부모와 가족의 기대를 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학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글쓰는 작업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시작되었다. 왜 글을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자각은 이 무렵에 이미 무르익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구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그마한 틈도 없이 반복해서 높이높이 구축되어, 망원경을 사용해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려진 그런 인생을 바라보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네. ... 우리가 읽은 책이, 우리들이 머리에 주먹으로 일격을 가해서 각성을 시켜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이라든가 자기 자신보다도 더욱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든가, 아니면 자살이라든가 또는 우리의 모든 사람들의 곁을 떠나서 숲속에 버림을 당하는 경우라든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과 같은 그러한 영향을 주는 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세. 한 권의 책, 그것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네. (F. 카프카, <서간집>, 1904년 1월 27일) 카프카를 둘러싼 시대 상황과 막스 브로트 대학 시절 카프카는 독서 및 연설 서클인 독일 대학생 강연 낭독회가 개최하는 강연과 시인의 낭독회에 즐겨 참여하곤 했다. 그는 1902년 10월 낭독회 자리에서 막스 브로트를 처음 만나게 된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 동생 테오가 있었다면(형 고흐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가 죽은 뒤엔 테오의 부인이 빈센트의 유작들을 관리했는데 그녀 역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고흐의 작품들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한다.) 프란츠 카프카에게는 막스 브로트가 있었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친구이자, 충고자였다. 자신의 사후 모든 작품을 불태워 없애달라는(그의 이런 소망은 나중에 히틀러에 의해 일부는 이루어진 했지만) 부탁을 거절한 사람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애독자라면 누구라도 막스 브로트에게 빚을 진 셈이다. 카프카는 1906년 6월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긴급조치에 의한 강압정치를 더욱 강화해나간다. 레이몽 아롱은 "열강은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무언가를 행하고, 생산하고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려면 아직도 8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유럽 열강은 이미 전란의 징조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대내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병행하여 내부의 저항을 무마하려 들었다. 이미 '늙고 병든' 유럽은 영토 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억누르려 했고, 그 늙고 병든 유럽의 열강 중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특히 노쇠해 있었다. 제국의 여러 곳에서 보통·평등선거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1905년 11월에는 사회민주당원 20만 명의 데모, 공화정치 실현당의 비 국수주의적 저항, 노이만 등을 중심으로 한 무정부주의적 국제 그룹의 저항 등 다양한 정치적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도 1913년 전쟁 발발 직전에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잠잠해지고 만다. 카프카의 친구이자 <밀레나에의 편지>의 초간본 편집인인 작가 빌리 하스는 카프카의 문학에 대해서 "프라하에서 태어나지 않고 프라하에서 살아보지 않은 자는 카프카의 문학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말의 이면에는 카프카를 둘러싸고 있던 이중삼중의 억압이 프라하라는 도시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35살 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시민이었고, 그 이후로는 체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태인이었고, 체코 사람이면서도 아버지의 요구로 그가 배운 모든 교육을 독일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비록 카프카가 평생 독일어 교육을 받고, 독일어로 작품을 쓰기는 했으나 그가 소설에서 사용하는 독일어의 어휘가 풍부하다거나 생동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가족, 시대의 억압은 그를 내면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에게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같은 유태인들로부터는 시오니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척받았다. 카프카는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를 혐오했고, 억압없는 이상사회를 꿈꿨다. 그는 노동계급의 권익 향상을 위한 성명서를 만들고, 아나키즘의 원조인 크로포트킨의 저서를 읽었고, 사회주의 서클에서 활동했다. 노동자 재해 보험국 직원이 된 카프카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카프카는 민사법원과 형사법원에서 각각 6개월간의 법관 수습기간을 마쳤지만 법관이나 변호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반 보험회사에 입사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근무는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이었던 카프카에게는 매우 고된 것이었고, 그는 소설을 쓸 시간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1908년 노동자 재해 보험국 에 입사한다. 카프카는 1922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할 때까지 14년간 이곳에서 근무한다. 원래 이 보험국은 사회보장법의 공포에 따라 설치된 반관반민의 기관으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험 업무를 진행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카프카가 주로 맡았던 임무는 기업의 이의제기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거나 노동자 재해 보험국의 일을 홍보하는 선전문을 작성하거나, 법률가로 법정에 출두하여 보험국을 변호하는 일, 라이헨베르크의 북부 공업지대의 공장들에 대한 감독 출장 등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 카프카가 이곳 보험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근무한 까닭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는 보람과 함께 근무조건(오후 2시 퇴근)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글을 쓸 시간을 얻기 위해 엄격한 자기절제의 생애를 보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보험국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는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한 시간의 산책을 하고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 다음 밤 11시경에 쓰기 시작해서 새벽 2시나 3시 혹은 좀더 늦게까지 썼다. 이 무렵 유럽의 자본주의는 식민지의 안정적인 시장과 착취를 통해 놀라운 번영을 이룩했지만 노동환경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카프카는 공무출장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의 내면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는 시위운동에도 참가하고, 사회혁명가의 집회 믈라디찌 클럽 에도 참가하였다. 클라우스 바겐바흐는 카프카를 서민대중 편에 선 그 당시 유일의 작가라고 지적하고 있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줄곧 내리막 길을 걸어왔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붕괴됐고, 프라하는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카프카는 이런 시대의 변화를 프라하라는 도시 안에서 고스란히 경험한다. 신생 독립국의 수도답게 프라하의 거리는 활기차 있건만 이를 바라보는 프란츠 카프카의 마음은 그리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 새로이 건설된 시가를 거닐고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 우리의 시선은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서 옛날의 비참한 골목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생시설의 보급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은 불건강한 구 유태인 거주지역은 우리 주위의 위생적인 신시가에 비해서 훨씬 현실적입니다.(G.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문학과 현실, 창작과 사랑 사이에 선 카프카 카프카의 일생은 혼돈과 방황의 흔적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쉽사리 허락되지 않았고, 그에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러나 프란츠 카프카는 1912년 그토록 말많고 우여곡절 많은 연애의 시작 펠리체 바우어를 만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처음 펠리체를 만난 카프카는 1917년까지 무려 500여통에 이르는 편지 왕래를 시작했다. 그는 펠리체를 만난 처음 3개월 동안에만 100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만남을 통해 창작의 의욕을 북돋우게 되었는지 여러 편의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이 해 여름 카프카는 바이마르를 일주일간 방문하게 되는데 그는 이때 괴테와 실러같은 작가들의 흔적을 찾는데 주력했다. 한편 그의 친구 브로트는 로볼트 출판사를 방문하여 카프카의 단행본 출판에 대하여 협의했다. 브로트를 아끼던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브로트에게 언제 작품을 출판할 것인지 물었는데, 브로트는 자신의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보다 굉장한 작가를 발견했다며 카프카를 추천했다는 일화가 있다. 어쨌든 카프카의 첫 작품집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로볼트 출판사에서 800권 한정판으로 간행된다.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카프카는 로볼트 출판사(이후에는 쿠르트 볼프 출판사란 이름으로 바뀐다.)에서 내는 잡지와 단행본으로 작품을 발표하지만 대중들로부터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1913년에 <화부>, 1915년에 <변신>, 1916년에 <선고> 등이 그것인데 카프카의 거의 모든 저작이 1천 내지 2천 부 정도 인쇄되었고, 실제에 있어서는 거의 팔리지 않았던 것 같다. <관찰>은 8백 권이 인쇄되었는데, 10여 년 후에도 언제나 구매가 가능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 |
카프카의 무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카프카 엿보기/ 홍영철 엮음/ 선일문화사/ 1997년 카프카문학 연구/ 박환덕/ 범우사/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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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직장은 저로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직장은 유일한 욕망이자 유일한 직업인 문학에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고 문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으며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 저와 결합을 한다면 제가 짐작할 수 있는 한 따님께서 불행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외부 사정에서 뿐만 아니라, 저의 본래의 본성이 폐쇄적이고 말이 없고 사교성이 없는 불청객입니다. ... 저는 가정에서 선량하고 친절한 가족들 사이에서도 남 이상으로 서먹서먹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결혼으로 제가 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직장이 저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F. 카프카, <일기 1910∼1923>) 그러나 무슨 까닭에서 인지 펠리체의 아버지는카프카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펠리체가 다가서면 카프카는 한 발 물러나고 펠리체가 물러나면 카프카가 다가서는 어정쩡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카프카는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의 여인에게 잠시 빠지기도 하고, 펠리체와 비공식, 공식 약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카프카는 자기 자신에 대해 무기력하고 무능하단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유능한 일중독자 아버지 헤르만과 스스로를 비교한 까닭에서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이나 결혼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의 일반적인 판타지적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는 펠리체와의 결혼을 족쇄로 여겼다. 그는 펠리체와의 약혼 6주만에 이를 파기했다. 그는 1917년 7월 펠리체와 다시 약혼을 하지만 자신이 폐결핵에 걸렸다는 것을 알자 펠리체와 다시 파혼한다. 점증하는 시대의 어둠 속에 소멸해가는 영혼 시대와 함께 유행하는 병도 달라진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창궐하던 매독이 주춤하면서 널리 퍼진 병이 폐결핵이었다. 이는 급속한 산업혁명과 공업화로 인해 도시의 대기에 많은 공해물질이 널리 퍼지고, 공업용, 가정용 연료로 석탄을 많이 사용하던 당시의 환경에선 흔한 병이었다. 카프카는 5년 동안 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각혈이 시작되자 병원에서 내린 진단 결과는 폐결핵이었다. 죽을 병에 걸린 카프카는 발병 사실을 오히려 홀가분하게 맞이했다. 그는 이제 한 사람의 성인으로 그에게 부과된 모든 의무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었다. 그는 1922년 노동자재해보험국을 완전히 퇴직하게 될 때까지 병가와 직장 근무를 반복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1917년 9월 카프카는 동생 오틀라가 운영하는 농장이 있는 취라우로 떠나갔다. 카프카는 취라우에서의 생활을 통해 약혼녀 펠리체, 직장, 프라하, 부친 등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일상의 세계와 단절하고자 했다. 동생 오틀라는 카프카의 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카프카와 그의 작업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고 협조해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은 펠리체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려는 카프카의 결정에 반대했다. 부자간의 대립은 카프카의 파혼 문제를 놓고 극에 다다랐다. 결국 카프카는 펠리체와 결별했다. 펠리체와 헤어진 카프카는 체코인 여성 밀레나와의 교류를 시작한다. 활달하고 개방적인 여성이었던 기혼녀 밀레나는 카프카에게 적극적이었지만 카프카는 밀레나에게서도 멀어져 갔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자신의 일기와 작품을 맡기는 등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긴 했지만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그녀와의 이질성 등으로 인해 결코 맺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밀레나와 헤어진 카프카는 그 상처를 잊기 위해서인지 창작에 더욱 몰두했다. 밀레나는 카프카를 적극적으로 잡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이 두 사람은 결별하는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다. 훗날 밀레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당하지만 카프카가 맡긴 작품과 편지들은 우여곡절 끝에 빌리 하스에게 넘어간다. 빌리 하스는 독일 패전 이후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하여 이를 <밀레나에의 편지>란 제목으로 출판한다. 건강이 더욱 악화된 1922년 카프카는 노동자재배보험국을 영구 퇴직하고 여동생 엘리와 함께 발트해의 뮈리츠에서 휴가를 보낸다. 그는 이 곳에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함께 할 여인을 만나게 되는 데 그가 바로 도라 디아만트였다. 그녀의 이때 나이가 스무 살 무렵이었다. 도라에게 흠뻑 빠진 카프카는 도라 디아만트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의 살인적인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매우 행복해 했다. 카프카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이때 유일하게 주위의 온갖 반대를 물리치고 프라하를 떠나 처음으로 자신의 가정을 꾸몄다. 이 때에도 역시 카프카는 많은 작품을 집필했는데 대개는 카프카의 요청으로 도라가 소각하였고, 나머지는 훗날 비밀경찰에 의해 압수되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도라와의 생활은 행복한 것이었지만 이 시기 카프카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독일의 인플레이션과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영양부족에 시달렸던 것이 그의 병세를 치명적인 것으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 우리가 없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워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요제피네는 ... 지상의 고통에서 구원되어 우리 종족의 무수한 영웅들 속으로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 더욱더 강화된 구원을 받아, 역사를 등한시하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외가쪽 친척들에 의해 다시 프라하로 옮겨진 카프카는 요양을 위해 비엔나 근교의 뷔너발트 요양소로 옮겨졌고, 다시 비엔나 대학 부속병원으로, 그리고 1924년 4월 말경에는 키에를링의 호프만 박사의 요양소로 옮겨졌다. 도라는 그의 곁을 밤낮으로 지키며 그를 간호했지만 1924년 6월 3일 자신의 41세 생일을 맞이하기 불과 한 달 전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6월 10일 프라하의 신 유태인 묘지에 묻혔다. 카프카와 실존주의 문학 하마터면 잊혀질 뻔했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보존하여 후세까지 이어지게 해준 가장 큰 공헌은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사르트르와 까뮈였다. 많은 작가들이 부인하는 일이고 실제로 독자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한 작품과 작가의 생애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 문제는 카프카에게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러나 작가의 삶과 작품을 어떻게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사르트르와 까뮈를 비롯한 실존주의 작가는 물론이요, 그의 작품을 읽는 많은 독자들은 카프카에게서 인간 운명의 부조리성, 존재의 불안을 발견하였다. 그는 현대라는 새롭게 시작되는 시대의 불안과 그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게 될 실존적 체험을 극한까지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작품 <변신> 에서 한 젊은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난 자신이 한마리의 흉칙한 벌레로 변신해있는 것을 발견한다. 회사의 지배인은 그레고르가 왜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오지만 벌레로 변해있는 그레고르를 보고 그의 이런 변모가 회사문제와 관련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될지 모른다. 우리는 안으로 혹은 밖으로 잠긴 문을 통해 나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지만 그 목소리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의 상사는 당신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조차 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간단히 전화 한 통을 해보거나 그도 아니면 E-Mail을 한 통을 띄워놓고 당신을 잊을 지도 모른다. 영화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이런 카프카적인 불안을 <비디오 드롬> 같은 작품을 통해, 스티븐 소더버그는 영화 <카프카>를 통해 카프카가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노동자를 억압하는 권력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또다른 작품 <성(城)>에 등장하는 조셉. K와 성의 관계는 우리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상징할 수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국가 권력, 아니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심연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카프카의 가장 큰 매력은 그를 어느 한 부류로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서 온다. 그는 절망과 희망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을 고독하게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까닭은 그가 제기한 문제들이 여전하다는 것,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인간 소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자본주의의 익명성에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형제 모두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줌의 재와 비누로 변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그의 작품들이 던져주는 의미는 남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
첫댓글 에고..오늘은 다 못 읽겠네요..다음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