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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가장 한국적인 대중 장로교 신앙을 창시하다
길선주 목사
영계(靈溪) 길선주(1869-1935)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아주 많다. 고신 교단의 교회사학자 이상규는 길선주를 “1900년대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영적지도자”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자 평양대부흥의 주역” “약 500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던 이른바 ‘부흥의 사람’” 초기 노회와 총회에서 한국인 임원을 역임하며 “한국에서의 장로교 형성에 기여한 인물” “한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풍류시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될 만큼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1) 평양 장로교를 대표한 선구적 선교사 새뮤얼 A.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1864-1939)의 아들로, 해방 후 장로회신학대학에서 활동한 새뮤얼 H. 마펫(Samuel H. Moffett, 마삼락, 1916-2015)도 아버지의 친구이자 동역자였던 길선주를 “초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인물 가운데 한 분”으로 규정했다. “1919년 3월 1일 한국 독립선언서에 서두로 기명-조인한 서명자” “전국적으로 존경을 받은 학자이자 영험적인 전도자” “한국에서 최초로 임직된 기독교 신교의 목회자”라고도 평가했다.2) 장로교 목회자, 교단 정치지도자, 전국구 부흥사, 독립운동가 등,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와 개신교 전체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지도자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이상규와 마삼락이 장로교 소속의 교회사가라서 길선주의 업적을 과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감리교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에서 가르친 토착화 신학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유동식(1922-2022)은 길선주를 “한국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사상 형성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한다.3) 목회와 순회 부흥사역을 통해 한국 장로교 보수 신학의 토대를 놓은 신학자로서 역할이 크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보수 신학을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개종 이전의 선도, 유교, 불교 유산을 창의적으로 계승하여 한국화한 토착신학자이자 목회자로 평가하는 이도 있다. 길선주의 말년을 평양에서 지켜본 목회자이자 출판인이었던 김인서(1894-1964)는 이미 1930년대 초에 “이렇듯 웅심(雄深)한 선생의 신학은 영미나 어느 외국에서 배운 것이 아니요 선생 독특의 신학이었다. 그런고로 선생의 신학 즉 조선 독특의 신학이라 하여도 가하다”고 칭송했다.4) 근래에는 옥성득도 길선주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했다. 단순한 미국 근본주의 보수 신학의 계승자가 아니라, 선도, 유교 등 풍성한 전통 종교 경험을 기독교적으로 한국화하고 토착화한 창의적인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다는 것이다.5)
선도 도사에서 기독교 목회자로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회자가 되기 이전부터 길선주는 치열하게 진리와 도를 찾아 헤매던 뜨거운 구도자였다. 길선주의 둘째 아들 길진경(1902-1989)에 따르면, 길선주는 성균관 박사 길재의 19대손으로, 1869년 3월 15일에 평안남도 안주 후장동에서 아버지 길봉순의 둘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경상북도 선산에서 평안도 영변과 안주로 이주했던 길씨 가문의 후손인 길봉순은 무관이었다. 특이하게도, 길선주는 한학에 조예가 깊던 어머니에게서 네 살 때부터 한문을 배웠다. 일곱 살 때는 지역의 명망 있는 학자 문하로 들어가 한학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부터 감수성이 예민해서 시를 자주 지었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한 살에 안주 출신으로 다섯 살 연상이던 신선행과 결혼했다. 소년 신랑이라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많았지만, 지적 능력은 범상해서 열두 살 때부터 칠언팔구의 한시 체계인 대고풍 등 여러 형태의 시문을 지었다. 이로 인해 열세 살부터 2년간 안주 본부의 관직인 초인직에 종사했고, 아버지가 종삼품 무관인 노강첨사로 안주에 부임하자 아버지와 동행하여 안주로 가서 한학을 계속 공부했다. 그러나 개화기 정치적 혼돈과 부패, 당파 싸움 와중에, 부랑배들의 습격으로 아들 길선주가 사경을 헤맬 만큼 구타를 당하자, 아버지는 공직에 더 머물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평양으로 이주했다. 평양 이주 후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열여덟 살의 길선주는 평양 거상 이재경의 점포에 취직해 상업을 배운 후 자기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못한 데다, 횡령, 모해, 사기 등이 판치는 상업판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아, 결국 가게를 닫아야 했다.6)
길선주의 영적 방랑은 열아홉 살 무렵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처음 평양의 용악산을 찾은 길선주는 이후 정신과 육체 모두를 이상으로 이끌어줄 도를 찾는 구도자가 되었다. 가장 먼저 만난 종교는 관성교(關聖敎)였다. 삼국지 영웅들 중 특히 관우를 숭배하는 이 종교의 주문인 보고문을 1만 번 외우던 중, 그는 환상 속에서 지시받은 대로 평양 명소인 을밀대로 갔다. 거기서 만난 창일도사라는 별칭의 김순호에게 산신 차력 주문을 배웠다. 얼마 후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의 대성산 두타사로 가서 밤낮없이 산신차력을 연마한 길선주는 영이 임하는 강령(降靈) 상태를 경험하며 몸과 마음이 모두 평온을 맛보는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7)
이어서 길선주는 본격적으로 선도(仙道)에 입문했다. 스물한 살 되던 해부터 평양의 장득한이 가르쳐준 구령삼정 주송법과 삼련 주문 등을 정기적으로 외우고, 백일기도 등에도 매진했다. 신통력을 얻어 옥피리 소리, 총소리를 들을 만큼 영험해졌다. 길선주의 아내도 남편을 통해 선도에 입문했다. 심신차력을 얻은 후에는 스물세 살부터 한 번에 일곱 대접의 물을 마시는 수차력과 정좌법을 통해 초인적인 힘을 소유하고 차력을 행하는 도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평양 일대에서 길선주는 ‘길장수’ ‘길도사’ 등으로 불리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8)
그가 스물세 살 무렵이던 1892년 평양에는 2년 전부터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1890년 1월 한국에 도착한 매코믹 신학교 출신의 북장로교 선교사 새뮤얼 A. 마펫은 그해 8월 말부터 평양을 찾아 북부 선교 가능성을 타진했다. 9월부터 대동문 안 널다리골에 있는 홍종대의 집에서 정식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후, 1893년 2월에 자신의 널다리골 집에서 평양 첫 교회(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를 창립했다. 진지한 구도자였던 길선주는 이 무렵 평양에 온 기독교 선교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직접 마펫을 찾아가서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도를 버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동료 선도인 문홍준과 김종섭에게도 마펫과 그의 통역자 한석진을 소개해주었다. 마펫을 만난 후에도 선도 공부를 지속한 길선주는 자산 북암에서 둔갑술을 공부하던 김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평안남도 성천군의 영대산에 들어가 한약재와 약방문을 공부했다. 여기서 지역 거부 이지억을 제자로 맞아 선도를 가르치다가, 1896년에 평양으로 돌아갔다.9)
평양으로 돌아온 길선주가 해추골 입구 종로 거리에 상점을 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전에, 그의 친구 김종섭은 이미 기독교인이 되어있었다. 김종섭은 평양으로 돌아온 길선주를 매일 찾아와 전도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지식과 마음으로 온전히 설득되어야 도를 받아들이는 길선주의 성향을 알았기에 언더우드가 발행하던 〈그리스도신문〉, 한자로 된 전도 문서 《이선생전》, 《장원양우상론》, 《천로역정》을 차례로 빌려주었다. 《천로역정》이 결정타였다. 책을 읽으며 죄의식과 번뇌, 고통에 가득 차서 기도에 매진하던 길선주는 결국 회심에 이르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회심과 개종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극적이어서, 후에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의 회심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과 비교하기도 했다.10)
1896년 겨울에 극적인 회심을 거쳐 개종한 길선주는 헌신의 징표로 머리를 깎았다. 이듬해 8월에 널다리골교회에서 마펫의 동역자 그레이엄 리(Graham Lee, 1861-1916)가 길선주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듬해 그의 부모님과 아내도 세례를 받았고, 제자이자 의형제였던 김찬성도 얼마 후 신자가 되었다. 이미 평양 지역에서 선도 도사로 지도자 위치에 있던 길선주, 김종섭, 김찬성은 개종 후 빠르게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로 올라섰다. 길선주는 세례받은 다음 해에 널다리골교회 영수가 되었다. 1901년에는 길선주와 김종섭이 같은 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고, 김찬성은 안주읍교회 장로가 되었다. 1901년에 평양신학교가 세워지자, 이들은 차례로 입학했다. 길선주는 1907년 1회, 김찬성은 1909년 2회, 김종섭은 1910년 3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11)
1896년 개종, 1897년 세례, 1898년 영수, 1901년 장로가 된 길선주는 1902년에는 널다리골교회뿐 아니라, 황해도와 평안도를 담당하는 도조사(道助事)가 되어 전도자로 살기 시작했다. 장대현교회로도 불린 널다리골교회는 새 건물 봉헌식을 가진 1901년 6월 당시 벌써 교인 수 1,200-1,400명에 이르는 대형교회였다. 따라서 평양의 모교회인 이 교회로부터 남문밖교회(1903), 창동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가 차례로 분립되었다. 장로 신분으로 1903년부터 평양신학교에 입학해서 공부한 길선주는 1907년 6월에 동기 여섯 명(이기풍, 서경조, 방기창, 양전백, 한석진, 송린서)과 함께 졸업한 후, 9월 17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로써 7인의 첫 한국인 장로교 목사와 함께 장로교 첫 치리회인 독노회가 탄생했다. 목사 장립을 받은 날, 길선주는 널다리골교회 위임목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1927년까지 널다리골교회 담임목회자였다.12)
1907년 9월 17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장로교 목사가 된 7인. 첫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사람이 길선주다.
전국구 부흥사가 되다
길선주는 개종 직후부터 1902년까지는 약국을 운영하면서 평신도로서 교회를 돌보았다. 그러나 1902년 조사로 임명받은 후에는 약국을 폐업하고 전적으로 전도자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선주가 설교자로서 고정적인 역할을 맡은 때는 장로가 된 1901년 어간부터였던 것 같다. 새뮤얼 마펫과 그레이엄 리는 일상 한국어에 능숙했지만, 다른 세계관과 삶의 체계를 가진 외국인이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며 공감을 끌어내는 한국어 설교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장로가 된 후부터 길선주는 선교사들보다 널다리골교회 강단에 더 많이 올랐다. 이전부터 선도 도사로 영적 체험이 깊었던 데다, 유교의 한학 학습 문화 덕에 성경과 기독교 문헌 지식을 읽고 또 읽어서 외우다시피 했다. ‘영혼의 시내’를 뜻하는 ‘영계’(靈溪)가 그의 호였듯, 개종 직후부터 영혼을 울리는 설교자로 한국인 신자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가혹한 금욕을 동반한 선도 수련으로 시력이 아주 나빠졌기에, 신자들은 그를 ‘한국의 바울’로도 자주 불렀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책임지는 도조사가 된 1902년 이후에는 소속 교회를 넘어 황해도와 평안도뿐 아니라, 전국으로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하기 시작했다.13)
1903년 무렵부터 한반도 북부에서 시작된 부흥의 물결이 평양 전도자 길선주를 전국구 대표 부흥사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1903년 8월에 남감리교 선교사 로버트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의 설교와 기도로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은 10월과 11월에는 스웨덴계 미국인 부흥사 프레드릭 프랜슨(Fredrik Franson, 1852-1908)의 집회, 1904년 1-2월의 개성 감리교 사경회, 1906년 8월 평양 감리교·장로교 연합 사경회, 9월 미국 장로교 전도자 존스턴(H. A. Johnstone)의 서울과 평양 장로교 집회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존스턴이 웨일스와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흥에 대해 말한 것이 선교사들과 길선주를 비롯한 한국인 지도자들을 자극했다. 그해 12월 12일부터 재령에서 열흘간 열린 황해도 도사경회, 이제는 고유명사로 쓰일 만큼 유명해진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인 1907년 1월 초 평양남자사경회를 통해 길선주는 ‘한국의 세례요한’이라 불릴 정도의 탁월한 부흥사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그는 30년 여생 동안 전국에서 약 500회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1920년대 김익두, 1930년대 이용도 등과 함께 해방 전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알려졌다. 대부흥에 이어, 길선주가 9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고 한반도 최대 교회인 널다리골교회 위임목사가 된 것은 선교사에게 지도력과 재정을 전적으로 의존하던 한국교회가 첫 단계 자립을 이루었다는 의미였다.14)
1907년 대부흥에 이어 1909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백만인구령운동도 길선주가 1908년 압록강 집회 직후 기안했다. 또한 1910년 독노회 부회장이자 전도부장에 선출되면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5년간의 독노회 시대를 지나 1912년에 조선장로회 첫 총회가 열렸을 때, 첫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회장, 한국인 첫 목사 길선주가 부회장이 되었다. 이는 길선주가 한국 장로교의 한국인 지도자 중 단연 첫손에 꼽힌 인물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15)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 가족과 길선주 목사. 사진을 찍은 시기는 1911-1912년으로 추정된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다
길선주가 개인 전도 및 회심, 부흥, 경건, 내세에 집중한 보수적인 목사였기에 민족의 운명이나 사회 개혁에는 무관심했다는 평가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회 개혁이나 독립운동을 기독교인의 우선순위나 직접 행동 과제로 보지 않았을 뿐, 구한말과 강점기 한국인 기독교인 대다수는 기독교와 민족의 번영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은 기독교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길선주와 그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규에 따르면, 길선주가 민족의 처지에 대한 관심을 글로 표명한 첫 사례는 청일전쟁기 1895년에 성천의 영대산으로 들어가서 지은 ‘산림처사춘몽가’(山林處士春夢歌)였다. 이 한시에서 그는 무능한 정부, 외세의 위협, 도탄에 빠진 백성의 처지를 한탄했다. 개종 직전의 이 관심사는 개종 이후에도 이어졌다. 1896년에 개화파 지식인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창립한 독립협회가 평양지부를 조직할 때, 길선주의 이름은 안창호 등 17인과 함께 발기인 명단에 있었다. 길선주는 법무국장으로 선출되어, 새 시대의 여명을 열어야 한다고 연설했다. 한일병합이 일어난 1910년 8월 29일에는 가족과 함께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 후, 교회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한지에 싸서 교회당 천장에 숨겼다. 그때 “이 국기는 잃었던 나라를 회복하고 자주독립하는 그날에 게양하기 위해 여기에 감추어 둔다”는 글도 함께 보관했다.16)
총독부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사건을 조작하여 이듬해 1월부터 민족 지도자 600여 명을 검거한 후, 그중 105인을 기소했다. 당시 105인 중 다수가 서북 지방 기독교인이었는데, 길선주의 장남 길진형도 그중 하나였다. 사건 당시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있던 길진형은 사건 공모자 중 하나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2년 이상 투옥되었다. 투옥 기간 중 가혹한 고문으로 부러진 늑골이 폐와 심장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에, 중국 상하이와 미국에서 치료와 요양을 병행했다. 결국 그는 귀국 사흘 후 1918년 봄에 사망했다.17) 국가 상실이 가족의 죽음으로 연결된 이 사건으로 길선주와 가족의 항일의식이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길선주의 독립운동은 이제 1년 뒤에 일어나는 3·1운동으로 연결된다. 잘 알려졌듯이, 1919년 2월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3·1운동의 전조로 불리는 독립선언이 잇달았다. 상하이 신한청년단의 선우혁(1882-미상)과 일본 동경 유학생들이 한국 종교 지도자들과 맺고 있던 관계망을 통해 길선주도 동참하게 되었다. 선우혁은 2월에 한국으로 와서 평양·선천·정주 등 기독교가 번성한 평안도 주요 도시에서 길선주, 박치록, 김찬성, 양전백, 이승훈 등을 만나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했다. 평양에서 선우혁은 길선주와 만나 두 시간 정도 밀담을 나누기도 했다. 법관 출신 신학생으로 3·1 거사에 깊이 관여하던 함태영(1872-1964)도 2박 3일간 길선주 집에서 기독교인의 종교 연합 시위 참여 타당성 등을 주제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이 대화를 통해 민족 대의를 위한 타 종교와의 제휴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이어서 숭덕학교 교사 안세환과 대화한 다음 날, 길선주는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해있던 이승훈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독립선언서에 날인할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16인에 합류해달라는 이승훈의 요청에 응했다. 다만, 이미 확정되어있던 황해도 장연 부흥회 일정과 장거리 여행에 지장을 주는 시력 문제로, 직접 참여하는 대신 도장을 빌려주기로 합의했다. 귀가한 길선주는 널다리골교회 여전도회 임원들에게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수천 장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18) 실제 3월 1일에 널다리골교회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1910년 한일병합 당시 천장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마당에 게양하고, 여전도회원들이 만든 태극기를 들고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19)
길선주는 전해 12월에 약속된 일정대로, 2월 20일에 평양을 떠나 다음 날부터 한 주간 장연교회 집회를 인도했다. 28일 집회가 끝나자마자 그는 말을 타고 사리원역으로 간 후, 기차를 갈아타고 경성역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은 3월 1일 저녁 6시경으로, 이미 오전에 시작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가 일본 경찰에 의해 진압당하며 다수가 체포된 상황이었다. 길선주는 역에서 곧장 조선총독부로 가서 독립선언서 서명자임을 밝히고 자수했다. 이때부터 심문, 공판이 여러 차례 진행된 후, 1년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20년 10월에 방면될 당시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중 무죄 선고를 받은 이는 길선주뿐이었다.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이유로, 1926년 널다리골교회 분규 시 청년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고, 이후 비판적 학자들에 의해 오명을 쓰기도 했다.20)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64주년 광복절을 맞아 길선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3·1운동 선언서에 길 목사 서명이 있는 등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이 분명한데도 일제 재판 과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공훈을 인정하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21)
3·1운동 참여로 인한 수난은 길선주 한 사람의 투옥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미 한 해 전에 105인 사건 고문 후유증으로 장남을 잃은 데다, 차남 길진경도 평양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상태였다. 당시 열여덟 살이던 길진경은 한 선교사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숨어서 등사 도구와 중국어 및 영자 신문을 구해서, 국제 정세와 3·1운동 소식을 편집하여 〈독립신문〉을 찍어냈다. 숭실중학교 고학생들과 친구 여러 명의 도움을 받아 길진경이 찍어낸 신문은 매일 거리의 상점, 교회 청년회 회원들의 집, 고아원 등에 배포되었다. 경찰의 집요한 추적 끝에 김병선, 원보훈 같은 청년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결국 5월 중순에 길진경도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 서명자의 아들이었기에 신문과 고문이 더 집요하고 가혹했을 수도 있다. 결국 길진경은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장남 역할을 하는 둘째 아들이 투옥되었고, 위험에 처한 막내 오누이 길진섭과 길진주도 경찰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다. 길선주는 이 모든 소식을 감옥에서 들었다.22)
길선주와 그의 가족들.
종말신학을 설파하다
자신과 아들의 투옥 생활, 어린 자녀들의 도피 생활에서 정점을 맞은 개인과 민족의 수난은 길선주의 초월적 내세주의 및 종말론 신앙관과 세계관을 더 강화했다. 이덕주는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한국 기독교의 신앙 양태가 크게 둘로 분화되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계몽주의 신앙운동이다. 앞의 것은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등 부흥사들이 주도했고, 뒤의 것은 YMCA를 비롯한 청년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주도했다.23) 구한말과 한일병합 등을 거치며 패배감을 체화한 많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3·1 독립운동의 사실상 실패는 현실 개혁에 대한 비관론 강화로 이어졌다. 이미 1900년대의 부흥운동으로 외적 사회 개혁과 독립운동보다는 내면의 영적 갱신과 각성, 종말과 내세를 더 중시하는 신앙 양태가 한국 기독교인 안에 자리 잡은 상태였다. 초월 세계와 이상향을 강조하는 선도와 불교를 개종 이전의 종교적 배경으로 갖고 있던 길선주 같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개인과 가족의 수난을 겪은 이후 이를 종말신앙으로 승화한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길선주는 성경 읽기와 기도에 매진했다. 개종 전 구도자 시절부터 고행과 금욕을 통해 물아일체 경지에 이르는 기도 생활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부흥운동기부터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새벽기도도 길선주와 동역자들이 탄생시킨 유산이었다. 새벽기도 후 요한계시록을 반 시간 정도 매일 묵상하던 이전 습관도 감옥에서 더 강화되었다. 특히 눈이 좋지 않아 밝은 낮 이외에는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1만 번 이상 읽은 것으로 알려진 계시록을 포함해, 성경의 많은 책을 사실상 외우고 있었다. 옥중 기도 중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옥중에서 길선주는 종말론을 체계화했다.
길선주의 종말론은 단행본 《말세론》과 잡지 연재물 ‘말세학’으로 간행되었다. 《말세론》은 1928년과 1935년에 두 차례 출간되었다. 1928년판은 기독교 출판업자 김정현이 길선주, 김상준, 제임스 게일 세 사람의 종말론 자료를 정리하여 편집한 책이었다. 1935년판에는 ‘길선주 강설, 김정현 저술’이라는 저자 표기가 있는데, 이는 길선주가 강의나 설교에서 다룬 내용을 김정현이 이해한 대로 정리했다는 의미였다. ‘말세학’은 1935년 4권 7호부터 1936년 5권 10호까지 기독교 잡지 〈신앙생활〉에 실린 연재물이다. 길선주가 1935년 11월 26일에 사망했으므로, 그 이후 연재에는 ‘길선주 목사 유고’라는 표현이 부가되어있다. 《말세론》은 김정현이 길선주의 강설을 이해한 대로 편집하고 작성한 내용이므로, 정확히 어느 것이 길선주의 생각이고 어느 것이 김정현의 생각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총 12장으로 구성된 ‘말세학’이 길선주의 종말론을 더 잘 보여주는 문헌이다.
길선주의 말세론에 담긴 두 핵심 주장은 재림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이전에 재림한다는 전천년설이다. 그의 말세 시나리오는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1차 재림)과 성도의 휴거 - 7년 대환란 -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2차 재림) - 천년왕국 - 최후의 결전 - 영원한 세계’라는 틀로 이루어졌다. 19세기 말에 영어권에서 유행했고, 한국에 온 선교사 다수가 믿었던 세대주의 전천년설과 대체로 유사하다. 임박한 종말과 세상에 대한 비관론적 전망을 강조하는 전천년설은 대개 기독교인과 교회가 세속 권력으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겪거나 기독교의 전망이 밝지 않는 시대에 유행했다. 따라서 억압받는 한국 민족의 식민지 경험과 개인의 질병, 자신과 가족의 투옥 및 수난 등으로 현실 개선의 소망을 찾기 어려웠던 길선주가 비관적 전천년설을 확신했던 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24)
한편, 신학자로서의 길선주를 다룰 때, 많은 이들은 3·1운동 이후 노년에 주로 종말신앙을 신학화한 인물로만 다룬다. 그러나 옥성득이 강조했듯, 생애 전반기 길선주는 청교도 작가 존 버니언(John Bunyon, 1628-1688)의 《천로역정》을 선도와 유교 등 독특한 동양 종교식 독법으로 해설한 《해타론》(懈惰論, 1904)과 《만사성취》(萬事成就, 1916)를 펴낸 창의적인 토착화 신학자이기도 했다.25) 1926년에는 《강대보감》(講臺寶鑑)을 펴냄으로써 한국식 대지 설교의 모범을 한국 목회자에게 전수했다.
1920년 10월에 무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난 길선주는 널다리골교회 목사로 복귀한 후, 몸이 회복될 무렵인 1923년 말부터 다시 부흥사경회 강사로 초대받기 시작했다. 서양과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의 1920년대 역시 새로운 사상과 운동이 기존 권위 체계에 강하게 도전하던 시대였다. 특히 일본, 만주 및 연해주에서 유학생과 운동가들을 통해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이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시기부터 반기독교 정서가 여러 형태로 표출되었다. 1926년 2월에 길선주와 당회에 불만을 가진 청년 및 교인 일부가 일으킨 널다리골교회 분규는 신문에도 보도되고, 노회의 관여가 필요할 만큼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26)
이듬해 1927년은 길선주가 널다리골교회에서 조사로 목회를 시작한 지 25주년 되는 해였다. 25주년을 기념하며 길선주는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순회 부흥사로 보냈다. 1933년에는 널다리골교회에서 이동한 교인 500여 명과 함께 이유택을 담임목사로 이향리교회(신현교회)를 시작했다. 66세이던 1935년 8월에 길선주는 평안북도 선천군의 월곡동교회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처음 뇌일혈로 강단에서 쓰러졌다. 선천기독병원에서 약 두 주간 치료를 받은 후 평양으로 귀가한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다시 사경회를 인도하러 떠났다. 11월 10일에서 26일까지 진행된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고창교회 집회 마지막 날, 길선주는 다시 강단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한국 장로교회 첫 목사이자 최대 교회의 담임목사,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흥사이자 설교자, 3·1운동 민족대표 등을 역임한 원로의 장례를 장로교회장(葬)으로 치렀다. 여러 신문이 길선주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9일간 치러진 장례 기간의 조문객은 10만여 명에 달했다. 12월 4일에 널다리골교회와 이향리교회 직원과 청년들이 멘 영구는 상수리구 장대현 북문 언덕을 떠나 신창리 네거리, 종로, 서문 거리, 서문 밖 숭실대강당을 지나 서장대에 있던 교회 공동묘지로 향했다.27)
■ 주
1) 이상규, ‘교회와 민족, 길선주 목사의 목회와 민족운동’,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3·1운동과 기독교 민족대표 16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 119쪽.
2) 길진경, 《영계 길선주》(종로서적, 1980), 5쪽.
3)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전망사, 1982), 57쪽.
4) 김인서, ‘朝鮮初代敎會의 偉傑 靈溪 先生 小傳 上’, 《神學指南 13-6》(1931.11.), 35쪽.
5)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새물결플러스, 2020), 609-689쪽.
6) 길진경, 《길선주, 부흥의 새벽을 열다》(두란노, 2007), 12-20쪽.
7) 위의 책, 21-25쪽.
8) 위의 책, 26-43쪽.
9) 위의 책, 44-51쪽.
10) 위의 책, 52-65쪽.
11) 이상규, ‘교회와 민족, 길선주 목사의 목회와 민족운동’, 122쪽.
12) 위의 글, 123쪽. 길진경, 앞의 책, 162-166쪽.
13) 위의 책, 129쪽.
14)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기독교문사, 2011), 211-245쪽.
15) 이상규, 위의 글, 124-126쪽.
16) 길진경, 위의 책, 176쪽.
17) 앞의 책, 184-192쪽.
18) 이상규, 위의 글, 127-131쪽.
19) 길진경, 위의 책, 199-201쪽.
20) 이상규, 위의 글, 131-141쪽.
21) 이위재, “[사람과 이야기] ‘민족대표 33인’중 마지막 1명 길선주 목사에 건국훈장”, 〈조선일보〉(2009.8.13.).
22) 길진경, 위의 책, 204-210쪽.
23) 이덕주, ‘3·1운동에 대한 신앙운동사적 이해’,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256쪽.
24) 김정현, 길선주, 《말세론·말세학》(한국고등신학연구원, 2010), 137-141쪽에 실린 김재현의 해설.
25) 길선주, 《만사성취》(한국고등신학연구원, 2008), 73-76쪽에 실린 김재현의 해설.
26) 이상규, 위의 글, 142쪽.
27) 길진경, 위의 책, 229-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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