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顯王后傳
─ 작자 미상(궁중 나인)
무진년 시월에 희빈 장씨 처음으로 왕자를 낳으니, 상감이 지나치게 사랑하심은 이를 것도 없고, 후(后)도 크게
기뻐하시어 어루만져 사랑하심을 당신이 낳으신 친자식과 같이 하셨다. 그런데 장씨 자기 분수를 지키고 있었더
라면 영화가 가득할 것이로되 문득 참람한 뜻과 방자한 마음이 불 일어나듯, 중궁의 성덕과 아름다운 자태가 일국
에 솟아나고 인망(人望)이 다 돌아가고 있음을 시기하여, 가만히 남몰래 제거하고 대위(大位)를 엄습코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 참람한 반역의 마음이 더하여 날마다 기색을 살펴 궁중전을 참소하기를, 새로 태어난 왕자를 숨을 막
히게 하여 죽이려 한다느니 희빈을 저주한다느니 하여 국모를 헐뜯고 모함하지 아니함이 없어, 간악한 후빈들의
힘을 합치게 하여 소문을 퍼뜨리고 자취를 드러내어 상감이 보시고 들으시게 하니, 예로부터 악인이 의롭지 않으
나 돕는 자가 있다더니 과연 그러한가 보았다.
중궁을 간해하는 말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상감이 점점 의심하시게 되어 중궁을 아주 박대하시고, 장씨는 악한
교태로 천심을 영합하며 왕자를 방패삼아 권세가 대단하니 상감이 점점 장씨의 사랑에 빠지시어 능히 흑백을 분
별하지 못하시었다. 전날에 엄숙하고 광명하시던 성심이 크게 변하시어 높고 어진 신하는 모두 물리치고 간신을
즐겨 쓰시니, 중궁이 그윽이 의심하시어 장씨의 사람됨이 반드시 변괴를 낼 줄 아시나 왕자의 당당한 상이 있는
고로 깊이 생각하시고 다행히 여기시어 사색을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갈수록 현숙한 덕과 정애스러운 마음씨를 보
이시나, 상감의 마음은 더욱 멀어져 드디어 중궁을 폐하신다 하면서 기사년 4월 23일 드디어 폐비의 전교(傳敎)
가 내리니라.
좌승지 이이만이 불가함을 간하니 상감께서 크게 노하시어 승지 이이만을 파직하시고, 수찬 이만원이 또 간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시어 멀리 귀양 보내라 하셨다. 이렇듯 대신 중신 사십여 인을 먼 고을로 정배하시고 또 비망기
(備忘記)를 내리시니, 간신의 간사한 말이 상감의 뜻을 영합하고 후궁의 간사한 기운이 상감의 총명을 가리우니,
양과 같이 선량한 충신의 간언이 무슨 효험이 있으리오. (중략)
이 때 후께서는 부원군(府院君) 장례 후 지나치게 애통하셔 육체가 불편하시더니, 좌우에 모시는 상궁이 이 말씀
을 듣고 대성 통곡하며 바삐 들어와 후께 아뢰니, 후께서는 안색도 변치 않으신 채 크게 탄식하여 이르시기를,
“이 또한 하늘이 내리시는 재앙이로다.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대들은 모두 명을 받들어 거행토록 하라.”
하시고, 조금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명안공주께서 이 변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 후께 비옵고 오열 비탄하여
옷을 잡고 흐느껴 우시며 능히 말씀을 이루지 못하니, 후께서 탄식하고 위로하여 말씀하시되,
“화와 복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거늘 나의 복이 없고 천한 탓인즉 다만 어명대로 받들어 모실 따름이다. 누구를
원망하리오마는 공주 이렇듯 동정하시니 은혜 잊을 길이 없소이다.”
공주 그 덕망을 새삼 탄복하며, 오래지 않아 성총이 깨닫고 뉘우칠 바를 일컫고 차마 놓지 못하여 후를 붙들고 눈
물이 비오듯하니 무수한 궁녀가 울고 차마 떠나지 못하더니, 이튿날 감찰상궁이 상명을 받자와 침전에 이르러 중
궁께 내리신 전교를 아뢰니, 후 천연히 일어나서 예복을 벗고 관잠을 끄르시고 중계에 내려오셔 전교를 듣잡고 즉
시 대내를 떠나 본가로 나오실 새 궁중이 통곡하여 곡성이 낭자하더라. (중략)
후 본가로 나오시니 부부인(어머니)이 나오시어 마주 붙들고 통곡하시니, 후도 부원군 옛 자취를 느끼사 애원 통
곡하시고 이윽고 부부인께 고하여 이르시되,
“죄인의 몸으로 친족을 보는 것이 옳지 못할 것이니 나가소서.
하고 전하시니, 부인과 다른 이들도 통곡하여 마지못해 나가신 후, 당일로 명하시어 안팎 문들을 모두 봉쇄하
고 본가 비복들은 한 사람도 두지 않으시고 다만 궁녀만 두시며 정당(正堂)을 폐하시고 하당에서 거처하시었
다. (중략)
이렇듯 삼사 년이 지나니 천운이 순환하여 흥진비래에 고진감래라, 구름이 점점 걷힘에 태양이 다시 밝아오
니, 성총이 깨달음이 계셔 민후의 억울하심을 알고 장빈의 간악함을 깨치시어 의심이 가득하시니 대하시는
기색이 전과 다르시고, 서인들이 후의 삼촌 숙질을 다 처벌하시라고 날마다 아뢰기를 수년에 이르렀으되 상
감께서 끝내 허락지 않으시니 이로써 민씨 일문이 보존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