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면의 역사 [국제신문]
회남의 귤이 회북에 와서 탱자가 됐다(橘化爲枳)는 고사성어가 있다.
회남의 귤처럼 이북의 냉면이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의 음식으로 정착한 것이 바로 밀면이다.
밀면의 역사를 더듬어가면 전쟁이 지나간 195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후퇴로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냉면집을 하던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란온 정한금(77)씨가
우암동 피란촌에서 ‘내호냉면’이란 냉면집을 열면서부터 부산 밀면의 역사가 시작된다.
당시 정씨 모녀는 함흥냉면과 평양냉면 두 가지 종류를 팔았는데,
메밀로 만드는 평양냉면은 손이 많이 갔고 면을 뽑아낸 뒤 얼마 되지 않아
모양이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국수를 즐겨 먹던 부산 사람들은
질긴 냉면의 면발을 부담스러워 했고, 면발의 주재료였던 메밀과 전분은 물량이 크게 달렸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밀가루로 만든 냉면..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누어준 밀가루는 풍족했다.
“밀가루로 면발을 만들어 보았더니 힘이 없고 뚝뚝 끊어졌지요.
수차례 실험을 해 전분을 3대 1비율로 섞어 보았더니 고소하고 면발이 쫄깃하데요.”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59년부터 손님들에게 선보였던
밀가루 냉면(당시엔 경상도 냉면이라 불렸다)은 금새 부산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알게 모르게 밀면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지금의 별미식으로 자리잡게 됐다.
밀면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는 70년대초.
오늘날 밀면의 대명사인 부산진구 가야2동의 가야밀면이 문을 연 것이 그 무렵이다.
가야밀면이 개발한 독특한 맛이 80년대 들어 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밀면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가야밀면 맛의 비결은 ‘며느리도 모르는’ 일급 비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
부드럽고 쫄깃한 면발과 새콤달콤한 양념, 시원하고 담백한 육수 이 세 박자가 맞아야
제대로 된 밀면의 맛을 낼 수 있다. 재료의 종류는 물론, 재료의 양, 온도, 시간 등
까다로운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산에서 탄생한 밀면은 부산을 배경으로 성장하고 부산 사람들의 입맛에 길들여진
순수한 향토 음식으로 뿌리내렸다.“초기에 상당히 자극적이던 밀면의 맛도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차츰 순해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밀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냉면은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냉면은 고려말 몽고에서 전래됐다는 설이 있지만, 문헌상으론 1849년 편찬한 ‘동국세시기’에서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연중행사와 세시풍속을 담은 이 책은 11월의 음식으로 냉면을 들고 있다.
조선후기의 조리서 ‘시의전서’에도 냉면의 조리법이 실려 있다.
초기의 냉면은 한겨울 고구마 전분으로 만든 면을 삶아 차게 만든 뒤
뜨거운 군불로 지핀 온돌방에서 속이 듬뿍 든 김치와 함께 먹었던 겨울 별식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유명해진 향토 음식으로 밀면과 함께 구포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전쟁통에 부산으로 내려온 피란민들에게 의해 구포장날 허기를 채워주던
음식으로 기억되고 있는 구포국수는 쫄깃한 면발과 약간 짠 맛이 특징.
인근에 바다가 있어 염분 섞인 수증기가 야외에서 말리던 국수에 스며들어
독특한 맛을 냈던 것이다.
1940년초부터 구포국수를 생산해온 구포제면 김동길 사장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구포국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라고 회상했다.
구포시장 인근에 구포국수 공장이 30여개나 있었으나 고임금시대로 접어든 1990년대부터
사양길로 접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현재 북구에는 구포국수 제조공장이 3곳밖에 남지 않았다.
허태관(방울이표 구포국수 영업부장)씨는 “오뚜기 동원 등 대형업체의 위세에 눌려
영업이 점차 위축되고 있다”며 사라져가는 향토음식에 대한 애정을 호소했다.
특히 지난 99년 북구청이 구포국수의 명성을 되찾으려고 시도했던 국수축제가
예산 문제로 무산된 것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구포국수는 중장년층에게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아있지만 젊은층에게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한국전쟁 시절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부산의 향토음식이 안타깝게도 역사의 뒤편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밀면은 밀가루가 주재료 평양-메밀 함흥-전분
흔히 평양냉면을 물냉면으로, 함흥냉면을 비빔냉면으로 알고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함흥냉면은 양념에 비벼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육수를 부어 먹을 수도 있다.
그 점은 밀면도 마찬가지. 평양냉면과 함흥냉면, 밀면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면발을 만드는 과정은 같지만, 면발에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 종류가 나누어진다.
평양냉면은 메밀을 주재료로 쓰며 함흥냉면은 전분을, 밀면은 밀가루를 주재료로 사용한다.
전분으로 만든 함흥냉면은 질겨 입으로 잘 끊어지지 않지만,
밀가루를 주재료로 전분을 섞어 만든 밀면은 부드럽다.
전분은 면발을 윤기있게 해준다.
함경도에서 함흥 냉면집을 운영하다 한국전쟁 뒤 부산에 정착한
정한금(우암동 내호냉면 운영)씨에 따르면 함흥냉면은 비빔냉면 물냉면으로 같이 즐겼으나,
평양냉면은 비벼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즉 평양냉면 함흥냉면 밀면 모두 육수를 부어 먹었으나,
비벼 먹는 경우는 원래 함흥냉면뿐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주로 냉면을 여름철에 즐겨 찾지만, 원래는 1월부터 5월 사이가 제철로
그 무렵에 맛이 가장 좋다고 한다. 메밀 함량이 많은 면발을 선호하는 노년층과 전분의 비율이 많이 들어간 면발을 선호하는
젊은층의 입맛을 모두 맞추기 위해, 최근에는 메밀과 전분을 적절히 배합한 냉면이
시중에 나와 맛 볼 수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