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강은 총 55km로 장흥댐부터 장흥읍 중심을 지나 양산 덕천 석교 목리을 지나서 남해로 흘러가는 1급수로
전라남도의 3대 강중 하나이다.
여름이면은 피라미와 은어가 때지여 헤염치고 수영도하며 헤염치는 장소였다,
그옛날 어린시절에 나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을 마음속깊이 간직해주었던-
평생동안 잊을수없는 강이다,
헌데 50년만에 다시보게되는 탐진강은 그옛날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수없다,
이세상의 모든 산과바다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면 삶의 자체도 발달하여
아름다움과 생활의 편리함으로 변해가는것이 순리이건만,
어찌된건지 내고향 탐진강은 이세상의 삶의 변화와는 다르게,
옛!태고의 원시림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이여서 안타깝다,
서울에있는 청개천과 뚝섬이 생각났다,
그렇게도 새까맣고 시궁창 냄세가 코을찌르던 청개천과,뚝섬이,
지금은 분수대가설치되여 물줄기을 뿌리고 바닦이 훤히보이는 맑은물이 흘러내리는데-
여기 참진강은 그와는 정반대다,
이곳저곳에 물웅덩이에 썩은물이 고여있고 뱀과구렁이가 기여나올것같아서 외관상
보기에도 흉칙할뿐이다,
전에 보이지않던"국토부에서 관리하는 국가하천이라는 표말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얫날에 보이지않던 <국토부의 하천이다>라는 표말들이 탐진강의 모습을 낙후시키지않나?
하는생각이 들게한다,
강진군민이 사는세상 강진군민들이 관리보호해서 그 옛날처럼 피라미와은어가
한가로이 떠돌아다니는 맑은물이흐르는 탐진강이 그립다,
지방자치제가 있어서 지방의경제가 나날이 부강해지고 발전하는게 요즘현상이다,
여기 탐진강도 지방자치제의 틀안에 묶여서 개발하고 관리해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데
편리하고 편안안 휴식의공간으로 활용함이 좋지않겠는가?
난!일요일마다 군동교회에 나간다,
오후에 예배을 맞치고 집에오는길에 석교다리밑을 본다,
무더운 여름철이면은 강진군 內 군민들이 <석교다리>밑에서 다리을 그늘막 삼아서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먹고쉬면서 휴식을 취하고있는 모습들이 토,일요일이면은
매주마다 눈에 뜨인다,
30도가넘는 세멘-콩크리트 다리밑-"쉬원함은 커녕-가열된 세멘다리의 열기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더욱 무더운감을 느끼게한다,
강진군內에 여름철에는 군민들의휴식처가 이렇게도 빈약하다는것을 느끼는 모양세다,
탐진강 하천을 깨끗하게 관리하여 그늘진나무을 많이심고 깨끗한 물속에는 각종물고기가
혜염쳐 다니는 탐진강이 다시 도래하여 무더운 여름철이면은 시골에 노후의 영감님들이
그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그리운 탐진강의 미래상이 그립다,
고향을 떠난후 50여년간을 객지생할을 하다가 탐진강이 그리워 고향땅에 내려온 이필자의 눈에는
고향인들의 휴식처가 너무나 빈약하고 경제와 동떨어진 삶의질에 지방자치제의
기대치가 한층절실해 보인다,
본글을 써내려가는 필자는 !---
50년전 내가태여난 德川마을을 뒤로하고 갑종장교후보생으로 21세에 고향을 떠났다,
임관후 전방소대장생할을 1년맞치고 서울에서 특전사 창설요원으로 군복무중에-
파월후 월남전에서 육군대위로 진급후 귀국했었다,
귀국후에는 서울에서 특전사 중대장(팀장)을 하다가 32세의 젊은나이에 전역-
서울송파구에서 예비군"중대장을 장기간 하고보니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많이 흘러가 버렸다,
허나!정신없이 서울에서 살아가면서도 그어린시절에 뛰놀던 탐진강은
저의마음속에서 항상 살아있었다,
아침일찍 기상해서 마구간에 메놓은 소와송아지을 끌고서 탐진강변의 초원위에,
소을 메여놀고서 학교에 간다,
학교에 다녀오면은 바로 탐진강변으로 나간다,
메여두었던 소을 풀어놓으면은 오후한나절에,
소들은 마음껏초원을 누비면서 해가서산에 귀울면은 소들의배는 불룩이들 나와있다,
자유롭게 탐진강변을 누비면서 맑은물과푸른풀을 실껀뜯어먹었으니---
내고향 덕천에 내려와보니 가장많이 변해버린것은 탐진강이다,
그 당시만해도 덕천마을 앞의 탐진강은 맑은물에 은어때가 줄지여 떠다니고
송사리 붕어 각종 민물고기들의 천국이였다,
뚝밑으로는 맑은 탐진강물이 깊은곳은 2m의 깊이로 유유히 흘러내리고
강변의중앙 벌판에는 수천평의 푸르른 잔디들이 초원을 이루워
백마리가 넘는 소때들이 한가롭게 풀을 띁어먹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볼수있었으며,
소몰이하는 동네 아이들은 빙둘러앉아서 씨름을 하는가 하며- 몆몆아이들은 흘러내리는
맑은 탐진강물에서 헤엄을 치며서 고기잡는 모습들을 이고저곳에서 볼수있었던-
지금 상상해보면은 지상낙원이였다,
<솥뚜껑(大) 만한 자라도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이였다,
대곡국민학교 -지금은 없어지고 그자리엔 00의 모습이 자리하고있다,
대곡학교에서 석교라는 마을을 지나서 군동면쪽으로 가다보면은 당시엔 물레방아가
있었고 곧바로 석교다리을 건너면 군동면으로가는길이다,
우측으로 들어가는길이 덕천마을에 들어가는 입구이다,
덕천마을 가는길에 들어스면 좌측에는 장흥에서 흘러내려온 맑은강물이 마량항을 지나서
남해로 흘러가는데 이강줄기가 바로 탐진강이다,
최근에는 자전거 도로을 만드는 공사가 한참진행중이다,
어린시절엔 집에서 학교로 가고 올때마다, 길아래 5m 뚝밑으로 흘러내리는
맑은탐진강은 어항속의물고기들이 때지여 떠다니는 모습마냥 훤히잘보였다,
이러한 물고기들을 보면서 학교에가고 집에 오곤했었다,
어느날엔가 집에오는도중에 뚝밑을 보니 솥뚜껑마냥 세꺼먼 커다란 자라가
물가에 나와있었다,
아버님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 우리아버님은 군동 면사무소에 다니시다가 6,25 전쟁당시에 늦은나이에
군에입대하셔서 병원에서 입원치료중에 전역하셔서 평생동안 전쟁 후유증으로
살으시다가 76세에 돌아가셨다,
내 어린나이였지만 당시에 우리아버님마냥 몸이 쇠약하신 어른들에게는 ""자라가 몸보신에
보약이라는 이야기을 많이들었다,
자라을 잡기위해서 뚝밑을 기여내려가면서 우리아버님과 어머님의 좋와하실 모습이
떠올라 줄겁기 그지없없다,
헌데 반데로 두려움도 앞섰다,
자라입이 너무나 강해서 숫갈과 젓갈도 물면은 부러뜨린다는 이야기을,
들어왔기때문이다,
그러나 탐진강변에서 살아온 15세되는 소년에게는 자라잡는 방법을 수없이들어서
알고있었다,
왼쪽발로 넒은 자라의 등을 힘껃밞았다,
자라가 뾰족한 주둥이을 쭈-욱 내미는가 싶더니 어느세 주둥이을 목덜미 안쪽으로
들어갔다,동시에 나는 오른손의 인지와중지 두손가락을 주둥이가 들어갔던
목덜미속으로 깊숙히 들이밀고서 왼손으로는 꼬리쪽을 잡고서 들어올렸다,
이런식으로 잡으면은 자라는 4개의 짧은발가락만 휘저으며 꼼짝하지못한다,
석교마을 당시 물레방아에서 군동면쪽으로가는길에는 석교다리가있었다,
당시 이다리는 비가조금만 내려도 넘쳐흘러서 뻐스도 못다니고 일상생활하는데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때이다,
강진읍내에있는 농고(현!생명과학)을 가야하는데 다리위에서 허리까지넘쳐흐르는 물위로는
다리을 건녀갈수가 없었다,
종아리 무룹정도까지 다리위로 물이넘쳐흐를때는 같은급우학생들끼리 손을 맞잡고
다라을건너서 학교에 다니기도 하였지만 그날은 비가너무많이와서
다리을 건너서 학교에 갈수가없었다,
수십명의 인파가 물레방아있는 다리에서 발만 동동구르고 다리위로 힘차게흘러내리는
물줄기을 보고있을때이다,
ROTC 중위로 군에입대하여 휴가차 고향덕천에 내려와있던 젊은장교가 금일중으로
부대에 귀대하기 위하여 다리을 건너야만했다,
그옆에는 군동국민학교1학년생인 어린애가 군동면에 엄마가살고있는집을 가야하는데
가지못해 울고있었다,
엄마가있는 집에들려서 학교에가야하는데 답답했던모양이다,
젊은장교 오중위는 울고있는 어린애을 등에업고서 모든사람이 만류하는 와중에도
다리을 건너기 시작했다,
많은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손에 땀을 쥐며 두사람의 모습을 보고있었다,
세차게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다리위쪽난가에 부딧쳐서 눂은파도로 변해서 다리위로
흘러내리는 모습은 불안하지않을수가 없없다,
다리중간지점까지 건널을시에는 이미 두사람은 다리위의 파도에밀려서 다리하단 부분,
난간지점까지 밀려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안돼- 안돼- 오른쪽으로가- 하면서 고함을 쳣지만
이미두사람은 파도에 밀려서 물속으로 빠져 사라지고 보이지않았다,
한참동안 보이지않던 두사람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서야 다리아래쪽 건너편
쪽에서 솟구쳐 보이기 시작했다,
길건너 뚝쪽으로 헤염을 치면서 건너는 모습이 어린애는 좌측 겨드랑이에 끼고,
오른쪽팔과 다리로 헤염을 치면서 건너가고 있었다,
한참 헤염치고서 가서야 물이얕아지고 발이 땅에닿아서 걸어나가는
모습을 볼수있었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다리건너편에 두사람이 걸어서 나가는모습을 보고서야
줄겁고 반가운 환호의함성을 지르며 박수갈채을 보냈다,
이젊은 장교는 후에 군에서 권총 특등사수로써 ! 박정희 정권당시 청와대 경호과장을
역임했던 오 경석 씨며 저로써는 집안 아제뻘이다,
해서!이후로 석교다리는 현제의모양데로 높은 다리모양을 축조하였으며,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억수로 비가내려도 다리가 넘치는적은 없었다 한다,
50년전의 맑고 깨끗했던 탐진강을 연상하면서 글을 써보왔읍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 9, 14,
첫댓글 탐진강의 역사를 보는듯 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연민을 느끼는 강진!!! 문인의 숨결과 화사함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마을을 느끼게합니다~~ 어릴때 떠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이 되어 항상 가고싶은곳
섬섬옥수님은 필명이 정말 아름답읍니다,
고향을 떠나시여 타향살이을 하고계시는듯 합니다,
저 역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생활 50년을 청산하고 고향인 강진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고향이 좋긴좋읍니다,
저의자식 4남매을 모두 서울에서 낳고 ,결혼을 시키고-
저만 고향에 내려왔지만-
역시 고향은 저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사람보다는
여기저기 고향산천이 저을 따사하고 포근하게
맞이해주며 감싸주는 군요,
섬섬옥수님!
고향에 자주오십시요,
50년만에 내려온고향-
그옛친우들도 절반은 하늘나라로 떠나가고-
아니면은 객지에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군요'
그래도 저을 반겨맞이해준것은 그래도 "고향산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고향산천은 포군한미소로 내곁에 살며시
다가와 저을 감싸안아줍니다,
그래도 가장그립고 추억이 깊은곳은---탐진강 였지요!
헌데 "탐진강은 사람의 발자치을 멈추게 만들어 놓왔군요!
저 멀리서 그 옛날의 흔적을 그리며 --상상해봅니다,
탐진강의 그리움 어쩌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든이의 애틋한마음!!! 아닐까요? 고향을 굳건히 지키셨던 장손 오빠도 떠나셨고 강진은 여행객으로 다녀오게 되었네요?
금년처럼 무더운 여름이라면-
차라리 도시가 여름보내기는 낳을것같다,
여름이다 하면은 그래도 산과바다을 연상하는데-
탐진강이라도 개발해서 그늘진 나무을 많이심어서-
탐진강물에 발이라도 담구면서 더위을 식히는 방안을
고려해야지 금년같은 여름은 생각만해도 이찔하다,,
<여름철 피서는 그래도 산과바다지요!->
향후!에는 보다 더 지구의"온난화가 심해져서 여름이면 산과바다로-
모두가 피서갈건데-
현제의 강진은 피서갈만한 바다가 NO 지요.
*** 탐진강
태고의 원시림마냥 방치시키지 말고-
본래의 1급수을 살려서 여름철 피서지로
개발합시다,
장흥 탐진댐 막기전엔 맑은 강물에 은어와각종 민물고기도 많고 좋은 바다였다고,----
과거사만 논하는데,-
그래도 과거의 장,단점을 살려서 "탐진강을 살리는데 많은 연구와 노력을 하면은 ,
현제의 탐진강보다낳은강이 되살아날거라 확신합니다,
남해권역 각군별마다,특색화되여 있는 작물이 있읍다,
장흥하면 표고버섯, 물축제, 토요시장 이렇게 특색화되어있고,
완도하면 전복,
영암하면 무화과 등
해남하면 고구마와 넓은 밭의 작물들-
강진은 "가우도?-또 뭐가있나요?
그래도 몆해전에는 "탐진강 은어"하면 전국에서도
알아주었읍니다,
그 옛날에는-학교가 파하면 집에오자마다 -
곧장 탐진강으로 달려갔읍니다,
옛날이 아닌 요즘도 시간이 나면은-
바로"탐진강으로 달려갈수있는 -
탐진강이 되였으면 좋겠읍니다,
탐진강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득한곳입니다
건강한 귀향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