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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THỌ VƯƠNG HỒNG from Pixabay
탁월한 교육학자 파커 팔머는 지식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교육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에 대해 인식론이 제공해 주는 이미지들은 교육받는 개인의 사고방식뿐 아니라 행동 방식에도 형성적 영향을 끼친다. 그는 지식의 양태는 곧 삶의 양태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지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는 핵심 단어들인 ‘사실(fact), 이론(theory), 객관적(objective), 실재(reality)를 관찰함으로써 지식의 인식론적이고 윤리적 이미지들을 밝혀 준다(Parker 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0-25). 그는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들을 통하여 어떻게 인식론이 교육받은 자아 및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형성시켜 주는지를 밝힌다. 팔머는 먼저 ‘사실’은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전제한다. 사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통해 주관적 지식으로부터 객관적 지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영어 단어 ‘fact’는 ‘만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파케레(facere)에서 유래된 것으로, ‘만들다’라는 이미지는 ‘사실’이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의 주체로 여긴다는 말의 핵심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는 사실들로 만들어진 실재만이 유일한 실재다. 팔머는 여기에서 “‘사실’에 대한 신뢰가 종교적 신앙이 쇠퇴함에 따라 증폭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2).
또 다른 핵심 단어는 ‘이론’이다. 이론은 사실들을 정리하고 통합해 주는 연결 논리의 망으로서 이론들을 도출해 낸다. 이론은 사실들을 엮어 주는 하나의 실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theory’는 ‘구경꾼’을 뜻하는 헬라어 테오로스(theoros)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이미지는 현대인의 인식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을 시사한다.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는 우리를 앎의 대상과의 관계 속으로 이끌기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와 세계에 대해 분석가, 논평자, 평가자로서 참여하도록 이끈다. 때문에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영혼을 성숙시켜 주는 것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객관성을 위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엄격히 구분할 뿐 아니라 구경거리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이란 단어도 우리의 앎의 방식에서 핵심적인 용어이다. ‘객관적’이라는 지식의 이미지는 만일 어떤 주장이나 근거가 객관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감정이나 편견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는 종교적 주장이나 신앙을 편견으로 가득 찬 일종의 인간의 감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objective’의 라틴어 어원은 ‘…에 맞서다’ ‘…에 대항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지식의 이미지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팔머는 “우리는 혼돈을 저지하기 위해, 실재를 재구성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구성물을 변경시키기 위해 지식을 추구한다. 우리는 세계를 자기 필요대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지식을 높이 평가한다.” 이러한 “객관적 지식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어원적 의미를 실현시켜 왔다. 즉, 객관적 지식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맞서는 적대자로 만든 것이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3).
우리에게 지식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시켜 주는 단어는 ‘실재’이다. ‘실재’는 지식임을 주장하는 모든 것에 대한 판별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팔머는 제안한다. 그는 ‘reality’의 어근은 재산, 소유물, 물건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레스(res)로부터 유래한 용어로, 이 이미지는 현대 지식의 또 다른 특징을 제공해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미지의 지식은 사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들을 소유하고 지배하기 위해 실재에 대한 알기를 추구한다. 이러한 지식은 사물에 대한 지배권을 주는 지식만을 가치 있게 여긴다.
팔머는 현대 지식의 실패는 윤리의 실패, 즉 적용의 실패가 아니라, 인식의 실패 즉, 앎 자체의 실패라고 지적한다. 그는 “현대 지식의 실패는 일차적으로는 윤리의 실패 즉 아는 것을 적용하는 문제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의 좀 더 깊은 원천과 열정을 추구하지 못하고, 우리의 지식이 창조하는 관계들—자기 자신, 이웃, 자연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사랑이 거하도록 하지 못한, 앎 자체에의 실패다”라고 지적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9). 팔머는 이러한 현대 지식의 이미지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제 시켰던 지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래 사랑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서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왜곡된 형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팔머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의 지식에 대한 이미지들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두셨던 하나님은 그들의 인간적 한계를 아셨음으로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한계 너머에 있는 지식을 향해, 즉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 것이라는 지식을 향해 손을 뻗쳤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팔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종교 전통의 언어와 지식 전통의 언어를 이끌어 낸다. 그의 따르면, 종교 전통의 언어로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최초로 죄를 범한 것으로 말할 수 있지만, 지식 전통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은 최초로 인식론적 과오를 범한 것으로 이해한다. 팔머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식의 종류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제시켰던 지식이다. 알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은 순종과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과 지배욕,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힘을 자신이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아셨고, 그들을 아시되 잠재성뿐만 아니라 한계 또한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존중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4-26). 팔머는 물론 “지식에 대한 갈망 자체가 죄나 인식론적 과오는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5).
팔머는 현대 지식의 이미지들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객관주의로부터 진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팔머가 지적하는 객관주의는 ‘소외된 인식 방식’을 의미한다. 객관주의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러한 객관주의는 인식 대상은 인식 주체와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팔머는 “지식은 주관적인 것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초월이다”라고 말한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의 지적을 통하여 인식의 주체와 인식 대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9에서 인용). 객관주의는 교육 행위를 사실의 권위에만 의존하는 가르침만을 가치 있게 여긴다. 이러한 교육 행위는 객관화된 사실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배우는 자는 단지 객관화된 사실만을 피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모방한다. 이러한 객관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배우는 자들이 진리에 대한 내적이고 영적 감각의 인도를 받으며 능동적으로 배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로 형성시킨다. 객관주의는 교육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형성적 영향력을 소외시킨다. 교육은 단지 사실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아관과 세계관에 형성적 영향력을 주어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 교육은 단지 어떤 내용이나 사실을 인지하는 교육이 아니라 영적 형성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교육 행위를 통하여 영적 시각에서 보다 더 깊고 넓은 자기 반응적 삶과 관계로 인도되어야 한다.
팔머에 따르면, “우리는 지식의 주관성의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다가 인식 주체를 삶의 그물망 자체로부터 끊어내어 버리고 말았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의 이러한 현대적 결별은, 인식의 주체로서의 자아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세계 사이의 공동체성과 책임성의 붕괴를 가져왔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26). 교육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을 분리시키는 객관적 실체들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교육이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진리’이어야 한다. 진리 안에서 무언가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인식의 대상의 삶으로 들어가며, 그것에게도 우리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정한 앎은 인식 주체와 그 대상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교육에서 전달해야 할 메시지인 진리에는 우리 모두가 추구하고 있는 그 본래 형상, 즉 우리가 그 안에서 창조되었던 공동체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 진리를 향해 교육한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론이나 객관적 실재를 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육이 객관적 실재를 파악하는 것만을 그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교육은 반드시 인식의 주체에게 인식 대상과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져야 한다. 이러한 교육관은 진정한 인식의 의미를 일깨운다. 팔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앎에서는, 인식 주체는 다른 인격, 피조물, 사물과의 충실한 관계의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참여자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언약을 서약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한다. 그럴 때 앎은, 본래 논리가 아니라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모든 분열된 존재를 재결합시킨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32).
팔머의 관점은 인간은 하나님, 다른 인간, 그리고 자연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팔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초월성과 관계성은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의 터전임과 동시에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 모든 가르침의 행위가 이루어지며 기독교적 가르침은 바로 이를 드러내 주고 경험하게 하는 행위이다. 이를 등한히 할 경우 인간은 교육으로 인하여 오히려 파멸을 경험한다. 팔머는 “교육이 초월성에 중심을 두지 않을 때, 교육은 자아와 세계 사이에 진정하고 자발적인 관계성을 창조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을 지적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12). 팔머는 교육의 영성 또는 초월성을 간과할 때 이성주의로 흐르게 됨을 지적한다. 이성 중심의 기독교 교육은 교육의 터전이 되는 인식론에도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팔머에 따르면, 이러한 교육은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그 동기는 사랑이 아니라 철저하게 호기심과 통제(curiosity and control)로 대치되고, 이로 인해 이용이나 조작(manipulation)과 같은 가치들이 주된 목적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교육 철학 안에서 지식이 인간의 변화의 수단이 아니라 이용과 착취, 이기적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은 진리를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리 결정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오류와 위험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교육은 앎을 추구하는데, 그 앎은 반드시 사랑의 행위를 수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팔머의 인식론은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만이 아니라 진리를 올바로 다가가는 모습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진리는 결코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이거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만남과 대화, 그리고 순종의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교육은 단지 어떤 것에 대한 객관성을 증명해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감성과 공동체, 그리고 초월성까지 이끄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지식의 성경적 시각은 감정, 행동과 함께 인식적 의미의 지식을 포함하는 성스러운 것이다. 지식은 알려진 사람이나 물체와 함께 하려는 개인적 헌신이나 의도를 의미하는 물리적 차원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안다는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순종, 믿음의 반응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성경적 지식은 하나님의 선포에 상관적, 경험적, 반사적 앎의 방법과 관계된다. 팔머는 성경적 지식은 자유하게 하는 지식이며 사랑의 삶으로 이끄는 지식이다. 자유 하게 하는 지식을 팔머는 고린도전서 8: 1-3에서 찾는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사랑의 관심과 관련된 것이 바로 이 지식이다. 신약에는 지식이나 진리가 반드시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엡 4:15; 요이 1장). 따라서 교육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다른 사람들, 피조물들의 사랑으로 어떻게 인도할 수 있는가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Palmer, To Know As We Are Known, 6-10).
나아가 팔머는 오늘날의 가르침이 인간 자신의 변화보다는 지적 증식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가르침이 기술이나 과정에 제한되는 한 결코 가르침의 주체인 인간의 변화를 기대 할 수 없다. 가르침의 주체는 과목이나 지식이 아닌 인간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르침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한다. 가르침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 기술이나 과정으로서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과 분리된 가르침이 아닌 인간의 변화가 동반된 가르침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