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칭(史稱) 건안삼신의(建安三神醫)라고 부른다. 건안은 동한의 마지막 임금 헌제(獻帝 : 서기 189 년 - 서기 220 년)의 연호이다. 그런데 화타와 장중경과 동봉은 모두 헌제때 사람이므로 건안삼신의라고 칭했다.
그중 동봉은 여산에 은거하며 백성들을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킨 인구에 회자하는 행림가화(杏林佳話)를 남겼으며 장중경은 위대한 의학저작이며 한약치료방법의 경전인 상한잡병론을 저술하여 후세 사람들이 의성(醫聖)이라고 불렀으며 화타는 민중속에 뛰어들어 중원과 강회(江淮)평원을 두루돌아다니며 내과,외과,부인과,소아과의 임증진치(臨證診治) 중 많은 기적을 낳았다.
중원(中原)은 황하의 중류와 하류에 걸친 땅으로 하남성 대부분과 산동성 서부 및 하북성 남부와 산서성 남부를 포괄한 지역이며 강회평원은 양자강과 회수지역으로써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의 평원을 일컫는다.
화타는 임상마취약인 마비산(麻沸散)을 만들어 내어 개복수술까지 하여 죽을 사람을 살렸다. 화타는 후세 사람들로부터 "화타재세(華타再世)" 또는 "원화중생(元化重生)" 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다시 말하면 "화타로 인하여 두 세상을 살게 되었다" 는 뜻이다.
화타의 이름은 부(敷)이며 자는 원화이다. 동한 말년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 현재 안휘성 호현(毫縣)) 의 일개 보통 사족(士族) 가정에서 충제(沖帝) 영희(永熹) 원년(서기 145 년)에 태어나 헌제 건안 13 년(서기 208 년)에 63 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화씨 가족은 본래 망족(望族)이었는데 후에 한 가족이 초현 이북 십리쯤 되는 풍경이 수려한 소화장(小華庄)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화타의 가족 중 똑똑한 사람은 화타밖에 없었으므로 온 가족들은 화타에게 큰 희망을 걸고 살았다. 그래서 화타의 이름 타(陀)는 내부재지의(乃負載之意)가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책임을 등에 짊어진다." 는 뜻이며 또 하나의 이름 부(敷)는 부포(敷布)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넓게 퍼뜨린다." 는 뜻이다. 화타의 자(字)는 원화(元化)인데 생육, 발생, 양육, 육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화타는 어렸을때 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상서(尙書)와 시경(詩經)과 주역(周易)과 예기(禮記)와 춘추(春秋)등 고적을 소리내어 읽어 외웠다. 그는 높은 문화교양을 갖추었다. 화타는 성장과정 중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외에 품질이 우수한 약재의 고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초현에서 여러가지 품질이 우수한 약재가 생산되었다. 예를들면 호작(毫芍)과 호국(毫菊)은 옛날부터 품질이 좋기로 천하에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화타의 고향은 수륙교통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그래서 초현은 옛날부터 한약재의 집산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도 초현의 통구대가(通衢大街)에 한약재창고가 곳곳에 널려있다.
유년시절부터 화타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열심히 읽었으며 동시에 의학에도 관심이 있었다. 봉건 사회속에서 대개 글공부한 사람들은 벼슬길에 올라 입신영달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화타는 보통 글공부한 사람들과 달리 종신 의사로써 지내기 원하는 뜻을 바꾸지 않했다.
화타의 청소년 시절은 동한 환제와 영제 때 임으로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의 권력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조정의 기강은 문란했고 비합법적인 정치를 했으며 뇌물을 받고 관직과 작위를 팔아 먹고 뇌물을 받는 것이 공공연하게 행하여졌다.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가혹하게 빼앗아갔다. 그래서 백성들을 고난속으로 몰아 넣어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였다. 화타는 관가의 부패와 민생고를 실제로 자기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그리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의술로써 세상을 구하는 길을 택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조정에서 유식한 관리들은 화타의 품행과 학식을 높이 평가해주고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동한 헌제(憲帝) 때(서기 190 년 2 월) 한대삼공(漢代三公)의 하나인 태위(太尉) 황완(黃琓)은 당시 조정의 군정대권을 쥐고 있는 조정의 중신이었는데 초야에 묻혀 있는 화타를 예를 갖추어 불러서 벼슬을 시키려고하였다. 그러나 화타는 벼슬에는 아예 흥미가 없다고 사절하였다.
또 패국 재상 진규(陳珪 : 서기 192 년- 서기 197년)가 화타를 효염(孝廉)의 관직에 천거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화타의 굳은 결심과 고상한 품덕을 알 수 있다.
화타는 자유자재로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강호낭중(江湖郎中)으로써 행의하는 것을 더 좋아하였다. 화타는 행의하며 스승없이 고의학전적을 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임상실천 중 부단히 의학을 스스로 연구하였다. 그당시 이미 황제내경과 81 난경과 신농본초경등 의학전적이 세상에 나왔으며 망(望), 문(問), 문(聞), 절(切) 사진(四診)원칙과 도인(導引)과 침구와 약물등 진료의 기본수단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널리 운용되었다.
전국시대의 고대 의가(醫家) 편작(扁鵲)과 서한의 창공(倉公)과 동한의 부옹(부翁)과 정고(程高)등과 같은 의사들은 영리와 부귀를 저버리고 죽을때 까지 의사로써 세상 사람들을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여 세상사람들의 가슴을 울려 주었다. 화타는 다년간 의료실천 중 부동병정(不同病情)을 구분하고 장부의 병위(病位)와 대증시치(對證施治)에 풍부한 경험을 했으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군리(軍吏) 두명이 신열과 두통이 있어 치료하기 위하여 화타를 찾아왔다. 한 사람의 이름은 예심(倪尋)이며 또 한사람은 이연(李延)이다. 화타가 두명의 군관을 사진(四診)을 통하여 진맥 해본 결과 두명의 군관은 똑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화타는 이연(李延)에게는 발한약(發汗藥)을 쓰고 예심(倪尋)에게는 사하약(瀉下藥)을 썼다. 두명의 군관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똑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두명의 환자에게 각각 다른 약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약후 병이 모두 완치되었다.
화타 옆에서 화타가 치료하는 것을 지켜보고 서있던 화타의 제자 오보(吳普)와 번아는 화타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화타는 "표면적인 증상은 비록 같을지라도 병인(病因)은 제각각 다르다. 이연은 수냉(受冷)으로 인하여 생긴 표증(表證)이므로 발한법으로 치료했고 예심은 상식(傷食)으로 인하여 생긴 이열증(裏熱證)이므로 사하시키지 않으면 치료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하약을 썼다." 고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어느 날 화타는 우체국장 직을 맡고 있는 돈자헌(頓子獻)의 질병을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그러나 화타는 다시 진맥을 하고나서 "당신의 병은 치유되었으나 원기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오. 원기가 완전히 회복 될때 까지 정양(靜養)이 필요하니 방사(房事)를 삼가해야 됩니다. 만일 방사를 참지 못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고 돈자헌에게 경고해 주었다.
그러나 그무렵 친정에 머물러 있던 돈자헌의 부인이 남편의 병이 완치되었다는 소문을 인편으로 듣고 너무나 기뻐서 백리길을 걸으며 때로는 뛰기도 하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그날 밤 돈자헌은 멀리 떨어져 있다가 오래간만에 만난 부인과 방사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돈자헌은 부인을 만나 방사를 하고 난 3 일 후에 과연 화타의 말대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어느날 화타가 강소성 염독(鹽瀆)에 도착되어 큰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술자리에서 우연히 엄흔(嚴昕)이란 사람과 합석하게 되었다. 화타는 엄씨의 얼굴색이 비정상임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화타는 엄씨에게 "당신의 몸에 현재 어떤 증상을 느끼지 못합니까?" 하고 물었다. 엄씨는 "아니오! 나는 현재 매우 건강합니다. 아무런 증상도 느끼지 못합니다." 고 화타에게 대답하였다.
화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에게 모종의 큰 질병이 잠복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얼굴색이 비정상입니다. 우선 당신은 금주(禁酒)부터 해야 됩니다." 고 엄씨에게 말했다.
엄씨는 화타의 말을 듣고 기분이 잡쳐 술맛을 잃었다. 그리고 엄씨는 화타의 말을 반신반의하였다. 술파티가 끝나고나서 엄씨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머리가 몹시 어지럽기 시작하였다. 마부에게 마차를 빨리 몰게 하여 집에 일찍 도착되었다. 그날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에 과연 화타의 말대로 엄씨는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또 어느날 화타는 병상에 누어있는 서씨(徐氏)를 왕진하러 갔다. 서씨는 "이웃 고을에 살고있는 의사를 초청하여 위완(胃脘)에 침을 맞은 후 부터 기침이 그치지 않고 계속나옵니다. 그리고 마음이 번거롭고 답답하고 불안하여 자리에 편안히 누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 화타에게 말했다.
화타는 서씨를 진찰한 후 "틀렸오! 침을 위완에 찌른것이 아니고 간장(肝臟)을 찔렀오! 만일 음식 맛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5 일 후엔 예측을 불허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고 말했다. 화타의 말대로 서씨는 5 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어느 군수가 의난증(疑難症)에 걸렸다. 여러 의사를 초청하여 치료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화타를 초청하여 치료를 받았다. 환자의 가족들은 화타에게 병정을 설명하고 나서 치료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화타는 환자의 병실로 들어가 환자에게 여러가지 질문을하며 오만불손하게 말하고 교만한 태도를 보이며 엄청나게 크나큰 보수를 요구하였다. 그리고나서 화타는 치료도 하지않고 떠나가 버렸다. 군수는 참다 못해 크게 화를 내고 사람을 파견하여 화타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화타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군수는 너무 화를 냈기 때문에 검정색 피를 몇사발 토하고나서 병이 완전히 치유되었다. 즉 화타는 희노우사비공경(喜怒憂思悲恐驚) 등 정지(情志) 활동을 조절시켜 군수의 질병을 치료한 것이다.
"성노방능제병(盛怒方能除病)" 이란 심리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한 가장 오래된 구체적인 병상기록이다. 즉 이와같은 심리요법은 "환자로 하여금 화를 내게 만들어 병을 치료하는 요법" 을 말한다.
화타는 민간치료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 황달병(黃疸病)이 대유행했었다. 그는 3 년간 인진호(茵陳蒿)의 약효를 열심히 반복 시험하였다. 그리고 춘삼월 인진호의 새로 돋아난 어린잎 만 황달병의 치료에 사용됨을 발견하였다. 인진호의 어린잎으로 수 많은 황달병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화타로 인하여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생겼다.
다시말하면 "같은 쑥이라도 3 월엔 인진이요 사월엔 "호"이다. 단단히 기억하여 후세 사람에게 전하여라. 삼월 인진은 병을 치료하지만 5월과 6월의 인진은 땔나무로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는 뜻이다. 여기서
화타는 또 온탕열부(溫湯熱敷)로 전갈(全蝎)에 쏘인 통증을 해소시켰다. 또 청태(靑苔)를 고약으로 만들어 말벌에 쏘인 통증과 부기를 가라앉혔다. 마늘을 잘게 다진 후 식초와 함께 복용하여 기생충을 박멸시켰고 자소(紫蘇)로 생선과 게의 식중독을 치료했다. 또 백전(白前)으로 기침병을 치료했으며 황정(黃精)으로 허로(虛勞)를 치료했다.
화타는 간단하게 단방(單方)으로 쉽게 치료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신속한 효과를 보게 하였다.
화타는 중년 이후 중원동란(中原動亂) 때문에 서주(徐州)로 이주하였다. 서주는 강회(江淮)의 중심지이며 여섯개의 군(郡)과 62 개의 성(城)과 읍(邑)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인구는 2 백여 만명이 살고 있었다. 그당시 서주의 수부(首府)는 팽성(膨城 : 현재 강소성 서주)이었으며 화타는 팽성 부근의 패국(沛國 : 지금 강소성 패현)에 살았다. 그당시 전국을 12 주로 나누고 각주에 자리(刺吏) 한 명씩 두었다. 자리는 매년 8 월 소속군(郡)과 국(國)을 순시하였다.
화타의 행의(行醫)의 발자취는 서주,예주(預州), 청주(靑州), 연주(兖州)등 각지에 두루 남아있다.
최근 역사학자들이 화타의 의안(醫案)을 보고 탐사한 결과 팽성을 중심으로 동쪽은 감능(甘陵 : 현재 산동성 임청(臨淸))과 염독(鹽瀆 : 현재 강소성 염성(鹽城))에서 부터 시작하여 서쪽은 조가(朝歌 : 현재 하남성 기현(淇縣)) 까지 남쪽은 광능(廣陵 : 현재 강소성 양주(揚州)) 까지 서남쪽으로는 초현(譙縣 : 현재 안휘성 호현(毫縣)) 까지 다시 말하면 강소성, 산동성, 하남성, 안휘성 등 광대한 지역을 행의를 하며 걸어서 돌아 다녔다. 대개 수 백 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화타는 행의를 하며 직접 채약(采藥)도 함께 하였다. 채약지역은 조가,패국,풍현과 팽성의 와우산(臥牛山)과 노남산(魯南山)과 미산호(微山湖) 등지였다. 화타의 행의 지역은 광활하며 백성들과 동고동락 하였으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설을 많이 남긴 의사였다는 것은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이와같이 수 십년 동안 행의 실천을 통하여 화타의 의술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되었다. 화타는 양생법과 방약과 침구와 외과수술에 숙련했으며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등 임증시치와 진단에 있어 정확했고 방법 또한 간단했으며 치료효과 또한 신속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신의(神醫)" 라는 영예를 얻었다.
그의 치료방법은 탕약(湯藥), 환(丸), 산(散), 침자(針刺), 구설(灸焫), 방혈(放血), 냉수요법, 열수요법, 심리요법 등을 병용하였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화타전에 화타의 의술에 대하여 공적이 우수한 것으로 평하고 서술되어 있다.
또 양생방면에 있어서 훌륭하고 익숙하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효양성지술(曉養性之術), 시인이위연차백세이모유장용(時人以爲年且百歲而貌有壯容)." 다시말하면 "화타가 가르쳐 준 양생법을 따른 사람들은 그 당시 나이는 100 살 인데도 혈기 왕성한 용모를 지녔다." 는 뜻이다.
또 용약(用藥)에 있어서도 정확하고 적절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정방약(又精方藥), 기요질(其療疾), 합탕불과수종(合湯不過數種), 심해분제(心解分劑), 불복칭량(不復稱量), 자숙편음(煮熟便飮), 어기절도(語其節度), 사거첩유(舍去輒愈)."
다시말하면 "질병 치료에 필요한 방약이 정확하고 탕의 종류도 많지 않으며 한약의 조제량도 잘 알기 때문에 두번 다시 저울에 다는 법이 없다. 탕약도 알맞게 삶아 마시기 편리하고 탕약 달이는법도 간단하며 탕약을 복용하고 나면 병이 즉시 치료된다." 는 뜻이다.
또 화타의 침구술에 대하여 "침구간첩(針灸簡捷), 약당침(若當針), 역불과일(亦不過一), 이처(二處), 하침언(下針言), 당인모허(當引某許), 약지(若至), 어인(語人), 병자언(病者言), 이도(已到), 응편발침(應便拔針), 병역행차(病亦行差)."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화타의 침구법은 간단명료하다. 화타가 침을 놓을때 한 두곳이면 족하다. 그리고 침을 놓으면서 화타는 '득기가 오면 나에게 말해 주시오.' 라고 말한다. 그러면 환자는 '득기가 이미 도달되었읍니다.' 고 말한다. 침을 뽑자 마자 환자는 즉시 병에 차도가 있음을 스스로 안다." 는 뜻이다.
화타의 신기한 외과수술에 대하여 "할부복배(割剖腹背), 추할적취(抽割積聚), 단장전세(斷腸전洗)"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칼로 배와 등을 절개하여 적취를 떼어내고 창자를 갈라 세척했다." 는 뜻이다.
삼국지 중에 16 개의 화타의 진료부(診療簿)가 있으며 화타별전(華陀別傳)에 5개, 갑을경(甲乙經) 자서(自序)에 한개, 태평광기(太平廣記)에 4개 도합 26 개의 진료차트가 남아있다. 화타는 선진(先秦)과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을 망라한 의가(醫家)들 중에서 가장 많은 진료 기록을 남긴 의사이다.
화타의 병력(病歷) 차트를 보면 치료범위 또한 광범하여 열성병, 내장병, 정신병, 비만병, 기생충병, 외과병, 소아과병, 산부인과병과 의료체육 외에 외상, 장옹(腸癰 : 충양돌기염), 골절, 침오(針誤), 기유(忌乳), 사태(死胎), 소아이질 등에 관한 것들이 포함되어있다.
화타가 백성들에게 자신의 깊이 통달한 의술을 펼칠때 하필이면 중원동란이 발생하였다. 조조가 화타를 초청하였다. 원래 조조는 일찍부터 두풍병(頭風病)이 걸렸다. 중년 이후 병세가 점점 악화되었으며 일단 두풍병이 발작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눈앞이 캄캄해지기도하고 머리가 어지럽고 두통이 심했다. 세상에서 유명하다고 이름이 나있는 모든 의사를 초청하여 치료해 보았으나 효과가 전혀 없었다.
화타는 조조의 초청을 받고 조조를 진료하였다. 화타는 조조의 격수(膈腧)에 침자하였다. 잠시 후 조조의 머리는 맑아지고 눈이 밝아지며 통증도 물론 사라졌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였다.
화타는 조조에게 "당신의 병은 뇌부(腦部)의 고질병입니다. 즉시 병근(病根)을 제거시킬수 없습니다. 장기간 치료해야 됩니다. 그러면 수명을 연장 시킬수 있읍니다." 고 설명했다.
조조는 화타의 말을 들은 후 화타가 고의적으로 교활한 술수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매우 불쾌하였지만 조조는 조금도 얼굴에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타를 조조의 관저에 머물게 하고 동시에 백성들의 치료를 허락해 주었다. 이때가 건안 7 년(서기 201년)이었다.
이때부터 화타는 조조의 속박을 받고 살기 시작하였다. 화타는 권력밑에서 노예생활이나 다름없이 자유를 잃어버린 채 생활했다.
서기 208 년 조조가 조정을 지배하게되었으며 스스로 승상(丞相)이되었다. 그리고 조조는 군정대권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조조는 화타에게 모든 개인적인 업무를 중단하고 오직 부중(府中)에 만 장기간 머물도록 명하였다. 항상 조조의 옆에서 조조의 주치의사로 남게 하였다. 강호낭중으로써 백성들을 질병으로부터 구제하려던 화타의 종신포부는 조조가 화타로 하여금 바깥 세상과 단절시킴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화타는 이제부터 오직 조조만을 치료하는 주치의가 되었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서주의 도겸(陶謙)을 토벌하였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조조가 젊었을때 중원동란이 발생하였다.그 당시 조조는 부하들을 시켜 자기 부친 조숭(曺嵩)을 초현으로 부터 연주(兗州)로 피난시켰다. 피난가는 도중 서주를 지나갈때 도겸이 부하들로 하여금 조조의 아버지 조승을 호송케하였다. 호송 대장이 마차에 잔뜩 싣고 가는 조승의 재물에 탐을내어 조승을 태산에서 죽인 후 재물을 가로챘다.
조조는 사연을 묻지않고 분풀이를 하기 위하여 무조건 서주의 도겸을 토벌했는데 그때 수많은 무고한 백성들을 사살했다. 수 만명의 백성들이 조조의 공격을 받고 참살당했다. 이때 죽은 시체는 길을 막았고 회수(淮水 : 산동성에 있는 강) 강물이 핏물로 변했으며 시체로 막혀 잘 흘러내리지 않했다. 조조는 지나치게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초능(譙陵)과 하구(夏丘)등 여러지역에서도 대량 학살을 감행하였다.
서주는 화타가 죽기전 까지 행의하며 살던 고장이다. 그러므로 화타는 자기가 사랑하는 그 고장 백성들과 동고동락했기 때문에 내심 어찌 분개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화타는 조조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화타는 고향방문을 위한 휴가를 조조에게 부탁하였다. 한번 고향에 내려간 후 화타는 조조에게 돌아가지 않했다. 조조는 몇 차례 편지를 화타에게 보내어 조정으로 빠른 시일내에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화타는 자기 부인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치료를 해 주어야 되기 때문에 조정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거짓 핑계를 댔다.
조조는 매우 화가났다. 조조는 화타의 구실을 조사해 보기 위하여 전사(傳使)를 파견했다. 화타의 거짓말이 탄로되어 화타는 허창(許昌)에서 붙잡혀 호송당했다. 화타는 엄형을 받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 조조가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에 대하여 화타는 반감을 가졌으며 지조가 굳세어 조조에게 굴하지 않았다. 조조는 화타가 자기말에 순종하지않고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더욱 노하여 화타를 죽이려고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큰 일을 조조와 더불어 항상 논하는 중요한 신하 순욱(荀彧)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진간(進諫)하였다. "화타의 의술이 고명한 것은 자타가 공인합니다. 그만한 의술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적고 천하백성들의 질병을 구제해 주었으므로 화타에게 한번만 관용을 베푸시옵소서!" 하고 조조에게 간하였다. 그러나 순욱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단독으로 일을 처리했으며 결국 화타를 옥중처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화타가 죽음을 앞두고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일생 숙원을 잊지 못하고 청낭경(靑囊經)을 옥중에서 열심히 썼다.
간수가 이 책을 보더니 "차서전세(此書傳世), 가활창생(可活蒼生)" 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이 세상에 전하여지면 수 많은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다." 는 뜻이다.
화타는 이 책을 옥중 간수에게 전하여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간수는 이 책을 화타로 부터 받을 경우 죄를 뒤집어 쓸 것을 두려워하여 받지않았다. 화타는 분한 나머지 청낭경을 불속에 집어넣어 태워버렸다.
후에 조조의 두풍병이 몇차례 발생하였다. 어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조조는 화타를 사형에 처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조조는 "타능유오질(陀能愈吾疾), 연불위오근치(然不爲吾根治), 상이차요협(想以此要挾), 오불살타(吾不殺陀), 병역난유(病亦難愈.)" 라고 탄식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타가 나의 병을 고칠 수 있었는데 그때는 화타가 나의 병의 뿌리를 뽑을성 싶지 않했다. 화타가 나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내가 했었더라면 나는 화타를 죽이지 않했을 것인데! 화타가 나에게 말했던 것 처럼 나의 병은 고치기 힘든가 보구나!" 라는 뜻이다.
조조가 화타를 사형에 처한 바로 그해 겨울 조조의 사랑하는 아들 조충(曺沖)이 중병에 걸렸다. 어의들이 치료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이 조충은 죽고 말았다. 조조는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난 후 "오회살화타(吾悔殺華陀), 재사차아활활병사(才使此兒活活病死)." 라고 말하며 또 다시 후회하였다.
다시 말하면 "내가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하노라! 화타는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살릴 수 있었으련만!" 하고 조조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다.
화타는 살아 생전에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중 팽성에 사는 번아(樊阿)와 광능(廣陵)의 오보(吳普)와 서안(西安)의 이당지(李當之) 등은 모두 세상에 이름을 떨친 명의가 되었다. 오보는 화타의 유방(遺方)과 그 당시 각가의 본초서를 참고하여 오보본초(吳普本草) 6 권을 집필했으며 번아는 침술로 이름을 떨쳤고 화타가 지어준 칠엽청점산(漆葉靑粘散)을 복용한 후 일백살 까지 수를 누렸다 고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이당지는 이당지본초(李當之本草) 1권과 이당지약록(李當之藥錄) 6권을 저술하였다. 오보본초는 서기 208년과 239년 사이에 저술되었다. 이와같이 화타의 의술이 제자들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지게 되었다.
만년에 화타는 의서 편찬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화타는 청낭경과 침중구자경(枕中灸刺經)과 관형찰색삼부맥경(觀形察色三部脈經)과 화타방(華陀方)과 화타내사(華陀內事) 등 많은 저서들을 편찬했는데 도중에 모두 아깝게 손실되고 말았다. 다만 일부 내용들이 기타 의서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화타는 의료 각과의 임증에 정통한 의술을 갖고 있었다. 특히 외과수술에 능통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화타를 "외과수술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화타의 외과수술은 한의학 사상 위대한 돌파구였다.
화타 이전에 저술된 "사기의 편작전" 에 보면 "상고명의유부(上古名醫兪부), 능전세위장(能전洗胃腸), 수조오장(漱滌五臟), 익뇌수(溺腦髓)."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옛날 옛적에 유부라는 명의가 있었는데 그는 환자의 위장을 씻어냈으며 오장을 헹구어 내었다. 그리고 뇌수를 손으로 어루 만졌다." 는 뜻이다.
또 열자(列子)의 탕문(湯問)에 보면 "편작시행과환심술(扁鵲施行過換心術)."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편작은 환심술을 시행한 적이 있었다." 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전설들은 모두 신기한 전설들이다. 그러나 고인들이 의학에 대한 모종의 희망을 이상과 같은 전설속에 반영시켰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화타의 사적(史蹟)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역사적으로 명확한 근거가 있다.
삼국지의 화타전에 보면 "약병결적재내(若病結積在內), 침약소불능급(針藥所不能及), 당수고할자(當須刳割者), 편음기마비산(便飮其麻沸散), 수유편여취사(須臾便如醉死). 병약재장중(病若在腸中), 편단장전세(便斷腸湔洗), 봉복고마(縫腹膏摩), 사오일차(四五日差), 불통(不痛), 인역불자오(人亦不自寤), 일월지간(一月之間), 즉평복의(卽平復矣)."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만일 적이 체내에 있을 경우 침과 약으로 치료되지 않으면 마땅히 수술을 해야 되는데 환자에게 마비산을 복용시키면 잠깐 후에 취한 사람 처럼 전신마비가 온다. 그리고나서 수술을 시행한다. 만약 병이 장중에 있으면 장을 절개하여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나서 창구를 실로 꿰맨 후 고약을 발라주면 4,5 일 후에 창구가 유합되고 통증이 없어지며 깨어날때 까지 기다려 계속 조양하면 일 개월 내에 완전회복된다." 는 뜻이다.
화타는 먼저 마비산으로 전신마취를 시켜 병자를 혼수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 수술을 시행한다. 수술이 끝나면 창구를 봉합하고 고약을 발라주면 4,5 일 후 창구가 유합된다.
외과수술과 관련된 병례(病例)가 두개 있다.
첫째 비장절제(脾臟切除) 수술이다.
어떤 환자가 복중에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 있다. 10 여일 사이에 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털과 눈썹끝에 난 털이 모두 빠져버렸다. 화타가 진맥해 본 결과 이 환자의 비장이 절반정도 썩어 있었다. 화타는 개복수술을 단행하여 비장의 썩은 부분을 칼로 도려내 버렸다. 그리고 창구를 봉합한 후에 고약을 발라주었다. 그리고나서 탕약으로 조리하였다. 질병은 백일 후 완치되었다.
둘째 종류할제술(腫瘤割除術)이다.
어느 사대부(士大夫)가 체내에 남에게 말못할 불편한 통증이 있었다. 화타는 환자를 진단한 후 "복강내에 종괴(腫塊)가 있으므로 개복수술을 하여 종괴를 절제하여야 됩니다. 신체가 허약하므로 수술시 기혈이 좀 상하나 곧 치유되며 수술하고 나서 조리를 잘 하면 통증없이 수명은 불과 10 년 정도 더 살 것입니다. 만약 수술하지않고 조리하지 않더라도 통증을 수반하며 10 년은 살수 있읍니다." 고 환자에게 설명했다.
화타의 설명을 듣고 난 환자는 아픔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기 때문에 화타에게 수술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화타는 칼을 손에 쥐고 환자의 배를 갈라 종류를 떼어냈다. 과연 10 년 후 환자는 죽고 말았다. 모든것은 화타가 말한 그대로였다.
화타는 진한(秦漢) 이후로 전래되어 온 한의학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각과에 정통하였으며 그중 특별히 외과수술에 정통하였다. 역사상 전무한 외과수술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여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하였다. 마비산을 만들어 수술을 시행하기 전에 환자에게 복용시켜 전신 마취를 시켜 통고를 없애주고 수술을 시작하였다.
화타는 환자를 돌볼때 한약을 사용하고 침을 사용했으며 뜸도 사용하고 질병치료를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두 사용하였다. 5장 6부의 질병에 대하여 화타는 한약과 침으로 치료되지 않을 경우 마비산을 술에 타서 환자에게 복용시켜 완전 마취시킨 후 개복수술을 단행하였다. 궤양이 있는 환처를 칼로 도려내고 장위의 진부한 더러운 부분을 씻어낸 다음 뽕나무 껍질에 한약을 첨가시켜 만든 상피선(桑皮線)으로 창구를 봉합하고 신고(神膏)라는 고약을 발라준 다음 열흘 내지 보름동안 조양하면 환자의 건강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화타는 중국 한의학 사상 맨처음으로 마비산을 사용하여 개복수술을 단행한 외과수술의사였다. 세계약학사(世界藥學史 : History of world Pharmacology)의 저자 Lawall 박사는 "고대 아라비아에서 마취제를 사용하여 수술을 시행했었는데 그때 사용되었던 마취제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었다. 중국 명의 화타는 외과수술에 정통한 의사였다. 화타는 중국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이다." 라고 그의 저서에 기록해 놓았다.
화타의 마취술이 조선과 일본과 모로코와 유럽등지의 의학계에 전파되었다. 19 세기 초에 서양에서 환자에게 전신마취를 시켜 수술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화타의 외과수술에 비하여 1600 년 후의 일이었다. 마비산의 발명으로 화타는 세계의학계에 크나큰 공헌을 한 셈이다.
고대 문명국 중 인도에서 마취작용을 하는 약물인 대마즙(大麻汁)을 발견했다. 신농본초경에 기재된 마취약물 중에는 마황(麻黃), 오두(烏頭), 부자(附子), 양척촉(羊躑躅) 등이 있다. 단 수술하기 전에 전신마취 처리를 해야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의학계에서 가장 오래된 병상기록에 기재된 마취약은 마비산이 처음이다.
1805 년 일본의 화강청주(華岡靑洲)씨가 화타의 마비산 내용을 연구하여 한약처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처방에 만타라마취제(蔓陀羅麻醉劑)라고 이름을 붇혔다.
처방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타라화 6전, 천궁 3전, 향백지 1전, 전당귀 1전, 오두 3전, 초천남성(炒天南星) 1전 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강청주씨는 자기 모친과 자기 부인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실험하여 보았다. 화강씨의 모친과 부인은 화강씨의 실험을 성공시켜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화강씨의 어머니는 실험도중 약물중독으로 사망했고 부인은 장님이 되어버리는 불행을 만났다. 자기 어머니와 부인을 실험대상으로 실험 연구한 것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열매를 맺어 결국 성공하였다. 1805 년 자기가 제조한 "신마비산" 으로 유방암 환자를 마취시켜 유방절제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하여 화강청주씨는 국제의학계의 갈채를 받았다.
어떤 학자들은 마비산의 주요성분은 압불로(押不蘆), 마분(麻賁), 뇨양화(閙洋花) 등 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송나라 때 두재(竇材) 와 원(元)나라 때 위역림(危亦林)은 마비산의 약물조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고 추측하고 있다. 원나라 때 전쟁에서 외상과 탈구골절(脫臼骨折) 등으로 다친 기마병사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조정의 태의원내에 정골(正骨) 겸 금족과(金镞科)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상과(傷科) 치료의 발전을 기하였다.
이 무렵 위역림은 세의득효방(世醫得效方 : 서기 1343 년) 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존하는 골과(骨科)에 관한 의서 중 가장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책으로써 사지골절과 탈구 및 질타손상과 전상(箭傷) 및 정복법(整復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수기요법과 기계요법도 첨가되어 있다. 또 마취법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데 화타 이후 전신마취법을 기술해놓은 가장 오래된 책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기록되어 있는 수성산(睡聖散)과 초오산(草烏散)과 몽한약(蒙汗藥)과 화타의 마비산이 서로 비슷할 것이다고 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화타가 발명한 마비산의 약물 조성속에 오두와 부자와 마분(麻賁)과 양금화(洋金花) 등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마비산의 약물조성은 아직까지 풀려지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서방 국가에서는 1846 년에 화학자 Charles Thomas Jackson(서기 1805 년 - 서기1880 년)의 도움으로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 근무하던 William Thomas Green Morton(서기 1819 년 -서기 1868 년)이란 치과의사가 에테르(Ether)를 사용한 마취에 성공하였다. 화타의 마비산에 비하면 에테르의 발견은 1600 여년 후 였다.
사학자들과 의학가들이 역대 사서(史書)와 외과전서를 포함한 모든 의적을 탐색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마비산의 약물조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록 마비산의 약물조성등은 문헌상의 자료부족으로 확인해 보기 어렵지만 화타의 마비산이 세계 약물 중 전신마취시킬수 있는 최고(最古)의 선례를 남겼다. 현대 서양 의학계에서 화타를 "고대 동방의학의 대표" 라고 칭한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Hippocrates)와 필적 할만 하다.
화타는 침구술에 있어서도 또한 독창적인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특징은 취혈(取穴)이 정묘하고 긴요하며 침을 깊이 찔러 치료하였으며 환자가 느끼는 침감(針感)도 크고 통증도 즉시 경감되며 치료효과가 신속하였다.
조조의 두풍병도 화타가 격수 한 점에 침자하여 치료하였다. 기타 질병치료에 있어서도 몇개의 혈에 만 침을 깊이 찔러 치료하였다.
침구치료 방면에서도 화타는 조예가 깊었다. 삼국지 화타전에 보면 "화타적침화구취혈심소(華陀的針和灸取穴甚少), 단요효명현(但療效明顯), 약당구(若當灸), 불과일(不過一), 이처(二處), 매처불과칠팔장(每處不過七八壯), 병역제(病亦除). 약당침(若當針), 역불과일이처(亦不過一二處)."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화타가 침이나 뜸을 뜰때 취혈은 간단하지만 치료효과는 컸다. 뜸을 뜰때 보면 불과 한 두점 만 취혈한 후 한 점에 각각 일곱장이나 여덟장씩 뜸을 뜬다. 그런데도 병이 잘 치유된다. 침을 놓을때도 불과 한 두점 만 사용한다." 는 뜻이다.
협척혈(夾脊穴)은 화타가 처음 발견한 침점이다. 양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걷는 환자에게 화타는 협척혈 열 군데를 취해서 구(灸)를 하여 치유하였다.
다시 말하면 "척추 중앙선에서 옆으로 일촌되는 곳에 상하 일직선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흡사 줄다리기 하는 모양과 비슷하다. 후세 의가에서 인체의 배부 제 7 경추 극돌기 옆 5 푼 되는 지점에서 제 5 요추 극돌기 옆 5 푼 되는 지점 까지 상하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좌우 각각 17 점이므로 모두 합하면 34 점이다. 이 침점을 현대인들은 화타협척혈이라고 부른다. 반신불수와 폐결핵과 천식과 위통과 간병과 요배통과 신경쇠약 등을 치료해 준다." 는 뜻이다.
사료에 보면 "인고제척(因古制尺), 촌소어금(寸小於今), 화타언(華陀言), 처협척일촌(處夾脊一寸), 비오(非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옛날의 촌수는 지금의 촌수 보다 작다. 그래서 화타가 말한 척추 중앙선에서 옆으로 일촌 떨어진 곳은 틀린 것이 아니다." 는 뜻이다.
화타의 침구술은 화타의 제자들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여졌다. 그중 번아는 화타로 부터 침구치료법을 잘 배운 제자 중 하나이다.
내과의 진료에 있어서도 화타는 정확히 판단하여 병을 예측하는데 귀신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매평(梅平)이라는 군관이 신병 때문에 사직하고 고향인 광능(廣陵 : 현재 강소성 양주(揚州))으로 이백리 길을 걸어 내려갔다. 밤이 깊었으므로 친척집에서 하루를 묵어 갔다. 공교롭게 그 집에서 화타를 만났다. 매평은 화타에게 질병치료를 부탁하였다. 화타는 매평의 얼굴색을 살펴보고 나서 병이 고황(膏肓)으로 이미 들어간 것을 알았다.
그래서 화타는 "군여조래견아(君如早來見我), 병당불치여차(病當不致如此), 금난의(今難矣)! 유유진쾌환가(柔有盡快還家), 상능여가인상견(尙能與家人相見), 오일내가보무려(五日內可保無慮)." 라고 매평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나를 일찍 만났더라면 이토록 병정이 엄중하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고치기 힘듭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만나 보십시요. 대략 5 일이 지나면 모든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는 뜻이다.
매평은 화타가 말하는 것을 모두 잘 들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여 고향집에 도착한 후 매평은 온 집안 식구를 불러 모아 놓고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이성(李成)이라고 부르는 군리(軍吏)가 계속 그치지 않고 기침을 한다. 어떤때는 가래속에 고름과 피가 석여 나온다.
화타가 이성을 관찰 한 후 "군지병(君之病), 사약폐병(似若肺病), 실위장옹(實爲腸癰), 금유산약이전(今有散藥二錢), 복후당토농혈이승(服後當吐膿血二升), 호자장양(好自將養), 월내즉유기색(月內卽有起色), 일년내거전유(一年內可痊愈). 연차질난이근치(然此疾難以根治), 십팔년후당복발(十八年後當復發), 금령유산약이전(今另有散藥二錢), 호자보존(好自保存), 십팔년후복발시복하(十八年後復發時服下), 잉능치유(仍能治愈). 약실약(若失藥), 무망의(無望矣)." 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병은 폐병과 비슷한데 장염입니다. 오늘 산약 2 전을 복용하면 고름이 섞여 있는 피를 두 되(升)쯤 토해낼 것 입니다. 그후 한 달 동안 잘 보양하면 얼굴색이 좋아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년 후엔 완전히 정상적인 건강을 회복할 것입니다. 당신의 병은 뿌리까지 뽑기는 어려운 병입니다. 그래서 18 년 후에 다시 재발할 것이며 그때도 이번과 마찬가지로 내가 처방해 준 산제를 2 전만 잘 보관해 두었다가 복용하면 건강이 회복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처방해 준 약을 잃어버리면 병이 회복될 희망이 없을 것입니다." 는 뜻이다.
이성은 화타가 처방해 준 약을 복용한 후 병이 치유되었다. 후에 이성의 친척이 이성과 똑같은 병에 걸렸다. 이성은 화타가 처방해 준 약을 끌어앉고 친척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관만 할수 없어 이성은 그 약을 친척에게 주어 복용시켰다. 친척은 그 약을 복용한 후 병이 완치되었다. 이성의 친척은 이성이 화타가 준 산약을 보관해 두었다가 다음에 자기의 병이 재발하면 쓰려던 그 약을 준것에 감사하며 화타가 살고 있는 초현을 향하여 달려갔다.
초현에 도착하여 보니 바로 그때 화타가 조조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포승줄로 꽁꽁 묶여 끌려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약을 구하지 못했다. 18 년 후 이성의 병이 재발되었다. 그러나 이성은 치료할 약이 없어 죽고 말았다.
이상의 고사에서 보는바와 같이 화타는 사진(四診)을 통하여 정확한 질병의 진단을 하였다. 병이 발생한 뒤 며칠후에 일어날 질병의 발생과정과 십여년 후의 예후(豫後)까지 정확하게 진단하였다.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에 "화타찰형관색병삼부맥경(華타察形觀色幷三部脈經)" 이라는 책이 한 권 수록되어 있었다. 이 책은 화타가 환자의 신형(身形)과 안색과 삼부맥경을 살펴 진찰하는 방법을 수록한 책인데 이 방면에 대한 화타의 총괄적인 경험은 애석하게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소아과 와 부인과 병증에 있어서도 화타는 모자간의 정체(整體) 관계에 착안하여 정확한 변증을 하였다는 것이 병상기록에 남아있다.
동양(東陽 : 현재 산동성 평원현(平原縣))에 살고 있는 진숙산(陳叔山)의 두살된 아들이 일종의 괴병에 걸렸다. 매번 어머니의 젖을 먹을때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젖을 먹고난 후 설사만 계속한다. 여러 의사들이 설사를 멈추게하는 약을 써서 치료해 봤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타가 진찰한 후 보양약(補陽藥)으로써 사물여완환(四物女宛丸)을 아기 엄마에게 복용시켰다. 그 결과 아기가 젖을 먹을때 울지 않했다. 물론 설사도 함께 멈추었다.
전에 아기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도저히 화타의 처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화타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화타는 "차내기모우잉(此乃其母又孕), 양기내양(陽氣內養), 유즙허냉(乳汁虛冷), 소아흡식(小兒吸食), 자연제곡(自然啼哭); 냉물상비(冷物傷脾), 우인기복사(又引起腹瀉), 금오수치모(今吾雖治母), 실유모급아야(實由母及兒也)." 라고 의사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아기의 어머니는 또 임신했오. 그래서 양기가 부족하오. 왜냐하면 태아를 기르기 위하여 양기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유즙이 허냉합니다. 소아가 허냉한 어머니의 젖을 먹기 때문에 배가 항상 고파서 웁니다. 또 냉한 것은 비장을 상하기 때문에 복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오직 어머니 만 치료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실하면 아기에게 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는 뜻이다.
옆에 서서 화타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의사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화타를 존경하게 되었다.
산동성 제남(濟南) 서편에 있는 감능(甘陵) 현령(縣令)의 부인은 임신 6 개월에 복통이 심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다.
화타가 부인을 진맥한 후 시녀(侍女)에게 명하여 부인의 복부를 살살 쓰다듬게 하였다. 화타는 시녀에게 눈을 감고 배를 쓰다듬으며 태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라고 말했다. 잠시후 시녀는 "태아가 왼쪽에 있습니다." 고 화타에게 대답하였다.
화타는 남태(男胎)이며 태아가 이미 부인의 뱃속에서 사망했다고 진단하였다. 부인은 화타가 지어 준 약을 복용하였다. 화타는 복약후 사태를 하태(下胎)시켜 산모의 건강을 회복시켰다.
기생충병의 치료 역사는 약 2천년이나 된다. 신농본초경에 기재된 것을 보면 "뇌환(雷丸)은 구충제로 사용된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병례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화타가 기생충을 치료한 병례는 3 개나 된다.
화타별전에 기록된 첫번째 고사는 다음과 같다.
20세 된 처녀가 각슬부(脚膝部)에 기생충괴(寄生蟲塊)가 생겼다. 매우 가려우나 통증은 없었다. 창구(瘡口)가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한다그녀는 7,8 년 동안 고생하고 있다. 화타는 그녀의 각슬부에 있는 종괴를 칼로 쨌다. 그리고 기생충을 죽여 밖으로 끄집어 냈다. 길이가 3 척(尺)이다. 옛날 3 척은 현재의 6촌(寸) 쯤 된다. 기생충의 모양은 길며 눈은 있는데 동자는 없고 동시에 생선비늘 모양의 귀가 달려있었다. 일종의 절편(節片)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충이었다.
화타의 기생충 치료에 대한 두번째 고사는 다음과 같다.
장위(腸胃) 기생충병 환자에게 약을 복용시키니 환자가 기생충을 입밖으로 토하고 나서 병이 치유되었다. 화타는 마늘을 잘게 다져 식초와 배합한 것을 회충약으로 사용하였다. 후세 의가에서 이 처방을 잘 이용하게 되었다.
또 삼국지 화타전에 기재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화타가 마차를 타고 가던 도중 길가에 주저앉아 신음하고 있는 젊은이를 발견하였다. 화타는 "젊은이! 어찌된 영문인가?" 하고 물었다. 젊은이는 "선생님! 목구멍이 막혀 말 소리가 잘 나오지 않으며 음식을 삼키기 조차 어렵습니다." 고 화타에게 대답하였다. 화타가 진맥해 본 결과 이 젊은이의 병명은 장충(腸蟲)이 원인이되어 생긴 인색병(咽塞病)이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화타는 젊은이에게 "여보게! 젊은이! 내가 지금 바쁜일이 있어 급히 가야하니 나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보게! 떡집에 가서 마늘 잘게 다진것과 식초 세 되(升)를 사서 함께 섞어 마셔보게! 그러면 병이 낫을 걸세! 이 약의 처방명은 산제대초(蒜齑大醋)라고 부르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화타는 다시 마차에 올라타고 떠나가 버렸다. 젊은이는 화타의 말대로 마늘 섞인 식초를 세되를 복용한 후 큰 어미 회충 한 마리를 입밖으로 토해냈다.
젊은이의 마음속에 매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젊은이는 화타의 거처를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화타의 집을 찾아갔다. 화타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두 서너명의 아이들이 화타의 집 문앞에서 뛰어 놀고있었다. 한 아이는 마차고 문위에 걸려있는 회충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젊은이의 옆에 서있던 한 아이가 회충을 쳐다보고 서있는 아이를 가리키며 "저 아이는 회충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 아버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고 젊은이에게 말했다.
화타의 아들이 젊은이를 방안으로 안내하였다. 젊은이는 병실에 들어가 사방을 두리번 거리며 쳐다보았다. 병실안의 북쪽 벽위에 열 마리의 회충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젊은이는 즉시 자기가 앓고있던 병이 기생충병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남조(南朝) 의학가 도홍경은 자신의 저서 "본초경집주" 의 서록(序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병점산제(餠店蒜齑), 내하사충지물(乃下蛇蟲之物)."
다시 말하면 "중국의 떡집에서는 짓찧은 마늘을 팔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충제이다." 는 뜻이다.
식초와 같이 신것을 먹으면 회충은 조용해 진다. 그리고 마늘은 회충들에게 강자극을 주어 교란시킨다. 그래서 화타의 처방 "산제대초" 는 목구멍을 통하여 회충을 토해내게 만든다. 이상은 한의학에 비춰본 약리분석이다.
후세 의가에서 사용하는 안회구충약(安蛔驅蟲藥) "오매탕(烏梅湯)" 은 이와같은 원리를 이용하여 조제된 것이다.
화타는 중국 역사상 걸출인물이었다. 화타가 죽고난 뒤 백성들은 더욱 화타를 그리워하고 경모하였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기념사업활동을 방방곡곡에서 추진하였다. 하남성 허창(許昌)은 화타가 조조에게 부인의 병을 핑계대고 내려온 후 조조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했기 때문에 붙잡혔던 바로 그 곳이다. 화타의 시체는 허창교외(郊外) 한 모퉁이에 매장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화타의 출생지 초현에 묘당(廟堂)을 건립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가 행의하며 돌아다니던 서주,양주,패현에 후세 사람들이 의관총(衣冠塚)과 묘각(廟閣)을 건립했다. 그가 행의하며 돌아다닐때 만들어진 전설과 고사들은 지금도 예(豫), 환(晥), 소(蘇), 노(魯)성(省) 각지 백성들에게 조상대대로 전파되어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집이나 다 잘 알고있다. 일천 팔백 여년 동안 화타의 의명(醫名)은 물이 졸졸 흐르는 모양과 같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다.
현재 하남성 허창 북쪽 10 여리 밖에 있는 소교(蘇橋)에 끝이 보이지않는 아득히 먼 보리밭 가운데 한개의 묘(墓)가 있다. 묘주위에는 푸른 벽돌담이 묘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묘앞에 비바람에 맞아 헤어질대로 헤어져 버린 낡은 돌비석이 서 있다. 돌비석위에 "한신의화공묘(漢神醫華公墓)" 라는 큰 글씨만 새겨져 있을 뿐이다. 이 돌비석은 청나라 건륭 17년(서기 1752 년) 에 허창에 살고있던 유의(儒醫) 황곤(黃坤) 등이 돈을 모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조조가 화타를 옥중에서 사형시킨 후 백성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옥리(獄吏)와 내통하여 화타의 시체를 옥중에서 몰래 꺼내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일천 팔백 여년 동안 밭에 물길을 트고 논밭을 손질했어도 촌민들은 정성을 다하여 화타의 묘를 잘 보호해 왔다. 후에 촌민들은 본래 화타의 시체를 묻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더욱 안전한 곳으로 이장시켰다.
화타의 딸이 아버지 무덤곁에 엎드려 목을놓아 울면서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이름을 지금도 "곡타촌(哭佗村)" 이라고 부른다. 현재 매년 화타의 제삿날이 돌아오면 곡타촌민들은 향불을 밝히고 화타의 업적을 기리며 화타의 신령(神靈)을 보우(保佑)하고 모든 질병을 구축해 달라고 기원하는 뜻에서 화타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허창성지(城址)는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래서 화타묘가 이곳에 있다는 진실성은 크다. 이 고장은 화타를 우러러 보며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왕래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곳이다. 최근에 화타의 일생기를 영화화하였다. 서주에 가보면 화타를 경모하는 사람들이 화타를 기념하기 위하여 화타의 능묘(陵墓)와 종묘(宗廟)를 건축했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조는 화타에게 참수형을 내려 죽였다. 화타가 참수형을 당한 후 조조는 화타의 머리를 서주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한다.
화타의 제자 번아(樊阿)는 화타의 머리를 석신(石身) 상에 붇혀 동산현(銅山縣 : 현재 서주시 동산현) 남쪽 땅속에 깊이 묻었다고 한다. 그후 수 많은 전란으로 인하여 화타의 묘는 없어졌다.
명나라 영락(永樂) 년간(서기 1403년 - 서기 1424 년)에 서주성내(徐州城內) 모처에서 건설공사 중 한개의 두개골이 출토 되었다. 사람들이 공사 도중 여기서 발견된 해골을 화타의 해골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에 해골이 발견된 바로 그 자리에 화타의 능묘와 종묘를 건립했다. 묘의 높이는 2 미터이며 큰 돌을 쌓아 만들었다. 묘문 비석에 "후한신의화타지묘(後漢神醫華佗之墓)" 라는 여덟개의 글자가 새겨 있다.
묘의 북쪽에 화타 사당을 건립했다. 모두 삼칸인데 앞칸에 화타의 동상이 모셔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동상은 서주시 한의과 대학에 잘 보존되어 있다. 동상의 양쪽에 두 아이가 좌우편에 각각 서 있다. 한 아이는 한약을 뜨는 숟가락(刀圭)을 들고 서 있고 또 한 아이는 청낭경을 두손으로 높이 받쳐들고 화타옆에 서 있다.
또 화타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광능(廣陵)의 오보(吳普)가 화타의 기념총을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 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서안(西安) 부근의 화산(華山)에 화타의 친구였던 어느 도장(道長)이 화타의 기념총을 만들고 돌비석을 세웠으나 현재 돌비석만 남아 있다.
최근 과학자들은 신의(神醫) 화타의 학술과 저작(著作)과 의료행위에 대하여 상세히 연구하여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학자들은 화타가 한의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화타의 빛나는 업적과 훌륭한 명성은 자손만대에 길이 길이 전하여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