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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는 두타산, 덕유산 내리는 길에 조망
더러는 자신이 인간인지조차 잊어버릴 일
무엇보다 자신을 알 일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 일
한 치 실수도 용서 아니함
따지어 나가되 산은 늘
네 생각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 일
―― 장호 김장호(章湖 金長好, 1929~1999), 「등산학」에서
▶ 산행일시 : 2018년 12월 9일(일), 맑음, 엄청 추운 날
▶ 산행인원 : 6명
▶ 산행거리 : GPS 도상 17.9km
▶ 산행시간 : 9시간
▶ 갈 때 :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경부선 천안 가는 고속버스 타고, 천안 시외버스터미
널에서 진천 가는 시외버스 타고 장교현에서 내림
▶ 올 때 : 성재2리(신자포실) 마을에서 택시 불러 오창으로 와서 서울 남부터미널 가는
고속버스 탐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6 : 20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경부선 천안 행
07 : 40 - 천안 시외버스터미널 진천 행
08 : 20 - 장교현(長橋峴), 산행시작
09 : 00 - 덕유산(德裕山, 415.6m)
09 : 30 - 지장골고개
09 : 53 - 환희산(歡喜山, △402.6m)
10 : 38 - 385.5m봉
11 : 04 - 국사봉(國師峰, 359.5m)
11 : 26 - 거범고개
12 : 12 ~ 13 : 15 - 수남리 도로 옆 공장부지, 점심
13 : 21 - 산속 진입
13 : 52 - 306.3m봉
14 : 08 - 서림산 작은봉(△316.8m)
14 : 16 - 서림산(徐林山, 341.8m)
15 : 13 - 임도
15 : 20 - 232.1m봉, 송전탑
15 : 32 - 약사산(藥師山, △245.6m)
16 : 19 - 도로, 덜미고개
16 : 38 - 거머산(209.8m)
16 : 49 - 솔림산(率林山, 236.1m)
17 : 05 - 임도, 태극한국사
17 : 20 - 성재2리 마을회관, 신자포실 마을, 산행종료
18 : 00 ~ 19 : 50 - 오창, 저녁
21 : 03 - 남부터미널, 해산
1-1. 산행지도
1-2. 산행지도
2. 산행 고도표
▶ 덕유산(德裕山, 415.6m)
이른 아침에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가니 판이 의외로 커져 있다. 킬문 님 홀로산행에 다섯
명이나 붙은 건 아마 드문 일이다. 사정인즉 각자 북쪽 고산으로 가려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파가 미국영화 ‘투모로우’ 버금간다고 하여 남쪽 저산으로 방향을 틀어서다. 15년이 훌쩍
넘은 오케이사다리 시절 ‘Those Were The Days’의 하루를 재현한다.
작은 삼각김밥 한 개와 팩 우유 200ml짜리 한 개가 더산 님의 아침식단이다. 나는 집에서 대
접의 고봉밥을 먹고 나왔다. 그러고도 산에 들면 종횡무진 누비니 안트공(안성섭+베트콩)
인 종전의 별명이 아주 적절했다. 월남전쟁 때 베트콩은 낮에는 미군의 공습을 피해 있다가
야간에 무장을 하고 주먹밥 한 개로 50km 남짓을 이동하였다고 한다.
오늘 산행의 들머리는 충남과 충북의 경계인 고갯마루 장교현이다. 거기를 가려면 천안시외
버스터미널에서 진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덕성리에서 내려야 한다. 그런데 장교현에서 내
릴 수 있도록 기꺼이 배려해준 버스기사님이 퍽 고맙다. 거기는 버스가 서지 않습니다 라고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고 그러리라 각오까지 했다.
긴 다리가 있는 고개라고 여기기 쉬운 장교현의 지명유래다. “1464년(세조 10년) 진천에서
충청도 군사 수만을 모아 큰 훈련을 하였는데 이때 각 고을의 장교(將校)들이 군사를 거느리
고 이 고개에서 쉬어갔기 때문에 장교현(長橋峴)이라 하였다고 한다.” 과연 세조 10년에 그
런 일이나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았다.
세조 10년(1464년) 2월에 그와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길상산은 장교현에서 북쪽으로 그다
지 멀지 않은 ‘태령산(胎靈山)’을 말한다.
“2월 20일. ‘충청도 군사는 2만여 인이나, 보병을 다 계산하면 4만여 인에 이를 것이니, 명일
(明日) 길상산(吉祥山)에서 몰이하게 하라’ 하고, 좌상대장(左廂大將)과 우상대장(右廂大
將)을 명소(命召)하여 약속을 주었다.”(忠淸道軍士二萬餘人, 盡計步兵, 則可至四萬餘人, 明
當驅吉祥山。 命召左右廂大將授約束).
“2월 21일. 길상산 사장에 이르러 부장 이몽석 등 두 사람이 군사를 잃어버렸으므로 면박(面
縛)하여 하옥하게 하였다. 병조의 표기가 느리게 와서 교룡기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기 때
문에, 정랑 민정과 진무 조숭지를 불러서 갓을 벗고 보행하게 하였다. 어가가 청주 초수(椒
水)에 이르니, 목사 고태필ㆍ판관 곽득하가 어가를 맞이하였다.”(至吉祥山射場, 部將李夢石
等二人失軍, 又命面縛下獄。 兵曹標旗緩行, 與交龍旗太遠, 召正郞閔貞及鎭撫趙崇智使脫笠
步行。 駕至淸州 椒水, 牧使高台弼、判官郭得賀迎駕。)
어가가 이동한 청주의 초수(椒水)는 지금의 초정리 광천수를 말한다.
장교현 고갯마루는 양쪽이 옹벽 위로 높은 절벽의 절개지다. 옹벽 오른쪽 가장자리로 멀리
돌아가서 개나리 울타리를 넘고 묵밭을 지나 산기슭으로 다가간다. 다 수직사면이다. 그중
얕은 골짜기가 낫다. 스틱 치켜들고 덤빈다. 일행 저마다 입맛 아닌 발맛 골라 오른다. 수북
한 낙엽에 미끄러져 제자리걸음하기 수차례다. 낙엽 쓸어가며 기어오른다.
한바탕 오지게 힘써서 능선마루에 올라선다. 한적하다. 만뢰지맥 길이라는데 소연한 게 기왕
의 등로는 낙엽에 묻혔다. 낙엽 위로 눈이 살짝 덮였다. 눈도 얼고 낙엽도 얼었다. 발밑에서
와삭와삭하고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 소리로 일행들의 떨어진 거리를 가늠한
다. 한 피치 올라 왼쪽으로 방향 틀어 남서진한다.
봉봉을 넘는다. 길게 올랐다가 약간 내리고 다시 길게 오르기를 반복한다. 제법 올랐다 싶었
는데 등로에 밤송이가 수두룩하니 깔렸다. 이래서는 야산을 가는 기분이다. 주변 조망은 수
렴에 캄캄 가렸다. 오르막에서는 중천에 솟은 해를 일출로 맞이한다. 어디쯤 왔을까 하고 지
도 들여다보니 덕유산 정상이다. 무주의 덕유산과 마찬가지로 ‘덕스럽고 넉넉한’ 德裕山
이다.
정상표지석이 없고 사방 나무숲에 가려 조망도 없다. 주변 나뭇가지 매달린 선답의 산행표지
기는 10장이나 된다. 생각도 얼고 말도 얼어 더듬거린다. 그래도 정상주 탁주가 없을 순 없
다. 내떨리면서도 시원하다. 환희산 가는 길. 그럴 듯한 능선이 네 갈래로 뻗어 있어 자칫하
면 잘못 가기 쉽다. 지도 정치하여 나침반의 방향을 확인하고 간다.
아까부터 왼발은 충북 땅을 오른발은 충남 땅을 밟는다. 쭉쭉 내리다 벌목지대에 들어서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산첩첩 조망이 훤히 트인다. 환희산이 거대한 장벽으로 보인다. 다시
한 차례 뚝 떨어진 안부는 지장골고개다. 고갯마루에 비닐천막과 엉성하게 쌓은 돌탑이 있
다. 돌탑에 사과와 배, 과자를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3. 덕유산 가는 길
4. 덕유산 내리는 중에 조망
▶ 환희산(歡喜山, △402.6m), 국사봉(國師峰, 359.5m)
앞으로도 그럴 터이지만 산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당찬 오르막이다. 이때만큼은 겉은
얼었어도 속은 땀난다. 내뿜는 거친 입김이 안개인양 눈앞을 가리는 통에 헛발질이 잦다. 더
오를 데 없고 환희산은 같은 고도로 왼쪽으로 230m를 더 가야 한다. 길 좋다. 산책로로 다듬
었다. 환희산. 충북의 표준 규격인 오석의 정상표지석이 있고, 삼각점은 2등 삼각점(진천
25)이다.
환희산이 ‘기쁨을 안겨주는 산’이라는 데 적극 동의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겨울 산중
진미인 과메기를 캐이 님께서 가져왔다. 속배추, 미역, 다시마, 김, 파, 마늘, 초장 등 일습을
준비했다. 양광이 가득한 정상 아담한 공터에 둘러앉아 그 안주로 술잔 나누는 정취야말로
이 산 아래 누워 있는 정철이 읊은 장진주사(將進酒辭)이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算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송강 정철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그 무덤은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예전의 고양군 원당면 신
원리)에 있었는데, 1665년 송시열(宋時烈)이 후손 정포(鄭浦)와 상의하여 지금의 위치인
환희산 아래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정철이 유배지도 아닌 이곳
어은골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환희산(歡喜山, 402m)의 지명유래가 한자 뜻과는 다르게 하늘산이 한으산을 거쳐 환희산으
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지명의 선행 요소 ‘환희’가 ‘하느<하늘’ 또
는 ‘하누’와 대응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하늘산은 ‘높은 산’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으
며, 실제로 환희산은 주변 지역의 산보다 높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뒤돌아서 다시 충남북도계를 간다. 한 차례 길게 내렸다가 잠깐 오른 385.5m봉은 Y자 능선
이 분기한다. 왼쪽이 취령산, 상봉산으로 가는 만뢰지맥 길이다. 우리는 잠시 설왕설래하다
가 오른쪽 도계를 밟는다. 가파른 내리막길 낙엽 러셀에 정신을 집중하고 아까운 술기운이
다 가신다. 그 여세를 몰아 국사봉(國師峰)을 대번에 오른다. 조망이 트이고 증평 너른 벌판
건너 밋밋한 산릉이 흐릿하게 보인다.
국사봉 정상과 그 주변은 등고선 5개가 동심원이라서 내림 길이 헷갈린다. 연호하며 사면을
누비고 발로 거범고개 가는 길을 찾는다. 주르륵 내린 야트막한 안부는 거범고개다. 도계 벗
어나 충남 땅에 들어간다. 사면은 곧 골짜기로 이어지고 덤불숲에 막혀 더 못가고 오른쪽 산
자락을 길게 돌아 잘 다듬은 무덤으로 내린다. 천안 전씨 전행오 후손의 납골 무덤이다. 무덤
주변의 조경수만 해도 수천만원은 될 거라는 게 이 분야 전문가인 캐이 님의 의견이다.
무덤이 그러하니 그 진입로는 임도로 뚫렸다. 이내 농로와 차도로 연결되고 송정방죽 지나
용두천을 제1송정교로 넘는다. 느긋이 오르막인 도로를 가며 점심자리를 찾는다. 도로 옆 너
른 공장부지로 간다. 캐이 님이 커다란 비닐천막을 가져왔다. 지지대가 없이 그냥 비닐 안에
들어가서 버너 불을 피우면 그 열기로 비닐이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동장군더러 밖에서 보초 서게 하고 여섯 명이 넉넉하게 둘러앉아 버너 불을 2개 피우고 오뎅
탕에 이어 떡라면을 끓인다. 둥그렇게 한껏 부풀어 오른 비닐 안은 따스한 봄날이다. 술기운
이 얼근하게 도니 숫제 더워 비닐 밖으로 얼굴을 자주 내밀어 식히곤 한다. 마냥 웃고 떠들며
마시고 먹고 또 마시고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마가목주 살짝 얹진 알싸한 커피로 입가심
하고 일어난다.
5. 덕유산 내리는 중에 조망
6. 환희산에서
7. 환희산에서
8. 국사봉에서 조망, 가운데 너른 벌판은 증평
9. 국사봉에서 조망, 멀리는 좌구산 연릉
10. 도로 옆 공장부지(점심 장소) 두른 수렴(樹簾)
▶ 서림산(徐林山, 341.8m), 약사산(藥師山, △245.6m), 거머산(209.8m), 솔림산(率林山,
236.1m)
이제는 서림산이다. ┫자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들어 고갯마루에서 잡목 헤치며 산속에 들었
다가 바로 공장건물에 막혀서 뒤돌아 나온다. 돼지축사를 지나 산기슭 빈 밭을 오른다. 밭 가
장자리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 꼭대기에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다. 막대기와 돌을 몇 번
던져 보다가 딴다고 해도 틀림없이 떫을 것이라서 물러난다.
잡목 숲 생사면을 한 피치 치고 오르면 인적이 뚜렷한 능선마루다. 산책로 같은 숲속길이다.
모자를 벗어 차가운 산기운에 연신 머리를 식혀가며 306.3m봉을 오른다. 하늘 가린 숲속길
이라 심산유곡이라는 느낌을 애써 가지려고 하지만 여기저기 널린 밤송이가 부정한다. 길게
오른 △316.8m봉은 서림산 작은봉이다. 서림산은 상당한 첨봉이다. 긴 오르막 끝판에 침목
계단 62개 오르고 억새밭으로 변한 헬기장을 지나면 서림산 정상이다. 널찍한 공터에 장의
자가 둘러 놓였다.
서림산이 ‘瑞林山’으로 ‘상서로운 수풀이 우거진 산’인 줄 알았는데 ‘徐林山’이다.
옛날 서림(徐林) 장군이 지키던 곳이라 해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서림 장
군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조선 명종(明宗, 1534~1567) 때 의적 임꺽정(?
~1562)의 모사(謀士)로서 서림(徐林)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서림산이 서림이 한때 활동
한 곳이 아닐까 추측하나 확실치는 않다. 서림은 한양에 잠복하러 나왔다가 관군에게 체포되
자 변절하여 임꺽정을 붙잡는 데 크게 협조한 인물이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
연구원)
서림산 정상을 벗어나서 비슷한 고도의 봉우리에는 대형 송전철탑공사가 한창이다. 서커스
공중곡예를 본다. 그 까마득히 높은 철탑 위에서 인부 한 사람이 좌우로 오가며 작업을 하는
데 날렵하기가 청설모 저리가라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참 올려다보았더니 뒷덜미가 아프
다. 서림산부터 다시 충청남북도계다. 방말고개와 두릉고개를 딱히 짚어내지 못하고 간다.
당분간 평탄한 산길이다. 가와히가시 헤키고토(河東碧梧桐, 1873~1937)처럼 간다.
이 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른 들판이어라
(この道に寄る外はなき枯野かな)
산줄기가 맥을 놓는가 싶더니 임도와 만난다. 임도 따라간다. 산굽이 돌고 돈다. 임도 옆에
송전철탑이 있는 232.1m봉을 오르고 진행방향이 헷갈려 잠시 망설인다. 약사산이 준봉으로
보이는 송전탑 운재로(運材路)를 따라 골로 갈 뻔하다 능선 길을 잡는다. 완만한 오르막의
산책로를 이슥히 가면 별 조망이 없는 약사산 정상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돛대산을 붙들고 있었다. 더산 님은 수시로 거기까지 거리를 계산하여 알렸
다. 약사산에서 솔림산은 그 앞의 거머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거머산 또한 반공을 가린 장
벽이다. 약사산의 가파른 내리막을 갈잎 낙엽사태 만들어 마을 가까운 안부까지 떨어졌다가
소나무 숲길을 간다. 이 숲길을 곧장 가면 도로의 깊은 절개지에 막히지나 않을까 머뭇거리
다 일단 가본다.
잘 다듬은 무덤이 나온다. 그 성묫길이 있으려니. 가파른 절개지 한 가운데를 철계단을 설치
했다. 덜미고개 고갯마루를 지나는 696번 지방도로는 많은 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못지않다. 신호대기에 걸렸는지 차량질주가 일시 멈춘 틈을 타서 건넌다. 다시 산을 간다. 해
거름 산그늘 진 북사면이다. 121.8m봉 넘어 가쁜 숨 잠깐 돌리고 냅다 박차 오르면 잡목 숲
속의 거머산 정상이다.
솔림산은 깊은 골짜기 건너편으로 보이는데 능선 마루금이 오른쪽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잡목 숲 헤치며 내쳐 간다. 발돋움질하듯 약간 내렸다가 한 피치 바짝 오르면 솔림
산 정상이다. 솔림산(率林山)은 ‘소나무(솔) 숲이 많은 산’일 것. 멀리서 보면 긴 산릉의 소
나무 숲이 한 경치 한다. 산 아래 마을의 가로등은 불을 밝혔다. 돛대산을 놓아주기로 한다.
가장 빠를 하산 길을 잡는다. 여태 동무하였던 J3 산행표지기는 도계 따라 서쪽으로 가고, 우
리는 도계 벗어나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여기다. 인적은 물
론 수적조차 없는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가파른 내리막이다. 예전에 간벌하여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뭇가지를 피하는 것도 된 고역이다. 엉겁결에 붙든 산초나무를 앗 뜨거워라 하
고 뿌리치다보면 청미래 덩굴이 목에 걸리기도 한다.
솔림산을 온몸 비트는 유희하며 내린다. 덤불 숲 뚫고 머리 내미니 억새 만발한 개활지가 나
오고 그 옆에 가정집 같은 태극한국사 절집이 있다. 마당에 두어 기 돌탑이 있어 절집으로 알
아본다. 어스름한 대로를 내린다. 도로 옆 졸졸 계류 흐르는 소리가 차디차게 들린다. 도로
따라 2.7km를 더 가야 하는 돛대산을 놓아주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다.
성재2리(盛才2里). 지도에는 신자포실 마을이다. 담벼락에 쓰여 있는 오창읍 택시부 전화번
호를 보고 택시 부른다.
11. 서림산 가는 길
12. 서림산 내려가는 길
13. 서림산 내려가는 길에서 조망, 멀리는 금북정맥 성거산 연릉
14. 약사산 내리는 길에 서쪽 조망
15. 약사산 내리는 길에 서쪽 조망, 흑성산(?)
16. 약사산 내린 도로 절개지 철계단
17. 거머산에서 바라본 솔림산
18. 태극한국사 옆 공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