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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어쩌면 공생해야 하는 바이러스로 삼아야 할까보다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없어질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덧 4개월입니다. 아이들 개학은 일단 한 것 같은데 불안한 등교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출할지 아무도 모르지요. 이제는 여기저기 정해진 곳도 없고 예측도 어려워집니다. 그렇다고 모두 붙잡아둘 수도 없고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다녀야 하는가 싶습니다. 그래도 손 놓고 나 몰라라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애쓰는 의료진들만 고달파 보입니다. 애처롭기도 합니다. 날씨는 점점 더 더워지는데 이를 어쩌지요? 셔츠 하나 입고 있는 것도 거추장스러운데 방호복까지 덮어써야 하니, 이를 어쩌지요?
뭔가 하는 일이 생기면 하루는 그리 어렵지 않게 갑니다. 더구나 기다리는 일이 있으면 하루가 여삼추가 되었다가도 지나고 나면 그 배 이상으로 빠르게 느껴집니다. 더디게 보내고는 빠르게 지난 듯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게 6월인가 싶었는데 벌써 반이 되어 갑니다. 빨리 지나는 것에 대해 억울할 일은 없습니다. 이제 와서는 세월과 시간에 대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이도 먹어봤자 배도 안 부르니 주거나 말거나 받거나 말거나, 하나 더 보태봐야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받을 혜택도 다 받은듯하니 거리낌도 없습니다. 물 흐르듯 가고 있습니다. 단지 추하게 만들어질까 그것 하나가 마음에 걸리지요.
20년 자산이 날아가고는 한참 멍하였습니다. 시간과 돈을 들여 수리를 부탁하였지만 십분의 일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마음을 정리하였기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지고 있은들 뭐 할까 싶었지요. 가지고 떠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마음에 떠오르면 하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정말 비워야지요. 단 하나, 마음은 편하게 가지자 다짐했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
2020년 6월 13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0-06-07주일설교(나라이 임하옵시며)
<프리즌 이스케이프>
살아가며 가끔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곤 합니다. 왜 사나? 우리 인간만이 해보는 질문이고 답을 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실 답을 알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인류 공통의 답이 있습니까? 질문의 수만큼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의 가치관이고 인생관에 따라 천차만별의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다 하는 정답도 없습니다. 대체로 분류를 한다면 쉽게 돈 따라 사는 인생도 있고 명예를 지키려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념과 신념에 생명을 거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믿음 때문에 순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스페인 내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말 그대로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발발한 내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네스트 헤밍웨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잘 아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영화로도 나왔지요. 참으로 놀라운 것은 자기 나라도 아닌데 그 내전에 유럽의 다양한 나라에서, 더구나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참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입니다. 하기야 우리나라 6.25 전쟁에도 많은 나라가 참전하여 지원해주었습니다. 이유가 뭐였나요? 한 마디로 돕자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이념에 대한 신봉입니다. 우리나라 전쟁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항거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과 신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 이방 땅에까지 가서 그 고생을 하며 목숨까지 바칩니다.
인종차별은 참으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와 함께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지고 발전해도 이 뿌리 깊은 의식은 사람들 가운데 잠재해 있습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보다는 일단 거부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나는 아니야, 해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반응을 하곤 합니다. 깨닫는 순간 잘못을 인정하고 공정한 의식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무의식적인 느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차별에 대한 거부감이 의식화되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잘못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나서서 반대운동을 이끄는 것입니다. 한창 정의감에 불타는 시기에 흔히 목숨까지도 걸고 투쟁합니다.
잘 아는 대로 20세기 후반까지도 인종차별이 세상에서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남아공입니다. 흑인과 백인을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나아가 철저히 무시하고 박대했습니다. 그 차별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사회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고 그렇게 정해져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양쪽 모두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에 반대하고 대항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이 힘을 모아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충돌이 발생합니다. 인권을 쟁취하고자 하는 세력이 생겨나 기존의 질서를 위협합니다. 기득권자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사회정치적 권력과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종차별 저항운동에 백인 청년 두 사람이 껴듭니다. 그리고 결국은 경찰에 붙잡힙니다. 모두가 그 의식 속에서 살고 그렇게 사회가 운영되고 있는데 재판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소위 엄벌에 처합니다. 그래서 형량도 문제겠지만 당시 매우 악명 높은 감옥소로 보내집니다. 두 젊은이의 인생을 종치게 만들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가진 사람 어느 누구도 편들어주지 않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이 사상범(?)들은 요주의 인물들입니다. 그러니 특별히 눈총을 받으며 감시를 당합니다. ‘팀’과 ‘스티븐’은 그렇게 수형생활에 임합니다. 12년과 8년,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견디지요? 사실 그 기간이 끝난다고 끝날지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어떤 빌미를 만들어 기간을 연장할지 어찌 알겠습니까?
어디서든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감옥이라고 악랄한 도깨비나 귀신들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극악한 범죄자들만 있는 곳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바깥세상을 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뛰어들 용기는 없습니다. 함께 하기를 원했지만 스스로 포기한 장기복역수가 있습니다.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공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어느 미로보다도 힘든 그 길을 어떻게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문 하나하나를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긴장과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 사이 간수의 오가는 발자국 소리는 오금이 저리게 만듭니다. 고요 속에 찰그락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는 그야말로 천상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게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싶습니다. 그런데 실화랍니다. 아마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나무로 철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다니, 가능합니까? 나무의 특성을 잘 알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치밀하게 관찰을 하였습니까? 참으로 대단하다는 칭송이 절로 나옵니다. 탈옥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팀이 사랑했던 여인을 평생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기야 그 나라로 돌아갈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자 또한 자기 나라를 떠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에야 나라가 많이 바뀌었지요.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렀습니다. 영화 ‘프리즌 이스케이프’(Escape From Pretoria)를 보았습니다.
<인턴>
일하는 데는 일 자체가 있고 그 일에 따른 여러 다른 부속 일들이 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어 직장 일을 하기 위해서 일단 그곳까지 출근해야 합니다. 출근하는 동안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일입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무심히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신경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혹 불편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혹 늦잠 자다 아침식사를 거르고 나왔다면 직장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기분이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길에서 누구와 부딪치기라도 했다면 더욱 마음이 상합니다. 근무 중에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지만 괜히 찝찝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관계가 껄끄러운 동료가 있다면 일을 하면서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본업에 영향을 주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잘 아는 대로 그런 것은 실적에 들어가지도 않고 누가 배려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감당해야 합니다.
나이 70, 은퇴하고 나니 전혀 새로운 삶이 등장합니다. 사실 사람의 스트레스 지수에서 가장 큰 점수로 나타나는 항복 중 하나입니다. 은퇴, 사회생활에서 물러나는 경우 스트레스 지수가 꽤나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퇴 후 1년 동안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특히 가까운 가족이 눈여겨보며 보살펴주어야 한답니다. 일단 1년을 잘 넘기며 다소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여태 하루 생활이 거의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서고 직장에서 하루를 일하고 퇴근하여 집에서 쉽니다. 그렇게 일과가 진행됩니다. 하루, 한 주간 그리고 한 달,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 일과는 차질 없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수 년, 아니 평생을 지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이런 일과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요?
어느 날 반가운 광고를 보게 됩니다. ‘실버인턴’ 고용 광고입니다. 나이든 사람을 임시직으로 고용하겠다는 것이지요. 사회봉사 차원에서 도입한 제도입니다. 세상에! 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용돈도 벌 수 있겠지요. 여태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숙제를 안고 지냈는데 그런 걱정 날릴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 노인으로서는 다소 버거운 인터넷 기술을 조금은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최근까지 직장생활을 했으니 조금은 가능합니다. 일단 이력서와 자기소개를 인터넷과 동영상으로 보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무난히 통과하여 일단 취업에 성공합니다. 의류 온라인 쇼핑몰입니다.
직원이 200 여명이나 됩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입니다. 사장은 최근 갑자기 떠오른 젊은 여성입니다. 디자인부터 상품 제작 나아가 포장, 택배 배송까지 철저히 관리합니다. 전적으로 고객 입장에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높고 그래서 성공했지요. 한 마디로 정신없이 일합니다. 40도 되지 않은 젊은 사장이 노인을 인턴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불편하지요. 그러나 과제입니다. 전혀 도움도 되지 않고 줄 수도 없는 처지 같습니다. 아무튼 이 노인을 어떻게 하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다른 직원들과 매우 다릅니다. 차림새부터 태도, 말씨가 참으로 깍듯합니다. 직원들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물론 사회생활과 인생의 경험이 훨씬 많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본래의 일을 하기 위해 부속되는 일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찾아서 해결해줍니다. 직장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업의 성공과 가정의 성공은 양립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사업하는 사람들의 숙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누구나 바라는 일입니다. 단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성공가도를 달리며 너무 바쁘니 가정에 다소 소홀할 수 있습니다. 전업주부를 택한 남편이 고백합니다. 아내를 일에 빼앗겼다고. 남편과 아내의 일을 바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이 말을 아내들이 많이 했습니다. 남편을 일에 빼앗겼다고 말이지요. 단지 그 때는 남자가 그렇게 일하는 것을 당연시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화가 그랬고 사회적 의식이 그랬습니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일하는 것으로. 그리고 어쩌면 남자는 가정보다 일에 더 열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들 하였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그 결과 황혼이혼이 생겼으니 말입니다.
30대 여사장 ‘줄스’도 남편을 사랑하고 딸 ‘페이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가정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러자니 업무량을 줄이든지 업무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능한 CEO를 제안 받고 고민하며 깊이 생각합니다. 만약 수락하면 자신의 뜻대로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상태를 이끌고 가다가는 남편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미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고 있습니다. 그러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여태 이루어낸 이 놀라운 업적을 포기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귀찮게만 여겨졌던 실버인턴인데 함께 하고보니 전혀 다른 용도(?)로 다양하게 써집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은 본업이 있고 그에 따른 부속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부가적 일이 오히려 본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과는 해피 엔딩,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봐도 좋군요. 영화 ‘인턴’(The Intern)을 보았습니다. 2015년 작품입니다.
성경 마 6 : 9 - 13 2020년 06월 07일
설교 : 나라이 임하옵시며 김종우 목사
기도 이야기를 계속하려 합니다. 처음 공중기도 즉 대표기도 할 때의 어려움을 이야기했지요. 평생 대표기도 한 번 하지 않고 교회 다니는 분들도 많습니다. 물론 큰 교회에서는 가능하지요. 그렇게 많은 성도들 가운데 직분자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조차 1년 한 번 자기 차례 오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기야 예배 또한 여러 번 드리니까 한두 번 차례가 올 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혼자서 기도하는 것과 많은 사람 앞에서 대표로 기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의 공통적인 소원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너무 길게 하거나 마치 설교를 하듯 기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얼마나 진정한 마음이 담겨있을지도 문제이지요. 때로는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기회를 삼기도 합니다. 예수님 지적하셨듯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도 있다는 말이지요. 어떤 분은 우리의 많은 기도가 하늘나라 쓰레기통으로 간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충격을 주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고민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기도해야지?
사실 우리보다 예수님 제자들이 먼저 고민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했겠지요. 그러나 허공을 때리는 기도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사고 청합니다. 눅 11 :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아멘! 그래서 나온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귀감이고 기도의 모범이지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 지를 단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서 이 주기도문 강해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큰 은혜를 받고 얼마나 감동하였는지 모릅니다. 어떤 성도는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마다 그 은혜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마 예배 마치는 순서로 쏜살같이 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배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작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그 내용을 안다면 정말 그 중요함을 깨닫고 구하는 심정이 더더욱 간절해질 것입니다. 이제 그 은혜의 바다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우선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이 주기도문 강해를 들을 때 배운 것을 잠시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우선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마 6 : 9 - 13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 내용을 이렇게 세분해서 강론하였습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 둘째 하나님을 위한 기도, 셋째 우리들을 위한 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영. 맞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참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골격 속에서 하나하나 강론해주는 것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똑같은 책을 읽어도 십대에 읽는 것과 20대에 읽는 것 그리고 40대에 가서 읽는 것 다릅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사실 같은 영화나 같은 책을 반복해서 보는 것이 흔하지 않지요. 그런데 만약 그렇게 시대마다 다시 한 번 본다면 그 느낌이 같을까요? 분명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책이고 그 영화입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변했지요? 우리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그 변한 것은 좋게 표현해서 보다 성숙해졌다는 뜻일 것입니다. 생각하고 음미하는 범위나 깊이에 차이가 생겼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느끼는 감동 역시 달라지겠지요. 어쩌면 더욱 깊은 감동을 받고 더 큰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그것을 기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아멘! 이제는 보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 때는 그것으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렸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다릅니다. 이제는 그것으로 은혜 받을 수가 없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는데 젖을 준다면 그게 맛이 나겠습니까? 맛도 없고 유치하고 먹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시대도 달라진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초림 복음에 매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재림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언제까지 지난 과거 사건에서 은혜를 찾으려 하겠습니까? 물론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기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하는 것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똑바로 깨닫고 제대로 행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씩 보도록 합니다.
기도의 대상이 나오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래서 사실 저도 처음에는 저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 우리 아버지가 계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떨어진 하늘일까요? 우리 눈앞에 있는 이 공간부터 저 멀리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우주 끝까지, 어느 하늘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잡히지를 않습니다. 고후 12 :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이 가봤다는 셋째 하늘은 또 어디란 말인가? 그러면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도 있다는 말인가? 이해가 됩니까?
오래 전 들은 설교에서는 이게 지구 대기권 안과 대기권 밖과 그리고 저 우주 끝 어디로고 이야기해준 것을 기억합니다. 과연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겁니까? 계 13 :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장막과 하늘을 같이 보고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은 모세에게 장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출 25 : 8 - 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분명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입니다. 그것이 장막입니다. 그 장막을 ‘장막’이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잘 아는 대로 그 장막이 오늘날 교회가 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이란 눈에 보이는 저 하늘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서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과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요 8 :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랬습니다. 자기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너희 아비는 마귀다, 그러십니다. 자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주장하고 예수님은 아니라고, 너희 아버지는 마귀라고 말씀합니다. 누구 말이 맞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유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들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씨라고 표현하지요(눅 8 : 11) 하나님의 씨가 없으니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지요.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고 배우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똑바로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씨가 없는 것과도 같은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주장해도 무효하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뿐입니다. 자라다가 병들고 자라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야 영생에 이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씨,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기도 내용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니 그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요? 이 세상이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하고서는 하나님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것이지요.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마귀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시켜서 그 짓을 하게 할 것입니다. 마귀의 영이 누군가에게 들어와서 그를 조정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요 13 : 2 “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하나님이 당신의 목자를 세워서 당신의 장막을 지키게 하듯이 마귀도 자기 사람을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합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마귀와 그 추종자가 활동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귀의 목자가 된 그 자가 자기가 마귀의 목자가 되어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알고서야 그 짓을 하겠습니까? 결코 모릅니다. 자기는 절대로 하나님의 충실한 종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요. 성도들 또한 교회 목사님이 전하는 말씀이니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 마귀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착용하라고 명하십니다. 엡 6 :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아멘!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14 - 17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요약하면 사실 하나님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포된다고 무조건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빙자한 마귀의 종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우리 신앙은 결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참으로 우스운 현상이 세간에 일고 있습니다. 성경 가르친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피하는 것이지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처럼 행해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단인지 삼단인지 들어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듣지도 못하게 합니다. 이것 하나는 분명합니다. 빛은 절대로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두려워합니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은 사라져 버릴 테니까요. 자기 존재 자체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렵지 않을 수가 없지요. 자기네가 전하는 말이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맞장 뜨는 거지요. 들어봐라, 왜 말 못합니까? 그러나 그랬다가는 자신의 거짓이 드러날까 두렵겠지요. 진리는 결코 거짓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진리를 두려워 피하려 한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나라 구어체 조사가 써진 것은 모두 이해합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나라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는 것이지요. 그 전에 ‘임한다’는 말의 뜻을 먼저 알도록 합니다. 한 마디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스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곳으로 임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다스려주기를 기도하는 것이지요. 구태여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이 세상 나라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도 구원 받아야 할 세상이고 그래서 완전한 세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근심 걱정 염려 불안 공포 미움과 다툼 모순과 불공평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가난과 질병, 고통과 죽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나 꿈꾸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나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왜 이런 모순이 생기지요? 하나님 나라 가고 싶다, 그런데 죽기는 싫다. 그러면 어쩌자는 겁니까?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가당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잘못된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목이 곧은 백성입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가리켜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의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습니다. 잘못되었을지라도 그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가 묻힌 무덤 앞에서 그 누이인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11 : 25 -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언제 이 말씀을 하셨지요?
예수님은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 되었을 때 오셨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맞으려 나갑니다. 마르다는 오라비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지요. 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1 :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아멘! 마르다가 믿습니까? 24절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마지막 때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5 -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은 분명 나사로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하신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해당되겠습니까? 죽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은 그 말씀의 진실함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살아났지요. 그렇다면 그 뒤의 말씀도 진실하지 않겠습니까?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할! 그런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언제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라 하신 것은 바로 그런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줄 믿습니다. 죽어서나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나라입니다. 실제로 그런 나라가 올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계 21 :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눈물, 사망, 애통, 곡, 아픈 것 - 이런 것들이 영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육을 말하는 겁니까? 믿음대로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우습게 여기지 맙시다(창 19 : 14). 우리가 가지 않아도 정말 그 나라가 오기를 소원합니다. 할!
물론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부활을 꿈꾸고 소망하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이 어떤 부활인가 생각해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여태 우리가 꿈꾸던 부활은 바로 이것입니다. 겔 37 : 3 -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입니다. 마른 뼈에 살이 붙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으로 덮여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런 부활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꿈에서 깹시다. 선지자 에스겔이 본 것은 말 그대로 꿈이고 환상입니다. 현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눅 8 : 41 - 56) 그런데 그 사람들이 아직ㄷㅎ 살아있답니까? 진작 죽었습니다. 우리가 그런 부활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요. 다시 죽을 부활이라면 뭐하려고 다시 살아납니까? 우리가 바라는 부활은 다시는 죽지 아니할 부활입니다. 그런 부활은 마지막 때 주님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다의 대답은 맞습니다. 요 11 : 23 -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우리가 소망하는 부활,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부활은 마지막 날 곧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이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이 육신은 죄의 씨로 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잘 아는 대로 사망입니다. 죽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고전 15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 몸은 다시 살아나봤자 죽게 됩니다. 이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데, 이 몸을 가지고 있는데 주님이 오시면 어떻게 되지요?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그렇습니다.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날을 소망하며 기도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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