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랑, 삶
-상지종신부-
어딘지 모르게 어감이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사람, 사랑, 삶이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참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사람의 삶이 아니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사람이 아닙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큼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흔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사랑'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저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 의례 듣게 되는 말이 '사랑하라'는 것 정도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첫사랑의 순간처럼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을까요? '사랑해' 라는 말이 그저 의례적인 인사 치례가 아니라, 진정으로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딱딱해진 가슴을 부드럽게 하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요?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과 마음으로 사랑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된 사랑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사랑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마련입니다. 마음과 의지,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내어놓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전하려는 '나'와 내가 사랑을 전해주고자 원하는 '너'를 온전히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 '너'를 또 하나의 '나'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참된 일치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는 우리가 하나되는 데에 너무나도 커다란 장벽을 수없이 쌓아놓고 있습니다. 돈, 지위, 권력, 지식 등, 여러가지 잣대로 사람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장벽을 허물고 모든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시에 잘난 사람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리고 율법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 모함을 받으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자 가장 큰 계명을 물어온 것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율법학자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모를 리 만무합니다. 이들은 사랑이라는 계명을 알고 있되, 결코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형제 자매들을 자신의 이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많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율법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방해하는 온갖 유혹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지금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하여 십자가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자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사랑을 실천하면, 그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웃에게 전파되어 서로 서로에게 사랑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우리가 어울려 있는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어낸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을 지피는 작은 불씨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첫째가는 계명
-김광태 신부-
유다인들이 십계명을 근간으로 6백여 가지가 넘도록 율법 조항들을 세분화시킨 일을 너무 가볍게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극도의 경건함을 실현하려는 그들만큼 신앙의 열정을 지닌 민족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까닭은 너무도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그 율법의 근본 바탕을 이루는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일 안에서 균형 감각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개신교 신학자 본 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목사요 신학자가 어떻게 십계명의 제5계명인 사람을 죽이는 일을 시도할 수 있을까요?
본 회퍼는 감옥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미친 운전사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인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사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본 회퍼의 이런 행동을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잣대로 재서는 안 됩니다. 그에 앞서 도대체 십계명과 모든 율법 조문의 근본 정신이 무엇인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율법 조문 중 첫째 가는 계명과 둘째 가는 계명만 언급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김보경 수녀-
◆예수님 당시 유다교 계명은 613개였는데 예수님은 그 계명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요약하셨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사랑은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씀이다.
며칠 전 40대 초반의 요한(가명)이 간경화로 선종했다. 부인과 두 아들이 있었지만 매일 병원에 와서 돌보는 이는 말끔한 얼굴과 훤칠한 몸에 양복차림의 건강한 팔순의 멋쟁이 노신사였다. 32년 전 부인과 사별하고 다섯 자녀를 홀로 키웠고 성당에서 봉사를 많이 하신다. 요한에 관해 말하실 땐 늘 눈시울이 붉어지고 기도해 달라며 90도 절을 하신다. 내가 요한을 처음 만났을 때는 지쳐 보였으나 말도 하고 함께 기도도 했다. 얼굴은 황록색이고 눈자위는 샛노랬으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음을 알 수 있었다. 부인이 보기에 그는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내게는 노인이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고 착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한은 신앙생활에 태만했다. 두세 달에 걸쳐 입퇴원을 거듭하던 그날도 요한은 힘없이 병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노인은 “얘가 누우려 하지 않고 자꾸 무엇이 보이고 들린다며 무서워해요”라며 보조침상에 앉아 요한의 무릎을 힘껏 감싸안으며 “눈을 떠봐, 수녀님이 오셨어. 내 몸 전부를 주어서라도(이식) 얘를 살리고 싶습니다” 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요한의 피부는 이미 검푸렀고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 수 있었으나 차마 노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순간 요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요한이 임종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로이 하느님께 가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눈물을 글썽이며 노인에게 ‘임종경’을 바칠 것을 권했다. 마침내 요한은 아버지와 형들과 가족에 둘러싸여 임종기도를 받으며 참으로 평화로이 하늘나라로 향했고 노인은 기뻐했다. 다윗 왕이 자식을 잃고서 힘을 되찾은 것처럼.
- 박재범 신부-
얼마 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라는 무장 테러 단체 때문에 레바논을 무차별 공격한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전쟁이 발발되자 레바논 정부는 평화협정을 맺자고 이스라엘 정부에 요청했으나 이스라엘은 거부했으며, 급기야 레바논 정부는 이 전쟁이 빨리 종결되도록 교황청에 중재 요청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휴전협정을 맺는데 한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은 이 전쟁에 대한 뉴스를 보고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해 묵상해 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테러나 전쟁이 사랑으로 표현되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끔은 내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힘들게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네 마음과 목숨,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세속적인 우상들이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하는데도 저의 감정과 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 마음 가는대로 판단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제게 잘하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닌 겉으로 들어나는 내 욕심에 의한 사랑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그저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제 주위에 있는 분들을 통해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평생을 삯바느질로 해서 번 돈을 장학금으로 내어 놓으신 할머니, 고아들을 거두어 드려 택시 운전을 하시며 그 아이들을 돌보시는 부산의 어느 스님, 우리나라 땅도 아닌 일본에서 철로에 쓰러져 있는 일본인을 구하려다 세상을 떠난 이수현님, 고향을 떠나와 30년 넘게 한국인을 위해 사목하시며 누구보다 한국인을 사랑하시고 한국이 고향이라고 말하시는 성 골롬반 선교사 신부님들, 그분들의 모습과 잔잔한 미소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그 순수한 사랑을 우리가 함께 찾고 그 사랑을 함께 실천하고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사랑, 그 첫사랑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씀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이웃에게,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힘들 때 예수님께 기도드립시다. ‘하느님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그럴 때에도 제 몸의 일부가, 제 마음의 일부가 하느님을 향해 있었음을 알아주소서. 이웃을 제 몸같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했음을 당신께서 알지 않습니까? 주님, 사랑합니다.’
-지용식신부-
사람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에 의해서 형성되어 진다고 합니다.
사제가 된 후에, 고해성사나 면담을 하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한구석에 억눌려 있는 오래된 상처에 사로잡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받은 경험에 의해 기억되고, 또 그 기억에 의해 베풀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자기 자신처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사랑의 체험과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의 체험을 잊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상처나 분노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 기억이 늘 자신을 괴롭히고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게 됩니다.
반면 우리 마음 안에 기억된 사랑은 남을 용서하게 만들고,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가까워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잠시나마 내게 사랑을 베풀어 준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사랑 하나뿐
-이수철신부-
사랑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먹고 숨 쉰다하여 다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살아있어야 진정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내면에서
하느님 향한 믿음이, 사랑이, 희망이 사라지면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어있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에제키엘이 환시로 본 마른 뼈들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바다이야기’로 온 나라가 술렁이는 세상,
혹자는 이 나라를 비하하여 도박 왕국, 술 왕국이라 합니다.
때로 술, 담배 안한다는 개신교 신자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겠다.“
하느님을 떠나면
누구 할 것 없이 무덤 속 마른 뼈들 같은 존재로 전락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믿음, 우리의 희망, 우리의 사랑이 될 때,
비로소 세상 허무의 무덤, 무의미의 무덤, 허영의 무덤에서 벗어납니다.
살길은 단 하나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유일한 존재이유입니다.
얼마 전 써 놓은 ‘삶’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여름/뙤약볕
작열하는/사랑
빨간 분 꽃/두 송이
눈부시다
삶은 기쁨/지금이 영원”
삶, 사랑, 사람, 같은 뿌리입니다.
‘살아’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진정 이런 갈림 없는 집중된 하느님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웬만한 걱정 다 사라질 것이고 웬만한 병 다 나을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진정 온 마음으로 하느님 사랑하면
자연스레 이웃을 내 지신처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살기위해서, 무덤 속 마른 뼈들 같은 인생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두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놓쳐버리면
곧장 중심을 잃고 고립단절 되어 허무의 마른 뼈들로 전락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어
오늘 하루도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하게 하십니다.
아멘.
사랑의 바다에 빠져라.
-강영구신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그대에게
가장 큰 계명(誡命)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사랑에로 초대(招待)합니다.
계명(誡命)은 그릇입니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담는 그릇입니다.
계명(誡命)은 너와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입니다.
계명은 바른 삶을 위한 길잡이입니다.
계명이라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출렁거리던 나도 잠잠해질 수 있습니다.
계명이라는 그릇에 담겨 쏟아지지 않고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계명의 인도를 따라 가면 사랑이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듭니다.
바다는 흘러드는 모든 것들을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바다는 온갖 쓰레기와 더럽게 오염된 강물들을 받아들이고 정화(淨化)의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을 선사합니다.
하느님은 바다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사랑의 바다에 빠지라는 말씀입니다.
바다에 빠지면 죽고 맙니다.
그러나 사랑의 바다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이재희신부-
바리사이파들은 항상 예수님을 눈에 가시로만 여겼습니다.
그래서 뻔히 다 알면서도 예수님의 속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은 예수께 율법, 즉 의무 규정에 관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예수님은 사랑이라고 대답하십니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이 이웃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계명을 지키는 사람의 태도와 방법을 함께 말씀해주십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그러한 열정과 정신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이 두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기에 사랑의 계명을 들을 땐
왠지 부담되고 의무만으로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실 때
율법과 의무사항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바리사이들과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분명 율법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족과 기쁨인 사랑에 관하여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기록의 충실성에 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의 충실성에 관해 대답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율법의 순위로 말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더 많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무 규정에 대해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사랑함으로써 얻는 진정한 해방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계를 매기려 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근본적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님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과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어느 날 복도를 가다가 복도 끝에 걸려있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깨달았고
그 후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랑의 계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느냐 일 것입니다.
얼마나 실천하느냐는 바로 자기희생을 얼마나 감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더 좋고 아름다운 말도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오아시스가 있어서 그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이 각박하고 메마르다 하더라도 서로가 오아시스 같은 충만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랑의 실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누구나 다 알고는 있지만 그 실천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물었던 그 율법교사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묻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첫째 계명은 하느님 사랑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사랑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 우리도 똑같이 대답을 별로 어렵지 않게,
별로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리를 아는 천주교 신자라면 질문자체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쉽지도 않게, 결코 쉽지 않게, 가볍지도 않게
간직해야 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박상대 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嫂婚法; 창세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행령(行令)과 365개의 금령(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 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 된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루돌프 불트만)......◆
<네 마음을 다하고>(마태 22,34-40)
-유광수 신부 -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비록 율법교사의 의도가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한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나 자신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과연 내 삶에서 반드시 지켜야하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무슨 계명인가?
계명이란 "함께 보내다."라는 뜻이다. 즉 무엇을 향해서 내 자신을 내 던지는 것이다. 내가 지켜야할 계명이 있다면 내 몸과 마음이 그 계명을 위해 던져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릴 때부터 이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였다.
"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귀가 달도록 들어온 말이었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고 한 분뿐이시고,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는 계명은 어느 한 사람만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지켜야할 계명이었다. 전 국가적으로 이런 계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마디의 환호성이 좌절과 실의와 분열로 심체되어있던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일치감을 맛보게 했고 대- 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하였던 큰 에너지를 우리는 얼마 전에 경험한 바 있다. 온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어떤 구호나 교훈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구한 역사를 내려오면서 한결같이 그네들만이 하나로 뭉치고 통일된 정신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위대한 힘은 바로 이 첫째 가는 계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면서 과연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줄 수 있는 어떤 위대한 가르침이 있었는가? 대-한민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주고 대-한민국인으로서 흩으러지지 않는 자세로 살아갈 수 있게 바쳐주고 이끌어 주는 어떤 계명이 있는가?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도 좁은 땅 덩어리에서 끊임없이 갈라지고 서로 싸우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는 어떤 위대한 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민족 전체가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가치도 목표도 없다. 나라가 그러하고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갓 태어난 자식에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해줄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 때나 괴로울 때 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을 때 내 인생의 지침이 되고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어떤 가르침이나 계명같은 것을 부모로부터 전수받은 기억이 없다. 나뿐인가? 부모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이 얼마나 될는지 의문이다.
우리네 부모들의 입에서 그냥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고 돈이나 많이 벌고 출세하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들어 본적이 없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왜 믿어야 하는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전달되는 것도 없고 또 전달하고자 하지도 않는다.너는 너로서 너의 생활을 하고, 나는 나의 생활을 하고 그저 오늘 하루 큰 사고 없이 생활했으면 되고 각자 먹고 각자 생활하고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간섭을 하지 않고 기분 상하게 하지 말고 좋게 좋게 지내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마음 속에 담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모상인 하느님을 우리 마음 속에 담을 때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본래부터 혼자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거들 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줄 거둘 짝을 찾고 있고 그리워 한다. 그리고 거둘 짝을 만났을 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있으면 자기의 부족함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 속에 부족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 속에 담는 것이다.
이태리 나폴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몰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다." 사랑할 대상만 있으면 그냥 행복한 거다. 세월이 가든 말든, 차가 밀리든 말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으면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내리면 눈이 내려서 더욱 좋다.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하면 늦게 도착해서 좋고, 빨리 도착하면 빨리 도착해서 좋다. 사랑하는 사람하고만 있으면 늘 행복하다. 왜 사는 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그런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하지 안해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만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다. 우리 마음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첫째 가는 계명이다. 하느님을 내 마음에 담으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귀하고 좋은 법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아무튼 우리가 자식들에게 또 하느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