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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0장 1-16절 천국의 특이한 계산법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9장 30절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태복음 19장 30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에 대한 비유를 포도원과 그 주인, 그리고 품꾼들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로 시작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기 위해 포도원에 들어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주인은 매우 부지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포도원의 일을 위해 이른 아침에 품꾼들을 찾으러 갔습니다. 포도원주인은 어디로 가야 품꾼으로 일할 사람들을 만날지 알았기에 그곳으로 가서 품꾼들을 만나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에 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 시는 우리 나라 시간으로 아홉 시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도 포도원으로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하고 말했습니다. 상당하게 주리라는 말은 많이 쳐주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루 품삯에 가깝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데나리온은 안되지만 그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쳐주겠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도 역시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제 육 시에도 가고, 구 시에도 역시 사람을 구하러 갔습니다. 육 시는 열두 시이고, 구시는 오후 세 시입니다. 거기서도 역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품삭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열한 시에 나가보니 그 시간에도 사람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한 시는 오후 다섯 시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묻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인이 말합니다. 일이 여섯 시 경에 끝난다고 하면 들어가서 힌 시간 정도 밖에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그들에게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비록 한 시간 꺼리 일지라도 일거리를 준 주인에게 감사하면서 포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날이 저물어 품삯을 계산할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먼저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불렀습니다. 그리고 품삯을 줍니다. 그런데 늦은 시간인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에게 수고했다고 하면서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받은 품꾼들은 황송하고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던 그들보다 앞선 사람들이 기대를 합니다. “저 사람들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우리는 더 주겠구나!”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 한 데나리온 씩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앞서온 사람들이 불만이 생겼습니다. 특히 이른 아침부터 와서 일을 했던 품꾼들은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을 보면서 약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을 시킨 주인을 원망하면서 말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포도원 주인이 말합니다. 마태복음 20장 13-15절입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그리고 한 말씀을 더히사는데 19장 30절의 말씀과 동일합니다.“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에서 19장 30절과 다른 점은 19장 30절은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지만 20장 16절은 “이와같이”로 시작됩니다. 이는 앞의 19장 30절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20장 1-15절의 비유는 19장 30절의 설명이며 20장 16절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예수님과 품꾼들의 서로 다른 점은 이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주인의 주권에 대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포도원에 필요한 일꾼들을 쓸 수 있는 권한도 있고, 쓰지 않을 권한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들을 찾아가셔서 자신의 포도원으로 데려갑니다, 이는 포도원주인의 주권이며 특권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누구를 쓰든지 간에 얼마든 지 쓸수도 있고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 품꾼들은 일을 주면 해야하고 일을 안주면 못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과 생활에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일을 해야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일을 맡길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을 만난 것입니다. 주인은 그들에게 일을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에도, 아침 아홉시에도, 열두시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오후 세 시, 다섯 시에 만난 사람들에게도 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만난 사람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지만 그 이후에 만난 사람들에게는 정확한 액수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만난 사람들도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했겠지만 아침에 만난 사람들부터 저녁에 만난 사람들까지 그들은 일을 주었다는 자체를 기뻐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아니라 반 데나리온, 혹은 4분의 일을 품삯으로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감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늦게라도 일거리를 준 주인이 굉장히 감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주인이신 예수님,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오늘날 추수할 일꾼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찍 부르심을 받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 부르심을 받지만 부르신 분은 예수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일을 할 수 없어서 놀고 있었듯이 오늘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 속에 빠져서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자 달라졌습니다. 일할 거리가 생겼고 또한 품삯을 약속 받았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또한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때 영원한 나라에서 주시는 면류관과 상을 약속하고 게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주권에 해당하는 또 하나는 품삯의 액수입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계산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맨 나중에 와서 한 두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준 것입니다. 그것을 본 먼저 온 사람들은 놀라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면서 생각합니다. “온지 한 두시간 밖에 안된 사람도 저렇게 주는데 먼저온 우리는 더 많이 주겠네!” 이때까지는 아무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인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더 줄거라는 기대감입니다. 하지만 오후 세시에 온 사람들, 그리고 열 두시에 온 사람들, 아홉시에 온 사람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 씩 돌아가자 먼저 온 사람들이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늦게 온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때는 주인의 관대함을 보며 우러러 보았던 사람들이 자기들 역시 똑같이 주자 불만과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런 불만과 원망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먼저 온 사람들이 늦게 온 사람들과 자기들이 일한 시간을 비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디고 일했는데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하나도 겪지 않고 겨우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똑같이 대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과 자신들이 수고한 입장을 비교하면서 주인에게서 받았던 감사와 주인으로부터 받았던 은혜를 잃었습니다. 아침 일찍 고용된 사람들도 주인의 은혜였고 한 낮에 고용된 사람들도 주인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늦은 저녁에 고용된 사람들 역시 주인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을 주인이 쓰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고용되지 못했고 그나마 한데나리온조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들만 일했고 약속한 돈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면 아무런 불만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대로 주었고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일을 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늦게 와서 일을 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품삯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면서 자기들이 수고한 시간과 그들이 수고한 시간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은 주인에게 불만을 표하면서 원망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된 사람들이 나온지 오래된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나온지 오래된 사람도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오래된 사람도 같은 직분을 받을 때 갖는 마음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은 자신이 감히 이런 직분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데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주고 직분을 맡기는 것에 대하여 감동하고 감격하며 목사님과 성도님들에게 감사하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헌신했던 사람들은 자기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왜 사울왕은 다윗을 그렇게 죽이고 싶어 했을까요? 자기는 오랫동안 블레셋군대와 싸워왔고 많은 승리를 거두었는데 백성들이 그런 자신보다 단 한번의 싸움에 골리앗 한 사람을 쓰러뜨린 다윗을 더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하며 노래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인데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는 말 속에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 밖에 안되는 데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나 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였고, 다윗이 전쟁에서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보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인정해주는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제 막 골리앗 하나를 쓰러뜨린 어린 아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를 높이며 노래하는 여인들의 노래는 사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인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포도원에서 일찌감치 일했던 사람들도 역시 자신들을 고용했던 주인의 선하심과 주권에서 나오는 은혜와 사랑의 마음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마음을 몰랐습니다.
오늘날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사나 집단이나 교회나 나라까지도 많은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 일꾼들은 자기가 소속된 집단과 공동체에 많은 일을 하며 헌신합니다. 그런데 이제 막 자기들의 주인이 새롭게 고용한 사람들이 들어와 회사를 새롭게 한다고 하고, 자기들의 공동체를 바꾸어야 한다고하며, 교회를 새롭게 바꾸려고 하며 나라를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고 하면 그들은 마음 속으로 불만을 갖습니다. “지가 뭔데 이 자리에서 몇 십년을 일한 나를 몰아내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해”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선 자들은 뒤따라오는 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때가 옵니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도전을 해가면서 발전해왔습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재빠르게 변화하는데 교회는 아직도 옛날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면 젊은 세대들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교회 답게 진리로 재해석해서 세상의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이자고 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 반발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않을 때 그 분열의 충격은 매우 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행하시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한다면 그 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퇴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는 변함없이 영원하지만 진리를 적용시키는 세상은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 조선말의 현상을 보십시오. 고종황제가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상투를 직접 자르고 모든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유생들과 양반들이 일어나 한양 궁궐 앞에 가서 그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엎드려 상소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 상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옛 것을 고수하고 있는 소수의 청학동 사람들 외에는 모두가 다 단발을 하고 다니지 않습니까? 교회도 역시 진리를 고수하면서 발전을 더디게 하는 전통적인 것을 벗어버리고 새 것을 받아들이거나 만들어가야 합니다. 진취적으로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젊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보다 앞서 바라보고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된 자가 자기들의 성공했던 방식에 집착하는 사이에 세상은 변화하고 세상에 뒤떨어져 퇴보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시대에 맞는 새 사람으로 새로운 교회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교회의 머리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교회를 세우신 그곳에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죄악으로 신음하며, 겉모양만 화려하고 내면은 썩어가고 죽어가는 세상을 새롭고 건강하게 회복시킬지를 보이고 싶어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예수님께 집중하고 있어야 하며 이 세상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따라갈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악 세상 속에서 진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고난이 필연적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된다는 예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계산법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기쁨에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이시고 빛나게 하신다고 불만을 갖거나 원망하지 말아햐 합니다.
오직 열린 마음으로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함께 주인의 기쁨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주님의 뜻에 즐겁게 헌신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신 일에 선하게 쓰임받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