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9월 6일, 날씨도 맑은 수요일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이날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인 상지원을 방문했다. 그 전부터 육 여사께서는 전국에 있는 나환자촌을 여러 곳 방문했으며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1972년 6월경, 상지원 대표자의 부인이 그곳에 “부모 때문에 사회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미감아(未感兒)들이 60여명 살고 있다” 는 소개와 함께 대통령 부인께서 한번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육 여사에게 보내 왔다. 미감아는 나환자 부모에게서 태어나 병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를 일컫는다. 영부인께서는 시간을 내어 꼭 한번 가보겠다는 친서를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의 여러 가지 행사와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몇 달이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1972년 9월 6일 전북 익산의 음성 나환자 정착촌 상지원을 찾은 육영수 여사를 주민들이 환영하고 있다.
대통령 부인으로부터 시간 나는 대로 꼭 한번 상지원을 가보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받은 상지원에서는
편지 받은 내용을 자랑삼아 이웃마을과 군청, 면사무소 등에 알렸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대통령 영부인
이 오지 않자 인근 부락에서는 공연한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상지원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했다.
상지원에서 다시 영부인 앞으로 편지가 왔다.
“여사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것을 이웃 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대통령 부인이 나환자촌에 어떻게 오시겠느냐며 우리들
을 놀려대기까지 합니다.”
육 여사는 그 편지를 받은 이튿날 바로 떠나기로 하였다. 극작가 이서구씨, 나협회장 차윤근씨, 양지회 총무 권옥순 여사 그리고 나 이렇게 수행하게 되었다. 박 대통령의 배려로 대통령 전용기 헬리콥터를 이용하게 되었다. 상지원에도 급히 연락을 했다. 상지원에서는 국경일도 아닌데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학생들은 영부인 일행이 도착했을 때 학교 운동장에 줄을 서서 새마을노래를 부르며 육 여사를 환영했다.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최대의 환영과 애정의 표시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환영 대열 속에는 아기를 들쳐 업은 아낙네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새마을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육 여사는 환영 나온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비록 얼굴 모습과 손이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순수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영부인은 상지원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부엌 안까지 살펴가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다.
앞서 1971년 12월 전국의 음성 나환자정착촌 가운데서 37개 정착촌을 골라 양지회 회원들이 470여 마리의 새끼 돼지를 사서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상지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상지원 대표가 영부인에게 정착촌의 현황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양지회에서 보내주신 돼지를 잘 키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새끼 돼지가 감기를 앓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는 아예 방안에 데리고 와서 같이 먹고 자고 합니다. 그런데 돼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아서 참 좋습니다.”
그의 말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나환자들이 마련한 육영수 여사 1주기 추모회
육 여사와 시인 한하운
1971년 12월 17일 육영수 여사는 음성 나환자정착촌 자활사업을 돕기 위해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정착촌 호혜원과 현애원을 방문해 씨돼지 30마리를 각각 나누어주고 정착촌 주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박 대통령의 배려로 영부인은 헬기를 타고 현지를 방문했는데 일행은 권옥순 양지회 총무와 소설가 이모씨 그리고 나환자 시인 한하운씨였고, 내가 수행했다. 오후 2시경 일행은
두 곳의 행사를 모두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영부인이 청와대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헬기 안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끝낸 일행에게 영부인이 후식으로 과자와 귤을 나누어 주었다. 한하운 시인에게 귤을 주려던 영부인이 주춤했다. 그러더니 귤껍질을 말끔히 까서 알맹이만 종이 접시에 담아 건네주었다. 육 여사는 한하운 시인이 나병을 앓아서 손가락이 모두 오그라들어 매우 부자유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귤을 까서 주었던 것이다.
육 여사가 음성 나환자들의 손을 스스럼없이 덥석덥석 잡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한 것은 나환자들에게 인간의 숭고한 사랑을 일깨워 주고 삶에의 의지를 심어주는 고귀한 사랑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 헬기 뒷자리에 앉아서 한하운 시인이 귤을 받아 들고 감격해 하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하운 시인은 그날의 소감을 ‘육여사님 수행기’ 라는 글로 남겼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그해 8월 29일, 전국 87개 나환자정착촌 대표들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여성회관에 모여 고인의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과 구라사업(救癩事業·나환자구제사업)을 기리는 ‘육영수 여사 추모회’ 를 가졌다. 한하운 시인은 그 자리에서 추모시를 낭송했는데 그 시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가시는 걸음 걸음 / 외로운 사람을 / 가난한 사람을 / 슬픈 사람을
병든 사람을 / 유달리 사람들이 꺼리는 / 문둥이 촌을 찾으시며
나환자의 손을 손을 잡고
문둥이 촌을 언제나 찾아 삶을 주신
이 지고하고 지순한 대자비심은
한국인으로서 아니 세계의 어느 누가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있었던가
오직 님만이 하셨던 일이 아니겠습니까
☞ 시인 한하운
‘나병시인’으로 불리며 화제를 일으켰다. ‘문둥이(나병환자)’라는 이유로 굴욕과 수모를 겪었으나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시를 통해 아직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남한으로 넘어와 구걸을 하며 생을 겨우겨우 이어가던 그는 시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병환자의 고통과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의 특징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7세 때 한센씨병(나병) 진단을 받았다. 함경남도 도청
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병이 악화되어 1년만에 사퇴했다.
작품으로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시전집>과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해설
시집 <황톳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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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 이 : 김두영 (前청와대 비서관)
첫댓글 그 이름 육영수여사님..~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것입니다.
당시 매스콤에서는 국모라 불럿지요..넘치도록 다정하신 분이셨는데..
"문" 뭐라나 ..! 문세광이란 이 사람..!!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져요..!! "문"가 이 놈..!! 사형으로 끝난 인간
오늘 시사평론 좀 하려다가 참습니다..!!!
은 산 님
저도 은 산 님의 그 마음에
한 표 보태는 심정입니다
은산 선생님,
이젠 역사 속에 묻어야 할 옛이야기지만 너무나 아깝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부인이셨기에 다시 올려놓고 있습니다. 공감하여 주시니 고맙습니다.
욕영수 여사님의
인생의 한 페이지
참으로 앞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아야 합니다
어제 일산 호수공원에 가서 놀다 왔어요
어찌 페이지를 넘기다
이제야 마중을 드립니다
최숙영 작가님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