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그 이후 성화의 구원 서정은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커트라인으로서의 믿음에 대한 이해는
바울 복음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커트라인으로서의 믿음은
믿음의 구원이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 신앙의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단계적 이해는
개혁주의 신학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 믿음으로 빛드는 옥토의 마음은
영적 생명의 유기체적 생태 환경을 가집니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주체가 성령으로 계시된 복음의 생명력이라면
영적 생명의 생태 환경을 조성하는 주체는 복음의 빛, 그 자체입니다.
복음의 말씀이 믿음으로 역사 되어 마음을 기경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는
옥토의 마음을 새롭하는 생명의 씨앗을 싹트고 자라 꽃피고 성령의 멸매를 맺게 합니다.
유기체적 생태환경은 서정(序程)이 아니라 서정(舒情)이듯이
영적 구원의 생태환경도 서정(序程)이 아니라 서정(舒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의 빛이 땅에 비취고 하늘의 비가 땅에 스며드는 것은
서정(序程)이 아니라 서정(舒情)입니다.
복음의 빛이 옥토의 마음에 믿음으로 스며드는 것은
구원의 서정(序程)이 아니라 은혜의 서정(舒情)으로 이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서정(序程)이 아니라 구원의 서정(舒情)이
믿음의 구원이라는 은혜를 아름답게 담아냅니다.
믿음은 흐르는 시간을 공간 예술로 승화하는 순간의 기적을 이루는 사진 예술이 아니라
믿음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유기체적으로 연결하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믿음의 구원에 대한 시간 개념의 적용은
생명의 영원한 부활이라는 믿음의 실상으로서 구원을 담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시작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시는 역사(役事)입니다.
은혜의 역사(歷史)가 아니라 은혜의 역사(役事)요
믿음의 역사(歷史)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役事)이며
성령의 역사(歷史)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役事)입니다.
역사(歷史)의 주체는 인류의 발자취이지만
역사(役事)의 주체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입니다.
믿음의 구원은 역사(歷史) 의식이 아니라
내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입니다.
믿음, 그 이후 성화라는 구원 서정의 신학적 이해는
완생을 향하는 미생의 묘수가 아니라 은혜의 서정(舒情)을 신학으로 재단하는 사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원의 커트라인으로서 믿음의 이해는
믿음의 영원한 현재성을 말살하는 왜곡, 그 자체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과거의 아브라함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부활 신앙의 구원 개념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과거적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 아니며 미래적 구원 또한
믿음으로 이루는 현재적 구원의 실상일 뿐입니다.
믿음의 구원이란 순간의 기적이 아니라
영적 생명의 활동이 계속되는 유기체적 은혜의 생태환경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커트라인으로 끊어 내는 믿음의 구원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허상입니다.
아마도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 곧 자아주체적 신앙이라면
열정을 쌓아 올리는 믿음의 카트라인이 존재할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로 이루는 구원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영적 변화입니다.
믿음은 서정의 단계가 아니며
구원은 복음의 빛이 성령으로 빛드는 믿음의 생태 환경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서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학의 이데올로기요,
생명의 풍성한 열매를 영원한 구원의 탄성으로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의 빛이 마음에 깃드는 생명의 은혜는
구원의 서정(序程)이 아니라 구원의 서정(舒情)으로 이해할 때 더욱 풍성하여 질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의 자의적 해석을 금하지만
때로는 믿음의 구원을 성령의 은혜로 누리는 기쁨의 탄성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합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생명의 꼴을 얻는 기쁨입니다.
믿음은 순간의 기적이 아니라
항상 복음을 빛들게 하는 영적 생명의 소통, 그 자체입니다.
하늘의 빛과 흐르는 물을 칼로 벨 수 없듯
구원의 은혜를 서정으로 정하는 것은 믿음의 속성을 왜곡하는 신학의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은 자아 주체적 인식과 실존의 실상이 아니라
복음을 빛들게 하는 열린 마음의 영적 생태 환경의 변화된 실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믿음의 합리적 이해는 주체 신앙의 실존을 낳았고
그 인본주의 신앙으로는 종교적 영성은 이룰 수 있어도 복음이 빛드는 믿음의 역사로
생명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적 믿음에 대한 본질적인 왜곡은
자아 주체적 실존 신학의 합리적 이해와 종교적 지성의 성찰로 추구한 영성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계시의 복음이 빛드는 믿음의 역사를 구원의 은혜로 누리지 않고
소위 말하는 은혜와 영성을 자아 주체적 실존 신앙으로 추구하는 인본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바르트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자아 주체적 실존 신앙을 강조함으로 인본주의 신앙의 대부가 되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바르트의 신학을 근본적으로 배척하지만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를 영성으로 추구하는 인본주의 신앙의 낙원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사역자는
인문학과 사회학과 심리학과 교육학과 철학과 상담학 등의 인본주의 학문으로 스팩을 쌓아
실력있는 목회자로 등용되어 양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옷으로 가장하여 다른 복음과 혼잡한 말씀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계시의 복음을 혼탁하게 하였습니다.
왜곡된 신학과 학문의 옷을 입은 가장된 복음을 사랑하는 한국 교회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한 고린도 교회의 전철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시 천의 명명이며 시대의 대세며 다원주의적 전인류 공존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하물이든지 하늘의 하나님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하니.......
참으로 성경의 올바른 바울 복음,
그 믿음의 구원은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