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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닛시
출 17: 8-16
지난 금요일 밤 기도원에 가서 말씀 준비하는데 바깥은 비바람이 창문을 흔들고,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 점점 커지는데,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 소리가 밖으로 나오면서 마음에 깊은 평안과 안락함을 느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복된 삶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만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이땅에 우리를 낳아 주신 아버지가 계시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영혼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무한한 감격과 감사가 우러러 나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는 또 한가지를 오늘 살펴봅니다.
1. 광야의 길에서 우리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아 큰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르비딤 광야에서 그곳에 살고 있던 아말렉이라는 족속과의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에돔 족속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그곳에서 맹렬한 세력을 뻗치던 유랑민족입니다. 그들이 자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일대 기습 공격을 가해 온 것입니다. 이 이후로도 아말렉은 이스라엘 나라를 늘 괴롭히는 숙적이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였습니다. 사사기의 기드온은 미디안과 아말렉을 상대로 해서 싸웠고, 사울 왕은 전쟁에서 아말렉을 진멸하도록 명령을 받았으며(삼상 14), 후에 다윗 왕은 아말렉을 토벌하기도 했습니다(삼상 27).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여호수아야! 사람들을 모아서 나아가 아말렉과 싸우라" 전쟁에 나갈 군인을 모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신체검사하고 등급을 매겨 군인을 뽑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애굽의 바로 밑에서 노예로 살 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훈련받아 본 적도 없고, 작전을 짜 본 적도 없고,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에게 그런 사람을 모아 쳐들어오는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적 아말렉을 만나듯이, 우리도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다가 길을 가로막는 아말렉과 같은 적들을 만납니다. 여러분에게 나타난 아말렉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은 아말렉을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
2. 이 싸움에서 모세는 어떻게 승리 할 수 있었습니까?
1) 첫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습니다.
"여호수아야 너는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9)
모세가 손에 잡은 지팡이는 지난 40년 동안 양치기 할 때 쓰던 모세의 지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호렙산 기슭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하나님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양치는 지팡이입니다" "그것을 땅에 집어 던지라" 땅에 집어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야 뱀의 꼬리를 잡으라"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내 보아라" 그렇게 하자 모세의 손은 문둥병자 손이 되었습니다. "그 손을 다시 품에 넣었다 꺼내 보아라". 모세가 그렇게 하자 순식간에 손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 지팡이는 원래 모세가 양치기 40년 동안 함께 하던 모세의 양치기 지팡이였으나, 성경은 그 때부터 그 지팡이를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동안 그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손이 복수로 나옵니다. 두 손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만을 의지하며 두 손으로 붙잡은 것입니다. 지팡이를 잡은 것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병든 여인이 주님 옷을 붙잡듯이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2)둘째로, 모세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손 꼭대기에 서리라"(9)
산은 우리 영적인 믿음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에 오르는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의 방주가 닿은 곳은 아라랏 산이었고,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정상에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렸고, 모세는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율법을 받았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정상에서 850명의 이방선지자들과 영적인 대결을 벌려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기도하러 가셨고 변화산에서 변화되셨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믿음의 산을 올라야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 문제 속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떠나 주님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얼마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의 태도에 대한 말씀인가요! 승리는 적극적으로 오르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올 줄로 믿습니다.
3) 셋째로,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고 그것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을 드는 것은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나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그 앞에서 두손 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올라간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 때는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힘이 빠져 손이 아래로 내려 올 때는 이스라엘이 지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산에 같이 올라갔던 아론과 훌이 모세를 돌 위에 앉게 하고 두 사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루해가 넘어가기까지 받쳐 주었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손이 내려 오지 않으므로,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내려와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십시오! 교사의 두손든 기도가 아이들의 영혼을 살리고, 구역장의 두손든 기도가 구역원을 살립니다. 부모의 두손든 기도가 자녀를 살리고 남편의 두손든 기도가 아내를 살립니다. 목사의 기도가 교회와 교우를 살리고 교우들의 기도가 목사와 목회를 살립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며 그곳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은 용기와 힘과 승리의 상징입니다. '여호와닛시, 하나님은 나의 깃발'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승리의 깃발이십니다. 주님의 권능을 믿음으로 붙잡고 기도의 손을 내리지 않으면 승리의 깃발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아말렉과 같은 우리 인생의 장벽앞에서 두려워 마십시오.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승리의 깃발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 닛시(2)
출 17: 8-16
지난 주간 말레이시아령인 보르네오섬, 최북단에 있는 사바주의 "코타키나바루"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아직 때묻지 않은 곳이라 참 아름다웠습니다. 하루는 해발 4000미터가 넘는 키나바루 산을 중턱까지 차로 올라가 한 2㎞정도 등반을 했습니다. 원시림의 장엄함과 신비함에 한껏 빠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나무마다 수십 종류의 기기 묘묘한 더부살이들이 뿌리를 붙이고 엉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행 중에 누군가 큰 나무에 붙어사는 기생식물이라고 하니까 안내자가 이를 정정해 주었습니다.
기생식물이 아니라 공생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기생 식물은 나무의 수분과 영양소를 빨아먹어 나무에 해를 끼치는 식물이지만 공생식물은 서로에게 유익을 주며 사는 식물입니다.
거대한 나무는 토양이 좋지 못한 곳에서 나무에 뿌리를 붙여 살도록 해 주고 대신 큰 나무는 수분의 증발을 막아 준다는 것입니다.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정글에도 이렇듯 신비로운 협동의 공생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그런데 태초부터 인간은 이 질서를 불응해 왔기에 세상은 끝없이 분열되어 온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노사 분규로 속을 썩이는 어느 회사 사장이 노조 위원장에게 말을 했습니다.
"어디 이런 사람 없을까?" "어떤 사람이요?" "돈은 주는 대로 받고, 일은 시키는 대로 하며, 능력은 한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일세…" "하나가 빠졌는데요?" "뭔데?"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 말입니다." "그러면 더욱 좋고…"
이번에는 노조 위원장이 사장에 말했습니다. "어디 이런 사장 좀 없을까요?" "어떤 사장 말인가?" "월급은 올려 달라고 안 해도 팍팍 올려 주고, 근무 시간 보다 휴식 시간을 더 많이 주고, 사원들 뿐 아니라 사원의 가족들까지 일일이 챙겨 생계에 조금도 근심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해 주는 그런 사장 말입니다."
이때 사장은 "이 사람아, 내가 바로 그런 사장 아닌가?" 하니, 노조 위원장도 "바로 우리가 사장님이 원하시는 그런 사원이 아닙니까?" 했다는 얘깁니다.
이 같은 서로의 이해의 차이는 인간 사회에 끝없는 불만과 분열을 가져오는 불행의 요인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적은 생이 기생이요,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많은 생이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들의 공생입니다.
오늘 말씀도 "협동"이 주제입니다.
출애굽기 17:8-16절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아멜렉의 전쟁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아멜렉과 첫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젊은 장수 여호수아에게 싸울 만한 사람을 뽑아 나가 싸우게 하고 자신은 산에 올라 내려다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올라가 있을 때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하여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 군사가 쫓기는 광경을 보고, 아론과 훌이 돌을 취해 모세를 앉히고 좌우에서 손을 부축하여 해 지기까지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하여 전쟁에 승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라 하셨고, 모세는 그곳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습니다. 여호와 닛시란 "여호와의 깃발" 혹은 "보좌의 손"이란 뜻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4:1-3절의 말씀은 교회의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세상과 인간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가 되게 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겸손과 온유, 인내와 사랑으로 평안을 이루고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은 모세의 르비딤 광야의 전투 모습을 통해 하나됨의 비결을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비결은, 여호수아의 복종입니다.
출애굽기 17:9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아멜렉과 싸우라" 하였고 10절에는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멜렉과 싸우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으로서 아무런 소개도 없이 돌연히 나타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꼭 필요할 때마다 전쟁의 영웅으로, 모세의 수종자로, 모세의 동료로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로, 그 자리에 있던 인물입니다.
아멜렉은 광야에서 살던 유목민으로 언제나 부족한 물 때문에 싸워야 했던 호전적인 백성입니다.
이 날도 해가 지도록 종일 싸운 것을 보아 참으로 힘든 혈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생존을 위해 광야에서 단련된 아멜렉을 향해 노예 생활을 하던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복종했습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복종이 아닙니다. 믿음의 복종입니다. 애굽의 바로의 사슬에서 해방하시고,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어 배부르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 전쟁도 숭리로 이끄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 때문에 복종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복종입니다. 가능한 것을 순종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을 복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이 복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복종하는 사람이 협동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비결은, 모세가 든 팔입니다.
출애굽기 17:11절에 보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멜렉이 이기더니…" 하였습니다.
모세의 든 팔은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의 첫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기독교 이전에도 인도, 중국, 애굽, 헬라, 멕시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도 그리고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도 종교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횡적으로는 믿음과 불신을, 종적으로는 이상과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신과 인간의 만남을 상징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무서운 정치범을 처형하는 형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팔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기도의 훌륭한 모범이요, 요한 12:22절, 19:18절과 같이 십자가의 상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세의 팔은 일찍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팔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잡은 손은 10가지 재앙을 가져왔고 바다가 갈라졌으며 반석에서 생수가 쏟아지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는 사람이 협동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맡기시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있고, 물을 주는 자가 있고, 그것을 거두는 자가 있게 하십니다.
이는 사람으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신 8:17)
그러기에, 여호수아의 믿음의 복종도, 모세의 기도도 그것으로 완전 할 수 없습니다.
셋째 비결은, 아론과 훌의 협동입니다.
출애굽기 17:12절에 보면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 놓고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하였습니다.
승리는 여호수아나 모세의 공만이 아닙니다.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한 아론과 훌이 없었다면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으로 걸어가야 할 멀고도 긴 가나안 길에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협동의 모습을 가르치신 산 교육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장 큰 위기를 겪을 때는 이 협동이 깨어질 때였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도구로서의 교회 안에서 내가 선 자리가 어디입니까?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도구로서의 가정 안에서 내가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도구로서의 직장 안에서 내가 선 자리는 어디입니까?
믿음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협동이 하나가 되게 하는 비결입니다. 여기에만 나나 너나 그 누구의 승리도 아닌 여호와 닛시, 여호와의 승리의 깃발이 있습니다.
기생이 아니라 공생이 있는 곳에 일치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저녁 하늘에 기러기들이 V자로 나르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조류학자들은 기러기가 V자로 나르는 것은 장거리 여행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기러기는 혼자 나르는 것보다 떼지어 나를 때 71%나 오래 나를 수 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힘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을 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V자로 나를 때 공기대를 형성하여 뒤따르는 기러기가 날기 쉽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앞서가는 기러기가 제일 먼저 지치기 때문에 그 자리를 계속 바꾼다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나르면서 계속 웁니다. 여기도 격려와 방향 제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기러기는 한 마리가 낙오하면 반드시 대여섯 마리가 함께 쳐져 나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한 마리의 낙오자를 기다려 주는 미물에게서도 우리는 배울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겸손과 온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겸손, 온유, 사랑, 오래참음, 용납에 평안이 있고 이 평안이 하나로 매는 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겸손은 자기 부족을 시인하는 용기입니다. 온유는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배은망덕한 사람에게도 불평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조건 없이 허락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덕목들은 도덕적 덕목들과는 다릅니다. 도덕적 덕목의 동기는 선이기 때문이지만, 기독교 윤리의 덕목은 하나님의 은혜의 감사가 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협동이 교회를 세우신 뜻이요, 일치가 우리를 부르신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심 같이 성령안에서 일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정 직장에서 하나되게 하는 복된 책임을 다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출애급기 17: 8-16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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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연천 근처의 휴전선 비무장 지대 내에 있는 경비초소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에 쏠려 있었습니다.
같은 부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한 내성적이고 평소에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 있던 한 젊은이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부대원들을 다 죽이고 초소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어서 모든 흔적을 다 없앤 후에, 자기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은신할 것을 생각하며, 동료들이 자는 막사에 수류탄을 던지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 댔다고 합니다.
새벽 2시를 넘어선 시간에 있었던 이 일로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여덟 명이었고, 공교롭게도 6,25전쟁이 일어난지 55년이 되던 어제 그들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사건에 대한 전모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제 마음 속에 생각나는 것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는 문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화하고 거칠게 만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덞 명의 동료들을 살해하고도 그다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그는 결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교육을 받았고, 같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살았던 아주 평범한 젊은이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차리라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에 의해서 내려온 사람에 의해서 이런 일이 저질러졌다면, 지금처럼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또는 우리의 자녀들과 같은 많은 것을 공유한, 이 나라의 문화가 만들어 낸 젊은이를 통해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이제는 정말 아무리 혼자서만 잘해서는 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희생을 당한 병사들이나 혹은 그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는 그에게 그런 앙갚음의 대상이 될만한 악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동료를 잘못 만나서 그만 그런 희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군대에서도 '군대 복 있다... 없다...'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한 개인의 운의 문제로 돌려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중한 교훈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도 중요하지만 너도 중요하다는 것... 오늘 이렇게 내가 웃고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도 나 못지 않게 행복하고 잘 살 수 있어야만 결국 모두가 행복한. 우리의 운명은 이제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없게 얽혀져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면 이번 사건은 단지 가해자와 피해자... 둘 사이에 국한 된 사건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켜보는 우리들 자신이 가해자이기도 하고 또한 피해자이기도한 것이지요.
비록 희생을 당한 사람들 중에 가족이나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광경을 지켜볼 때마다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들이 잠을 자다가 참혹한 봉변을 당했던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그들의 숙소가 마치 내 마음 같았고, 한반도의 오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어디서도 내가 대한민국 백성이라는 자부심이나 자존심같은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나라의 현실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였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이사야1:5-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라'는 이사야의 탄식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어쨌든 우리는 지금 2021년의 꼭 절반을 보내는 자리에 있지만, 지난 시간에 대하여 '감사하다'거나 '자랑스럽고 보람 있었다'는 생각은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무엇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전에 없었던 위기와 절망의 순간이라고 느낄 수박에 없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부터 이렇게 만만치 않는 현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미래에의 희망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로 접어들어서 첫 번째로 싸웠던 싸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의 일입니다. 물이 없어서 고생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 반석을 치도록 명하셨고, 그들은 호렙산 반석에서 솟아 나온 물로 목마름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아말렉이라고 하는 낯선 사람들이 그들을 공격해온 것입니다.
아말렉이 누군지... 잘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는 유목민족속들이 결합한 공동체가 아말렉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광야에 출현한 낯선 사람들 때문에 긴장을 하기도 하고, 자기들이 삶의 기반으로 생각하던 곳을 침범 당했다는 느낌을 이스라엘 민족을 보면서 가지게 되었겠지요.
그래서 자기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해온 것입니다.
아마 이들은 참으로 잔혹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보면 아말렉이 이스라엘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패배를 하고 돌아가지만, 그들은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심지어는 사사시대가 끝나고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까지도 아말렉과의 싸움은 가끔씩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아말렉과의 싸움이 두 가지로 묘사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14b)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젊은 세대인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반드시 멸망시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16)
너희들이 아말렉과 싸울 때마다 항상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처럼 그들을 도우시고 승리하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독 아말렉에 대하여 이렇게 철저하게 벼르고 계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아말렉을 쳐부수는 문제는 결국 이스라엘의 생존의 문제와도 직결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싸움을 걸어오는 민족인데, 이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설자리를 찾는 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말렉은 우리가 처부셔야 하는 것이고, 그 싸움을 위해서라면 오늘처럼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말렉을 어떻게 생각을 해야할까요?
오늘 우리들에게는 아말렉처럼 부단히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세력은 없습니까?
“아말렉처럼 그것을 없애고 무찌르지 않으면 내가 설자리를 찾을 수 없는 그런 삶의 문제들... 내가 싸우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어렵고 힘든 문제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는 없는 것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요즈음 질병과 목숨을 건 힘든 싸움을 벌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상대방을 물리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생존 경쟁을 하느라고 신경이 곤두서고 탈진 상태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별히 진학을 앞에 두고 있는 학생들은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동시에 수 많은 경쟁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어렵고 힘든 싸움들이 줄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알아서 나의 길을 평탄하게 하시겠지... 마치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아무런 문제나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그렇게 우리의 삶이 흘러가야만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다운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광야의 길을 갈 때... 그들에게 고통과 위험이 찾아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그들이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물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이렇게 아말렉이라고하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2021년의 반년을 살아오면서도 우리에게는 저마다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때로는 정말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해서 지치고 탈진할 위이게 빠졌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 것입니까?
특별히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모든 것이 어렵고 꽉 막힌 듯한 답답한 시기에는 바로 오늘 우리가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서 고생하는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아말렉과 같은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때로는 한없이 목이 마르기도 하고, 목숨을 건 싸움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이러한 싸움에서 예외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난 반년을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가 평생을 싸워야만 하는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는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목표지점까지 도달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그 때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말렉은 광야에서 삶의 터전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칠었고,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을 그렇지를 못하였습니다. 아직도 광야는 낯설고 불편하기만 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전혀 이러한 훈련이나 준비가 되어있지를 못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은 아말렉이라는 낯선 사람들에게 포로가 될 수 있는 위기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나섰습니다.
모세는 먼저 여호수아를 전투의 지휘관으로 내세웠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군사를 조직하였고, 그들을 통해서 전쟁을 치르려 하였습니다.
만약에 모세의 생각이 여기에 그치고 말았다면, 그 날 그 싸움의 승패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한번도 싸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광야에서 잔뼈가 굵은, 수 없는 전투의 경험을 가진 잘 조직된 군사들과 싸워서 승리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군사를 조직하는 모세도 이런 정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질 수밖에는 없는 싸움을 승리로 돌려놓을 수가 있을까?'에 있었습니다.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이번 싸움에서 지고 만다면, 그들은 영영 아말렉의 노예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것이 싫어서 자유를 찾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에는 아말렉의 노예가 되고 만다면... 이것은 도무지 생각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한번의 고비를 넘기고 저 가나안을 향해서 계속해서 전진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모세는 이러한 선택을 하였습니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9b)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패배가 불 보듯 너무나 분명하게 보이는 하지만,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싸움을 앞에 두고 모세가 선택한 승리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 그것은 마른 막대기와도 같은 아무런 볼품도 없고 값도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바라 볼 때마다 모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하나님께서 나의 능력이 되어 주시는 구나..'
처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설 때부터 모세에게는 이런 확신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팡이를 통해서 많은 고비를 넘기게 하셨고, 많은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르비딤에서 있었던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는 일도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의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서 물이 솟아나서 마시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애굽을 빠져나오던 날 홍해바다는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그래서 홍해바다에 빠져 죽든지, 아니면 바로의 군사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내어 맡기던지... 둘밖에는 어떤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파이를 손에 들고 바다위로 내밀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때에 홍해바다가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정말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놀랍고 감격스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모세에게 있어서 지팡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의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선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질 수밖에는 없는 싸움을 시작하지만, 우리들 곁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리고 하나님만 함께 하신다면 어떤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싸움에 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옛날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지팡이와 같은 것이 없는지요?
며칠 전에 등산에 대한 안내를 간결하게 해 놓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면서 단단한 지팡이 하나 들고 올라가는 것은 여행을 훨씬 쉽고 수월하게 한다고 적혀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모세에게는 이런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이스라엘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도저히 싸움이 되지도 않는 힘든 싸움을 싸워야 할 때면 이렇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그 일에 도전하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이런 지팡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뿐 아니라 우리들 한사람 한 사람에게도 이런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지팡이는 어떤 것일까요?
이것을 우리는 지난날에 살아왔던 삶에 대한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경험들... 특별히 여러 가지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나를 도우시고 붙잡아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돌보심에 대한 기억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래! 하나님이 지난날에도 나를 도와주셨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담대하게 앞을 향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 시간 여러분 모두의 마음 가운데 이런 생각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과거에 우리가 직면했던 어려움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승리하게 하시고, 모든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팡이를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믿음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는 하나님이 이 어렵고 힘든 위기의 순간에 저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만을 의지할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잘 헤쳐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지팡이를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의 마음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입술이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기쁨과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담대하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팡이의 또 하나의 모습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현실이나 문제에 직면해있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이것처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결정적인 원인도 결국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과 아말렉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나름대로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합니다.
그는 싸움터나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높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지요.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두 손을 들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힘을 얻어서 아말렉을 물리칩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너무 힘이 들어서 손을 내려놓으면 이번에는 아말렉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세가 이렇게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높이 들었다는 것! 그것을 기도하는 행위라고 읽고 있습니다.
결국 모세의 기도 속에 승리의 비결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기도하기를 쉴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오늘의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주는 것이지요.
결국 그 날 모세와 이스라엘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으로 올라가는 결단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묻고 싶습니다.
살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 도저히 승산이 없지만, 피해갈 수도 없는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때에 우리는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들었던 그 지팡이가 오늘 우리에게는 있는 것입니까?
- 모세처럼 지난날에 도우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모세처럼 과거에 도우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위기에 직면할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움과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하나님께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나님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볼품이 없어 보이는 마른 막대기와 같은 지팡이! 모세는 결코 이 지팡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과 모세의 승리의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들도 이러한 지팡이를 다시금 손에 잡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고 힘주셨던 때를 떠올리십시오.
일부러 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그분의 존귀한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모세처럼 하늘을 향해 두손들고 '이기게 해달라고... 나를 도와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오늘처럼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며,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지만,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할 인상깊게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있다가 너무 힘이 들어서 팔이 내려올 때마다 그를 지탱해 주었던 아론과 훌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팔이 자꾸만 내려온다고... 모세도 어쩔 수 없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아 주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고 해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그 지팡이조차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치고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을 지켜보면서 그의 손을 슬며시 붙잡아 준다는 것! 그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없는 것이지요.
오늘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아론과 훌과 같은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이 절대로 기도를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그래서 그들이 결국에는 위대한 승리자가 되도록... 피곤한 손을 붙잡아 주고 위로해주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